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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들이 최고수준으로 왜곡한 5월21일의 진짜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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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7-01-17 11:15 조회6,8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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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갱이들이 최고수준으로 왜곡한 5월21일의 진짜상황

 

** 5.21일 상횡은 광주사태 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쟁 상황이었고, 광주시는 공식적으로 5.21. 20:00시에 완전 해방구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소스의 상황일지를 대조해가면서 종합 정리한 것입니다. 상황의 정리는 가장 힘든 작업 중 하나입니다. 각자의 시각은 기초 사실들로부터 형성되는 것입니다. 아래 상황자료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의 검찰보고서 내용을 100% 수용하고, 경찰, 치안대, 계엄사, 각 부대의 상황일지를 모두 수용한 것입니다.

 

                                 1980.5.21.(수) 날씨 맑음 

00:00시, 자정부터 5.21일 새벽 4시경까지 3천여 명의 시위대가 대형차량을 앞세우고 11여단 주둔지인 조선대에 몰려와 정문 돌파를 시도했다.  

01:45분, 전교사는 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습격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31사단장에게 광주교도소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발했다. 이에 따라 31사 96연대 13/444명이 02:45분에 광주교도소에 배치했다. 

02:00시, 광주세무소 앞에 시위대 2,000여 명이 광주세무서에 난입하여 방화하고, 무기고를 습격하여 칼빈총 17대를 탈취했다. 이 때 광주시외 전화가 모두 두절됐다. 

03:00시, 도청, 광주역, 광주세무서, 카톨릭센터. 공단입구 등에서 4만여 명이 구호와 전우가를 제창하면서 철야 시위를 했다. 

구호는 이랬다, “전두황 물러가라” “계엄을 해제하라” “시민은 도청 앞에 모이자” 

유언비어는 이랬다.  

“고교생 중심으로 특공대를 조직하여 화염병을 투척, 군장갑차를 피습하고 있다” 

"우리들의 항쟁으로 신총리 이하 전 각료가 굴복 퇴진하였다" 

"최규하 대통령은 곧 하야하게 되었다" 

시위대는 도청건물 3개 동을 불태우고, 차량 12대를 불태웠고, 광주역, KBS, 월산동 사무소를 불태웠다. 군인 사망 2명, 군인부상 5명, 경찰 중상 6명, 경찰경상 7명, 민간인 사망 2명.  

04:00시, 20사단 61연대(82/14,13) 기차에서 송정리에 내려 전교사에 도착했다.  

04:30분,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대책회의를 주재하여 계엄군을 외곽으로 빼내고, 소탕작전은 5.23일 이후 의명 실시하고 군에 자위권을 발동하기로 결심했다.  

05:20분, 역전파출소, KBS가 연소 중에 있었고, 3공수 중사 전광철이 차에 갈려 사망했고, 군인 9명이 중상을 입었다.  

06:00시, 시위대는 노태동, 금남로, 광주교도소, 서부 변전소 등에서 가정을 방문, 합세를 호소했고, 버스25대, 트럭 4대를 탈취했다.  

06:25분, 가스 살포용 헬기 5대가 전교사에 도착했고 08:00시를 기해 전교사 지역에 비상경계령 진도개 하나가 발령됐다.  

08:00시, 어떻게 정보가 새어나갔는지 시위대는 광주 톨게이트에 대거 운집해 있다가 육로로 광주에 출동 중이던 20사단 지휘부를 화염병으로 공격하여 지휘용 찦차 14대와 탑재된 무기를 탈취했다. 사병이 실종됐다가 후에 복귀했고, 2명이 부상을 입었다. 폭도들은 그레이하운드 1대, 트럭 2대를 몰고 송정리로 이동하면서 시민이여 동참하라 마이크로 선동하였고, 카톨릭센터와 한일은행 앞에서 5,000여 명이 버스 1대, 용달차 1대, 군용 지프차 1대를 탈취했다.  

새벽 4시에 상무대에 도착한 61연대는 전교사 참모장의 명령에 따라 광주교육대학으로 이동했지만 돌고개 지역에서 시위대의 저지에 부딪혀 전교사로 회군했다.  

공수대는 시위대 공격이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간 틈을 내서 도로에서 잠시 눈을 붙인 후, 11공수의 61. 62대대는 도청 앞 금남로 앞에, 63대대는 노동청 방면에, 7공수 35대대는 광주천 방면에 배치하여 전남도청을 방어하기 위해 배치를 완료했다. 8시가 되자 도청 앞에는 수만 명의 시위대가 시체 2구가 실린 손수레를 앞세우고 공수부대의 만행을 규탄했다.  

08:30분, 25새 가량의 여자가 광광호텔 앞에서 “전두환의 동생이 호텔에 투숙하고 있으니 우리에게 인계하라. 보내지 않으면 불을 놓겠다”며 소리를 질렀다. 이에 계엄군이 호텔을 차단했다. 도청 앞에서는 민간시체 2구를 가져와 도지사가 인수하라고 주장했고, 제일은행 앞에서는 학생들이 각목, 삽 등 흉기를 들고 버스 2대, 군지프차 2대를 탈취했고, 시체 2구를 리어커에 싣고 다니며 시민들을 흥분시켰다.  

