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대법원 판결 완전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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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7-07-02 19:22 조회8,33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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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대법원 판결 완전붕괴
머 리 말
[1997.4.17.선고96도3376전원합의체판결]은 사상누각이었고, 그 누각은 지금 완전 붕괴되었다. 1996-97년 재판부는 "5.18은 광주시민으로 구성된 시위대가 주도했다"는 대전제 하에 전두환 등 피고인들을 단죄했다. 하지만 그 대전제는 실존하지 않았던 신기루였다. 필자가 이것을 증명했다. 대법원 판결문에는 20개의 ‘판시사항’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5.18이 과연 광주사람들이 이룩한 민주화운동이었는가?”에 대한 판시항목이 없다. 좌익들은‘5.18민주화운동’관련 3개 법안과 1997.대법원 판결을 내세우면서 대법원이 5.18을 민주화운동인 것으로 인정했다 주장한다.
국가가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호칭하기 시작한 것은 노태우 시절이었다. 1990년 정부가‘광주보상법’(광주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등에관한법률)을 제정해 피해자 2,224명에 대해 당시 화폐로 1,430억원을 지출한 사실이 ‘5.18은 민주화운동’으로 자리 잡게 한 단초가 되었다. 이 국고금 지출은 처음‘민주유공자’로서의 희생과 공헌이라는 명분으로 지급되었지만 1997. 대법원 판결이 나오면서부터 좌익세력은 이들에게 주는 돈을 대폭 늘리기 위해 2002년 이른바 “5.18민주화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을 만들었고, 보상명목을 1개에서 3개로 늘리면서 보상 약수가 2-3배로 증폭되었다. 이런 대우를 받는 5.18유공자들이 2017. 현재 5.769명으로 폭발했다. 그런데 5.18유공자는 일반 국가유공자들에 비해 천지차이의 보상금을 받지만 유공자로 선발되는 과정이 기이하다. 일반유공자 되기가 낙타바늘인 반면 5.18유공자 되기는 누워서 떡먹기다. 이해찬, 권노갑, 한화갑 등은 5.18유공자 증을 누워서 받았을 것이다. 일반 국가유공자들은 대통령을 대신해 보훈처가 까다롭게 심사하지만, 5.18유공자는 광주시장 주도로 심사하여 그 수가 해마다 마구 늘어났다. 광주시장이 5.18유공자를 선정하면 대통령이 국민세금을 가지고 그들에게 모든 혜택을 시행한다. 광주시가 국가 위에 군림하는 기현상이 5.18로 인해 해마다 증폭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1995.12.21. 김영삼이 코너로 몰린 정치적 입지를 타개하기 위해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을 번개처럼 제정했다. 이는 사실상 위헌법률이었다. 1997.4. 대법원 판결은 이 두 개의 법률 명칭을 무조건 수용하여 5.18이 ‘민주화운동’인 것으로 그 성격을 확정했다.“광주시위대는 전두환의 내란행위로부터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결집된 헌법수호기관 내지 준-헌법기관이었고, 이 시위는 전국에 빠른 속도로 확산됐어야 할 민주화운동이었다”고 전제한 것이다. 하지만 5.18이 민주화운동이라는 대전제는 당시 ‘화해와 통합’이라는 사회적 명분하에 정치인들이 타협하고 절충한 결과일 뿐, 이 대전제가 과연 사실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연구하거나 사법판단하지 않았다.
5.18 재판은 두 번 했다. 검찰자료는 1980년 것과 1995년 것이 대동소이 했다. 단지 판사들의 판단이 시대 권력에 영합하는 방향으로 뒤바뀌었을 뿐이다. 필자는 16년 동안의 연구 끝에 검찰 및 안기부 자료 등 정부문서들로부터 “5.18은 폭동이었고, 북한군 600명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반면 지난 두 시대의 조사관들은 음미력과 분석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북한군 개입에 대한 의심 자체를 하지 않고 넘어갔다. 이 새로운 발견은 팩트의 함수가 아니라 분석력의 함수였다.
“5.18은 북한군이 주도했다”는 새로운 결과는 게릴라작전 등에 대한 군사지식-통계학지식-미해군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통해 훈련된 분석력에 터 잡아 국방연구원에서 분석능력을 증진시킨 필자가 2002년부터 무려 16년 동안 연구해서야 비로소 얻어낸 열매다. 이런 결과는 위와 같은 과학적 분석능력을 갖추지 못한 재래식 분석관들이 단 기간에 얻어낼 수 있는 결과도 아니고, 좁은 법정에서 극히 제한된 시간 내에 극히 제한된 자료를 가지고 '판단'해 낼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 하늘이 기적을 내려주셨다. 이민 1.5세대로 미국시민권을 가지고 미국정보기관에서 영상분석 기술을 연마한 필명 노숙자담요와 그가 지휘하는 영상분석 팀을 보내주신 것이다. 그의 팀은 5.18광주현장사진들의 얼굴 478명이 모두 북한에서 출세한 인물들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광주현장사진 속 얼굴 하나하나에 대해 그 얼굴이 북한의 어느 얼굴과 닮았는지를 찾아내는 데에는 수천만 원짜리 얼굴 인식 소프트웨어와 영상을 현미경 적으로 불 수 있는 특수 컴퓨터가 있어야 하는데, 이는 한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자산이 아니었다. “얼굴이 신분증” 현재 모든 정부청사들에는 보안구역을 얼굴로 드나들게 하는 소프트웨어가 깔려 있다.
