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탈당하는 국가혼과 역사(5) -노근리사건의 진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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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7-02-07 15:25 조회4,50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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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탈당하는 국가혼과 역사(5) -노근리사건의 진실-4
미국파병과 사건 당시 전쟁상황
1950년 6월 25일, 개전 당시 북한군은 10개 보병사단, 1개 전차여단, 18만명의 병력, 전투기 211대, 전차 242대를 보유하고 기습남침을 했다. 개성과 포천이 6월 25일 아침에 함락되고, 26일에는 문산, 동두천, 의정부, 주문진으로 거의 무저항 상태에서 진격했다. 그리고 6월 28일에는 서울을 함락했다.
무초(John J. Muccio) 주한미대사로부터 남침사실을 보고받은 미국정부는 6월 25일 오후 유엔 안비리에 “38선 이남의 남한 영토에 불법침입한 북한이 공격을 중지하고 38선 이북으로 철수해야 한다”는 결의안을 제출하고, 유엔은 이를 결의했다. 하지만 북한은 이를 무시하고 진격을 계속했다. 6월 26일, 한국정부는 장면 주미대사를 통해 미국의 신속하고도 충분한 지원을 요청한다는 대한민국 국회 결의문을 미국 대통령에 전달했다.
미대통령은 6월 25일 주일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첫 명령을 내렸다. 미 제5공군을 이용하여 주한미국인들을 안전하게 일본으로 철수시킬 것과 한국에 항공기 10대를 지원하라는 것이었다. 북한군의 침공이 계속되자 미국 대통령은 유엔안보리에 대한국 무력원조를 회원국에 권고하는 새로운 결의안을 제출하여 이를 통과시켰다. 이어서 투르먼 대통령은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한 공군 및 해군을 사용할 것을 명령했고, 7함대를 대만해협에 파견하여 중국이 대만을 참략할 것에 대비했다.
맥아더 극동군 사령관은 6월 29일, 한국으로 날아와 한강 전선을 직접 시찰한 후 육군부대를 파견하지 않고서는 북한군을 저지할 수 없다며 처음엔 1개 연대를, 곧이어 2개사단 파견을 건의했다. 트루먼의 재가를 얻은 맥아더는 6월 30일,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에게 주일미군 증 규슈에 있는 제24사단을 파병하라고 명령했다.
최초로 파견되는 부대는 스미스 대대, 제21연대 제1대대였고, 그 대대장은 Charles B,Smith 중령, 스미스 대대는 4대의 C-54기에 탑승하고 7월 1일, 08:45에 이타츠케 비행장을 출발했다. 하지만 부산지역에 자욱했던 안개로 인해 10회나 회항하다가 15:00시에 겨우 착륙했다. 이들은 열차에 탑승하여 한국 국민의 환호를 받으면서 7월 2일 08:00시에 대전에 도착했다. 이어서 날아온 52포병대대 A포대(105미리 6문)의 조를 이루어 7월 5일, 오산에서 북한군 제4단을 맞이해 싸웠다.
스미스 대대는 급조된 대대였기에 통상 대대규모의 절반에 불과했지만, 이 대대는 높은 자부심과 사기로 충천해 있던 나머지 북한군이 자기들을 보기만 해도 도망할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들을 가지고 싸우다 그만 혼비백산하고 병력의 절반을 잃은 상태에서 평택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속속 파병된 제24사단의 품에 안겼다. 비록 패했지만 그의 오산 전투로 인해 국군 재편성에 필요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 때 24사단장 딘 소장과 국군총참모장 정일권간에 작전 협조가 이루어졌다. 경부도로를 중심으로 미군은 그 서쪽을, 한군군은 동쪽을 맡기로 한 것이다.
미 제24사단은 대전에 사령부를 차리고, 제34. 21. 19연대를 차례로 투입하여 평택, 천안, 조치원 등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북한군의 진격을 좀 지연시킬 수 있었을 뿐, 북한군 제3,4사단을 이겨낼 수 없었다, 7월 15일, 16일에는 금강의 도하를 허용하였고, 이어서 공주와 대평리를 상실한 후 대전에서의 결전을 결심했다.