08:50분, 20사단 사령부 및 61연대 114/1,555명 상무대에 도착했다.  

08:58분, 버스 2대, 트럭 1대에 탄 시위대 400여명이 교도소에 접근하였다 돌아갔다. 10:22분, 150여 명의 시위대가 버스 1대, 트럭 3대를 타고 교도소 앞을 2-3회 선회한 후 광주쪽으로 갔다. 11:02분, 시위대 50여명이 장갑차 1대, 트럭 1대, 군용 지프차 1대를 타고 교도소에 접근했다가 돌아갔다. 15:38분, 경찰 기동순찰차 등 20여 대로 교도소에 접근했다가 돌아갔다. 이는 교도소 공격 작전계획을 세우기 위한 사전 정찰행위였다. 11:46분에 31시단 교도소 경계병력에 실탄이 공수됐다.  

09:00시, 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온 시위대 300여 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또 다른 시위대 300여 명이 아시아자동차를 점거하여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대형버스 등 357대를 탈취하여 시내로 몰고 나갔다.  

폭도 김해범(조선법대1년) 및 전옥주(조선대 무용과 중퇴)가 차량에 마이크를 설치하고 시민의 참여를 선동하고 다녔다. 시위대는 10만으로 늘어나 광주 시가지 전역 및 나주 등 인근 지방으로 확산돼 가고 있었다. 이 때 도지사는 헬기를 타고 다니면서 시민에게 자제를 촉구했다. 금성센터 매점에 남입하여 “경상도 출신이니 한번 당해 봐라”며 상가에 방화했다. 주유소도 습격을 당했다, 대창석유, 동아석유, 나주 대중 주유소 등에서 휘발유 23,484리터, 경유 20,701리터를 탈취했다. 

나주 금성파출소, 화성경찰서 습격, 무기고를 탈취했다. 칼빈 소총510정 및 실탄30,600발, LMG 4정 및 실탄 40,00발, M-1소총 255정 및 실탄 16,766발, AR소총 4정 및 실탄 1,440발 , 수류탄 182개를 탈취했다.  

10:00시, 정웅 31사단장은 시위대의 주장이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에 물리적인 수습보다는 정치적인 수습이 강구돼야 할 것이라는 건의를 전교사에 했고,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진종채 2군 사령관에 이를 보고했다.  

이 때, 광주 사건 보도를 통제해오던 계엄사는 오전 시간에 처음으로 사태의 진전 상태를 보도했다. “광주 소요사태는 5월18일 시작됐고,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유언비어들이 유포되어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가세하여 사태가 악화됐다. 21일 7시 현재 군경5명과 민간인 1명이 사망했다. 조속히 평온을 찾도록 대책을 강구하겠다”  

도청 앞에서는 시위대 대표 4명이 7공수 35대대장의 안내로 장형태 도지사를 만났다. 이들은 공수부대 즉각 철수, 연행자 석방, 과인진압 사과, 계염사령관과의 면담 주선 등을 요구했다. 도지사가 최선을 다 하겠다 약속했지만, 시위대를 이를 믿지 않고 연설까지 방해했다. 도지사는 헬기를 타고 “공수부대를 철수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으니 해산하라” 방송을 했지만 시위대는 믿지 않았다.  

전남대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시위대가 장갑차, 트럭, 버스, 소방차 등 대형 차량들을 앞세워, 정문에 4만명, 후문에 1만명이 3공수와 그야말로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공수부대원들에 시위대가 무장했다는 첩보가 퍼지자 13대대 대대장은 중대장들에게 위급한 상황에서만 사용하되 명령에 따라서만 사용하라며 실탄 30발씩 장전돼 있는 탄창 2개씩을 지급했다.  

11:00시, 도청 앞 수만 명의 시위대 앞에는 총을 든 격렬시위자들, 장갑차, 버스. 트럭 등이 공수부대를 향해 압박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11공수 61대대장은 여단본부에 긴급 대책을 강구해달라 SOS를 쳤지만 여단 참모장은 선무활동으로 시위대를 해산하고 도청을 사수하라는 정신 나간 지시만 반복했다. 견디다 못해 63대대장은 지프차에 보관하고 있던 경계용 실탄을 헐어 개인당 10발씩 나누어주면서 위급할 때 명령에 의해서만 사용하라고 지시했다.  

12:00시, 윤흥정은 21일 아침에야 그날 아침 방금 도착한 20사단 61연대와 도청 방어 임무를 교대하도록 지시했다. 61연대가 광주로 진입하려 했지만, 광주-송정 간 도로에는 이미 시위대가 바리케이트를 쌓고 기다리고 있었다. 시위대가 미리 정보를 안 것이다.  

예기치 못한 저항에 부딪친 61연대가 이들 시위대를 뚫고 있는 동안 도청 앞에는 10만 군중이 몰려왔다. 도청 주변 건물들의 옥상에는 기관총들이 설치되어 계엄군을 향해 불을 뿜어냈다. 전남도지사는 헬리콥터로 피신해 나와 계엄 당국과는 아무런 의논도 없이, “게엄군을 12시까지 철수시킬 것이니 시민들은 돌아가라”고 방송을 했다. 이 방송을 들은 안부응 11여단 62대대장이 어찌된 영문이냐고 상부에 확인했지만 윤흥정은 “도청을 계속 지켜라”는 말만 반복했다.  