일단 이 소프트웨어에 의해 비교대상의 얼굴을 찾아내면 그 시각부터는 얼굴의 특징들을 비교하고 얼굴의 수많은 포인트들을 선으로 연결하여 도면을 대조해보는 기하학적 분석 등이 동원된다. 사진들이 촬영되는 환경에 따라 그리고 나이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에 대한 예리한 판단력이 가미된다. 영상을 컴퓨터로 분석하려면 시력 소모가 굉장하다. 그래서 얼마동안은 일하고 얼마동안은 쉬어야 한다는 과학적 매뉴얼에 따라 눈을 보호한다. 노숙자담요팀이 15개월 동안 478명의 광수를 찾아내는 데에는 이렇게 눈물 나는 노력이 있었다. 이러한 결과는 하늘이 내려준 기적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우리 회원들에는 눈썰미가 뛰어나고 정보를 잘 캐내는 매니어들이 꽤 많다. 이들은 상황에 대한 예리한 직관력을 가지고 “광주 현장의 이 얼굴과 북한의 이 얼굴이 닮은 것 같으니 분석해 달라”고 노숙자담요에 토스를 했다. 이 분들의 끈질긴 노력 역시 하늘의 뜻이었다고 생각한다.
5.18을 북한이 주도했을 것이라는 예측(conjecture)은 2002년에 했다. 직관력에 의한 예측을 사실로 전환하는 것이 증명(prove)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미해군대학원 박사논문에 수학공식들과 정리 여러 개를 실었다. 그것들을 증명하는데 필요한 잠재력을 2년에 걸쳐 길렀고, 1년 동안 증명했다. 그런데 5.18에 대해서는 훈련된 직관을 사실로 증명하는데 무려 16년이 걸렸다. 여기에 노숙자담요 팀이 가세했다. 이제 필자가 증명한 것은 논리적으로는 누구도 뒤집을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지난 16년 동안 한 번도 ‘필자의 노력에 열매가 맺힐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 이 땅을 장악하고 있는 빨갱이를 잡는 방법이 오로지 이 한길 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필자가 걸어야 할 길이 이 한길밖에 없기에 ‘오리를 가다 쓰러지든 십리를 가다 쓰러지든’하는 마음으로 걸어왔다. 이제부터는 하늘이 응답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증명 항목
1. 5.18 폭동을 북한군이 주도했다는 증거
2. 광주사람들 중 5.18-21.에 폭동에 가담한 사람 없다는 증거
3. 광주단체들이 카빈총상 사망자수를 줄이고 있다는 데 대한 증거
4. 광주교도소를 북한군이 공격했다는 증거
5. 전남도청 2,000여발의 폭탄을 조립한 집단이 북한군이라는 증거
1. 5.18 폭동을 북한군이 주도했다는 증거
1) 1980.5.21.상황 기록한 검찰보고서 9개 줄에 북한군 보인다.
1995.7.18.에 민-군 검찰이 공동으로 발행한 “5.18관련사건 수사결과”(증거자료 별책 1항, 이하 별책으로 호칭) 제92-93쪽에는 아래와 같은 9개 줄의 매우 중요한 기록이 있다.
“02:30경 용산을 출발,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08:00경 광주에 도착한 20사단 지휘차량 인솔대는 광주공단 입구에서 진로를 차단한 수백 명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공격을 받고 사단장용 짚차 등 지휘용 짚차 14대를 탈취당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사병 1명이 실종되고(수일 후 복귀), 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09:00경 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온 시위대 3백여 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시위대 3백여 명이 아세아자동자공장을 점거하고 장갑차 4대와 버스 등 차량 56대를 탈취하여 광주시내로 진출하였음.”
위 글에서 56대는 356대의 오타로 보인다. 별책 제23쪽에는 200여대, 33쪽에는 305대, 76에는 328대 등으로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군상황일지, 안기부 상황일지, 치안본부 상황일지, 계엄사 등을 종합하여 필자는 374대로 정리하여 놓았다.
군대 상식이 없는 사람들이 위 검찰보고서를 읽으면 전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1985년의 안기부가 그랬고, 1995년 검찰이 그랬다. 그냥 시위대가 20사단 차량 부대를 공격해 10여대의 지프차를 빼앗고, 아시아자동차 공장에 시위대 600명이 모여 장갑차 4대와 수십 대의 차량을 탈취해 시내로 나갔구나, 하는 정도의 느낌을 주는 데 그칠 것이다. 그러나 군대는 물론 게릴라와의 전투경험이 있는 필자의 눈에는 아래와 같이 읽혔다.
“시위대 3백여 명이 08시에 광주공단 입구(톨게이트 부근)에서 20사단 지휘차량부대를 공격했다”는 의미
군부대 이동 상황은 극비 중의 극비정보다. 이 극비정보가 이들 300여명의 폭도들에 넘어갔다는 뜻이 이 문장에 들어 있다. 군 이동계획에 대한 극비정보를 빼낸다는 것은, ‘스스로를 5.18의 주역이었다고 주장하는 10-20대의 비조직 화된 콩가루 하층계급’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5월 26일, 도청, YWCA 등을 지켰던 광주사람들은 10-20대의 개념 없는 하층계급 70-100명 정도에 불과했다. 좌익들은 이들을 ‘항쟁본부’라며 존재감을 풍선처럼 부풀려온 것이다.
