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21일 광주 5.18 시민군들은 오전에 아시아자동차를 습격, 장갑차 및 군용 차량 등 200여대 탈취했다. 이때 탈취한 APC 장갑차는 4대로 KM900으로 추측되고 있다. 당시로 보아서는 신형장갑차다. 이런 신형 장갑차를 자유자재로 운전하는 사람이 4명 이상은 있어야 아시아자동차를 출발해 광주 시내를 종횡무진 할 수 있다. 어찌됐건 광주 5.18 당시 장갑차의 활약은 대단했다. 시민군 장갑차가 군인들을 깔아 죽이는 대범함까지 보였으니 운전병(조종수)은 5.18 유공자가 돼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장갑차를 운전한 사람은 광주 5.18이 발생한지 36년이 흘러가고 있지만 누가 운전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아는 사람도 없다. 그렇다고 나타나지도 않는다. 왜 그럴까. 이제 이 수수께끼를 국민의당 38명 국회의원들이 밝혀야 한다. 당시 APC 장갑차 운전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면 누가 역사왜곡을 하고 있는지 꼬인 문제가 쉽게 풀릴 수 있기 때문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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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군들이 장갑차 위에 여러명 올라탄 상태에서도 자연스럽게 동네 골목을 누비고 있는 장면 ⓒ뉴스타운 |
야 3당 대표는 뭐가 왜곡이고, 뭐가 조작인지 알고는 있는가?
지난 22일 오후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등 야3당은 국회 제1소회의실에서 ‘5.18 왜곡 행위 처벌을 위한 법률개정 국민토론회’를 열었다. 토론회 목적이 ‘광주민주화 운동을 왜곡하면 처벌’을 하기위한 것이었다. 이날 토론회에는 김종인, 박지원, 심상정 대표가 참석했다.
토론회 내용은 논할 가치조차 없다. 역사적 사실여부를 놓고 벌이는 토론회라는 것이 찬·반 또는 좌·우 상반된 의견을 주고받는 자리가 돼야 하지만 이날 토론회는 좌 일변도식 토론으로 끝을 맺었다. 심지어 방청석 보수 인사들의 질의에는 욕설과 반말 등으로 깔아뭉개는 식이었다. 토론자, 사회자는 물론 방청인들까지 하나 였다. 솔직히 그들만의 리그였다고 보면 된다.
이날 토론회를 지켜보면서 <뉴스타운>은 그동안 줄기차게 요구해온 5.18 영웅 급 477명의 광수가 누구인지, 또 이들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는지를 기대 했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역시 기우였다. 오로지 특별법 개정안이 하루빨리 국회를 통과해 5.18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뉴스타운>은 지금까지 [제13탄]의 연재 기사를 통해 광주 5.18의 역사를 누가 왜곡하고 조작했는지를 밝혀 놓았다. 단순 주장도 아닌 모두 증거를 통해 정확히 짚어 주었다. 그리고 몇 번에 걸쳐 박지원 대표와 더민주 이개호 의원에게 ‘광주 5.18의 역사를 누가 왜곡하고 변조 했는가’를 공개적으로 물었다. 둘 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겠지만 들여다본다고 해서 반박할 건덕지 또한 없었을 것이다.
이제라도 ‘장갑차 운전병’ 누구인지 밝혀보라
5월 21일 시민군들은 광주세무서 방화로 전소, CBS 방송국 점거 방화 및 차량 탈취에 이어 오전에 아시아자동차를 습격해 장갑차 및 군용 차량 등 200여대를 탈취했다. 이들은 탈취한 차량과 장갑차를 몰고 광주시내로 들어와 광주 도심을 능숙하게 돌아다녔다. 시민군이 몰고 다닌 장갑차는 공수부대원을 깔아 죽이는가 하면, 시내 곳곳에서 발칸포를 거치한 채 위협을 가했다. 이런 행위들은 다양한 기록과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런 광경을 지켜보는 군 복무 장갑차 운전병 출신들은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5.18 옹호론자들은 “충분히 운전할 수 있는 일”이라고 반박한다.
지금도 군에서 정상적인 훈련과정을 거친 군인들도 장갑차 사고를 낼 정도이니 과연 아무나 운전할 수 있는지 이는 5.18 역사가 스스로 밝혀야 할 대목이다.
장갑차 사고는 드러난 것만도 여러 건 있었다. 대표적인 사고가 지난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한 효순·미선양 사망사고다. 이어 2010년 7월 육군 전투장갑차(K21) 1대가 전남장성지역에서 훈련도중 수몰돼 장병 1명이 갇히는 사고, 2015년 4월 육군 모 부대 이등병이 K-21 장갑차에 치여 숨지는 사고가 이어졌다.
