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메시지(17)] 회상(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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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02-18 13:15 조회5,81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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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메시지(17)] 회상(운명) 어쩌다 쳐 본 유학시험 1974년, 나는 대위 계급으로는 홍일점처럼 유일하게 합참에 근무했다. 해외정보수집 장교였다. 공문이 하나 날아왔다. 육해공군 해병대 전 군에서 딱 한사람만 선발해 미 해군대학원 경영학과에 유학을 보낸다는 것이었다. 사관학교를 1966년에 졸업한 이후 책을 놓은 지 9년, 자신이 없었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일단 시험부터 치렀다. 그런데 나도 놀란 점수가 나왔다. 100점 만점에 97점이었다. 이는 이전까지의 최고기록 84점을 많이 넘은 점수였다. 인사과 해군소령의 양보 압력 국방부 인사과에 근무하는 해군소령이 나를 두 번씩이나 불러 기회를 해병중령에게 양보하라며 눈을 부라렸다. 응하지 않으면 나를 육군으로 원대 복귀시키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그 해병중령은 82점을 받았다. 마침 국방부 장관보좌관과 총무과장님이 베트남에서부터 나를 예뻐하셔서 그분들에게 일렀다. 그랬더니 그 해군소령이 혼쭐나고 원대 복귀되었다. 위 두 분들은 장군이었다. 울려고 유학 왔나? 미 해군대학원은 쿼터제였다. 방학 없이 1년에 4개 학기 학습을 시켰다. 첫날부터 스파르타 분위기가 풍겼다. 하필이 첫 학기에 심리학이 들어있었다. 교수는 리더십에 대해 한시간 강의를 했다. “민주형 리더가 있고 권위주의형 리더가 있다. 권위주의형 리더는 리드되는 집단의 수준이 아주 높거나, 아주 낮은 경우에 성과를 낼 수 있고, 민주형 리더는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그룹의 수준이 중간일 경우에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요지였다. 그리고는 ‘텀 페이퍼(Term Paper)’를 내라는 것이었다. ‘텀 페이퍼’,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이웃 학생에게 어떻게 하는거냐고 물었다. 도서관에 학술잡지 코너가 있는데 리더십 분야의 저널을 검색해 내 나름의 간단한 논문을 써내라는 것이라 했다. 나는 사서에 책 찾는 요령을 가르쳐달라 부탁했다. 그녀는 부탁받는 것을 귀찮아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즐거워했다. 그리고 2층으로 데려가 심리학 저널코너에 데려다주면서, 그 중 리더십에 대한 제목이 있는 저널만 뽑아, 복사해서 연구하면 된다고 했다. 한동안 뽑아놓은 잡지가 매우 많았다. “이걸 다 복사해서 읽고 짧은 논문을 타자 쳐서 내야한다니!” 엄두가 나지 않아 카펫에 주저앉아 두 다리를 뻗고 한동안 눈물을 훔쳤다. 몇 주 후 근근히 요점을 잡아 20쪽 분량의 paper를 썼다. 도서관 한 코너에는 복사기와 타자기들이 놓여있었다. 모두가 공짜였다. 생전에 타자기를 만져본 적이 없어, 이것저것 만져보았지만 요령부득이었다. 절망상태에 있을 때, 내 모습을 잠시 지켜본 다른 학과의 낯선 장교가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내게 말을 걸었다. 자기 부인이 타자를 잘 치는데 내일 저녁식사에 초대하고 싶으니 그때 paper를 가져오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그야말로 천사였다. 나는 자수정 한 개를 고르고 포도주를 사가지고 장교 집으로 갔다. 융숭한 저녁대접을 받은 후 타자를 시작했다. 그 부인은 해맑고 예의가 매우 깍듯했다. 