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으로 둔갑된 것은 김영삼의 반란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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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제갈윤 작성일17-08-04 21:21 조회5,68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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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 제1권 권두언
고무줄 대세법의 갈지자 행진
12.12
및 5.18 역사가 변조된 것은 법을 다루는 현역들이 대통령과 여론에 굴종하면서 법을 정치의 도구로 전락시킨 데에서 완결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2008년8월23일, 조선데스크는 헌법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라는 헌법재판소의 기회주의적 행태들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송두율, 사립학교법, 종합부동산세, 노무현의 선거법 위반 등에 대한 헌법소원을 정치권의 눈치를 보며 처리했던
볼썽사나운 행태들이 지적됐고, 마지막으로 헌법재판소 자체가 헌법을 유린하는 파행을 저질렀다는 것이 지적됐다. 헌법재판소장의 임기는
6년이다.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은 헌법재판관으로 임기 3년 이상을 남겨 놓고 있던 전효숙에 헌법재판소장 자리를 주고,
임기도 남은 임기 3년이 아닌 6년을 모두 보장해주고 싶어 했다. 이런 대통령 뜻에 따라 헌법재판소는 임기 3년을 남겨놓고 있던
전효숙을 사직시키는 편법을 쓰다가 망신을 당했다. 헌법재판소 소장은 헌재 재판관 중에서 임명하도록 법에 명시돼있는데도 헌법재판소가
임기 6년에 집착한 나머지 편법을 쓰다가 조순형 의원에 덜미를 잡힌 것이다. 대통령을 위해서라면 대한민국 최고의 사법기관인
헌법재판소까지도 기회주의적 행태를 보이고 법을 어기는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이러한 기회주의적 행태는 5.18특별법, 12.12,
5.18 등에 관련한 헌법소원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헌법을 해석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사법기관인
헌법재판소 9명의 재판관들이 이러하면 지방법원에서 대법원에 이르기까지에 분포돼 있는 다양한 성향과 배경을 가진 법관들은 어떠할
것인가? 이런 기회주의적 행태는 역사바로세우기에 관여한 판검사들에도 잘 나타나 있다.
민주화투사라는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자 그는 하나회를 정리하면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인기의 요체를 실감한 김영삼은 군사정권까지
때리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인기는 더욱 올랐다. 민주화에 대한 막연한 열기가 전국을 휩쓸었다. 김영삼은 12.12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지만 역사 평가는 후대에 맡겨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12.12 및 5.18 피해자들이
일어섰다. 1993년7월19일 정승화, 장태완 등 22명이 전두환-노태우 등 34명을 반란 및 내란죄 등 혐의로 대검에 고소장을
냈다. 12.12사태는 군의 사조직인 하나회를 중심으로 정권찬탈을 목적으로 일으킨 군사반란이라는 것이 요지였다.
이로부터
1년3개월10일 후인 1994년10월29일, 검찰은 12.12고소-고발사건에 대한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은 12.12를
“군형법상의 군사반란사건”으로 규정했고, 피고소-고발인 전원에 대해 반란죄를 인정했다. "12.12사건은 소장파 군부세력의 리더인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군권을 탈취하기위해 치밀한 사전계획 하에 군 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재가-승인 없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연행하고, 병력을 불법동원 해 군 지휘체계를 무력화시킨 명백한 군사반란 사건이다."
하지만 검찰은 이들 모두를 법정에는 세우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38명중 전두환-노태우 등 34명에 대해서는 14년간 국가발전에
기여한 점을 평가하고, 법정에 세울 경우 국가적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는 이유로 기소유예를, 공소시효가 지난 정호용 등 4명에
대해서는 ‘공소권 없음’이라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서울지검 조준웅 1차장검사는 12.12가 내란죄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당시 대통령 등 헌법기관이 그대로 유지됐기 때문에 정권 탈취를 목적으로 한 내란죄는 인정되지 않는다. 이제 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후세에 맡기고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이번 검찰의 결정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상은
‘죄는 있지만 역사평가는 후대에 맡기자’는 대통령의 발언에 검찰이 법적 고무도장을 찍어주는 것이었다.
이어서 5.18 시위를 획책했던 정동년 등 구속자-부상자-사망자가족 등 3백22명이 주동이 되어 1994.5.13일 오후3시
전두환-노태우 등 5.18 당시 대대장급 이상 신군부 35명을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죄로 서울지검에 고발했다.
이는 음지에 있던
역사의 당사자가 세상이 바뀌자 자신들이 주도했던 광주 역사를 다시 쓰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객관성에 문제가 있어 보였다. 고소장이
접수 된지 1년2개월만인 95년7월18일, 서울지검 공안1부(부장 장윤석)는 피고소피고발인 58명 전원에 대해 ‘공소권
없음’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이들을 불기소 처분했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고소인과 피고소인, 참고인 등 모두 2백69명의 진술과
관련 자료를 종합해 본 결과 신군부가 취한 행위들은 10.26으로 야기된 권력공백기에 12.12를 통해 군을 장악하여
제5공화국이라는 새 정권을 창출해내기까지의 전형적인 통치행위이기 때문에 내란죄 등에 해당되는지 여부를 판단할 사법심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한마디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역시 죄는 인정하지만 처벌은 하지 않겠다는 김영삼
대통령의 뜻에 일치하는 것이었다.
