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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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6-08-18 16:30 조회6,33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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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대통령 이승만(1875)이 살던 시대는 조선왕조였습니다. 왕조에서 민주주의와 개혁이라는 언어를 가지고 개화운동을 하는 것은 극도로 의협심이 있는 선각자나 할 수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형선고를 받은 후 그 험한 원시적 감방에서 장장 7년의 형을 마치고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풀려나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출옥 시기는 1904년, 29세였습니다. 1912년생인 김일성이 태어날 때 그는 37세였습니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은 1904년부터 1945년까지 무려 42년 동안이나 미국에서 살았습니다. 이승만은 하버드 석사에 프린스턴 박사였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역대 대통령들이 프린스턴 출신들이었습니다. 그 학교 출신의 미국 대통령 윌슨이 그의 스승이었습니다. 당시 세계지도자 중에서 이승만의 학력이 가장 화려했습니다. 1919년 9월에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44세의 이승만이 임시정부 대통령이 되었고, 이동휘가 국무총리였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은 반공주의 자였고 이동휘는 지독한 공산주의 자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시달림을 받았습니다.
이동휘는 임시정부에 좌익들을 불러들여 ‘공산주의자 그룹’을 결성했고 이어서 1921년 1월에 여운형, 김두봉 등을 주축으로 하는 ‘고려공산당’을 결성했습니다. 이들은 소련으로부터 40만 루불의 공작금을 받아 임시정부 조직을 소련식 ‘위원회’ 편제로 하자며 이승만을 압박했고, 이승만은 이에 반대했습니다. 이 때 이승만을 압박한 사람들에는 이동휘 말고도 여운형, 안창호 이동녕 등이 있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1925년 3월 다수파를 만들어 가지고 이승만을 탄핵하여 이승만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승만의 나이 50이었습니다.
이승만은 미국 민주주의 생활양식만 몸에 젖은 것이 아니라 애국자의 자세가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프란체스카라는 여인으로부터 존경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1934년에 그들은 제네바에서 처음 만났고, 그해 10월에 뉴욕에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녀의 나이 35세, 이승만의 나이 60세였습니다. 바야흐로 2차 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도 종결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소련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미국은 이승만이 미국에서 펼치는 반공활동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미운 털이 박힌 이승만은 해방을 맞이하고서도 미국무성의 끈질긴 방해로 귀국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와 친분이 있는 맥아더 장군(1880)이 주선해준 수송기를 타고 1945년 10월 16일에야 서울에 올 수 있었습니다. 이때 이승만의 나이는 71세였습니다. 참고로 맥아더가 인천상륙 작전을 지휘했을 때, 맥아더의 나이는 71, 이승만의 나이는 76세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에도 70대는 청춘이었던 것입니다.
스탈린은 2차대전에 참전한 대가로 15개국을 합병했고, 20개국을 위성국가로 만들었으며 일본으로부터는 북방 4개 섬인 쿠릴 열도를 빼앗아 버렸습니다. 이어서 1946년 2월 8일, 북한을 위성국으로 만든 후, 그 다음 날인 2월 9일에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는 타협이 불가능하다”고 공표했습니다. 이처럼 소련이 영토 욕에 사로잡혀 세력을 팽창시키고 있을 때 어이없게도 미국은 한반도 자체가 미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 하에 조선을 포기했고, 이어서 애치슨라인을 발표하면서 주한미군을 철수시켰습니다. 이것이 북한과 소련의 오판을 불러 6.25전쟁이 발발했던 것입니다.
당시 남한인구는 북한의 2배로 많았지만, 1인당 GNP는 북한의 반도 안 되었습니다. 1948년 4월 연석회의 참석 차 북한에 갔던 김구나 김규식 등의 눈에 북한은 선진국처럼 보였고, 남한은 후진국처럼 보였습니다. 전력의 96%, 석탄의 95%가 북한의 소유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김일성에 아부하는 발언들을 했습니다.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이 벌이는 온갖 방해를 받아가면서 북한에 비해 1인당 GNP가 반도 안 되는 경제력을 가지고 먹고 살기 위해 싸웠습니다. 1949년 조병옥 박사가 대통령 특사로 미국을 방문했지만 미국 관리들은 ‘민주주의만 잘하면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다’는 원론만 들려주고 돌려보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71세인 1945년에 한국에 들어와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면서 74세였던 1948년에 대한민국을 건국했고 그 후 12년 동안 문맹률 80%인 국민에게 주권이라는 것을 선물해주었으며 문맹퇴치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말이 유행했습니다.
