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났던 정일권의 애첩 정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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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6-07-29 00:32 조회6,63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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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났던 정일권의 애첩 정인숙
1969년 5월. 나는 월남 근무 22개월을 마치고 귀국하여 육군본부에서 갓 준장으로 승진한 비육사 출신 장군의 전속부관이 됐다. 관리참모부 내의 핵심 부서인 예산회계처장이었다. 장군 부속실에는 4명이 있었다. 보좌관인 중령, 중위인 나, 정상병 그리고 예쁘게 생긴 아가씨가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부속실에 아가씨들이 떼를 지어 놀러왔다. 그런데 날마다 얼굴들이 바뀌었다.
“미스 윤.”
“네?”
“인기가 대단한가 봐요, 친구들이 그렇게 많아요?”
그녀는 대답 대신 책상을 내려다보며 실실 웃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내게 말문을 열었다.
“지중위님, 요즘 우리 사무실에 아가씨들이 왜 자꾸만 오는지 아세요?”
“…….”
“베트콩 구경하러 오는 거래요.”
“베트콩이 누군데? 혹시……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요?”
“어유, 지중위님은 눈치가 빠르시네요.”
“내가 어째서 베트콩이래요?”
“깡마르고, 체구가 작고, 얼굴이 검고, 머리가 짧고, 입술이 푸르스름해서 영락없는 베트콩이라고 소문이 났대요. 장교들이 그랬대요. 월남에 못 가본 아가씨들 그 방에 가면 베트콩 구경할 수 있다구요.”
전속부관이 하는 일은 전화를 받고, 공⋅사를 불문한 모든 심부름을 잘해내는 것이었다. 청량리까지 가서 장군 댁 세금을 납부하는 일도 많이 했다. 사적인 심부름이지만 열심히 하다 보니 사회를 아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장군이 말씀만 내려주시면 알아서 하는 것이 전속부관의 핵심능력이며, 능력이 부친다고 보고하면 무능한 장교가 되는 것이다. 장군의 심부름을 잘하기 위해서는 여러 영관급 장교들의 도움을 받는 요령이 필요했다. 고급 장교들의 능력을 이용해야만 심부름을 잘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이웃 영관장교들로부터 귀여움을 받는 것이 아주 중요했다.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과 장군과의 인간관계에 대한 센스도 필요했다. 장군이 귀찮아하는 전화를 연결하면 그에 대한 짜증은 전속부관이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부속실에 있는 정상병은 기생오라비라고 불릴 만큼 얼굴이 매끄럽게 생겼다. 그는 가끔 장군의 지시내용을 잊기 때문에 장군 방에서 자주 꾸중을 들었다. 나는 그를 단지 경상도 말을 쓰는 병사라고만 생각했다. 9월초, 나는 결혼식을 4일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정상병이 갑자기 휴가를 가겠다고 했다.
“어이, 정상병. 미안한 말이지만 내가 9월 6일에 결혼식 하는 거 알고 있나?”
“예. 압니다.”
“장군을 모시는 일은 너와 나만 할 수 있는데, 네가 휴가를 가면 나는 결혼식을 연기해야 하지 않는가? 어떤가? 청첩장도 발부됐고, 식장도 이미 예약이 돼 있는데.”
“그래도 저는 가야 합니다. 이미 여자 친구들하고 조를 짜놓았습니다.”
나는 입장이 곤란해 중령 보좌관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중령이 화를 내고 언성을 높여 야단을 쳤다.
“야, 임마. 네가 인간이냐? 결혼식장에 가서 심부름은 못해줄 망정 이놈아 그걸 말이라고 해?”
그걸로 끝인 줄 알았다. 그런데 매우 놀랍게도 정상병은 장군이 파티에 나가기 위해 황급히 차에 오르는 순간, 느닷없이 휴가를 다녀오겠다고 보고를 했다.
“오? 그래. 잘 갔다와.”
장군은 나와 보좌관이 그의 휴가를 이미 허락한 것인 줄 알고 건성으로 대답을 한 것이었다. 정상병의 돌출행동에 대해 나는 화가 많이 났다. 2층 사무실로 올라와 정상병을 다그쳤다.
“야, 임마. 너 그따위 버릇, 어디서 배웠어?”
“아까 보시지 않았습니까? 장군님이 허락하셨는데 부관님이 왜 이러십니까?”