아무래도 내 영작은 서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그 부인은 이 표현을 이렇게 바꾸면 어떻겠느냐며 일일이 물어서 수정했다. 미국 사람들에 대한 천사의 이미지가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텀페이퍼는 A학점을 받았다. 훗날의 논문 지도교수를 만난 동기 수시로 시험을 치기 때문에 학생들은 도서관에 통상 밤11시까지 있었다. 나는 2시에 자고 7시에 일어나 아침을 굶고 학교로 뛰어가는 생활을 했다. 아침에 시계종이 울리면 나도 모르게 “어구 어구” 소리를 했다. 한번은 5분정도 지각을 한 적도 있었다. 다른 학생들에게 힘든 과목은 수학이었다. 그들은 수학시험을 앞두고 그룹으로 스터디룸에서 의논해가면서 수학문제들을 풀었다. 책에 있는 문제가 30개면 30개 모두를 풀었다. 그런데 나는 30개 문제 중에서 질문의 패턴이 다른 것들만 대표로 뽑아 그것만 풀었다. 스터디룸에서 문제를 풀다가 풀지 못하면 그들은 도서관 여기저기에 나를 수배하러 다녔다. 문제를 풀어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금방 풀어주면 그들은 눈을 크게 떠 보이면서 고개들을 흔들었다. 그들은 나를 천재라 불렀다. 그리고 그게 소문이 되었다. 한번은 세트이론과 확률시험이 있었다. 50점 만점에 내가 50점을 맞았다. 그런데 다른 학생들은 10~30점 사이를 받아 모두 재시험을 쳤다. 바로 이 시험문제를 낸 교수가 훗날 박사과정에서 내 논문 지도교수가 되었다. 이 한 사건으로 인해 그 교수는 길에서 마주칠 때마다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매 분기마다 게시판에는 Dean’s List가 붙었다. 4점 만점에 3.65 이상의 성적을 거둔 학생들의 이름이 게시되는 것이다. 첫학기에 혼이 났던 나는 이후 늘 ‘학장 리스트’에 올랐다. 회계감사 교수는 내 영원한 은인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나는 이웃 응용수학과에서 제공하는 확률과목과 통계학 과목 한 개씩을 등록해 공부했다. 시야가 넓어졌다. 1967년 베트남에 가서 미군과 작전을 협의하면서 처음으로 시야가 넓어졌고, 주월사령부와 육군본부, 합참에 근무하면서 또 시야가 넓어졌다. 그런데 경영학을 공부하고 재무회계, 원가회계, 경제학 등을 공부하면서 그동안 보아온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역시 학문은 인간의 사고력을 키우는 엔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은 경험이 아니라 학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기업감사를 가르치는 젊은 교수가 있었다. David Burns, 그는 경영학도들에게 숙제를 내주었다. 기업이 제출하는 자재와 재공품에 대한 회계자료를 얼마만큼 믿을 수 있는가를 평가하는 과제였다. 1990년대 한국에서 ISO9000이라는 바람이 불었다. 기업이 냉장고 등 복잡한 제품을 생산하는 데 그 제품의 성능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를 예측하는 시스템이다. 한국산 냉장고를 영국 바이어가 10년동안 써보고 살 수는 없는 일이 아니던가. 그래서 고안된 것이 기업 생산시스템의 신뢰성을 평가하는 것이었다. 스위스에 본부를 둔 위원회가 작성한 체크리스트를 기업이 얼마만큼 준수하느냐? 합격된 기업의 제품만 국제시장에 등장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기업이 소유한 인벤토리(자재, 재공품)는 금액으로 환산돼야 한다. 기업의 원가회계 관행으로 보아 기업이 자체 평가한 인벤토리 원가가 얼마인가는 재무제표의 커다란 항목이 된다. 공인회계사는 이 기업의 장부를 얼마나 믿어야할지 판단을 해야 한다. 그런데 미국 공인회계사들은 고객(Client)이 많아 3개월 실적을 가지고 1년간의 재무제표를 평가한다. 나는 통계학과 확률이론을 이용해 교수가 낸 숙제를 풀었다. 그리고 후에 이를 논문으로 확대했다. [A Mathematical Model for Evaluation of inventory control system] 바로 이 Burns 교수가 나에게 이 학교 응용수학 박사과정에 들어가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학교측은 난색을 표했다. 