당시 여론은 검찰의 이런 결론을 별 무리 없이 수용하고 있었다. 이로써 민주화세력에 의한 역사뒤집기 노력은 일단 서리를 맞는 듯
했다. 그런데 여기에 한 이변이 발생했다.
1995년10월19일 박계동 의원이 노태우의 비자금을 폭로한 것이다. 비자금이 1조를
넘을 것이라는 의혹에 국민들은 분노했고, 이는 연쇄적 심리작용을 일으켜 군사정권에 대한 사회적 반감으로 비화됐다. 바로 이런
분위기가 역사를 뒤집기 하려는 소위 민주화세력에게 절호의 찬스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당시 김영삼은 노태우가 이끄는 민자당에 들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로 인해 김영삼은 소위 민주화세력으로부터 군부와 결탁하여
대통령이 됐다며 조롱받던 처지에 있었다. 바로 이런 때에 노태우의 비자금이 터지자 국민은 노태우와 민자당에 대해 분노했다.
불똥은
노태우에게만 튄 것이 아니라 노태우로부터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받았을 것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던 김영삼과 김대중에게도 튀었다.
김대중은 1995년10월25일부터 그달 31일까지 중국 ‘조어대’(영빈관)에 있었다.
비자금 문제가 터지자 김대중은 동행했던
참모들과 한마디 의논도 없이 그가 노태우로부터 20억 원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그가 그런 폭로를 한 것은 더 큰 것을 예방하기
위해 던지는 작은 미끼와 같은 것이었다. 만일 검찰이 노태우 비자금의 향방을 추적하게 되면 그가 노태우로부터 받은 비자금 전모가
노출될 것이기 때문에 사전에 양심선언을 한 것으로 보였다.
여기에는 김영삼을 향한 비수도 꽂혀있었다. 당시 민자당에 들어가 노태우
밑에서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노태우로부터 더 큰 규모의 비자금을 받았을 것이라는 무언의 협박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김대중의 폭로로 당황한 쪽은 김영삼이었다. 김대중이 노태우로부터 20억원을 받았다면 김영삼은 얼마나 큰돈을 받았겠느냐, 이런
여론이 확산된 것이다. 이 따가운 여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김영삼은 특유의 승부수를 띄워 국면 전환을 시도했다.
그를 향해
집중돼 있는 검은돈의 의혹을 피해가기 위해서는 노태우와 전두환을 희생양으로 삼을 필요가 있었다. 전직 두 대통령을 희생시키면 전
사회가 충격에 빠질 것이고, 이 충격에 의해 노태우 밥상머리에서 대통령이 되었다는 세간의 조롱도 묻어 버릴 수 있을 것이고,
그에게 집중됐던 비자금 수수 여론도 잠재울 수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따라 1995년11월16일. 노태우가 2,358억 9,600만원의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전격
구속되었고, 11월24일. 김영삼이 5.18특별법을 제정하라 지시함으로써 11월30일에 특별수사본부가 발족되고 정당과 국회가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대통령의 발언이 바뀌자 검찰의 입장도 바뀌고 헌법재판소의 권위도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헌법재판소와 검찰이
보여준 기회주의적 행태는 본문에 잘 드러나 있다. 이어서 12월3일 전두환이 경남 합천에서 경찰에 의해 전격 구속되어
안양교도소에 구속수감 되었다. “노태우 등 33명의 군부 장교들과 공모하여 대통령의 사전재가 없이 5천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육본 중앙청 등을 장악하여 군권을 탈취하였다는 혐의”인 것이다.
12월21일에는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
공포되었으며, 1996년2월28일에는 12.12 및 5.18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종결되면서 전두환, 노태우 등 16명이
기소되었다. 1996년8월26일, 1심 선고에서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징역 22년6월을 선고받았고, 12월16일의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전두환은 무기징역을, 노태우는 징역 17년을 선고받았으며, 1997년4월17일, 상고심은 항소심 형량을 확정하였다.
1997년12월19일, 김대중이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됐고, 12월20일에 김영삼과 김대중이 회동하여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사면에 정치적으로 합의했다.
이런 약사가 말해주듯이 5.18에 대한 재판은 순전히 김영삼의 상황 돌파 필요성에 의해 시동되었고, 법관들이 인민재판식 여론몰이에 영합하여 판결문을 쓴 정치재판이요, 역사를 뒤집는 역사쿠데타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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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이 특별사면되어 석방되자 북조선괴뢰패당은 광주인민봉기 18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
1998년 5.19일자 <한민전>명의의 성명을 발표한다.
민주구국의 제단에 바친 광주항쟁용사들의 깨끗한 피와 고귀한 희생을 팔아 집권한 현 당국(김대중)은 드디여 <민주>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문민>독재때 감옥행을 당했던 전두환,로태우와 같은 광주대학살주범들을 살려주다못해 선행독재자들의 파쑈살인몽둥이를 넘겨받아 무분별하게 휘둘러대는 독재정치를 펼치고있다.
이렇듯 김영삼의 정치9단 쑈로 인해 정치재판,인민재판이 펼쳐졌고 이로써 북조선괴뢰패당이 줄기차게 광주의 피값을 천백배로 받아내야 한다고 줴쳐되며 발광하던 그 염원이 실현되고야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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