“남이야 전봇대를 뽑아 이쑤시개를 하든 말든, 남이야 절간 변소에서 낚시질을 하든 말든 웬 상관이야~” 이런 말들이 당시의 민주주의를 상징했습니다. 자유방임이 곧 민주주의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선진국들은 민주주의의 쟁취를 위해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얻은 해방은 하늘(미국)이 준 선물이었고, 우리가 얻은 민주주의도 하늘(미국, 이승만)이 준 선물이었습니다. 우리 민주주의는 선진국들처럼 피를 흘려 쟁취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가치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의 자유를 위해 남의 자유를 방해하는 무책임한 매너들이 아직도 고쳐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사회가 어지러웠습니다. 일반국민들은 연료 및 식량부족에 허덕였고, 일부 부유층들에서는 축첩, 양주, 양담배로 표현되는 사회악이 난무했습니다. 이는 깨끗함과 풍요를 내세우는 공산세력의 선동 대상이 되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더 더러웠지만 그들은 언제나 정의와 아름다운 말과 깨끗함으로 위장하여 백성들을 선동했고, 선동된 군중들을 움직여 부패한 기득권을 공격했습니다. 당시의 사회는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었습니다.
제주 4.3사태 때 제주도로 가서 공산당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은 여수 주둔 14연대는 제주도로 가는 척하다가 10월 19일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이승만은 1948년 12월 1일부터 국보법을 시행하여 6.25일 직전까지 4회에 걸쳐 숙군작업을 실시했습니다. 1948년 9월부터 육군 정보국 내에 특별 수사과를 설치하여 1949년 7월말까지 4,749 명에 대하여 총살, 유기형, 파면 등을 단행하면서 군내의 좌익들을 청소했지만, 6.25가 발발하자 한국군은 간첩이 지휘했다는 흔적들이 매우 많이 나타났습니다.
폭동에 가담했던 좌익 군인들이 산 속으로 도망했고,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1949년 5월, 2개 대대 규모를 만들어 월북까지 했습니다. 반란군을 토벌할 임무를 받았던 토벌사령관 송호성은 6.25가 발생하자 서울에서 인민군으로 변신하여 인민군 소장이 되었습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우군인지 알 수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해가 있었고, 억울한 희생도 많이 생겼습니다. 이러한 희생을 놓고 소련과 북한은 한국정부를 야만집단인 것으로 선전했고, 지금도 좌익들은 이승만을 독재자로 매도합니다. 좌익들은 또 미국과 맥아더를 증오합니다. 이승만, 미국, 맥아더 이 세 존재가 없었다면 한반도는 김일성 체제로 통일됐을 텐데, 이 3개의 존재가 원수라는 것입니다.
맥아더를 위시한 미군정 장군들은 “이승만이 없으면 전쟁을 할 수 없으며, 그를 대체할만한 인물은 없다”고 했습니다. 사실 월남에서 미국은 엄청난 전비를 들이고 수많은 생명을 바치게 했지만 패했습니다, 그 이유는 월남에 이승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승만은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처칠보다 더 훌륭한 인재였습니다. 단지 영국은 잘 알려진 나라이고 한국은 알려지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에 이승만이 빛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의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 세계 국가들 중에서 한국만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공산주의와 싸워온 유일한 나라입니다.” 휴전을 놓고 이승만과 대립했던 로버트손 미국무부 차관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전국민을 분발시켜 공산주의와 싸우도록 만들었습니다. 세계의 그 어느 나라 지도자들에게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승만과 4.19
이승만 대통령은 어수룩한 미국을 움직여가면서 남한사회를 사실상 통제했던 공산주자들을 숙청-청소하고, 이 나라에 3권이 분립되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터전을 닦았습니다. 김구와 김규식의 끈질긴 반대와 태클을 이겨내면서 민주주의 헌법을 기초하고 미국의 도움을 얻어 현대식 국가기관들을 설치하고 행정인력과 과학인력을 양성했습니다.