창설 70년 역사에 전례가 없다는 것이었다. 학교 당국이 거부하자 Burns교수는 “발전할 수 있는 학생의 기회를 차단하는 이 학교에 나는 더 이상 머물 생각이 없다”며 초강수를 두었다. 결국 학교위원회가 열렸고, 위원회는 나에게 조건부 수용을 결정했다. 학교가 실력자로 공인된 교수를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위원회는 나에게 우선 응용수학과의 중요한 과목들을 1년간 이수해서 그 성적에 따라 정식 박사과정에 등록시키기로 했다. 그리고 학교는 국방장관에게 나의 유학기간 연장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나는 내심 하늘에 빌었다. 하늘이 이 엄청난 고통을 피해가게 해 주기를 빈 것이다. 그래서 엉거주춤한 마음으로 일단 귀국하여 국방부의 PPBS실에 근무했다. 다시 용광로 속으로 1977년 하늘은 또 나를 용광로 속으로 집어넣었다. 국방부 유학예산이 남았다며 내가 유학을 가야한다고 했다. 주임 교수에 전화를 했더니 “학교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얼른 와라” 살가운 대답을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위장이 많이 약했다. 책상에 앉으면 뒷골이 무겁고 다리 전체가 ‘차라리 잘라냈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로 저렸다. 그리고 자꾸 졸렸다. 이러다가는 큰일 나겠다 싶어 20분 거리에 있는 한인 침술사를 찾아갔다. 오가는데 20분씩, 침을 맞는데 20분, 한시간씩 시간을 낸다는 것은 낙제를 의미했다. 나는 사정했다. 내가 침을 내 몸에 놓을테니 침뭉치와 함께 요령을 가르쳐달라 한 것이다. 30여 대의 실침을 배에 꽂았다. 배가 고슴도치가 됐다. 꾸룩꾸룩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발과 손에도 놓았다. 침을 꽂으면 체력이 소모돼 잠이 왔다. 그래도 정신력 때문인지 20-30분이면 깼다. 침을 빼고 나면 곧장 자고 싶어졌다. 그런데 자면 만사가 끝이다. 미 해군촌(Lamesa)은 모든 가옥이 2층이었다. 1층에는 미국학생이 2층에는 내가 살았다. 2층에서 나무계단을 내려와 비틀거리며 뛰었다. 뛰면 생기가 돌았다. 하루를 거르면 열흘을 거르게 돼있다. 열흘을 거르지 않기 위해 하루도 거르면 안되었다. 뛰는 시간 30-40분이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매일 뛰면서 풀어야 할 문제를 준비했다. 머리에 수학기호들이 칠판에 쓴 것처럼 지나갔다. 상상력이 향상됐다. 나는 새 과목을 공부할때마다 도서관에 가서 그 과목을 다룬 3권 정도의 책을 빌렸다. 반면 다른 학생들은 교수가 정해준 교과서 한권만 가지고 공부했다. 같은 과목을 4명의 학자들이 써 높았기 때문에 접근하는 사고방식과 테크닉이 다 달랐다. 이것을 캐치하는 것은 정말로 희열이 있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이런 희열을 느끼는 시간들이었다. 과목마다 시험을 보면 처음에는 이웃 학생들이 선두에 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선두에 섰다. 중요한 사실은 그들의 뿌리는 얕고, 나의 뿌리는 깊어서 누가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다는 것과 응용능력이 매우 다르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1년이 지났다. 4점 만점에 3.92를 기록했다. 정식 박사과정으로 진입 가파른 지붕 밑에 다락방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나에게 배당됐다. 아침부터 밤 11시까지, 점심과 저녁을 구내에서 때우는 시간 말고는 갇혀있는 생각기계가 되었다. 때로는 벽에 기대 거꾸로 서기도 하고 맨손체조도 했지만 대개는 몰두의 시간들이었다. 주임교수와 의논해서 학과에서 제공하는 과목도 공부했고 교수와 일대일로 공부하는 과목도 공부했다. 1:1공부, Reading Course라는 것, 한국에도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교수가 없는 것이나 같다고 한다. 반면 미국에서의 1:1 리딩코스라는 것은 참으로 힘도 들지만 위험하기도 했다. 