바로 이 때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군의 지휘를 위임했다. 7월 14일이었다. 이에 맥아더 사령관은 워커 중장을 주한 미지상군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7월 17일, 워커 중장에게 한국군 지휘를 위임하였다. 그리고 워커 중장은 이승만 대통령의 동의를 얻어 8군사령관의 지격으로 한국군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미 제24사단이 평택, 천안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순간인 7월 6일-12일 사이에 미제25사단이 한국전에 파병되었다. 이 25사단은 안동, 상주, 황간 지역에 있던 한국군과 교대를 했다. 경부도로와 호남국도의 분기점인 대전을 잃으면 호남을 적 수중에 넘겨주는 것이라 판단한 미군은 대전방어에 역량을 집중했다. 하지만 이미 많은 병력을 잃은 24사단으로서는 역부족이었다.
워커 장군은 24사단장 딘 소장을 방문하여 일본에서 추가 투입되는 제1기병사단이 충북 영동지방에 투입될 수 있도록 7월 20일까지 만이라도 버텨달라는 희망사항을 전달했다. 딘 소장은 이를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북한군 제3 및 4사단과 제105탱크사단의 진격을 저지하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제24사단은 후방으로부터 포위당해 사단장 딘 소장이 실종되었다 포로가 되었고, 사단은 참전 이래 병력 50%인 8,000명 정도를 잃었다. 그리고 미제1기병사단은 7월 18일 영일만에 도착했다. 지금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면 어린 미국 병사들에 참으로 미안하고 고맙기 이를 데 없다.
북한군의 전술
북한군 전술은 한마디로 ‘일점양면' 작전이었다. 이는 포병과 기갑으로 도로 주변의 방어선을 돌파한 후 양족에 있는 산간지역에서는 보병들을 집중 전개하여 측방을 돌피한 후 중앙 돌파병력과 연결하여 방어중인 미군부부대를 포위하는 북한 특유의 전술이었다. 북한은 이런 전법을 시위 때에도 응용한다, 적은 수의 시위대가 다수의 경찰을 부분적으로 포위하여 집중 공격하는 현상은 바로 이러한 북한 전법인 것이다. 북한은 1980년대의 386시위대에게 이런 전법을 훈련시켰고, 이는 지금 민노총 시위에 한결 같이 적용되어오고 있다.
미군에게 가장 위협적인 북한 전술은 정규전과 후방게릴라전의 연결작전이었다. 북한의 정찰대원의 능력은 매우 뛰어났다. 이들은 공격이 있기 훨씬 전에 미군 후방으로 침투하여 미군의 배치 상황들을 정확히 파악해 보고했다. 그리고 일부 정찰대원들은 후방의 미군 퇴로를 차단했다. 이들 정찰병들은 흰색의 피난민 옷이나 미군 복장으로 위장한 후 피란민에 섞여 미군 방어진지를 통과하여 미군의 후방을 차단하고 미군진지 좌표를 본대에 알려주었다.
이 정찰대와는 별도로 북한군은 장거리 유격대를 활용하였고, 여기에는 지역 빨치산, 동네 공산주의 동조자들이 적극 참여했다. 매일 남하하는 수만 명의 피란민들은 이들 정찰대와 지역 빨치산들이 숨어서 침투하기 가장 좋은 매체였다, 미군에게 그리고 한국군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는 수만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피란민이었다. 북한군은 이러한 위장 사기 전술에 매우 능숙했지만 미군은 언제나 이에 당해 피난민 노이로제 상태가 되어 있었다. 미군이 무너지는 것은 언제나 정규군과 피란민으로 위장한 후방 게릴라전의 배합작전에 의한 것이었다.
북한군은 수백명의 부녀자, 어린이, 노인들은 전투지역으로 걷게 하여 마치 북한군이 진군하는 것처럼 속이기도 했고, 피난민을 가장하여 남하한 후 갑자기 미군을 쏘아 죽이는 등의 행동을 감행했다. 미군의 탄약과 보급물자를 털어 북한군에 제공하는 약탈부대도 운용했다.