만일 이승만 대통령이 지금보다 몇 배나 더 혼란했던 당시의 시국을 다부지게 다잡지 못하고 장면 같은 사람처럼 우왕좌왕했더라면 4.19세력은 시위할 공간을 갖기는커녕 김일성 집단에 의해 총 맞아 죽고 아오지탄광으로 끌려가 죽었을 것입니다. 지금의 이른바 ‘4.19혁명세력’은 좌익들이 틀어잡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승만을 독재자이며 친일파이며 미국의 앞잡이며 부정부패의 원흉이며 분단의 원흉이라며 국민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이는 건국자체를 부정하려는 전략에서 나온 반역행위인 것입니다.
이승만은 3.15부정선거를 명령하지도 않았고, 학생들에게 사격을 가하라는 명령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유혈사태가 발생하고서야 비로소 이기붕과 최인규가 무얼 잘못했는지 알았고, 그래서 그는 그 책임을 지고 학생들의 기개를 칭찬하면서 순순히 물러났습니다. 경무대를 나와 이화장으로 갈 때 그는 학생들의 거친 시위 속에서도 차를 타지 않고 걸어 나갔습니다. 민간인으로 하야한 시점에서 관용차를 탈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독재자가 여기 말고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한국이 미친 것입니다.
만일 그가 좌파들이 말하는 대로 독재자였다면 그는 절대로 물러나지 않고 김일성이나 모택동처럼 시위학생들을 대량 살상해 버리고 처형하고 아오지 탄광으로 보냈을 것입니다. 그는 수족들을 잘못 기용했고, 잘못 관리했다는 원망은 들을 수는 있어도 분단의 원흉이고 독재자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4.19단체들은 지금도 자기들이 혁명세력이라며 온갖 거드름을 다 피웁니다. 이들 자칭 혁명세력이라는 사람들 중에서 원래 4.19를 주도한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거의가 4.19와는 무관한 외부 좌파세력들입니다. 시위가 혁명입니까? 시위는 혈기만 있으면 누구나 다 합니다, 그게 무슨 큰 자랑입니까? 이 나라에는 시위보다 더 엄청난 기여를 하고도 말없이 국가의 장래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좌파들이 연연세세 4.19가 독재를 타도한 혁명이라며 우려먹고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젊은 혈기에 시위에 나서서 돌을 던지고 고함을 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전국적으로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4.19 시위대처럼 젊은 혈기와 의협심을 발산했습니까? 그런 시위는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던 해방공간에서 그들과 싸우며 이 나라에 민주주의 시스템을 건설하고 이 나라를 적화통일로부터 지켜내는 일은 4.19세력이 수억만 개가 있어도 해낼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입만 열면 외쳐대는 부정선거는 그 시대의 산물이었습니다. 부정선거는 지금도 만연해 있습니다. 이기붕과 최인규와 정치깡패들이 저지른 일각의 일을 침소봉대하여, ‘김일성 왕조에 나라를 빼앗기지 않고 민주주의 국가 체제를 구축해 준 국부’를 시위대 학생들의 발밑에 깔고 뭉개서야 어찌 이를 국가라 할 수 있겠습니까?
‘4월혁명회’의 정체
4.19를 빙자한 좌파세력 중 하나가 ‘4월혁명회’입니다. 이들은 홈페이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매월 ‘사월혁명회보’를 발간하는데 그 내용은 대한민국을 적대시하는 내용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4.19가 곧 좌파들의 온상인 것입니다.
2011년 4월 19일 80대의 이인수 박사에게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하며 일방적인 몸싸움을 벌인 극히 예의 없는 건달들이 ‘4월혁명회’ 건달들입니다. 2001년부터 8년 동안 상임의장을 한 사람은 '황건'이라는 좌익입니다. 4월혁명회’의 홈페이지는 ‘진보’로 표시돼 있습니다. 그들은 모임이 있을 때마다 ‘민중의례’를 하고, 한미전쟁연습을 반대하고, FTA를 반대하고 적화통일(민족자주통일)을 주창합니다. 민중의례는 대한민국의 순국선열들을 부정하고 대한민국을 반대하여 싸우다 희생된 빨치산 후예들을 기리는 의례입니다.
해방 후의 남한 학생운동 대부분은 북과 연계된 불순한 운동
1977년 평양의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전후 남조선청년학생운동”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습니다. 이 책의 235-270쪽에는 '전후 남조선청년학생들의 주요투쟁일지’가 요약돼있습니다. 이 책에는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부터 1974년까지 20년에 걸쳐 무려 344건의 학생운동이 있다 했고, 매 사건을 눈으로 보듯이 요약돼 있습니다. 북한이 이렇게 자세한 역사기록을 만들었다는 것은 남한 학생운동을 북한이 지휘했고 북한이 그 기록을 정리한 ‘북한의 역사’라는 것을 짐작케 합니다.