시위군중이 탑승한 장갑차, 대형트럭 등 수십 대의 차량이 10만 군중 전명으로 나오더니 장갑차 한대가 11여단을 향해 돌진하였다. 병사 1명이 즉석에서 깔려죽었다. 이어서 나머지 장갑차와 대형트럭으로 또 돌진했다. 동료의 무참한 죽음을 지켜본 병사들, 또 다시 그들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 오는 차량에 위협사격을 가했다.  

13:00시, 전남대 정문의 300m 정도가 시위대에 의해 뚫리자 3공수 3개대대가 총 투입되어 시위대를 신안동 굴다리까지 1km 정도 밀어붙였다. 3공수여단은 14:00시 교도소로 철수할 때까지 이들 차량 시위대와 격전을 반복했다. 시위대가 차량을 지그재그 기동으로 돌진시키자 공수부대 장병들은 돌진하는 차량을 향해 발포했다. 화가 난 공수대원들은 극렬 공격자를 점찍어 추격했고, 민가에까지 쫓아가 최루탄을 쏘거나 진압봉으로 가격하고, 체포 연행했다. 시위대로부터 장갑차, 트럭, 5톤 구난차, 경찰 가스차 등 13대를 노획하여 그중 4대는 운전 불가상태라 파괴해 버리고, 나머지는 교도소로 끌고 가 도로를 차단하는 데 활용했다.  

전남대 앞 진압 과정에서 임신 8개월인 주부 최미애(23)가 충상으로 사망했고, 성명불상자 2명이 총상으로 사망했다. 최성환(남, 18), 양일권(남, 19) 신상균(남,15) 등이 총상으로 중상을 입었다.  

시내 폭도는 10만 규모로 늘어나 도청점거를 시도했다. 30,000여 명의 폭도가 시체 2구를 실은 리어카를 앞세우고, 군용 지프차 및 장갑차 등에 분승하여 “오늘 밤은 부자집과 각 기관을 파괴하자”고 선동하면서 공설운동장으로 이동했고, 폭도 200여 명이 차들을 집단으로 몰고 나주, 함평, 목포 등지를 순회하면서 주민참여를 선동했다.  

도청 앞에는 12시부터 11공수와 시위대가 막상막하의 접전을 벌였다. 공수부대는 장답차 2대를 전면에 내세우고 일련 횡대로 진을 치고, 시위대는 장갑차, 트럭, 버스, 택시 등 100여 대의 차량을 전면에 내세워 공수부대를 압박했다. 13시가 되자 시위대가 공수부대 장갑차에 화염병을 던져 장갑차가 화염에 싸이자, 시위대는 그 순간을 이용하여 잽싸게 시위대의 장갑차를 군을 향해 돌진했다. 너무나 순간적이고 잘 짜여진 공격방법에 공수대원들은 지그재그로 돌진하는 장갑차를 피해 이리저리 분산됐다. 이 때 너무나 빠른 돌진 속도를 감당하지 못해 2명의 공수대원이 깔려 1명은 즉사했고, 1명은 중상을 입었다. 

놀란 장갑차 소대장이 장갑차에 거치된 기관총 방아쇠를 건드리는 바람에 공중발포가 됐다. 이 때 도청직원들이 마이크를 가지고 애국가를 부르며 해산을 호소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시위대는 버스와 트럭으로 공수대원들을 향해 지그재그로 마구 돌진했다. 다급해지자 공수대 장교들이 돌진하는 차량을 향해 발포를 하여 버스 운전자가 사망했고, 나머지 차들은 분수대를 돌아 빠져나갔다.  

산개됐던 공수대원들이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대형화분 등으로 비리케이트를 치고, 일부 대원들은 그 뒤에서 사격자세를 취해 시위대에 위협적인 자세를 취했지만, 시위대는 이에 구애받지 않앗다. 시위대가 장갑차를 아주 바른 속도로 몰고 시위대원들을 깔아죽이려 돌진하자 누구라 할 것도 없이 수많은 공수대원들이 장갑차를 향해 발포했고, 장갑차 위에서 흰 띠를 두르고 태극기를 흔들던 청년이 즉사했다. 또 다시 5-6명이 태극기를 들고 구호를 외치며 접근하자 이미 이성을 잃은 공수대원들이 그들을 향해 집중 사격을 가했다.  

이때까지 7공수 35대대는 실탄이 없었다. 그런데 방송국을 경계하다가 전남도청을 거쳐 사단으로 철수하던 96연대 1대대가 가지고 있던 실탄을 넘겨주어서 35대대 장교들도 1인당 10발씩의 실탄을 갖게 됐다.  

화순경찰서 중앙파출소로부터 총기 212정 및 실탄 81,908발, 수류탄 182개를 탈취했다.  

나주경찰서 남편지서로부터 칼빈 64정 및 실탄 504발, LMG 1정 및 실탄 1,508발, AR 1정 및 실탄 350발, M-1 15정 및 실탄 1,500발, 권총 1정 및 실탄 7발, 수류탄 47개 등을 탈취했다.