올 들어서도 지난 2월 24일 오전 8시20분쯤 경기 파주시 법원읍 갈곡리 도로에서 육군 모 부대 소속 장갑차 2대가 추돌하는 사고 발생했다. 이처럼 훈련을 이수한 군인들도 사고를 당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일반인들의 장갑차 운전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증명하고 있다.
군사전문가들에 따르면 장갑차의 경우 최대 속도는 70km 정도며, 장갑차의 조작실에서는 조작수병 한 명이 운전을 하는데 기본 군사 훈련단에서 6주 교육과 특수학교에서 4주 교육을 받아야 장갑차를 운전할 수 있다고 한다.
상식이지만 일반인들은 절대로 장갑차를 운전할 수가 없다. 기갑부대 출신이라 할지라도 운전이 가능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한 군사 전문가는 “당시 우리나라에는 기갑부대가 완전편재 되지도 않은 상황 이었다”며 “시민군이 탈취한 장갑차는 주로 기동타격대에서 사용하는 경장갑차로 70년대 중반이후 수경사(현 수도방위사령부) 경비단에서 주로 사용하던 장비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군 특성상 장갑차 운전은 기계화부대에 특기병으로 입대해 운전병으로 훈련을 받는 경우다”며 “당시 장갑차 운전여부를 알아 보지도 않고 알아서 장갑차를 끌고 오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지적한다.
더욱이 당시는 지금처럼 1인 가구 자가용 시대가 아니어서 수백 명에 가까운 운전자를 한순간에 모아 바로 운전토록 하는 것도 불가능 했을 것이란 분석이다. 특히 이들 중 신형장갑차를 4대씩이나 몰 수 있는 운전자를 광주에서 즉흥적으로 확보한다는 것 역시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 이었던 박남선씨는 ‘광주시민(光州市民)은 왜 총(銃)을 들었나’에서 운전자가 많지 않았음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박씨는 “군납 방위산업체인 광주 아세아자동차공장에는 대형·소형의 버스와 장갑차를 비롯한 군용트럭 등 여러 종류의 차량들이 완전히 조립이 끝난 채 수백 대 늘어서 있었다. 공장안은 연이은 시위로 가동이 중단된 때문인지 출근한 근로자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함께 간 우리들 중에는 운전기술을 익힌 사람이 7명밖에 되지 않아 우선 버스 7대를 몰고 금남로로 되돌아왔다”고 밝히고 있다.
문제는 이런 장갑차를 몰고 종횡무진 하던 중 장갑차 위에서 사진에 찍힌 사람들 조차 누구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대부분은 군복 또는 경찰복을 입고 무기를 소지하고 있다. 당시 같이 활동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인물들이다.
더욱이 이들의 모습은 본인은 물론 이들을 지휘한 사람이라면 사진과 동영상을 통해서도 금방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그 무수한 시민군들의 증언들 중에서 아직까지도 시민군 장갑차 운전병 증언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를 본 사람도, 알고 있는 사람 역시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 이었던 박남선씨는 알고 있을까?
도대체 시민군 장갑차 운전병들은 누구 였는가. 이 물음을 던지니 박지원, 이개호 의원이 왜곡이라며 <뉴스타운>에 재갈을 물리려 한다. <뉴스타운>은 증언록, 사진, 동영상 등을 분석한 결과 장갑차 운전병, 장갑차 위에서 무기를 들고 있는 시민군, 장갑차 운전병에게 신호를 보내는 시민군들은 서로 알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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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달려오고 있는 장갑차를 향해 수신호를 하고 있는 장면 ⓒ뉴스타운 |
보통의 사람들은 장갑차가 자신에게 다가 오면 피하려고 하는 것이 다반사다. 그러나 동영상에서는 정체불명의 시민군이 장갑차에 어떤 신호를 보내자 장갑차는 그 옆을 지나 간다. 이것은 신호를 하는 사람이 장갑차 운전병을 알고 있거나, 아니면 장갑차 운전병이 신호자를 알고 있음을 의미한다. 둘 중 한명만 나타나도 장갑차 운전병은 누구인지 쉽게 알 수 있다.