특히 이 책의 229쪽 하단-230쪽 상단에는 남조선청년학생들의 투쟁 전략과 전술이 요약돼 있습니다. 우리가 남한 사회에서 산발적으로 보았던 것들이 북한 자료들을 보니까 모두 북한이 만들어준 전략과 전술에 기초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조선 청년학생들은 지난 항쟁을 통하여 위대한수령 김일성 동지의 혁명사상, 주체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남조선의 진보적 청년학생들은 우선 각종 형태의 합법 또는 비합법적 써클들과 연구회들을 수많이 결성하고 수령님의 위대한 주체사상과 혁명이론 그리고 전력 전술을 연구 체득하기위하여 노력하였다. 또한 서울대학교의 선진적 학생들은 진보적인 중학교 교원들과 지식인들을 망라하여 1955년부터 ‘독서회’를 결성하고 위대한수령 김일성동지의 로작과 수령님의 혁명력사를 학습하였으며 공산주의 교양강좌까지 조직하였다.(120쪽)”
한 예를 들어 1960년에 발생한 학생시위 사건은 38개나 됩니다. 1960년에 발생한 학생운동이 4.19만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2월 28일에는 경북고, 대구고 등 1,000여명이 시청광장과 도지사집 앞에서 학원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했다. 3월 5일에는 서울의 고교와 대학들이 민주주의수호를 내걸고 시위했다. 3월 8일에는 대전고등학교를 비롯한 대전의 고교생 1,000여명이 학생에게 자유를 달라며 시위했다. 3월 15일에는 마산에서 25,000여 학생-시민들이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대대적인 시위를 했다. 3월 24일, 부산 고교생 1,000여명이 학원자유화를 외치며 시위했다. 이어서 . . 4월 11일에는 마산에서 35,000여 시민들이 이승만 정권 타도를 외치며 시위했다. 4월 18일, 고대 3만명이 정권타도를 외치며 시위했다. 4월 19일, 서울에서 10만, 부산에서 7만, 광주에서 3만의 시민들이 정권타도 시위를 했다. 4월 20일, 서울의 학생 시민들이 경찰서와 파출소를 파괴하고 군경과 충동했고, 전주, 수원, 이리, 청주 등을 통해 남조선 전체에 확대됐다.”
“4월 21, 22, 23일에는 인천에서 확산, 4월 23일에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4월 25일에는 서울의 1만여 학생들이 중앙청으로 진격하면서 경찰과 육박전을 폈고, 진보적 학생들이 ‘4.19청년학생동맹’을 결성했다. 4월 26일, 서울 50만 청년학생들과 시민들이 경무대를 완전포위하고 경찰기관들을 습격했다. 4월 인민봉기의 절정을 이뤘고, 이승만의 하야 성명이 있었다. 이 이후로도 학생시위는 연말까지 24회나 지속되었다.”
이상이 북한 노동당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1977년에 발간한 ”전후 남조선청년학생운동‘에 수록된 남조선학생운동사에서 뽑은 4.19를 전후하여 발생한 ’남조선청년학생‘의 운동사입니다.
당시 시위대들은 “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런 구호를 외치며 통일을 외쳤다. 귀순한 거물간첩 김용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북한은 4.19 혁명이 실패한 것에 대해 몹시 후회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진단했다. (1) 남한에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정당이 없었고, (2) 명확한 투쟁 강령이 없었고, (3) 노동자-농민의 참가가 없었다. 그래서 1964년 3월 15일, 서울에서 발족된 것이 통혁당(통일혁명당창건준비위원회)이었다. 이 준비위원회는 비밀조직으로는 ‘민족해방전선’을 두고, 합법적 조직으로는 학사주점, 새문화연구회, 청맥회, 동학회, 민족주의연구회 등의 서클을 두었고, 당 기관지로는 혁명전선이라는 지하신문을, 합법적 잡지로는 청맥을 발간하여 반미 사상, 반정부 사상을 고취하고, 민족 및 노동자-농민에 대한 계급의식을 확산시켰다.”
