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팔리는 한국의 위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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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11-10 22:39 조회6,72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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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팔리는 한국의 위인들
역사책 [해방전후사의 인식]
세계사를 공부하고 세계 영웅들의 족적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의 역사관은 국수주의이거나 공산주의다. 2019년 10월, [조선과 일본]이라는 책을 실들린 듯 발행했다. 나는 이 책이 해방 전후사의 바이블이라고 생각한다. 노무현이 유일하게 열심히 읽은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질이 낮은데다 김일성의 지령을 받아서 썼기 때문에 허위 투성이다. 이에 대항한다고 이영훈 등이 공동으로 한편씩 공출해서 이들을 합철해 인쇄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역시 질적인 면에서 그리고 조감도 측면에서 빨갱이 책을 능가하지 못했다.
내가 쓴 [조선과 일본]
나는 [조선과 일본]에서 우리나라 역사책이 선정한 대한민국의 영웅들에 대해 무척 쪽팔려 하고 있다. 김구는 곰보에다 열등의식이 높아 잘난 사람을 골라 시기 질투했고, 천성이 사기꾼에다 살인마에 폭력배이기 때문에 오늘날 빨갱이들이 가장 선망하는 영웅이 될 수 있었다. 그 김구는 일본의 젊은 상인이 돈이 있다는 것을 알고 돌멩이와 몽둥이로 때려 죽인 후 금품을 갈취했다. 윤봉길에게 도시락 폭탄을 주었고, 윤봉길은 시키는 대로 일본 귀족을 향해 폭탄을 던지고 잡혔다. 이런 김구, 이런 윤봉길이 조선의 영웅이고, 대한민국의 애국 영웅이라니 참으로 쪽팔린다. 여기에 더해 윤석열 대통령께서는 같은 종씨라고 윤봉길 기념관에서 출마선언을 했고, 지난 8.15행사 기념사에서 윤봉길을 최고의 영웅으로 치켜올렸다. 나는 한군의 영웅들과 그들의 공적을 [조선과 일본]에 소개했다.
김구(1876~1949):1893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여 1894년 동학군의 선봉장 노릇을 하다가 안중근의 집에서 한동안 식객노릇을 했다. 그는 김자점의 손자다. 김자점은 효종 때 북벌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한 죄로 능지처참이라는 가장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김구의 조부 김자점은 영의정으로 인조반정에 공을 세웠다는 것 하나로 온갖 분탕질을 했다.
김구는 얼굴이 곰보이며 어릴 때에는 자기를 곰보라 놀리는 동네 아이들에게 부엌에서 식칼을 가지고 나와 협박을 가할 정도로 과격했다. 한때 승려노릇도 했을 만큼 그는 떠돌이 인생이었다. 그 후 친일파를 암살하고, 주요공관을 파괴하고, 독립운동을 한다며 지하에서 군자금을 모집했고, 이봉창, 윤봉길을 테러 행위자로 내몰았다. 사사건건 이승만을 모략-질투했고 1948년 4월 19일에는 북조선으로 넘어가 김일성의 북조선 건국에 협조했다. 이승만이 건국을 한 이후에도 건국사실을 부인하며 사익을 추구하다가 안두희로부터 저격을 당해 사망했다.
김구의 특기는 살인이다. 그는 21살 때 죄 없는 일본인 스치다 조스케를돌멩이와 몽둥이로 살해하고 금품을 갈취했다. 56세이던 1932년에는 어린 이봉창과 윤병길에게 폭탄을 주어 살인을 교사했다. 1947년 7월에는 여운형과 송진우가 암살됐는데, 그 암살범이 김구일 것이라는 여론이 팽배했지만 당시 미군정은 증거를 찾지 못했다. 그 5개월 후인 12월에 한국민주당 당수 장덕수까지 암살당하자 미군정은 미온적이던 태도를 바꿔 김구를 직접 재판정에 세웠다. 이 재판에서 김구는 용케도 무죄로 나왔지만 그가 이끌던 한독당은 치명상을 입었다.