바로 <뉴스타운>이 이러한 미심 쩍인 행동들 때문에 시민군 장갑차 운전병의 정체성에 대하여 의문을 품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당시 장갑차 운전병이 나타난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군에서 장갑차를 운전한 정식사수 출신이던지, 아니면 특수교육을 받은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장갑차 운전병 등과 대화 또는 지시를 한 것으로 나타나 있는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 박남선씨가 지만원 박사를 고소하면서도 이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씨는 ‘광주시민(光州市民)은 왜 총(銃)을 들었나’에서 몇 번에 걸쳐 장갑차 동승자들에게 지시하는 증언을 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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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네 골목에서 잠시 쉬고 있는 것 같은 장갑차 ⓒ뉴스타운 |
“한두 재를 넘어 시내로 진입한 우리는 양동시장을 거쳐 유동3거리로 나아갔다. 유동3거리에는 아세아자동차공장에서 가져온 트럭과 APC장갑차 2대 그리고 각지에서 무기와 시민을 싣고온 차량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차에서 뛰어내려 시민들에게 무기와 실탄을 나누어주었다. 무기의 분배를 끝내고 난 나는장갑차위로 뛰어올라가 시민들에게 무기조작법을 간략하게 설명한 뒤 오늘밤 전면전이 벌어질 것 같으니 죽음이 두려운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집으로 돌아갈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계엄군이 우리들의 배후에서 치고 들어올 것을 염려하여 아세아극장 옥상과 극장 아래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바리케이트를 칠 것을 몇 사람에게 부탁하고 장갑차에 올라앉아 무장시민들을 선도, 수창국민학교 앞을 거쳐 도청 쪽으로 금남로를 따라 올라갔다. (중략)무장시민을 양쪽으로 나눈 나는 장갑차를 서서히 몰도록 부탁한 다음 도청정문을 주시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디선지 기관총 사격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나는 장갑차 위에서 내려와 해치를 닫은 다음 장갑차를 정지토록 하였으나 어디에서 총소리가 나는지 정확히 몰라 일단 장갑차를 후진시켜 현대극장 쪽으로 가자고 하였다. 장갑차 조종수가 조종방법을 정확히 모르고 밖의 동정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어 혹시 고립되어 공수부대에게 고스란히 당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어 급히 후진한 다음 달리는 장갑차 안에서 연도의 수많은 시민들은 모습을 보고 안심하였다. 장갑차를 현대극장 앞에 정지시키고 장갑차 위로 광주공원 쪽으로 가라고 손짓했다. (중략) 나는 어는새 무장시민들의 지휘자가 되어 있었다.”
박남선씨의 당시 정황만 두고 보면 장갑차 운전병을 마음대로 지휘하는 것으로 보아 충분히 누구인지 알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그렇다면 5.18 단체들이 박남선씨를 통해 이 장갑차 운전자를 찾아 5.18 유공자로 등록해줘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 이유는 적어도 광주 5.18에서의 장갑차는 대단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장갑차 운전자가 누구의 지시에 따랐는지는 몰라도 공수부대 저지선을 무너 뜨리는가 하면 공수부대원까지 깔아 죽였기에 그렇다.
광주 5.18 관련 검찰 측 자료에 따르면 ‘(5월21일) 13시경 공수부대가 철수하지 않는 데 항의하며 시위대가 화염병을 투척하여 계엄군 장갑차에 불이 붙는 순간 시위대의 장갑차 1대가 갑자기 공수부대 쪽으로 돌진했다. 공수부대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공수부대원들은 장갑차를 피해 좌우로 갈라져 부근 전남도청, 상무관, 수협 도지부 건물 등으로 산개하였다. 미처 피하지 못한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깔려 1명이 사망했다.’
사망자와 관련 월간조선 88년 7월호 <공수부대의 광주사태>제하 기사에는 ‘당시 현장에 있던 11공수여단 소속 통신병 경기만씨 증언에 의하면 시위대 장갑차 돌진으로 사망한 대원은 11공수여단 소속 권용문 상병이라고 한다. 권 상병은 머리가 장갑차 바퀴에 눌려 짓이겨진 채 즉사 했고, 다른 사병은 가볍게 다쳐 곧 일어나 달아났다.’
이날 시민군 장갑차에 깔려 죽은 권용문 상병의 사망은 분명히 억울한 죽음이다. 그는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던 중 아무 이유 없이 돌진해 들어오는 시민군 장갑차에 깔려 죽었다. 그럼에도 현재까지 그는 내란과 폭동의 주범처럼 남아 있다. 1997년 대법원 판결이 전두환 정권을 내란과 폭도의 원흉으로 지목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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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갑차 위에서 실탄을 장착하고 있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뉴스타운 |
이제 국민의당 38명 국회의원들은 5.18 영웅급인 장갑차 운전병을 찾아내, 그를 5.18 유공자로 인정해주어야 한다. 또한 억울하게 장갑차에 깔려죽은 권용문 상병의 죽음도 헛되이 역사에 남겨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국회의원들이 해야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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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타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