“1964년의 6.3한일회담반대 투쟁, 1965년8월의 한.일협정비준반대-투쟁, 1969년의 험프리 미부통령 및 일본의 佐藤 수상 내한반대-투쟁, 1969년 7월의 3선개헌반대-투쟁을 선동했다. 그러나 이들은 1968년 8월 24일 한국정부에 의해 발각되었다(73명을 구속, 85명을 조사 중이라고 발표). 모든 반정부 불만을 소요와 폭동으로 교묘하게 연결시킨 배후에는 반드시 지하당의 선전-선동과 전문적인 연출세력이 개입돼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민주화’는 1960년대부터 북이 남한의 불만세력을 선동하기 위해 사용한 위장용어였고, 남한의 민주화운동은 북의 지령이었다. 남한에의 민중정부 수립은 김일성의 목표였으며 남한에서 발생한 모든 소요사태의 배후에는 언제나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 한일협정 반대 시위의 배후에도 북이 있었다. 굴욕외교라고 비분강개한 대학생들의 정서를 이용해 뒤에서 불길을 크게 키운 것이 북이었다. 김대중, 김영삼, 문익환, 함석헌, 장준하 들이 그 불길의 중심에 서있었다.”
4.19데모가 순수하지 않았던 이유
1960년 한 해 동안에 발생한 학생 시위사건을 보면 4.19 이전에도 학생데모가 있었고,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경무대를 비워준 이후에도 학생데모는 연속해서 발생했습니다. 그렇다면 4월 전체의 학생데모는 3.15부정선거 때문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3.15부정선거는 순간적이고도 극히 한시적인 구실에 불과했습니다. 1960년에 발생한 38개의 학생데모들은 모두가 북의 지령 하에 연기된 붉은 데모였습니다.
폭력시위에 불을 지르기 위해 좌익들은 늘 시체장사를 합니다. 시체 하나만 생기면 무슨 거짓이라도 참말이 됩니다. 4.19 시위에 불을 지르기 위해 대남공작 간첩들은 무슨 음모를 꾸몄습니까? 역시 시체장사였습니다.
1960년 4월 11일, MBC는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 부위에 박혀 있는 김주열(마산상고)의 시체가 떠올랐다는 방송을 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4.19가 촉발됐습니다. 최루탄이 눈언저리에 직사포처럼 박힐 수는 없습니다. 최루탄은 곡사포처럼 공중으로 쏘아서 최루가스가 분무기처럼 널리 확산되도록 쏘는 것이지 사람의 얼굴을 조준하여 직사포처럼 쏘는 탄이 아닙니다. 그런데 김주열군의 눈퉁이에는 최루탄이 아주 깊이 박혀 바다 속에서 26일 동안(3.15-4.11)이나 파도에 부딪히면서도 빠져 나오지 않았습니다. 26일이면 다른 데로 밀려갔거나 부식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공작의 냄새가 물씬 나는 것입니다.
1980년 4월 17일, 김대중은 서울대 학생회 초청 연설에서 이런 선동을 했습니다, “김상진, 김주열 못지않게 김재규도 충신이었다.” 김상진은 서울농대 학생으로 1975년 유신체제와 긴급조치를 반대한다며 분신자살을 했고, 이로 인해 수그러들던 1970년대의 학생 시위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공산주의자 김대중은 바로 이런 희생자들이 또 다시 등장하여 혁명의 불을 지펴야 한다고 선동했고, 그런 선동이 1980년 5월의 무법천지를 이끌어 냈던 것입니다.
부정선거와 4.19 정체에 대한 신현확의 증언
1999년 2월호 월간조선, 신현확의 육성증언이 소개돼 있습니다. 신총리는 자유당 말기 부흥부장관으로서 3.15부정선거에 관여한 죄목으로 2년 3개월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한 바 있습니다.
“3.15 선거가 부정선거가 됐단 말이야.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내 죄목이 ‘자유당표가 너무 많으니까 국무회의에서 자유당 표를 줄여야한다는 결의를 했다’는 죄목으로 징역을 받았지. 세상에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나!”