조직화된 300명이 이동 중인 현역부대를 공격할 수 있는 능력과 배짱은 일반 시민이나 학생들에 없다. 오전 08:00에 정규군을 공격했다는 것에도 엄청난 의미가 내포돼 있다. 적어도 06시 정도에는 300명의 시위자들 각자가 집에서 기상하여 최소한 07:00경 공격대기지점(Line of Departure) 근방에 집결하여 실무적 작전점검을 하고, 공격대기지점에 매복해 있다가 08시에 작전을 개시했다는 말이 된다. 어느 나라 군대에서건 이는 기본 틀에 속한다. 광주의 10-20대 최하층 노동자 300명이 이른 새벽에 일어나 집결지에 모여 작전 전 회의를 하고, 공격대기지점에 매복하고 있다가 정규부대를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할 사람 아마 지구촌 전체에도 없을 것이다.
“300명이 사단장 1호차를 포함한 14대의 짚차를 탈취한 후 그것을 몰고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갔다”는 의미
이 300명은 그 어려운 기습작전을 성공시켰다. 정규군을 공격해서 이겼다는 말은 매우 중요하다. 한국의 정규군이 자기들보다는 약하다는 사실을 먼저 평가한 후 자신감을 가져야만 감행할 수 있는 행동이다. 이들 300명은 극비 중 극비로 취급되는 제20사단 이동계획을 사전에 파악했다. 이동하는 한국군이 자기들보다 취약하다는 사실을 평가했다. 공격해서 한국군을 패닉상태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14대의 짚차와 300명을 태울 수 있는 또 다른 차량들까지 운전하여 아세아자동차로 갔다. 극비정보 획득능력, 피아 전투력 평가능력, 전투부대 공격능력, 운전능력 모두를 다 갖춘 이 300명은 절대로 광주시민일 수 없다.
이들 300명은 왜 이 어려운 작전을 통해 짚차를 탈취해가지고 아세아자동차공장으로 직행했겠는가? 아래에 설명하겠지만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38개의 무기고를 털 군용트럭이 필요해서였다. 장갑차들도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차량들은 군납업체인 아세아자동차공장에 있다. 아세아자동차 공장의 벽은 요새의 벽이다. 높고 견고하고, 철조망이 있고, 망루가 있고, 경비병들이 있다. 경비병들은 높은 망루에 모래 마대를 쌓고 기관총을 거치하고 여차 하면 발사할 준비를 갖춘 전투병들이다. 이런 벽을 뚫고 그 많은 차량을 탈취하려면 삼엄하게 경비를 서는 경비병을 제압해야 한다. 경비병과 싸우려면 총이 있어야 하는데 폭도에는 총이 없다. 싸우면 총 없는 600명이 전멸한다. 총 없는 폭도 600여명이 총을 가진 경비병들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기발한 작전이 필요했을 것이다. 짚차 등 14대의 짚차를 구태여 빼앗아 아세아자동차공장으로 갔다는 것은 “이 거 봐라, 20사단이 다 일망타진됐다, 이미 대세가 기울었으니 반항하지 말고 순순히 항복하라”또는 “우리가 20사단 지휘부다. 문 열어라”는 식의 엄포용이었을 것이다.
“09:00경 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온 시위대 3백여 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시위대 3백여 명이 아세아자동자공장을 점거하고 장갑차 4대와 버스 등 차량 56대를 탈취하여 광주시내로 진출하였음.”이라는 의미
시위대 600여명이 아세아자동차 공장을 점거했다는 말은 경비병력이 순순히 경비를 풀고 문을 열어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갑차와 군용차를 수백 대 단위로 내주었다는 것은 차량키를 꽂아주었다는 뜻이다. 그 많은 장갑차와 군용차량들을 몰고 시내로 나갔다는 말은 자가운전 시대가 아니었던 광주에 장갑차를 4대씩이나 운전을 할 수 있는 운전기술자들, 군용트럭을 300여대나 몰 수 있는 많은 운전사들이 광주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별책 74쪽(계엄사) 상단 표의 셋째 줄에는 탈취당한 차량이 군용 민수용 다 합쳐서 총 882대인 것으로 표기돼 있다. 900대에 가까운 차량을 몰 수 있는 운전자들이 광주에 나타났다는 뜻이다. 그 당시 이렇게 많은 운전자들이 광주에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사람 별로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600명은 부대이동에 대한 극비 정보도 얻을 줄 알고, 매복해 있다가 현역부대를 급습할 줄도 알고, 짚차를 몰고 다닐 줄도 알고, 장갑자와 트럭도 몰 수 있고, 곧바로 뒤에 석명하겠지만 38개 무기고 위치를 사전에 파악할 줄도 알고, 무기고 경비병을 단번에 제압할 줄도 알고, 무기고를 단숨에 부술 줄도 알고, 총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도 알고, 총기사용방법도 교육시킬 줄 알고(별책 14쪽), 뒤에 살명하겠지만 8톤트럭 분의 다이너마이트로 2,000여발의 폭탄을 조립한 매우 희귀한 기술도 보유했다. 실로 다재다능한 능력을 가진 600명 팀인 것이다. 이런 맥가이버들이 600명 씩이나 광주에 있었다는 것 역시 해가 서쪽에서 뜬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상이 필자가 위 9개 줄을 읽는 독해방법이었다. 이 9개 줄을 놓고 군-안기부-검찰-법관들이 읽은 방법과 필자가 읽은 방법이 천지차이로 다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북한특수군을 보지 못했고, 필자만 보게 된 것이다.