화순읍내 4개 파출소에서 총기460정 및 실탄 10,000발을 탈취했다.  

나주경찰서 산포지서에서 칼빈31정 및 실탄 5,310발, AR1정 및 실탄 360발, M-1 26정 및 실탄400발을 탈취했다.  

나주경찰소에서 칼빈 94정, 권총 25정, 공기총 151정, 엽총 23정을 탈취했다.  

화순경찰서 동면지서에서 총기370정 및 실탄 23,463발, 수류탄47발, 권총실탄 21발을 탈취했다.  

화순광업소에서 칼빈 66정 및 실탄 3,420발, 제라진 폭약 13상자(,2925kg) 및 도화선 6,000m를 탈취했다.  

화순 서태리역청공장에서 제라진 폭약 22.5kg을 탈취했다.  

화순읍 중앙파출소 방화했다.  

13:10분, 61항공단 수송용 헬기 UH-1H 10대가 전교사에 도착했다.  

14:00시, 전고사는 전남대를 방어하고 있는 3공수에 전남대에서 철수하여 외곽도로를 차단하고 광주교도소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도지사 등 3명만 제외하고 도청직원 전원이 피신했다.  

화순 한천지서를 습격하여 칼빈 27정, BAR 1정, LMG1정을 탈취했다.  

화순 농주지서로부터 총기 6정 탈취했다.  

광산 대촌면 무기고에서 M-1 소총 16정을 탈취했다. 

나주 일신방직, 호남전기, 연초 제조공장 무기고에서 총기 1,700정 및 실탄 4,700발을 탈취했다.  

나주 영강지서에서 칼빈 57정 및 실탄 7,800발, M-1 소총 5정 및 실탄 5,088발을 탈취했다. 

화순읍 무기고에서 총기 40정을 탈취했다.  

나주 삼포지서에서 칼빈 32정 및 실탄 5,310발, LMG 1정 및 실탄 368발, M-1 26정 및 실탄 400발을 탈취했다.  

나주경찰서 무기고에서 LMG 1정 및 실탄 1,500발, 칼빈 301정 및 실탄 19,320발, M-1 25정 및 2,880발, AR 1정 및 실탄 360발, 권총 1정 및 실탄 7발, 수류탄 10개를 탈취했다.  

나주 다시지서에서 탄띠 l6개, 칼빈탄창 290개, AR탄창 9개, 수통5개를 탈취했다. 

화순 역전파출소에서 총기 207정 및 실탄 18.450발을 탈취했다.  

광산 비아지서 에비군 무기고에서 칼빈 154정, M-1 10정, LMG 1정, AR 1정, 권총 1정을 탈취했다.  

15:00시, 시위대가 장갑차를 몰고 도청 광장을 향해 돌진하다가 공수부대 장갑차에서 발포를 하자 후퇴했다. 시위대는 탈취한 무기를 광주공원 및 학운동에서 분배한 후, 총기사용교육을 실시했고, 총기사용법을 규육받은 시위대는 지프차 등을 타고 시내를 돌면서 시위군이 총을 가지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민참여를 호소했다. 남평지서에서 무기를 탈취한 시위대는 충금지하상가 사거리에서 20여 정의 무기를 분배했고, 화순 지역에서 무기를 탈취한 시위대는 학동 지원동 등에서 무기를 분배했다. 무기를 소지한 시위대는 모두 전남도청을 향했다.  

공수부대는 도청 본관 및 신관 옥상, 전남일보, 수협도지부, 상무관 등 인근 건물 옥상에 병력을 배치하여 도청으로 접근하는 시위대를 향해 사격을 가했다.  

15:15분, 우체국 쪽에서 2,000여명의 시위대가 카빈총들을 가지고 도청으로 접근하다가 총격전이 벌어졌다.  

15:35분,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선무활동에 의해 시민과 불순세력을 분리할 것, 광주 외곽 도로망을 차단할 것, 교도소를 끝까지 방어할 것, 지휘를 일원화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다라 전교사 사령관은 31사단장에 작전배속시켰던 2개 공수여단에 대한 지휘권을 환수하고, 16:00부로 대공경계령인 진도개 둘을 발령했다.  

16:00시, 폭도들은 시내에서 무차별 사격을 가하고, 전남대 부속병원 12층 옥상에 KMG 2정을 설치하고 헬기, 도청 및 시가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20사단 61연대장이 11공수여단과 임무를 교대하기 위해 UH-1H 헬기를 타고 도청 상공에서 정찰을 하다가 시위대로부터 쏜 총알 6발이 명중됐고, 광주통합병원 상공에서 선무방송을 하던 헬기에도 6발이 명중됐다. 총알을 맞고 돌아온 61연대장은 전교사에 임무교대가 불가함을 보고했다.  

시위대는 지프차에 수류탄 1상자와 LMG 1정을 설치하고 도청 점거를 시도했고, 국민은행 앞에 다이나마이트 1차량분을 놓고 도청을 폭파하겠다고 위협했다. 칼빈을 휴대한 시위대가 전남의대 5거리에서 도청 쪽으로 사격을 하면서 이동했고, 광주은행 본점에 도착한 트럭이 시위대에 30여 정의 칼빈총을 분배했다.  