교수와 마주앉는 것이 아니라 나란히 앉았다. 교수가 종이 위에 일사천리로 써 내려갔다. 그리고 또 종이를 바꾸어 써내려갔다. 가끔씩 내가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Are you with me?”를 기계처럼 반복했다. 이때 따라가지 못하고 다른 소리를 자주 내면 머리가 둔한 학생으로 낙인찍힌다. 이는 치명적이다. 그렇다고 모르면서 그냥 넘어갈 수도 없었다. 처지가 이러하기에 리딩코스에는 엄청난 예습이 필요했다. 여러 학생들과 함께 강의를 들어도 예습을 해가면 입장하는 교수가 반갑지만 예습이 없으면 입장하는 교수가 염라대왕처럼 느껴진다. 예습을 하면 교수의 말이 다 소화되고, 중점이 어디에 있구나 하는 것이 캐치되지만, 그게 없으면 교수가 써내려가는 것을 베껴 쓰기에 바빴다. 교수는 칠판에 쓰는 로봇이었다. 어떤 때는 말을 하지 않고 쓰다가 나가는 교수도 있다. 수학이란 기호의 언어다. 확률과 통계 그리고 최적화를 구하는 학문은 함께 가야만 모든 문제에 대한 해법을 낼 수 있다. 내가 공부한 것은 문제의 해결사가 되는 공부였던 것이다. 필기시험 이런 시간이 1년 지났다. 3명의 교수가 확률, 통계, 최적화에 대한 문제 한 개씩을 내게 주면서 골방에 가서 8시간동안에 풀어오라 했다. 이 세 개의 문제를 풀지 못하면 나는 그날로 끝이었다. 얼굴을 들고 고국에 갈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외줄타기 인생을 선택한 이유를 나도 알 수 없었다. 피를 말리는 순간순간이 합쳐져 8시간이 되었다. 시간을 지켜 제출했다. 교수들이 채점을 하는 동안 나는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외줄 타는 서커스 인생, 1966년 2월 말에 소위로 임관한 나는 이듬해인 1967년 7월, 베트남으로 갔다. 투이호아 해변지역에 주둔한 28연대, 소위가 가면 죽지 않으면 불구가 된다는 위험지역이었다. 남쪽 닌호아에 자리잡은 사단 보충대에서 깻망아지처럼 생긴 CH47을 타고 다른 소위들과 40분동안 북쪽에 있는 투이호아로 날아갔다. 함께 타고 가는 소위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굳어있었고 눈에는 어두운 공포의 안개가 서려있었다. 저녁 9시에 도착했는데 5-6시간 눈을 붙이고 새벽 4시에 UH-1H라는 헬기를 탔다. 한 대에 5명씩, 헬기가 옆으로 누워 날아갈 때는 밑으로 쏟아져 추락할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헬기의 문이 활짝 열려있어서 더 그랬다. 머나먼 고지로 날아간 헬기는 산 정상 갈대밭 2m 위에 정지했다. 그리고 병사들을 따라 나도 2m 높이에서 뛰어내렸다. 계곡 쪽으로 내려가니 하늘이 전혀 보이지 않는 밀림지대가 펼쳐졌다. 그리고 밑에는 집채만한 바위들이 뒤엉켜 병사들은 바위에서 바위로 건너뛰었다. 밀림에 가려 햇볕이 없는데도 땀이 쏟아져 작업복이 하얀 소금옷이 되었다. 병사들 눈에는 공포감이 역력했다. 갑자기! 선두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모든 장병들이 바위에 납작 엎드렸다. 눈들이 반짝였다. “이 순간을 무를 수만 있다면!” 채점을 기다리는 순간 나는 두 번째로 똑같은 생각을 했다. 피를 말리고 있던 순간 교수가 함박웃음을 띄운 채 들어왔다. “축하합니다!” 그 사회에서 ‘지옥문’으로 통하는 필기시험에 합격했다는 사실은 나와 함께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학생들에게 대단한 부러움이었다. 구두시험 며칠 후 구두시험(Oral Test)장에 끌려갔다. 주임교수가 내게 사전 주의를 주었다. “모르면 깨끗하게 모른다고 승복하라”, “아 그거 알았었는데 금방 생각이 안난다, 이런 말 하지 마라”. 기상학과, 원자력공학과, 순수수학과 등에서 수학으로 생활하는 교수들이 몰려왔다. 이른바 염라대왕들이었다. 한 교수가 “심플렉스 알고리즘이 왜 최적 해를 구하는 데 정당한 방법으로 사용되는가?”하고 물었다. 나는 순수수학과에서 배웠던 Implicit Function Theorem으로부터 Simple Method를 칠판에 유도해 주었다. 