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 안기부와 1995 검찰이 북한군 존재 놓친 이유
페이지 정보
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7-06-18 21:47 조회5,916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1985 안기부와 1995 검찰이 북한군 존재 놓친 이유
나는 아세아자동차 공장 턴 집단 600명이 북한군이라는 발상 어떻게 했나?
1995.7.18.에 민-군 검찰이 공동으로 발행한 “5.18관련사건 수사결과” 제92-93쪽에는 아래와 같은 9개 줄의 기록이 있다.
“02:30경 용산을 출발,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08:00경 광주에 도착한 20사단 지휘차량 인솔대는 광주공단 입구에서 진로를 차단한 수백 명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공격을 받고 사단장용 짚차 등 지휘용 짚차 14대를 탈취당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사병 1명이 실종되고(수일 후 복귀), 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09:00경 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온 시위대 3백여 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시위대 3백여 명이 아세아자동자공장을 점거하고 장갑차 4대와 버스 등 차량 56대를 탈취하여 광주시내로 진출하였음.”
위 글에서 56대는 356대의 오타로 보인다. 다른 자료들에는 모두 300대 이상으로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군상황일지, 안기부상황일지, 치안대 상황일지, 계엄사 등을 종합하여 필자는 374대로 정리하여 놓았다.
군대 상식이 없는 사람들이 위 검찰보고서를 읽으면 아무런 중요성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냥 평범한 내용으로 읽어버릴 것이다. 1985년의 안기부가 그랬고, 1995년 검찰이 그랬다. 그냥 시위대가 20사단 차량 부대를 공격해 10여대의 지프차를 빼앗고, 아시아자동차 공장에 시위대 600명이 모여 장갑차 4대와 다수의 차량을 탈취해 시내로 나갔구나, 하는 정도의 느낌을 주는 데 그칠 것이다. 그러나 군대는 물론 게릴라와의 전투경험이 있는 나의 눈에는 아래와 같이 읽혔다.
나는 어떻게 읽었나?
시위대 3백여 명이 08시에 광주공단 입구(톨게이트 부근)에서 20사단 지휘차량부대를 공격했다는 말에는 아래와 같은 뜻이 들어 있다.
군부대 이동 상황은 극비 중의 극비사항이다. 이 극비 사항이 이들 300여명의 폭도들에 넘어갔다는 뜻이다. 광주의 10-20대 하층계급 집단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5월 26일 도청, YWCA 등을 지켰던 광주사람들은 10-20대의 개념 없는 하층계급 80명 정도에 불과했다. 300명으로 이동 중인 현역부대를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은 일반 시민이나 학생들에는 없다.
전남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38개의 무기고를 털려면 군용트럭이 많이 필요하다. 이 차량들은 군납업체인 아세아자동차공장에 있다. 아세아자동차공장을 정복하려면 망루를 설치하고 삼엄하게 경비를 서는 경비병을 제압해야 한다. 경비병과 싸우려면 총이 있어야 하는데 폭도에는 총이 없다. 총 없는 폭도 600여명이 총을 가진 경비병들을 제압하려면 작전이 필요하다. 이런 상태에서 600여명이 아세아자동차 공장을 점거했다는 말은 경비병력이 순순히 경비를 풀고 문을 열어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사단장 1호차를 포함한 지휘차량 대열이 필요했던 것이다.
폭도 300여명이 사단장용 짚차 등 14대의 짚차를 구태여 빼앗아 아세아자동차공장으로 갔다는 것은 “이 거 봐라, 20사단이 다 일망타진됐다, 이미 대세가 기울었으니 반항하지 말고 순순히 항복하라”는 식의 엄포용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런 기발하고 세밀한 머리를 쓸 정도의 실력은 당시 광주 사람들에 없었다. 더구나 광주사람들은 시위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 아니라 즉흥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늘 주장해왔다.
장갑차와 군용차를 수백대 단위로 내주었다는 것은 차량키를 꽂아주었다는 뜻이다.
그 많은 장갑차와 군용차량들을 몰고 나갔다는 말은 자가운전 시대가 아니었던 광주에 운전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 역시 이상한 일이다.
부대이동에 대한 극비 정보도 얻을 줄 알고, 매복해 있다가 현역부대를 급습할 줄 도 알고, 짚차를 몰고 다닐 줄도 알고, 장갑자와 트럭도 몰 수 있고, 38개 무기고 위치를 사전에 파악할 줄도 아는 다재다능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600명 씩이나 광주에 있었다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이상이 내가 이 9개의 줄을 읽는 방법이었다. 이 9개 줄을 놓고 군-안기부-검찰-법관들이 읽은 방법과 내가 읽은 방법이 천지차이로 다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북한특수군을 보지 못했고, 나만 본 것이다. 이에 한 가지만 더 추가하면 게임이 끝난다. 제1급 5.1`8유공자인 정상용-허규정-박남선의 증언만 보아도 무기를 털고 전남도청을 통제하던 시민군은 광주사람들이 아니었다고 한 것이다. 5월 26일 도청을 지키던 사람은 물과 70-80명의 아이들이었다고 한 것이다.