호남전기에서 칼빈 180정 및 실탄 900발을 탈취했다.  

영암경찰서에서 칼빈42정, M-1 14정, LMG 3정, BAR 3정, 권총 10정을 탈취했다.  

광주연초제조찬에서 칼빈 101정을 탈취했다.  

전남방직회사에서 칼빈 188정 및 실탄 60발을 탈취했다.  

해남계속지서에서 수류탄 47발을 탈취했다.  

시내에서 민간버스 111대 및 경찰 지프차 1대를 탈취했다.  

난동자들은 탈취한 차량을 이용하여 화순, 나주, 담양, 장성,목포, 영암, 고흥, 관산 등 17개 도시로 진출하여 무기고를 털고 난동을 부리며 시위를 선동했다.  

이들은 복면과 마스크를 착용한 채, 화순광업소를 습격하여 화약 및 TNT를 탈취했고, 광주에 소재한 (주)한국화약 보급소에서 폭약 2,500여 상자와 35만개의 뇌관, 4만여m의 도화선을 탈취했다.  

윤흥정 사령관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으로부터 공수부대를 시 외곽으로 철수하라는 지시와 자위권 발동을 명령받고 7여단 및 11여단의 철수를 지시했다. 이어서 예비군 무기 및 탄약을 보호하고 외곽도로를 완전 차단할 것을 명령했다.  

16:30분, 전남도청상황실이 완전 폐쇄됐고, 3공수여단이 전남대에서 철수, 교도소를 향해 출발했다. 이때까지 연행한 수십 명의 극렬 시위자들을 천막을 씌운 트럭으로 운반하는 도중 광주역, 전남대 등에서 극렬시위자들과 총격전 등을 거치면서 공수부대원들은 매우 흥분하게 되었다. 흥분한 일부 공수부대원들이 그 화풀이를 천막 속에 들어 있는 시위자들에게 가하면서 연행자 수명이 사망했다,  

한편 윤흥정 사령관이 체신부 장관으로 내정되자 종합행정학교 학교장이었던 소준열 장군을 전교사 사령관에 보임시키는 계획에 따라 소준열 장군이 전교사에 도착했다. 취임식은 5.22.10:00시였다.  

16:50분,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도청을 지키던 계엄군에 철수를 명했고, 17:50분에 1,200명의 병력은 겨우 숙영지인 조선대로 철수했다. 이로써 광주시는 시민군에 의해 완전 탈취되었고, 무정부상태가 되었다. 이들을 민주화 인사라 하는 사람들은 해방구라고 말한다.  

17:00시, 총기를 소지한 시위대들은 조를 편성하여 정찰활동, 도청감시, 외곽도로경계 등의 임무를 부여했고, 이로부터 소위 ‘무장시위대’가 본격적으로 시위를 주도하는 국면이 전개됐다. 도청이 완전 점거당했고, 광주 전지역에 행정이 마비됐다. 탈취한 차량으로 전남 전지역을 질주하면서 시민참여를 독려했다. 장갑차 및 9대의 차량으로 총기를 난사하면서 광주 교도소를 습격했다. 조선대학교에 있는 계엄군에 난사하고 탈취한 총기를 시민에게 분배했다.  

나주 반남지서에서 칼빈38정 및 실탄270발을 탈취했다.  

해남 옥천지서에서 M-1 555정, 칼빈 61정, AR 소총 1정, LMG 1정을 탈취했다.  

장성 황동 지서에서 M-1 13정을 탈취했다.  

장성 진원지서에서 칼빈 47정, M-1 1정, LMG 1정, AR 1정을 탈취했다.  

화순광업소 예비군 대대, 광주대한통운, 광주고교, 강진 성진 지서 등 무기고를 급숩하여 수량 미상의 무기를 탈취했다.  

한국낙농(김복용 대표)을 급습하여 매일 우유 900상자, 100만원 상당의 요구르트를 탈취했다.  

삼립식빵에서 식빵 676상자, 열일식품에서 식빵 86상자 및 592개를 탈취했다.  

대청섬유, 농성주유소 등에서 휘발유 6,240리터, 경유 9,046리터를 탈취했다.  

거의 모든 관공서를 공격하여 부수고 불을 질렀다. 이 시각까지 탈취한 무기는 칼빈, M-1, 기관총 등 5,403 대의 화기가 피탈됐고, 소화기 탄약 288,680발, 수류탄 270개가 피탈됐다. 시민군은 779대의 차량을 탈취했고, 이들 779대는 군용차 34, 경찰차 50, 아시아자동차 328, 일반차 367대였다. 이는 사단 규모의 차량 수에 해당한다. TNT 10여 상자, 수류탄 270여 발이었다. 