교수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어서 확률-통계학 교수가 물었다. “해군장교들의 근무연한에 대한 통계분포를 알기 위해 그 샘플을 현역 중에서 추출할 경우 무슨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가?” 이에 나는 즉시 “교수님은 지금 Length Biased Distribution에 대해 질문하고 계십니다.” 여기까지 말하자 교수들의 눈이 또 커졌다. “당연히 과대평가(Over estimation)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물에 머리카락이 많이 빠져 있습니다. 그 머리카락의 길이에 대한 분포를 알기위해, 막대기를 휘휘 저어 막대기에 걸린 머리카락을 샘플을 정하는 것과, 현역중인 장교 중에서 샘플을 뽑는 것은 같은 성격의 이야기입니다. 막대기에 걸린 머리카락은 상대적으로 길기 때문에 걸린 게 아니겠습니까? 단, 여기에 저는 전경력의 분포와 제대 할 때까지의 후 경력(전생분포, 후생분포)이 통계적으로 같은 분포를 갖는다는 수학정리를 추가로 설명 드리면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들은 교수들은 만족한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런데 나는 한 발 더 나아가 실력발휘를 하고 싶었다. Length Biased Distribution, 이를 증명하는 교과서적 내용은 A4지 반쪽분량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나는 불과 3줄로 증명했다. 더 고급과목인 Renewal Theory를 도입한 것이었다. 이는 교수들에게도 새로운 구경거리였다. 여기저기에서 탄성의 소리가 들렸다. 더 이상 진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눈짓으로 주고받았다. 지도교수가 나에게 자기 사무실에 가서 대기해 달라고 했다. 이번에는 좋은 느낌이 들었다. 약 20분 후, ‘지만원 박사위원회’ 5명의 교수가 차례로 들어오면서 환한 미소를 선사했다. 한사람씩 악수를 하면서 축하의 말을 연발했다. “구두시험이 끝난 후 모든 교수들이 만장일치로 합격을 결정했습니다. 당신은 미 해군대학원 창설 이래 최고의 학생이라는 평가들이 있었습니다. 교수들은 우리 위원회에, 당신의 천재성을 활용해 해군에 도움이 되는 유익한 논문을 쓰도록 지도해달라는 당부를 했습니다.” 필기시험, 구두시험, 논문합격. 이 세가지 관문은 어느것이 더 어렵고 쉽다고 말할 수 없는 같은 무게의 관문이었다. 이 중에 2개의 지옥문을 통과했다는 것은 3분의 2의 성공을 의미했다. 주임교수실 앞에는 나와 함께 박사학위에 도전하는 5명의 장교 학생들이 내가 나올 때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성공했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들은 나를 빈 교실로 데려갔다. 그리고 갑갑해 죽겠다는 듯이 무슨 질문을 받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두 가지 질문을 그대로 소개했다. 그러자 모두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와~난 그런거 대답 못할텐데~” 그래서 어떻게 대답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한 대답 그대로를 말해주었다. 순간, 그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나는 그런거 공부 안했는데~” 이 5명은 미국소령, 이스라엘 소령, 캐나다 소령, 브라질 소령, 스웨덴 소령들이었다. 나만 신삥 중령이었다. 박사논문 무슨 분야인가 구두시험에 왔던 교수들의 주문 그대로, 나의 주임교수는 새로운 장르에 대한 과제를 논문제목으로 주었다. A Mathematical Model for Operational Availability. 장비의 가동도에 대해 정리와 공식과 알고리즘을 만들어보라 했다. 당시 가동도라는 분야는 새로 개척되는 분야로 이렇다 할 이론들이 없었다. 비행기 등 부품들이 고장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시간은 상수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확률의 수치다. 이를 다루는 이론이 신뢰도(Reliability)분야다. 