피난민 노이로제가 미국부대 전역에 확산돼 있었다, 7월 24일 이후 미군 전폭기들은 적의 탱크, 트럭, 별력, 차량, 교량 분만 아니라 게일라 병력이 숨어 있다고 판단되는 철도, 터널, 건물, 마을, 도시 들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폭격을 감행했다, 조종사가 의심하는 지역은 공습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이를 당시의 거친 상황으로 보아 정당방위의 범주에 속했다고 생각한다.
게릴라 침투 사례
7월 18일 영일만에 상륙한 미 제1기병사단은 이러한 북한군의 전술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 7월 22일 사단장은 미8군으로부터 북한군의 특이한 잔술과 게릴라 전술에 대해 알려주었지만, 북한군의 전술은 그 이상이었다. 북한군은 주로 민간인들을 이용하거나 스스로 민간인 복장을 하여 미군을 속였다. 미군 후방으로 침투한 북한군 정찰대는 미군의 지휘고와 포병진지를 직접 게릴라전법으로 공격하거나 북한 포로 하여금 공격하게 했다.
정찰대와 미간인은 한 팀이었다. 7월 23일에는 사단 포병단 진지 근방에서 2명의 소년(10, 11세)를 붙잡았는데 이들은 미군부대 위치를 북한군에 알려주는 것이었다. 임신을 가장한 여인이 옷 속에 소형 무전기를 슴기고 있었다. 14세의 소년은 북한군의 길 안내자였다. 이런 갖가지 희한한 사례를 경험한 미제기병사단은 한국에 오자마자 피난민 공포증에 걸리게 되었다, 세계의 그 어느 군대를 이 상황에 대입하더라도 이는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7월 25일, 제1기병사단은 영동에서 목숨 부지하기에 신경이 공두서 있었다. 오전 10:30분, 북한군 침투부대와 게릴라 병력이 하얀 옷을 입고 영동읍 북방과 남방에 위치해 있는 포병부대에 접근해 기관총과 소총 사격을 가했다, 수십명이 희생됐다. 제1기병사단은 영동에서 3일동안 항공사격 및 야포사격의 도움으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했다. 하지만 7월 25일 2개 중대 모두를 실종당했다. 이러한 공포스러운 상황을 맞아 미군은 피란민은 물론 마을 사람들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마음은 그보다 60여년 후인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가졌던 마음과 동일했다.
한미연합 조사의 결론
노근리 사건은 미군이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발생한 사고였다. 미군이 피난민을 통제하고 의심되거나 그글로부터 위협을 느꼈을 때 예방적 차원에서 사격을 가한 것은 인정이 된다. 하지만 이를 놓고 미군이 한국 국민들을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사살하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렇게 한국국민을 사살하려 미군이 한국에 왔다면 미군은 왜 북한군과 그 가혹한 환경에서 싸울 수 있었을 것이며, 한국 민간인 수백명을 학살하기 위해 어떻게 24사단장인 딘 소장을 위시하여 2만여 명의 장병들을 불과 26일 사이에 희생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노근리 피해자들은 사망, 실종, 부상자 수를 영동군청에 248명이라고 신고했지만 이번 한-미 조사단은 그 수를 확정할 수 없었다.
나라를 구해준 미국에 대한 쌍갈래 반응
위에 쓴 나의 글은 내가 자의적으로 쓴 글이 아니라 특별취급으로 분류된 “한미 노근리 사건 조사결과보고서”의 극히 일부를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부분들을 요약-소개한 것이다.
이 요약 글을 보면 미군은 맥아더와 투루먼의 명령에 의해 일변식도 없는 한국인들, 지구상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생면부자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 18-19세의 어린 나이에 와서 공포의 순간수간들을 보내며 목슴을 잃어갔다. 20일간의 전투에서 2민여 명을 잃었다. 만일 그 당시 한국이 미국이었다면 귀한 자식들을 생면부지의 나라를 위해,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희생시켰을까.