                                계엄군 외곽으로 철수 명령 하달 

진종채 2군사령관은 “광주외곽봉쇄작전”을 성안했다. 작전 내용은 계엄군을 광주시로부터 외곽지대로 전명 철수시켜 충돌을 막고 사태가 타 지역으로 확신되는 것을 차단하고, 주요시설을 경비하면서, 광주시민에 의해 사태를 수습하도록 유도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작점개념에 따라 진종채 2군사령관은 17시경,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에게 계엄군의 외곽 이동을 명령했고, 윤흥정 사령관은 같은 시각에 이 명령대로 계엄군에게 즉시 외곽으로 철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11공수 3개 대대 및 7공수 35대대는 장갑차를 선도로 전남도청을 출발, 공포를 쏘면서 전남대로 철수한 후, 7공수 33대대를 합쳐 총 5개 대대를 차량제대와 도보제대로 나누어 시 외곽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정부와 계엄사는 사태의 진정을 위하여 계속적으로 선무활동을 전개했다. 5.21일에는 호남출신장교단 62명을 광주로 보내 광주의 지도층 인사들과 대화하여 사태를 수습하도록 했다. 윤흥정 계엄분소장과 호남출신 소준열 장군도 5월20,21,23일 3회에 걸쳐 호소문을 발표했고, 총 117만여 장에 이르는 선무전단을 살포하고 수백 회에 이르는 선무방송을 했다.  

17:15분, 전남도경 상황실이 완전 폐쇄되고 지휘부가 광주공항으로 피란함에 따라 경찰병력도 운동복으로 위장하여 철수했다.  

17:20분, 3공수여단이 광주교도소에 도착하여 광주교도소 및 광주에서 담양으로 빠지는 도로를 차단하기 위한 배치를 시작했다. 3공수 15대대가 31사단 병력과 임무를 교대하고 있을 때, 세위대가 칼빈총을 가지고 고속버스 2대에 분승하여 돌진해오면서 기습시격을 가했다. 이에 공수부대원 1명이 중상을 입었다. 공수단은 시위대로부터 고속버스 2대와 트럭4대를 빼앗았고, 칼빈, M-1 등 4정의 총기를 탈취했다.  

광주교도소에는 간첩 및 좌익수가 170명 있었고, 총 복역수가 2,700여명이었다. 시민군은 복면을 쓰고 APC를 앞세워 5차례의 공격을 시도했고, 여기에서 쌍방간에는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여기에서 쌍방 피해가 가장 많이 발생했으며, 시민군 사망자만도 50여명에 달했다.  

18:50분, 외곽도로 봉쇄 명령에 따라 20사단 61연대는 광주에서 전주로 나가는 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송암동 및 광주톨게이트에 배치됐고, 62연대는 통합병원 입구, 송정리 비행장, 전교사에 배치되었다.  

19;30분, 교도소를 방어하는 3공수 병력과 무장 시위대 사이에 여러 차례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총격전이 벌어진고 있는 와중에 담양에 거주하는 시민 4명이 픽업 차량을 타고 가다가 시위대의 카빈총에 맞아 그중 2명(35,37세)이 사망했다. 이 때 광주 지역에 있는 주유소는 휘발유를 달라는 대로 주었기 때문에 상당수의 민간인들이 드럼통 단위로 휘발유를 집으로 날라갔다. 네 번째 휘발유를 운반하다가 교도소 앞에서 총을 맞아 부상당한 민간인이 훗날 유공자가 되었다는 증언도 있다.  

20:00시, 전남도청은 시민군에 완전 접수되었다. 이날 총격전에서 사망한 사람들에 대한 통계는 이랬다. 성명이 알려진 사람이 34명, 성명 불상자가 여러 명 되었다(5.15관련사건수사결과). 이름이 알려진 30명은 13세부터 27세 사이였고, 총상은 대부분 칼빈에 의한 것이었다.  

21:00시, 육군본부의 1개 연대 추가투입 지시에 따라 20사단 60년대 제2,제3대대 및 포병연대 병력 88/1,514명이 성남비행장을 출발했다.  

22:10분, 효천역 부근에서 광주-목포간 도로를 차단하고 있던 61연대와 6-7대의 차량을 타고 오던 시위대 사이에 교전이 붙었다. 이어서 광주로부터 5-6대의 차량에 분승해 오던 시위대와 또 다른 교전이 붙었다. 이 두 교전에서 시위대 10여명이 죽거나ㅣ 다쳣고, 공수대원 2명이 총상을 입었다.  

21일의 특기사항은 광주시내에 국한돼 있던 소요가 목포, 영암, 나주, 광산, 담양, 장성, 고흥, 해남 등 17개 도시로 확산된 사실이다.  

                                    자위권 발동 대통령 재가 

광주지역을 직접 작전 지휘하고 있는 지휘관은 31시단장 정웅, 전교사 사령관 윤흥정이었다. 당시 2군 사령관은 진종채, 그는 이 두 장군을 총괄 지휘하는 위치에 있었다. 진종채는 계엄군의 거듭된 증파에도 불구하고 사태가 악화되자 잔전참모 김준봉 장군을 대동하고 광주를 직접 방분하여 현지사정을 주사했다.  

오후4시, 그는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면담, 광주사태 상황의 심각성을 설명하고 자위권 발동의 불기피성을 건의했고, 이희성은 즉시 주영복 국방장관에 보고했다.  