2) 무기고 탈취 기록에도 북한군 보인다
북한군의 모습은 5.21.자 상황을 정리한 검찰자료와 안기부자료 모두에 드러나 있다. 두 개의 문건이 다 비슷한 자료들을 담고 있다. 그런데 검찰자료와 안기부 자료는 사실들만 나열해 놓고 이를 쥬스를 짜내듯이 짜서 정보를 가공해 내지 못했다. 필자가 이 두 자료들로부터 가공해낸 정보는 “600명의 폭도들은 21일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38개 무기고를 털어 총 5.403정의 총기(별책 75쪽 가)와 8톤 트럭분량의 다이너마이트를 탈취했다”(별책 189쪽 가)는 정보다.
필자가 가공해 낸 위 정보가 없으면 북한군이 안 보이는 것이고, 위 정보가 있으면 북한군이 보이는 것이다. 별책 77쪽 ‘가’에는 당시 1심에서 집행유예 이상의 판결을 받은 사람들이 195명에 불과하다는 기록이 있다. 동 78-82쪽을 보면 이들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들의 이름, 나이, 직업 등이 기록돼 있다. 구두닦이 껌팔이 자개공, 목공 철공 등 59개종의 하층직업들에 분산돼 있고 그 80% 정도가 10-20대다. 사망한 민간인이 154명이다, 이들 중 33명이 10대 전후의 아이들이다(별책 57쪽). 별책 59-64쪽에는 나머지 사망자 119명과 신원미상 12명이 있다. 이 119명의 직업과 나이를 보아도 다 20대의 무직자와 식당종업원 급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5.18의 주역들이라며 5.18유공자가 되어 있다. 10세 전후의 33명을 제외한 5.18주역들은 사망자와 유죄판결을 받은 자들을 모두 합쳐봐야 불과 349명에 불과하다. 600명의 절반 정도의 수자다. 이러한 직업과 이러한 나이에 속하는 광주시민 349명은 600명도 안되고 번개같이 날아다니는 맥가이버들도 아니다.
1985. 안기부는 “5.18상황일지 및 피해현황”이라는 보고서를 냈다(별책 제2항). 이 책의 제55-71쪽에는 5.21. 낮 12시부터 털린 무기고 이름과 털린 무기 수량들이 박스 단위로 나열돼 있다. 그냥 읽자면 매우 지루하다. 그래서 귀찮다는 듯이 20쪽에 달하는 책장을 넘겨버린다. 1980년대 안기부 분석관은 무기고 탈취 사항에 대해 별책 제23쪽 5~14줄에 걸쳐 아래와 같이 두루뭉술하게 정리했다. 한 마디로 폭도들이 아세아자동차에서 탈취한 차량들을 몰고 전남 여러 곳을 다니면서 무기고를 털었다는 무미건조한 내용이다. 600명에 대한 정체를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난동자들은) 방위산업체인 아세아 자동차공장을 탈취, 군용 및 일반버스 등 200여대를 탈취, 이를 몰고 장성, 화순, 등지를 휩쓸면서 시위선동 및 무기탈취, 난동자들은 화순광업소 및 광주 소재 한국화약보급소에서 폭약, 뇌관, 도화선을 탈취한데 이어 광주 담양 나주 등 경찰서 파출소 및 예비군 무기고 등에서 무기, 탄약을 탈취하고. 시내 곳곳에서 총격전 및 방화.” (별책 제23쪽 5~14줄)
그러면 1995. 검찰은 무기고 탈취사건을 어떻게 기록했는지 살펴보자. 1995.7.18.에 민-군 검찰이 공동으로 발행한 “5.18관련사건 수사결과” 제100~102쪽(별책 13~15쪽)에는 이에 대한 검찰의 시각이 정리돼 있다. 결론적으로 두루뭉술 그 자체이며 “여러 지역에서 다수의 무기가 피탈되었다”는 위 안기부 식 나열 그대로다.