부품이 고장 났을 때 이를 다시 갈아 끼우는 시간 역시 상수가 아니라 불확실하다. 정비사의 숙련도, 부품의 위치, 대기시간 등에 의해 그 정비조직에 잉태한 통계학적 분포를 갖는다. 이를 정비도(Maintainability)라 한다. 즉 이상의 두 가지는 고장 날 시간에 대한 확률과 정비시간에 대한 확률을 다루는 분야다. 이 두 분야에 대한 이론은 많이 개발돼 있었다. 그러면 가동도(Availability)라는 것은 무엇인가? 100대의 전투기가 있다. 갑자기 출동명령이 내려졌을 때 곧바로 뜰 수 있는 비행기 수 역시 확률이다. 어느 기종은 100대 중 평균 80대가 뜰 수 있고, 어떤 기종은 60대가 뜰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가동도 분야다. 이 가동도는 Reliability와 Maintainability를 연결해야만 성립한다. 이렇게 해서 나는 공식 두 개와 수학정리 6개, 그리고 항공모함 출동 시 선박의 창고에 적재시켜야 할 수십만 수리 부속 각각에 대한 최적화된 숫자를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전환할 수 있는 알고리즘을 발명한 것이다. 나는 이제까지 수학공식과 정리와 알고리즘을 발명했다는 결론만 이야기했지, 그것이 대개 어떤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소개한 적이 없었다. 내가 가동도 이론을 개발했기 때문에 나는 1990년, F-16이냐 F/A-18이냐를 놓고 기종 선정을 할 때, “우리는 전투기 댓수를 사는 것이 아니라 체공시간(Time in the air)을 산다”는 단가계산을 해야 한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그래서 F/A-18이 F-16으로 교체되었다. 이 이론을 받아들인 사람은 당시 이종구 국방장관이었다. 떠야할 때 뜨지 못하는 전투기를 비싼 가격에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논문 지도교수와의 일시적 충돌 교과서에 나와 있는 공식이라 해도 나는 늘 내 상상방법에 의해 달리 유도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 논문에서 기존의 한 줄짜리 공식으로는 내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 나름의 공식을 유도했더니 3줄짜리 공식이 되었다. 이 공식의 유도과정을 지도교수에 설명했더니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3줄짜리와 1줄짜리가 어떻게 같은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이 시니컬해지기까지 했다. 나는 우선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차를 몰고 귀가하면서 “교수는 돌머리” 하고 외쳤다. 부딪히지 않고 우회하는 길을 생각해보았다. 갑자기 Uniqueness Theorem of Laplas Transformation 이라는 이론이 떠올랐다. “맞다, 이거다!” 3줄짜리를 라플라스 폼(form)으로 전환하고, 1줄짜리를 라플라스폼으로 전환시켰더니 두 개의 상이 일치했다. 현실세계에 있는 두 개의 서로 달리 보이는 공식을 라플라스라는 거울에 투영시켜보니 두 개의 영상이 하나로 일치된 것이다. 이튿날 나는 지도교수에 달려가 이를 증명해보였다. 교수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내가 이런 접근을 생각해 내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꿈속에서 공식 만들어 나는 석사때 그 학교 수학교수, Dr.Weir(위어)로부터 순수 수학과목 하나를 선택해 공부를 했다. 그는 강의를 할 때 명배우의 제스쳐를 썼다. 유명한 교수이기도 하지만 멋이 있었다. 강의 중 그는 꿈속에서 문제를 풀었다는 말을 했다. 이때 나는 옆 친구를 툭툭 치면서 “저거 구라 아냐?” 말한적이 있다. 그런데 내게도 그런 의심을 받는 일이 발생했다. 자기 전까지 씨름하던 문제를 꿈속에서 풀은 것이다. 벌떡 일어나 정리했더니 그것이 답이 되었다. 이것이 몰두의 경지라고 생각했다. 졸업식 1980년 10월 26일, 난생 처음으로 학자가운을 입고 대강당으로 걸어갔다. 수많은 학생들 사이에 나 혼자 가운을 입었다. 걸어가는데 웬 외국 여성이 내 옷자락을 잡고 슬피 울었다. 