16:35분, 주영복장관은 즉시 합참의장, 각군총장을 불러 긴급 대책회의를 소집하여 진종채 사령관의 건의를 승인했고, 이어 이희성은 최규하 대통령에 자위권발동을 승인받았다(육군본부, ‘이희성 육군참모총장 동정일지’) 

19:30분, 자위권 발동에 대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와 국방장관의 승인을 받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광주사태와 관련된 담화문”을 발표하여 광주시민의 자제를 호소하는 한편, “계엄군은 폭력으로 치안을 어지럽히는 행위에 대해 부득이 자위권 조치를 취할 권한을 보유하고 있음을 경고한다” 취지의 내용을 KBS를 통하여 방송했다. 이어서 22일에는 계엄훈령 제11호로 전계엄군에게 자위권발동을 지시했다.  

                          11공수 61대대장 안부웅 중령의 5.21일  

- 5월 21일 밤중 03시경, 선동방송을 하던 시위대 차량이 시위대를 향해 "조선대로 가자"고 선동했습니다. 그리고는 금남로에서 시위대가 차츰 없어져 제가 여단에 무전으로 "지금 시위대가 조선대쪽으로 가는 것 같으니 대비하라"고 보고했습니다. 금남로에서 시위대가 차츰 없어져 소강상태가 계속됐습니다.  

- 08시경 시위대가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금남로에 완전히 꽉 찰 정도로 운집하여 저희 병력 약 10미터 전방까지 진출했습니다. 우리로서는 어떻게 진압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 상황이었는데 시위대도 돌이나 화염병을 던지지는 않고 우리 앞 10미터 전방까지 전진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병력들에게 "눈도 돌리지 말고 서 있으라"고 지시해 병력들은 부동자세로 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위대는 전날 밤과 마찬가지로 돌, 화염병, 쇠파이프 등 흉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 09시경 정도 되니 어제 선동방송을 하던 여자가 시위 군중 사이를 헤치면서 앞으로 나왔습니다. 자세히 보니 리어카를 끌고 앞으로 나왔는데, 나오면서 "죽은 사람이 내 동생인데 계엄군이 죽였다. 살인마 계엄군을 쫓아내야한다"는 취지로 선동을 했습니다. 군중들이 "와와" 소리를 지르며 호응한 뒤, 칼과 도끼 등을 든 사람들이 시위대의 전면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병력 바로 앞에까지 와서 도끼로 부동자세로 서있는 병사들의 철모를 툭툭 치면서 "이 새끼를 이걸로 골을 빠개 버려?", 그리고 가위, 칼 등을 눈앞에 대고 "이 걸로 눈을 쑤셔버려?" 등의 위협을 해 우리 병사들은 완전히 겁에 질려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병력들은 꿈쩍도 않고 있었습니다. 방송을 하던 여자가 대화를 하자고 제의하여 62대대장이 앞으로 나가 여자와 대화를 조금 하고 있으니까 갑자기 군중 속에서 62대대장을 향해 돌이 날아와 62대대장이 대화를 하다 말고 들어와 대화가 중단되었습니다.  

여자가 방송을 통해 "남자가 칼을 뺐으면 무라도 잘라야지"라고 하며 다시 나오라고 했으나 62대대장이 안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63대대장과 35대대장도 우리 지역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63대대장 보고 "당신이 말을 잘 하니까 당신이 나가서 이야기 한 번 해보라"고 하자 "35대대장과 나는 경상도 사투리를 쓰니까 안 된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제가 나가서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 그날 오전에는 시위대가 먼저 돌과 화염병을 던지지 않았습니다. 또 시위대의 숫자가 엄청나 충돌이 있었다가는 저희 병력들이 전부 맞아 죽을 상황이었습니다. 병사들도 상당히 불안해했기 때문에 충돌할 때까지 시간을 지연시키기 위해 대화에 응해야 하겠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대화를 해보니 시위대가 요구하는 내용은 3가지였습니다. "1. 계엄군은 즉각 철수하라, 2.체포해 간 사람들을 즉각 석방하라, 3. 계엄군은 폭력을 쓰지 말라" 

저는 잠시 기다리라 한 뒤, 대대장들과 어떻게 답변할 것인지를 의논했습니다.  

"우리는 전방 지휘관이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것이 군인이기 때문에 도청을 사수하라는 지시를 받은 이상 우리 마음대로 철수할 수 없다. 그렇지만 당신들이 요구했던 사항을 상급부대에 보고하겠다. 둘째, 체포한 사람들은 모두 경찰에 인계했기 때문에 우리가 보호하고 있는 시위대는 없다. 셋째, 우리 계엄군도 국가와 국민을 위한, 국민으로 구성된 군인이다. 우리가 쓸데없이 폭력을 쓰겠느냐. 지금 봐라, 당신들이 폭력을 쓰지 않으니까 우리도 폭력을 쓰지 않고 있지 않느냐"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 그렇게 하는 사이 12시가 되었습니다. 당시에 도지사가 계엄군을 철수시키겠다고 시위대 대표와 약속을 했다고 시위대가 3회에 걸쳐 방송했습니다. 그런데 그 방송을 듣고 여단에 무전으로 문의하니, "철수계획이 없으니 도청을 사수하라. 그리고 계속 선무활동을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12시가 넘어서서 운집한 시위대가 "왜 12시가 되었는데도 물러가지 않느냐"며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단에 다시 한번 확인을 했더니 "지금 계엄회의가 계속되고 있으니 아직 알 수 없다"고 회신이 와서 제가 시위대에게 "지금 계엄회의가 계속 중이라니 조금 더 기다려 보자"고 말했습니다.  