“한편 시위대는 차량을 이용하여 인근 광산, 영광, 함평, 화순, 나주, 영암, 해남, 강진, 완도, 승주, 고창 등지로 진출하여 무기고를 확보, 무장하였는데, 13:00경, 광산 하남 파출소에 시위대 80여명이 차량 3대를 타고 와 칼빈 9정을 탈취하였고, 고속버스 트럭 등 10여대의 차량에 탑승한 광주시위대가 함평에 도착하여 군중 시위를 벌이고, 신광지서에서 총기 1백여정. 실탄 2상자를 확보하였고, 13:35경 화순 소재 4개 파출소에서 총기 460여정과 실탄 1만발을 탈취하였고, 14:00경 나주 남평지서 무기고에서 칼빈 20여정과 실탄 7~8상자를 탈취하고,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와 나주시위대가 합세하여 나주 경찰서에 진입, 군용 레카차로 무기고를 파괴하고 칼빈 5백여정, M1소총 2백여정, 실탄 4만 6천여발을 탈취하였고, 15:35경, 화순광업소에서 칼빈 1,108정, 실탄 17,760발, 화순 동면지서에서 M1 72정, 칼빈 296정, AR 1정, LMG 1정, 실탄 1만4천여발을 탈취하였고, 이날 하루 동안 일신방직, 호남전기, 연초제조창, 영암경찰서, 화순경찰서, 지원동 석산화약고, 한국화약, 강진성전파출소, 등을 급습하여 칼빈, M1. AR. LMG 등 총기 4천9백여정, 실탄 13만여발, TNT 10여상자, 수류탄 2백7심여발을 탈취하였다”
“시위대는 이들 무기를 가져와 광주공원과 학운동에서 분배한 후 총기사용교육을 실시하였고, 15:00경, 광주공원에서 무기를 분배받은 시위대가 짚차를 타고 시내를 돌면서 상황을 전파하였으며, 17:00경에는 광주공원에서 총기사용교육을 받은 시위대들이 조를 편성하여 정찰, 도청감시, 외곽도로 경계 등의 임무를 부여받고 시내 요소에 비치하기 시작하는 등 이른바 ‘시민군’이라 불리우는 무장시위대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음”(별책 13~15쪽)
이상과 같이 1985년의 안기부도 1995년의 민-군 합동검찰의 수사관들도 다 같이 원천자료만 나열했던 것이다. 두 시대의 수사관들이 다 같이 “맥가이버 능력으로 훈련된 600명의 폭도들은 21일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38개 무기고를 털어 총 5.403정의 무기를 탈취했다”는 산뜻한 정보를 가공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탈취당한 무기고들을 나열한 것으로부터는 북한군에 대한 희미한 실루엣조차 얻을 수 없지만,
“시위대 600명은 부대이동에 대한 극비 정보도 얻을 줄 알고, 매복해 있다가 현역부대를 급습하여 이기는 능력도 가졌고, 작전분석도 할 줄 알고, 짚차를 몰고 다닐 줄도 알고, 장갑차와 트럭도 몰 줄 알고,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비밀시설로 숨어 있는 38개 무기고 위치를 사전에 파악할 줄도 알고, 사전 예행연습을 통해 38개 무기고를 향해 질주 할 줄도 알고, 무기고를 지키는 경비병을 제압할 줄도 알고, 무기고를 단숨에 부순 후 5,403개의 총기를 탈취할 줄도 알고, 총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도 알고, 총기사용방법도 교육시킬 줄 알고(별책 14쪽), 8톤트럭 분의 다이너마이트로 2,000여발의 폭탄을 조립할 줄 아는 매우 희귀한 기술도 보유한 실로 다재다능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분석 내용에서는 북한군의 모습을 명확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2. 광주사람들 중 5월 18-21일 폭동에 가담한 사람 없다는 증거
이 사실을 증명하는 데에는 이른바 “5.18항쟁주역”들로 알려진 김창길, 김종배, 정상용, 허규정, 박남선의 증언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이들의 증언은 2002.12. 전남대학교 출판부가 발행한 "5.18항쟁증언자료집I"(별책 98-184쪽)에 수록돼 있다. 한마디로 이들은 5.18유공자 최상의 반열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5월 18일부터 21일 나흘 동안에는 숨어서 각자도생했는데 그 사이에 총기가 쏟아져 나왔고 도청이 점령됐는데, 그 일은 자기들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했다는 것이다. 자기들은 단지 5월 25일부터 도청과 YWCA에 들어가 갑론을박 하다가 진압 당했다는 것이다.
김창길(온건파 학생)의 증언 발췌
* 5월 22 아침에 도청에 들어가 시민수습위원회 만들어 계엄군과 협상하기 시작했다(증59의 103쪽 가, 이하 증59 생략함)
* 생면부지의 장인홍씨가 나에게 물었다. 자네 누구냐? 저는 전남대 3학년 김창길입니다. 그러자 장인홍씨는 ‘그럼 잘됐다. 지금 계엄사와 협상하러 가는데 학생 대표 1명이 필요하다. 자네가 같이 가자. (108쪽 가, 나)
* 학생수습위원회에 학생은 서너 명뿐이고 나머지는 일반인들이었다(109쪽 가)
* 시민군 조직은 도청에서 관리하는 조직이 아니라 자생적 조직이었다. 이런 조직이 무기를 회수하러 다녔다(110쪽 가)
* 시민수습위원회 사람들은 아침에 넥타이 매고 출근했다가 딱 시간 되면 퇴근했다(111쪽 가)
* 윤상원(주: 이른바 5.18의 영웅,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과 정상용 등은 5.24. 오후에 도청에 처음 들어왔다(112쪽 가)
* 시민수습위원회의 헤게모니가 조비오 김성룡 신부들로 완전히 넘어 간 시점이 5.24.저녁이고, ‘항쟁지도부’가 생긴 시점은 5.26. 아침이었다( 113-14, 나)
강경파 학생 김종배(1심 사형) 증언 발췌
* 윤상원, 정상용, 김종배 셋이서 이전의 수습위원회를 엎어버리고 25일 저녁에 ‘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114-115쪽 가)
* 수습위원회에는 온건파와 강경파가 있었다. 온건파는 무기를 반납하자는 파이고 강경파는 끝까지 싸우자는 사람들이었다. 25일 밤 강경파가 온건파를 몰아내고 ‘투쟁위원회’ 만들었다(116쪽 나).