“3.15선거 당시 국무위원들이 개표상황을 지켜보고 있는데 부통령후보인 이기붕씨와 장면씨의 표가 92 대 8로 나오자 국무위원들이 최인규 장관을 불러 ‘이건 시중여론과 너무 다른 것 같소’하고 지적했답니다. 그러자 갑자기 개표결과가 70 대 30으로 바뀌었답니다. 이것이 4.19 이후 국무위원들이 부정선거에 개입한 혐의의 증거가 된 거지요”
“전 국무위원이 15년 구형을 받았고 선고는 7년 6개월로 잘랐지. 그중에 중심인물은 무기, 최인규는 나중에 사형이 집행됐고 나머지는 전부 7년 6개월. 이래가지고 있었는데...5.16 혁명 나기 전에 어땠나 하면 내 방에 간첩이 두 명 있었어. 그러면 어떤지 알아? 아홉 명이 앉아 자요. 거기엔 살인범이 있고 쓰리꾼도 있고...전부 같이 넣었어. 그리고 우리 일행은 한 방에 한사람씩 집어넣었어. 두 사람이 있으면 의논한다고.. 말로 형언할 수가 없는 거요.”
“그 감옥 내부는 어땠느냐. 간첩도 같이 있었는데, 서울대학교 졸업생도 한 놈 있었어. 서울대 졸업하고 월북해서 김일성대학 졸업하고 간첩교육을 5년 받고 넘어와서 활동하다가 붙잡혀 들어왔다 이 말이야. 잡힌 것이 아니고 저희 형 아버지가 알고 이놈을 억지로 붙잡아 가지고 자수시켰단 말이야. 자기들이 무사하려고. 똑똑하기 똑똑한 놈이야. 그게 학생조직에 들어가서 어떻게 활동했고 4.19를 어떻게 조직하고, 그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다 하는 거야. 내가 그 얘기를 다 들었지. 이놈은 그 얘기를 나한테 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있는 다른 놈들 교육시키는 거야. 절도, 강도, 살인범 이런 놈들에게 교육을 시키는 거지. 사흘만 지나면 전부 간첩 지지자가 되는 거야.”
“그 안에는 이 체제에 대해 좋다고 찬성하는 놈 한 놈도 없는 거야. 간첩 한 놈만 있으면, 사흘 지나면 간첩이 오야붕 되는 거야. 그래 얘기를 죽 하기에 내가 물었어. ‘네가 넘어왔을 때 처음 어디에 갔느냐?’ ‘서울시내 명동에 갔습니다’ ‘명동에서 어떻게 느꼈느냐?’ 하니 그놈 말이 명동에 가보니, 시골에서 닭을 키우면 새벽에 닭장을 열어준다. 그럼 닭이 와하고 닭장에서 나가는 거와 똑같다는 거야. 무슨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뭐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 닭이 몰려나가는 거하고 똑같지 이게 뭐 사람 사는 사회냐. 이렇게 말하더라고. 내가 북은 어떠냐고 물으니, 평양은 다 목적이 있어서 사람들이 나오고 줄서서 다니고, 목적에 따라 움직이지 닭 떼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니지 않습니다. 이러는 거야.”
“자유가 뭐고 통제가 뭐라는 걸 전혀 모르는 거야. 그 놈이, ‘남한적화가 이제 얼마 안 남았다’ 는 거야. 오래 가야 두 달 남았다. 신문도 안 들어 오고 라디오도 없는 콘크리트방안에 앉아있는데도 정보가 다 들어오는 거야. 온갖 기술 동원해서 통신이 24시간 계속되는 거야. 내가 2년 7개월 살아서 잘 알아. 목침을 벽에다 대고 말하면 전화랑 똑같 해. 옆방에서 말하면 다 들리는 거야. 이런 식으로 모든 게 다 전달이 되었어.”
“사회상을 판단해 보니 정말 간첩들 말하는 것처럼 우리나라 뒤집어지겠구나. 2년3개월 동안 거기 들어앉은 우리가 최대로 걱정한 것이 이 나라가 언제 뒤집어 지나 이거야. 대한민국 망하는 거 아니냐고. 그러다가 5.16이 떡 났을 때 그 안에서 모두 만세를 불렀어. 이제는 적화 안 된다 하고. 이게 진짜요. 아 죄수들 중에서도 우리들 같은 사람들 있지만. 대부분은 저쪽이었다고. 군사혁명을 누가 했는지도 모르고, 그 소식만 듣고 이제 적화를 면했다고 만세를 불렀다니까”
우리는 신념을 가지고 위대한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박사를 지켜야 할 것이다
2016.8.18.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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