- 그 때 갑자기 시위대가 웅성웅성해져 살펴보니 시위대 뒤편에서 장갑차와 시위대가 가득찬 5톤 군용트럭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차량을 몰고 저희 병력 앞으로 나와 장갑차와 트럭 등을 저희 병력을 향해 횡으로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저희 병력들과 시위대 차량이 마주 보고 있게 된 것이지요.  

- 그 때 61대대와 62대대가 시위대 쪽으로 제일 전면에 나가 있었습니다. 저희 대대에는 장갑차가 배속되지 않아 전면에 병력들이 나아가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앞에 시위대의 장갑차와 군용트럭에 탄 시위대가 보였는데 시위대는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흉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 때보니 총을 가진 시위대가 군데군데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병력의 뒤에는 62대대 뒤에 장갑차가 1대 있었고, 그 장갑차 뒤에 63대대 1개 지역대 병력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위대가 몰고 나온 장갑차는 광주 군대 무기고에서 탈취한 신형장갑차로서 바퀴가 궤도로 되어 있지 않고 고무타이어로 된 것이었습니다.  

- 13시 경에 이르러 시위대가 장갑차와 차량의 시동을 걸고 "부릉부릉" 거리는 등 살벌한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대대병력들에게 방독면을 착용시켰습니다. 그런 뒤 갑자기 장갑차의 빵빵 소리와 함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1개가 날아와 62대대 장갑차 있는 곳에 떨어졌습니다. 우리 장갑차가 화염병을 보고 뒤로 빠졌으며 그와 동시에 시위대 전열에 서 있던 시위대 장갑차와 5톤 트럭이 계엄군 쪽을 향해 돌진해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그 차량을 막을 재간이 없어 도청을 향해 병력들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시위대 차량이 빠른 속도로 저희 병력을 향해 들어왔더라면 많은 병력이 깔려 죽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장갑차 1대만 빠른 속력으로 도망가는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여 계엄군 1명이 깔려 죽었습니다. 그 장갑차는 분수대를 돌아 충장로 쪽으로 갔습니다. 시위대 장갑차가 돌진해 들어옴과 동시에 시위대 쪽에서 총소리가 연발로 났습니다.  

- 시위대 장갑차가 돌진하고 나간 뒤 저의 대대 정보장교인 장두혁 대위로부터 62대대 이창호 대위가 얼굴에 약간 스칠 정도로 총알을 맞아 비틀비틀 하 길래 자기가 부축해 주었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습니다. 그 뒤 도망을 가 분수대에 도착한 후 전부 피곤한 상태였기 때문에 4개 대대병력이 서로 뒤섞인 상태에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시위대도 더 이상 분수대 쪽으로 돌진하지 않았습니다.  

- 그리고는 잠시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뭐야"하고 일어나서 보니까 분수대 옆 충장로 쪽으로 시위대 버스 1대가 저희 병력을 덮쳤습니다. 당시 저희 병력들은 쉬느라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 때 버스가 달려드니까 누군가가 버스를 향해 사격을 한 것입니다. 버스는 사격을 받고 분수대에 부딪힌 뒤 방향을 바꿔 충장로 쪽으로 가다 담을 들이받고 정지했습니다.  

이 때 관광호텔 쪽에 서 있던 시위대 장갑차와 5톤 트럭이 동시에 계엄군을 향해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차를 향해 부대원들이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습니다. 사격을 하니까 시위대 차량이 주춤하더니 다시 뒤로 물러났습니다. 제가 "큰일 났구나" 생각하며 뛰어 다니면서 사격 중지를 외쳤습니다. 사격중지를 외쳐도 동시에 사격중지가 되지 않아 제가 병사들 속을 뛰어 다니며 발길로 걷어차면서 사격중지를 외쳤습니다.  

사격을 중단시킨 뒤 병력을 집합시켜 상무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62대대장은 충장로 방향에 있는 농협 공판장 쪽으로 들어가면서 62대대에 배속된 장갑차 소대장에게 시위대의 장갑차가 들어오면 막으라고 지시한 뒤 장갑차 1대만 남겨 놓은 채 도청 앞에서 주변으로 전부 피신했습니다. 이제 도청 앞 광장에는 계엄군이 거의 없게 된 것입니다.  

- 이 때 사격명령을 내린 적은 절대 없습니다. 순전히 급박한 상황에서 부대원들이 조건반사적인 사격, 그러니까 돌진하는 시위대의 차량에 압사 당할지도 모른다는 심한 공포감으로 인해 실탄을 삽입하여 발사한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합니다. 실탄을 가진 병사들을 사격통제하지 못한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저의 대대뿐만 아니라 다른 대대도 전부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2017.1.17.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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