* 25일 밤, 박남선이 총으로 위협해서 온건파 김창길 등을 추방했다(119쪽 가)
* 기동타격대는 실내장식업을 하는 이재호가 조직하고 윤석루(19세 구두공, 1심 무기형)가 대장을 했다. 윤석루는 대장이긴 해도 어리고 뭘 몰랐다(121쪽 가)
* 21일 저녁에 총이 나왔다. 22일 총기를 반납하자는 수습방안들이 나왔다(123쪽 가).
* 박남선은 도청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125쪽 가)
* 투쟁위원회에 모인 정상용 들 몇 몇 사람들은 다 끼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교련반대, 긴급조치위반, 민청학련 빈민운동 문화운동 등을 했던 사람들이었다(127쪽 가)
정상용(1심 무기형) 증언의 발췌
* 항쟁지도부는 급조된 조직이다. 나는 외무위원장을 맡았다. 그 이전에는 시민학생수습대책위가 있었는데 총기를 반납하자 해서 이를 거부하고 만든 조직이다(128쪽 가), 그날이 25일이다(128쪽 나)
* 시민학생수습대책위의 기본 골격은 무기반납이었다(130쪽 가).
* 23일부터는 무기반납쪽으로 선회했다(131쪽 가)
* 항쟁지도부의 활동기간은 5월 25일 오후부터 27일 새벽이었다(131쪽 나)
* 26일 우리가 재무장을 하기로 결의하고 발표하고 조직을 짜려는 순간 진압 당했다(132-133쪽 가)
* 5월 19일부터 윤상원 등 투사회보 사람들이 녹두서점(윤상원이 점원으로 있는 서점)에 모여 작업도 하고 전략회의도 했다. 21일 총격전이 나자 모두 흩어져 각자 도생했다. 이날 수시로 위험하다는 판단이 나오면 보성기업으로 자리를 옮기는 등 숨어 다녔다. 본격적인 재집결은 22일부터였다. 안전하다고 생각한 YWCA를 계속활용했다(136쪽 가).
* 김종배와 허규정은 조선대 학생일 뿐 운동권은 아니었다(137쪽 가)
허규정(1심 무기형) 증언의 발췌
* 나는 처음 박관현이 전남대 총학생회장인줄도 몰랐다(143쪽 가)
* 투쟁위에서는 누가 나서서 주도하는 사람도 없었고 리더도 없었다(145쪽 가)
* 계엄군을 몰아내고 도청을 장악한 사람들이 도청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신분을 다 확인했다. 우리가 도청에 들어간다고 하자 높은 사람들로 보이는 관료들이‘계엄군이 들어오니 나가라’고 명령했다(148쪽 가, 나)
* 25일 도청에 모인 사람들은 맨날 회의만 하고 대안은 못 내고, 한마디로 오합지졸이었다(151쪽 가 나)
* 도청에 모인 사람들은 고등학교학생들과 나이 어린 사람들이었다. 광주의 운동권들은 계엄 검거령이 내려져 모두 잡혀갔다, 그래서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운동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154쪽 가)
박남선(1심 사형) 증언의 발췌
* 시위에서는 식당종업원, 구두닦이 등 가장 밑바닥에서 사는 사람들이 제일 앞장섰다. 소위 운동권들은 다 도망갔다가 5.23-25경에 도청에 들어왔고 지식인들은 수습위원회나 만들어 가지고 얼굴 세우는 일만 했다(163의 가)
* 도청 내에 남아 있는 인력은 100명 정도였다(172쪽 가)
3. 광주단체들이 카빈총상 사망자수를 줄이고 있다는 데 대한 증거
5.18 총상 사망자는 116명, 그 중 75%에 해당하는 85명이 카빈소총 등 시민들이 소지한 무기고 총들에 의해 사망했다는 것이 당시 육군본부(계엄사령부)의 통계다(별책 73쪽 가). 이러한 통계는 1985.5. 안전기획부가 작성한 보고서 즉 별책 57-65쪽 자료를 정리하면 도출된다. 광주시민이 광주시민을 조직적으로 쏘았다는 결론인 것이다. 그런데 1995년 검찰이 발표한 통계는 이와는 정반대다. 카빈총상이 26명, M16총상이 96명, 계 132명이 총상사망자라는 것이다(별책 90쪽).
총상사망자가 16명이나 더 늘어났고, 카빈총상 사망자가 85명에서 26명으로 줄어든 반면, M16 총상 사망자가 31명에서 96명으로 늘어난 것이다. 1995년 당시, 사망자들의 뼈는 15년 동안 땅 속에 묻혀있었다. 설사 땅을 파서 뼈를 꺼낸다 해도 뼈를 가지고는 사망원인을 밝힐 수 없다. 통계를 광주에 유리하도록 마구 조작한 것이다. 이에 더해 최근에는 5.18기념재단 홈페이지의 기록들이 몰래 조작되고 있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카빈총상을 그냥 총상으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조작 케이스로는 5.18 선전로고로 등장해온 조사천의 경우다. 이런 조작 사례들은 시스템클럽과 뉴스타운에 자세히 증거 돼있다. 북한군의 소행을 감추어주기 위해 카빈총상 수를 점점 더 줄이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광주사람들이 광주의 피해가 북한군에 의해 발생했다고 하면 5.18명예가 훼손된다며 소나기식 소송을 하고, 반드시 공수부대에 의해 발생했다고 해야 5.18의 명예가 존중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5.18단체들의 정체가 묻어나는 것이다.