무기고 탈취 행위자는 북한군이었다는 발상 어떻게 했나?
1985년 안기부는 “5.18상황일지 및 피해현황”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이 책의 제55-71쪽에는 5.21. 낮 12시부터 털린 무기고 이름과 털린 무기 차량들이 박스 단위로 나열돼 있다.
나는 이 어지럽게 나열된 자료들로부터 “폭도들은 21일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38개 무기고를 털어 총 5.403정의 무기를 탈취했다”는 정보를 가공해냈다.
1985년 안기부 분석관의 재래식 실력
그러면 1985년 당시 안기부는 같은 현황자료를 가지고 어떤 정보를 가공해 냈는가? 안기부 분석관은 제9쪽 5~14줄에 걸쳐 아래와 같이 두리뭉실하게 정리했다.
“(난동자들은) 방위산업체인 아세아 자동차공장을 탈취, 군용 및 일반버스 등 200여대를 탈취, 이를 몰고 장성, 화순, 등지를 휩쓸면서 시위선동 및 무기탈취, 난동자들은 화순광엽소 및 광주 소재 한국화약보급소에서 폭약, 뇌관, 도화선을 탈취한데 이어 광주 담양 나주 등 경찰서 파출소 및 예비군 무기고 등에서 무기, 탄약을 탈취하고. 시내 곳곳에서 총격전 및 방화.”
안기부 분석관들이 분석한 내용으로부터는 “광주의 10-20대 식당종업원 구두닦이 양아치 등 개념 없는 하층 노동자들로 구성된 난동자들에게 “21일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38개 무기고를 털어 총 5.403정의 무기를 탈취”한 어마어마한 실력이 있었겠는가?” 에 대한 의혹을 도출해 낼 수 없다.
1995년 민-군 검찰의 재레식 수사 실력
그러면 1995년의 서울지방검찰과 군검찰은 이 원천자료들을 가지고 어떤 정보를 가공해 냈는가? 1995.7.18.에 민-군 검찰이 공동으로 발행한 “5.18관련사건 수사결과” 제100~102쪽에 이에 대한 검찰의 시각이 정리돼 있다. 결론적으로 두루뭉슬 그 자체이며 ”여러 지역에서 다수의 무기가 피탈되었다“는 위 안기부식 나열 그 자체였다. 안기부나 검찰이나 도토리 키재기였던 것이다.
“한편 시위대는 차량을 이용하여 인근 광산, 영광, 함평, 화순, 나주, 영암, 해남, 강진, 완도, 승주, 고창 등지로 진출하여 무기고를 확보, 무장하였는데, 13:00경, 광산 하남 파출소에 시위대 80여명이 차량 3대를 타고 와 칼빈 9정을 탈취하였고, 고속버스 트럭 등 10여대의 차량에 탑승한 광주시위대가 함평에 도착하여 군중 시위를 벌이고, 신광지서에서 총기 1백여정. 실탄 2상자를 확보하였고, 13:35경 화순 소재 4개 파출소에서 총기 460여정과 실탄 1만발을 탈취하였고, 14:00경 나주 남편지서 무기고에서 칼빈 20여정과 실탄 7~8상자를 탈취하고,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와 나주시위대가 합세하여 나주 경찰서에 진입, 군용 레카차로 무기고를 파괴하고 칼빈 5백여정, M1소총 2백여정, 실탄 4만 6천여발을 탈취하였고, 15:35경, 화순광업소에서 칼빈 1,108정, 실탄 17,760발, 화순 동면지서에서 M1 72정, 칼빈 296정, AR 1정, LMG 1정, 실탄 1만4천여발을 탈취하였고, 이날 하루 동안 일신방직, 호남전기, 연초제조창, 영암경찰서, 화순경찰서, 지원동 석산화약고, 한국화약, 강진성전파출소, 등을 급숩하여 칼빈, M1. AR. LMG 등 총기 4천9백여정, 실탄 13만여발, TNT 10여상자, 수류탄 2백7심여발을 탈취하였다”
“시위대는 이들 무기를 가져와 광주공원과 학운동에서 분배한 후 총기사용교육을 실시하였고, 15:00경, 광주공원에서 무기를 분배받은 시위대가 짚차를 타고 시내를 돌면서 상황을 전파하였으며, 17:00경에는 광주공원에서 총기사용교육을 받은 시위대들이 조를 편성하여 정찰, 도청감시, 외곽도로 경계 등의 임무를 부여받고 시내 요소에 비치하기 시작하는 등 이른바 ‘시민군’이라 불리우는 무장시위대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음”
이상 1995년도 민-군 검찰의 수사관들 역시 안기부가 원천자료를 나열만 했듯이 파출소 이름과 탈취된 무기수량을 어지럽게 나열했을 뿐이었다.
1985년의 안기부 분석관이나 1995년의 민-군 검찰의 수사관이나 다 같이 “폭도들은 21일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38개 무기고를 털어 총 5.403정의 무기를 탈취했다”는 산뜻한 정보를 가공해내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1980-81년의 법관들이나 1996-97년의 법관들은 5월 21일의 상황을 북한특수군과 연결시킬 생각조차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