알고 보니 캐나다 장교 부인이었다. 그는 가까스로 두 개의 지옥문을 통과했다가 마지막 관문인 논문심사에서 추락했다. 300여 명의 졸업생, 모두 군복 정장을 입었다. 지도교수는 나를 단상에 올려 내가 이룩한 학문적 업적을 발표했다. 그 지역 교포들이 많이 와서 자부심을 느끼며 눈물들을 흘렸다. 길에서 스치는 미국인 가족들도 나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오늘의 졸업식은 너를 위한 세리머니였다” 이 순간을 만들기 위해 나는 위장병과 싸우고 생사가 달린 지옥문을 거쳤다. 고공에서 외줄을 타는 광대처럼, 내 학문의 길도 그렇게 위험했다. 학위와 운명 학위과정에서 얻은 중요한 것은 학위 자체가 아니라 내용이었다. 나는 물건을 발명한 것이 아니라 수학을 발명했다. 수학은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발명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발명한 수학도 귀중한 것이지만 그것을 발명하기 위해 내가 치른 인간승리의 모습은 내가 바라보기에도 아름다웠다. 극기와 몰두와 거침없는 도전이 이룩한 인생 앙상블이었다. 여기에서 내가 느끼는 자존감은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도도함이 되었다. 알피니스트가 정상에 도전하듯이 사람들은 성취감에서 얻는 자존감을 만끽하기 위해 극기와 인내를 반복한다. 하지만 내가 점령한 학문적 목표는 내 스스로 정한 목표가 아니라 운명에 떠밀려서 도전했던 목표였다. 사관학교 신체검사에서 키가 모자라 불합격된 나를 어디선가 나타난 소령이 신발신고 키를 재라 명령해주었다. 몸무게가 부족했을 때 낯선 대령이 나타나 물을 먹여 합격시켜 주었다. 기적이고 운명이었다. 어릴때엔 베트남에서, 미국에서 아슬아슬하게 죽음을 극적으로 면했던 순간들도 있었다. 하루아침에 시험이나 한번 쳐볼까 한 것이 유학으로 연결됐다. 이처럼 내 인생행로는 우연과 기적의 연속이었다. 운명이라는 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이런 나를 이용해 하늘은 그분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실 것이다. 가치(Value), 자아를 실현하는 귀한 인생들에는 가치관이 있다. 슈바이처, 마리아 테레사 등은 자기희생을 최고의 가치로 정하고 하늘의 뜻을 이행하고 살았을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내게 잉태된 가치는 세상을 개선하고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의 총 결산이 바로 [결정적 증거 42개]이다. 이 책은 위대한 발견이었다. 나를 위한 발견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 발견이다. 누구도 관심 갖지 않고 묻힐 뻔했던 진실을 장장 21년에 걸쳐 발견했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고, 그것이 이 나라를 점령국처럼 호령하고 착취하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의 사기극이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 연전에 모 포럼을 이끌고 있던 한양대 명예교수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골방에서 기도를 하는 중에 붉은 바닷물을 가르면서 대한민국호를 두 손으로 들어 올리는 장관을 보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나였다는 말씀을 여러 회원들 앞에서 한 적이 있다. 나는 지금이 그 교수님이 미리 보신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싶다. 일본 가라대의 최고봉이었던 최배달, 그의 어록 하나가 떠오른다. “태어나서 한 가지를 위해 목숨 바치는 사람이 가장 아름답다.” 나는 끝까지, 나의 종교인 ‘아름다운 멋쟁이’이고 싶다. 2023.2.10. 지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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