계엄사 기록(별책 73쪽 나)에는 이런 글이 있다. “계엄군 당국에서는 이러한 사인을 의사 변호사 군수기관 시민대표들로 구성된 합동조사반에 의거 소상히 규명하여 유족들로 하여금 확인토록 공시함으로써 136명의 유족들은. . 사실을 인정하고 인수해갔으나 26명의 사망자에 대해서는 유족이 나타나지 않아 공원묘지에 안장하였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1980년의 기록들이 15년 이후에 대량 뒤바뀌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5.18단체들이 5.18의 진실에 대해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4. 광주교도소를 북한군이 공격했다는 증거
전 국정원장 남재준은 대선후보 시절인 2017.4.17. “5·18 당시 대한민국 사법부가 판결을 내린 일부 사상범까지 수감된 교도소를 총을 들고 습격하는 것이 과연 민주화를 위한 것이었느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5.18기념재단 상임이사인 김양래와 5.18 성역화에 앞장 선 광주시장 윤장현은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공격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남재준 대통령후보를 허위사실 적시혐의로 고소하겠다 천명했다. 이어서 5.18기념재단 상임이사 김양래와 광주시장 등은 “교도소를 공격했으면 시체들이 있어야 하는데 시체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상의 내용을 담은 기사는 별책 176쪽에 있다. 그러나 북한군은 5월 21일 밤 무리하게 광주교도소를 공격하다가 430명 이상의 대량학살을 당했고, 그 430구의 유골이 2014.5.13. 청주 흥덕지구 밀림 속에서 5.18 사망자 포장 방법 그대로 지하 1미터 깊이의 운동장에서 발굴되었다. 이 430구에 대해서는 무연고 장례를 위한 입찰공고도 없었고, 화장된 기록도 없다. 아마도 2014년 10월 4일 아무런 이유 없이 날아온 김정은 특별기가 북으로 실어갔을 것이다.
대법원 1997.4.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 제2장 제2항 ‘가’ “광주교도소의 방어 부분과 관련한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의 점에 대하여”에는 광주교도소가 무장한 시위대로부터 전후 5차례에 걸쳐 공격을 받았고, 2.5톤 군용트럭에 LMG 기관총 등으로 무장한 시위대가 정문방향으로 공격하던 시위대 중 서종덕, 이명진, 이용충 등이 사망했다는 내용이 적시돼 있고, 광주교도소는 간첩을 포함한 재소자 2,700명이 수용된 주요한 국가보안시설 이었다는 내용이 적시돼 있다. 아울러 계엄군이 교도소를 향해 공격해 오는 시위대를 사살한 것은 정당한 행위이기 때문에 내란목적 살인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시하였다(별책 183쪽 가)
대법원은 광주교도소가 5회 공격당했다 하고, 광주시장 및 광주5.18단체는 광주시민은 교도소를 공격한바 없다 강경 주장한다. 그렇다면 교도소는 광주시민 모르게 북한군이 공격했다는 말이 되는 셈이다.
5. 전남도청 2,000여발 폭탄을 조립한 집단이 북한군이라는 증거
1996.10.10. 광주일보사 특별취재반의 ‘실록 5.18광주항쟁사’ 제79회는 “도청 폭탄뇌관제거”에 관한 기사다(별책 187-191쪽). 이 기사는 전남도청에 8톤 트럭 분량의 다이너마이트(189쪽 ‘가’)가 전남도청 지하실에 조립돼 있었고, 이 사실을 양흥법, 김영복, 문영동 등(189쪽 나)이 광주시의 안전을 위해 전교사 부사령관 김기석 준장에 가서 밀고했고(190쪽 가), 전교사는 1명의 문관을 보내 5월 25-26일 밀고자들의 보호를 받아가면서 해체했다(190쪽 나)는 내용이 들어 있다.
광주일보의 이 기사에 적혀있는 문영동, 양흥범, 김영복은 다이너마이트가 폭탄으로 조립돼 있었다는 사실과 문관 1명이 2일 동안에 걸쳐 해체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인이다. 광주일보 특별취재팀 여러 명도 이에 대한 증인이다. 전남일보가 거명한 계엄군측 인물은 김기석(191쪽 가), 윤성민(191쪽 나) 그리고 배승일(185쪽)이다. 거명된 증인만 해도 6명이다. 배승일은 자기가 해체한 다이너마이트 폭탄이 2,000여발이라고 했다(185쪽 가). 배승일은 광주시를 지켜냈다는 공로로 보국훈장 동백장을 받았다가 노무현 정부에 의해 그 훈장을 박탈당했다. 그리고 소송을 걸어 2007년에 다시 찾았다(185쪽). 2,000여발의 다이너마이트 폭탄을 해체한 사실은 6명 이상의 증인들로부터 확인돼 있는데 이를 조립한 사람이 일체 없다. 폭탄을 지킨 위 광주사람들은 광주사람들 중에서는 조립된 폭탄을 해체할 수 있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 조립한 사람이 광주에 있었다면 해체할 수 있는 사람도 광주에 있었어야 했다. 그런데 폭탄을 조립한 공로로 5.18유공자가 되었다는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그 조립은 북한군이 한 셈이 된다.