“정상병, 한 인간에게 결혼이 얼마나 중요한 대사인 줄 너도 알지?”
이런 설득은 그에겐 아무 소용이 없었다. 누적되는 화를 꾹꾹 참았다. 장군 방에서 소란을 피우는 일만큼은 적극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정상병. 명령이다. 못 간다. 알았어?”
“그게 무슨 명령입니까?”
그는 시니컬하게 웃으면서 모욕감까지 주었다. 오래 참았던 것만큼 감정이 폭발했다. 그 때부터는 내 정신이 아니었다. 몇 대의 주먹이 날아갔다. 그래도 그는 약을 올리려는 듯 피식피식 웃었다. 두 손을 뻗어 내 어깨를 잡고 덤빌 기세까지 보였다. 아마도 체구가 작고 바싹 마른 나를 우습게 본 모양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합기도 실력으로 그를 메어꽂았다. 억- 소리를 내면서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졌다. 그 다음부터는 짐승처럼 패 버렸다. 두드려 팰수록 분노가 더욱 증폭됐다. 재떨이도 날아갔다. 그 기세가 무서웠던지 그가 갑자기 잘못했다며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비볐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그를 죽을 때가지 팼을 것이다. 일단 분노의 세계로 접어들면 이성이 끼어들지 못한다. 분노의 세계에서 과잉 여부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지중위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요란한 소리에 인근 사무실에서 병사들이 몰려왔다.
“지중위님, 그만 하십시오. 저희들이 주의를 주겠습니다.”
그의 팔이 부어올랐다. 병사들과 함께 그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X-레이를 찍었다. 의사가 두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이 정도면 괜찮아. 찜질만 하면 돼”하며 내게 힘을 실어주었다. 다시 사무실로 갔다. 일직 근무를 서던 소령이 갑자기 나를 힐난했다. 평소의 그는 나에게 매우 친절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안면을 바꾸니 혼란스러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소령은 이미 정상병의 어마어마한 배경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 잘못은 장군님한테 평가받을 테니, 소령님은 상황보고만 하십시오. 내 죄를 용서할 권한이 없으면 나를 힐난하지 마십시오.”
이 말 한마디에 소령은 머쓱해 가지고 돌아갔다. 이어서 병사들이 나섰다.
“중위님, 저희들이 찜질해 줄 테니 퇴근하십시오. 탈영 같은 건 없을 겁니다.” 정상병 역시 반성을 하고 있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이튿날이었다. 정상병은 약속을 어기고 탈영했다. 장군이 출근하자마자 나는 지난밤에 있었던 일과 탈영사실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잘했어. 그놈은 혼 좀 나야 해. 불성실한 놈이야. 같은 일을 여러 번 시켰는데도 제대로 할 때가 없었어. 괜찮아.”
그날 오후였다. 장군이 김계원 참모총장 비서실에서 받은 전통(전언통신문)을 한 장 가지고 오셨다.
“야, 지대위. 이걸 좀 읽어봐. 염려는 하지 말고”
나는 1969년 9월 1일에 대위로 임시진급을 했다. 중위를 3년간 달아야 대위가 되었지만 그 때에는 대위의 수가 모자라 중위 1년 반 만에 임시진급을 시켰다. 정일권 국무총리가 김계원 육군참모총장에게 보낸 전통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병사를 무단 구타한 몰지각한 장교가 있는 바, 엄중히 처벌하고 결과 보고할 것” 이 전문은 9월 3일에 내려왔다. 장군이 이 전문에 대한 이야기를 대령급 과장들에게 하셨다. 3~4명의 대령 과장들이 아는 사람들을 동원해 국무총리실로 다리를 놓아가며 구명운동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정면 돌파만이 해결책이었다. 나는 이웃 병사로부터 정상병의 집주소를 얻어냈다. 물어보니 정상병은 내무반에서 ‘상당한 집’의 자손인 것으로 파다하게 알려져 있었다. 퇴근길에 주소 쪽지를 손에 쥐고 찾아가 보니 서교동 2층집이었다. 30세가량의 여인이 꼬리치마를 입고 나와 대문을 열어주었다. 냉랭한 표정이었지만 깔끔하고 예쁘게 생긴 여성이었다. 그녀는 거실 소파에 자리를 권한 후 말문을 열었다.
“외국에 오래 머물렀다가 바로 어제 돌아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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