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은 북 게릴라전, 입증증거 42개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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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11-08 17:32 조회3,67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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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을 북괴가 주도했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42개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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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답변서] 책에는 5.18을 북괴가 주도했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42개 증거를 50-224쪽에 걸쳐 사진들과 함께 정리했다. 그런데도 많은 독자가 42개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고 질문하신다. 그래서 그 42개 증거를 따로 뽑아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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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당시 합참의장이었던 유병현은 2013년 10월 [유병현 회고록]을 냈다. 그 회고록 제453쪽에는 당시 합참의장 유병현이 해군총장에게 강력히 요청하여 5.18직전 전남해안을 경비하던 해군병력을 전북 변산반도 이북으로 이동시켰다는 사실이 기재돼 있다. 이로써 목포를 비롯한 전남 해안이 텅 비어있었기에 대형 선박들이 다닐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군을 간첩이 지휘했다는 의혹은 6.25직전에도 있었고, 김대중 시절과 노무현 시절에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북한 특수군이 어떻게 600명씩이나 광주에 들어올 수 있었겠느냐, 의문을 갖는다. 하지만 이런 의문은 조갑제가 선도하여 확산시켰다. 600명씩이나 왔으면 100% 한국군에 발각되었을 것이고, 600명이 와서 총질을 했으면 전투가 발생했을 텐데 그런 총격전이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600명은 한꺼번에 집단을 이루어 행군해 온 것이 아니라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 당하자마자 10명 내외, 20명 내외의 단위로 위장 침투하여 광주와 전남 근방에 흩어져 양아치 등으로 위장하여 시가지와 건물들을 정찰하고 있었다. 위 조갑제 류의 의문 제기는 군도 모르고 게릴라도 모르는 사람이나 생각할 수 있는 논리 밖의 의문이다.
북특수군은 이런 식으로 소량씩 6개월에 걸쳐 축차적으로 침투했다 하더라도 ‘광주에는 또 다른 수백 명 규모의 민간 신분의 남녀노소들이 질서 있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이들은 어떻게 광주에 올 수 있었는가’에 대한 또 다른 의문이 제기된다. 그 의문이 바로 [유병현 회고록]에 의해 풀렸다. 그가 전남해안을 북괴에 열어 준 것이다. 아래 사진들은 질서 있는 남녀노소들이다. 광주시민들은 이렇게 많이 거리에 나오지도 않았고, 나왔다 해도 질서를 통제할 사람이 없었다.
군번 1번 이형근 대장의 회고록 제55족-57쪽에는 당시의 한국군을 간첩이 지휘했다는 것을 의심케 하는 10대 불가사의가 기록돼 있다. 그 중에는 6.25가 발발하기 불과 2주일 전, 중앙 요직을 포함한 전후방 사단장 및 연대장 급의 대대적인 이동이 단행되어, 지형과 병사에 익숙치 못한 상태에서 전쟁을 맞게 한 사실, 6월 13일부터 6월 20일에 걸쳐 전후방 부대를 대대적으로 이동시킴으로써 장병들로 하여금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한 사실, 6월 11부터 발령됐던 비상 경계령을 6.24일 0시에 해제한 사실, 전쟁 하루 전에 전 장병의 50%를 휴가, 외출, 외박의 형태로 부대를 떠나게 한 사실, 6월 24일, 전군의 중령급 이상을 육군본부 장교 클럽에 초청해 양주와 댄스파티를 열어 고급 장교들로 하여금 6.25일 새벽까지 술에 취하게 한 사실, 국군이 파죽지세로 밀리고 있는데도 국군이 북진하고 있다는 허위 방송을 하여 군과 국민을 혼란에 빠지게 했고, 한강 나루터에 피란 나간 애국자들을 다시 귀가시켜 인민군 죽창에 찔려 죽게 한 사실, 전방에서 총성이 울리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군을 지휘해야 할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는 사실들이 기록돼 있다. 당시 이러한 지휘를 누가 했을까에 대한 분석이 [전두환 리더십] 192-195쪽에 제시돼 있다. 이처럼 전쟁 시에는 반드시 내통자가 존재하는 것이다. 합리적 추론 차원에서 보면 6.25때 적을 이롭게 한 자는 당시 국방차관 장경근(일본 판사출신)이고, 5.18때 적을 이롭게 한 자는 유병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제주 4.3사태 때 제주도로 가서 공산당을 처치하라는 명령을 받은 여수 주둔 17연대는 제주도로 가는 척하다가 10월 19일 반란을 일으켰고 이에 충격을 받은 이승만은 1948년 12월 1일부터 국보법을 시행하여 6.25일 직전까지 4회에 걸쳐 숙군작업을 실시했다. 1948년 9월부터 육군 정보국 내에 특별 수사과를 설치하여 1949년 7월말까지 4,749 명에 대하여 총살, 유기형, 파면 등을 단행하면서 군내의 좌익들을 청소했지만, 6.25가 발발하자 한국군은 간첩이 지휘했다는 흔적들이 매우 많이 나타났다.
폭동에 가담했던 좌익 군인들이 산 속으로 도망했고,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1949년 5월, 2개 대대 규모를 만들어 월북까지 했다. 반란군을 토벌할 임무를 받았던 토벌사령관 송호성은 6.25가 발생하자 서울에서 인민군으로 변신하여 인민군 소장이 되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우군인지 알 수 없는 세상이 바로 대한민국인 것이다.
2022.11.8.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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