이것뿐인가? 142명의 미국 장군들이 아들들을 한국 전쟁터로 보냈다. 이중 35명의 장군 아들들이 전사하고 부상당했다. 밴프리트 2세도 그중 한 명으로 압록강에서 전사했다. 밴프리트 대장의 아들은 미 육사를 졸업했다. 그러나 그는 공군에 다시 입대하여 폭격기 조종사가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에 알리지도 않고 한국전에 참전하여 낯선 압록강 지역에 출격하였다가 순천지역에서 대공포화를 맞았다.미7공군사령관은 그 지역을 수색하였다. 하지만 이를 보고 받은 당시 미8군사령관 밴플리트 대장은 아들이 실종된 지도를 한동안 응시한 후 아들의 수색작전을 멈추라 명령하였다.
6.25전쟁 초기에 가장 먼저 참전한 24사단장 딘 소장이 물을 찾는 부하에게 물을 떠다주기 위해 밤중에 벼랑으로 내려가다가 심한 부상을 당해 결국 포로가 됐다. 86kg의 체중이 2개월 만에 58kg가 되었다. 한국인의 밀고로 그는 포로가 되어 참으로 많은 세월을 고통스럽게 보낸 후 늙은 몸이 되어서야 석방됐다.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클라크 장군도 한국전에 아들을 보냈다. 워커장군은 아들과 함께 한국전에 참전했고, 스스로는 목숨을 잃었다. 이 대한민국에 장군들 중에는 6.25전쟁에 아들을 이렇게 바친 장군이 거의 없다. 이 하나만 생각해도 미국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한국이 어찌 있을 수 있었겠는가?
육사 21기 최승우 장군, 그는 국가가 하지 않은 일, 군이 해야 하는 일을 묵묵히 혼자서 하고 있다. 그는 올해까지 16년 동안 거의 빠짐없이 짐을 많이 지고 미국을 찾아간다. 한군전에 참전했던 전우들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부상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메달과 감사장들을 안고 간다. 그리고 큰 모임을 만들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병원들을 일일이 방문하여 눈물을 흘린다. 이제는 가족들과 함께한다. 참전한 미군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없었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반면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는 작은 문제들을 놓고 미국을 찍어내리기 위해 기획한 AP통신에 적을 두었던 최상훈 기자, 그는 빛나는 언론상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리고 노근리 사람들은 나라를 구해준 미군을 칭송하기는커녕 물에서 건져주니 보따리 내놓으라 떼를 썼다. 대한민국을 수치스럽게 만든 역사의 양아치급 죄인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두 케이스를 놓고 우리는 어느 길이 애국의 길이고 어느 길이 정의의 사도가 걸어야 하는길인가를 따져야 한다.
최상훈은 국제 공간에서 애국심과는 거리가 멀게 사실을 해석하여 정의의 사도가 되었다. 김대중도 노벨상을 받아 국제적인 정의-평화의 사도가 되었다. 하지만 육사 21기 최승우 장군은 오직 미국에 대한 감사한 마음 하나로 16년 째 묵묵히 애국을 하고 있다. 묵묵히 애국하는 최승우 장군에는 누구도 상을 주지 않지만, 한건 잡은 최상훈이라는 기자는 빛나는 퓰리처상을 높이 쳐들고 목슴바쳐 우리나라를 도와준 미국을 인권 유린국가로 몰아갔다. 이제 보니 노벨상도 더럽고 퓰리처 상도 더럽다.
노근리 사건을 왜곡한 업적과 해마다 미국을 찾아가 미군 전우와 스킨십으로 보답하는 장군의 업적은 두고 두고 비교돼야 할 것이다. 그리고 5.18사건을 바로잡은 업적도 최상훈 기자의 업적과 두고 두고 비교돼야 할 것이다. 1948년 제주도민들은 함병선 대령을 존경하고 고마워하면서 한라산에 공덕비를 세웠다. 그래놓고는 지금은 빨갱이들에 물들어 그 공덕비를 없애 버리고는 빨치산 후예들에 부화뇌동 부역하고 있다. 노근리 사람들도 이런 사람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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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2.7.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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