결 론
통계학이라는 고급학문이 있다. 수많은 통계자료(statistics)로부터 추론(inference)를 이끌어 내는 공학적 기술로 수리공학의 절정을 이루는 학문이다. 필자는 그 학문에서 수학공식 2개와 수학정리 6개를 창조했던 사람이다. 통계자료는 그라프 상에 표정(plotting)돼야 분석을 할 수 있다. 필자는 검찰보고서와 안기부 보고서를 읽으면서 전남지역 각 시도에 털린 무기고 위치를 지도 위에 점으로 찍었다. 지리적 분포가 눈에 즉시 들어왔다. 이렇게 표정을 하고 분석을 하는 목적은 오로지 통계자료로부터 추론(inference)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다. 추론(inference)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통계자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쓰레기다. 검찰보고서와 안기부 보고서에 추론 없이 나열된 자료들이 그런 쓰레기였던 것이다. 쓰레기였기에 거기에서는 북한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진리는 학문이 찾아내는 것이지 사람들을 처벌하는 재판과정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1980년 및 1995년에 탈취된 무기고 자료를 단순 나열한 것으로 만족했던 분석관들로부터 통계학적 분석 마인드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들이 나열만 했던 자료로부터 역사상 처음으로 통계학적 분석을 시도한 사람은 이 나라에서 오로지 필자 한 사람 뿐이다. 그리고 광주사태에 대한 상황일지들을 시기별로 패러다임 화할 수 있는 마인드를 가진 사람 역시 아직까지는 필자가 유일했다. “5. 18.~5. 21.까지는 최상의 농도로 진행된 시가전, 5. 22.~ 5. 27.까지는 총기반납 및 협상을 내용으로 하는 수습국면”, “5.21까지는 북한군이 주역, 5. 22.부터는 광주시민들이 주역” 이것이 필자가 정의한 5.18의 패러다임이다. 평범한 낱말로 기술한 군사 상황일지 내용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음미하여 과학적 의미를 추출해낸 사람도 필자가 유일했다.
결론적으로 1980년 및 1995년의 수사관-검사-판사들은 1)상황일지 상에 나타난 통계자료(statistics)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추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통계학적 분석을 하지 못했고, 2) 광주사태 10일간의 발생한 상황들을 날짜별로 패러다임 화할 줄 몰랐고, 3) 상황 하나하나에 대한 군사적 의미를 전혀 음미하지 않고 건너뛰었다. 이러했기에 처음에는 피고인 혼자 외톨이가 되었던 것이다.
패러다임 측면에서 바라보자면, 지금의 5.18문제는 비-과학과 과학과의 전쟁이 되어 있다. 똑같은 사실자료들(statistics)을 나열해 놓고도 과학적 접근을 하지 않았던 1980년 및 1995년의 분석관들은 그 자료들 속에서 북한군의 존재를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한 반면, 과학적 접근을 분석의 무기로 삼은 필자는 똑같은 자료들에서 북한군의 존재를 생생하게 찾아낸 것이다.
1997년 4월 17일의 대법원 판결 판시사항 제14호(증59의 178쪽, 판시사항 제14호 "비상계엄의 선포나 확대행위가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는지 여부")에는 이런 판시내용이 있다.“대통령의 비상계엄의 선포행위나 확대행위는 고도의 정치적-군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행위라 할 것이므로, 그것이 누구에게나 일견하여 헌법이나 법률에 위반되는 것으로서 명백하게 인정될 수 있는 등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라면 몰라도, 그러하지 아니한 이상 그 계엄선포의 요건 구비 여부나 선포의 당-부당을 판단할 권한이 사법부에는 없다고 할 것이다."
필자는 위 대법원 판례사항 제14호가 판시했듯이 법정의 지식과 판단 범위를 훨씬 넘어선 고도의 군사적 지식과 고도의 통계학적 응용지식 및 분석능력을 사용하여 "5.18은 광주시민들이 주도한 민주화운동"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증명해 냈다. 학자인 필자는 '연구'를 하지만, 법정에서는 매우 짧은 시간 내에 ‘연구’가 아닌 '판단'만 한다. 5.18을 북한군이 주도했다는 것을 증명했다. “5.18을 북한군이 주도했냐”에 대한 명제는 학자에게 허용된 ‘연구’ 영역이지 사법판단의 영역이 아니다. 1996-97 재판부들이 사용한 “5.18은 민주화운동”이라는 대전제는 실존하지 않는 신기루였다. 대전제가 무너져 버린 지금, 이에 터 잡아 판단한 1997년의 대법원 판결문은 승복력을 상실해야 할 것이다. 이는 학자의 신분으로 제기하는 매우 엄중한 도전이다.
별책 증거자료
1)“5.18관련사건수사결과”(1995.7.18.서울중앙검찰청-국방부검찰부) 1-21
2)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1985.5. 국가안전기획부) 22-64
3) “계엄사-10.26사태와 국난극복”(1982.3.15. 육군본부) 65-82
4) “광주의 분노”(1985.5.16, 조선노동당출판사) 83-88
5) “5.18사건수사기록”(월간조선 2005년 1월호 별책부록) 89-97
6) “5.18항쟁 증언자료집I”(2002.12. 전남대학교 출판부) 98-175
7) 광주일보(2017.4.17) “광주시민 교도소 공격 안 했다” 176-177
8) 대법원 판결문(1997.4.17.선고96도3376전원합의체판결문) 178-184
9) 전남도청 다이너마이트 폭탄 해체한 사람들 185-191
2017.7.2. 지만원
http://system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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