한독당 당수 조소앙은 정계를 은퇴했고 김구의 최측근인 김석황, 조상항, 신일준, 손정수, 김중목, 최중하, 박광옥, 배희범 등 8명에겐 교수형이, 조엽과 박정덕에겐 10년형이 언도됐다. 김구 옆에 있다가는 제 명에 못 간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박정희도 전두환도 역사를 몰라 김구 신화를 만들어주었고, 그 처사가 오늘날까지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좌익들로 하여금 김구 신화를 높이 받들며 똘똘 뭉치게 했고, 무방비 상태에 있는 대다수 국민들로 하여금 김구를 민족 최고의 영웅이라고 믿게 했다.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좌익이 설치한 붉은 무대 위로 올라가 춤을 추게 했고, 오늘날 모든 국민 위에 빨갱이들이 군림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역사공부는 이래서 중요한 것이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그를 영웅으로 존경하고 있지만, 크게 두 가지 점에 대해서는 매우 아쉽게 생각한다.
하는 김구를 위인으로 선정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국에 와서 임종을 맞고 싶어 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야박하게 박대한 사실이다. 그는 애국자였지만, 청년시절에 공산당에 가입하였기 때문에 이승만을 미워하고 이승만의 정적인 김구를 추켜 올린 듯하다. 지금의 윤석열과 비슷한 측면이 있어 보이는 것이다.
이봉창(1900~1932): 용산의 문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가게 점원을 거쳐 용산역에서 역무원과 운전 수습생으로 일하다가 일본에 건너가 오사카에서 일본인의 양자가 되었고,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일본식 이름도 얻었다. 일본을 좋아하고 일본어도 유창하게 잘 하는 등 일본인이 되고자 노력했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승진이 안 되어 일본에 대한 반감을 가졌다고 한다. 결국 그는 김구를 찾아갔고, 폭탄 두 개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1932년 1월 8일, 도쿄 교외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히로히토 천황을 겨냥하여 수류탄 1개를 던졌다. 일본 고관대작 두 명이 부상하였으나 히로히토는 온전했다. 도쿄대법원은 1932년 9월 30일 오전 9시 사형을 선고한 후, 동년 10월 10일에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처형했다. 32세의 미혼이었다.
윤봉길(1908~1932):중국 상하이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채소 장사를 하다가 23세의 나이로 1931년 겨울 김구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몸을 바치고 싶다고 호소했다. 그리고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전승기념 행사에 도시락폭탄을 투척했다. 일본군 간부 여러 명이 죽고 다쳤다. 이로 인해 그는 1932년 5월 28일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32년 12월 18일 일본 가나자와 육군 구금소로 이감되어 그 다음날 총살형으로 처형됐다. 그의 나이 25세였다.
유관순(1902~1920): 1918년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1일 고등과 1학년에 진학했다. 아버지 윤중권은 홍호학교를 세울 정도의 지방유지였다. 2월 28일에는 전교생이 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했다. 이화학당 학생인 신특실, 노예달 등은 파고다공원에서 벌어진 3·1 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하였고, 당시 고등과 1학년인 유관순은 서명학, 김복순, 김희자 등과 함께 ‘5인의 결사대’를 결성하여 남대문으로 향하는 시위행렬에 합류했다. 신특실, 노예달 등은 검거되었고, 교사 김독실 등은 투옥되었지만 일경에 잡혔던 유관순은 곧바로 석방됐다. 학생들의 시위가 극심해지자 일제는 3월 10일 전국적으로 휴교령을 내렸고, 학교로 갈 수 없게 된 유관순은 13일 기차를 타고 고향인 천안으로 갔다.
고향에 돌아온 유관순은 사촌언니 등 연상자들의 지시에 따라 태극기를 만들었다. 1919년 4월 1일, 조인원, 유중권, 등과 함께 천안 병천 시장에서 만세시위 즉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19명이 사망했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한다. 유관순은 시위대의 전면에 있다가 체포되어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받고,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원(고등법원)으로 넘겨져 6월 30일 3년형을 언도받았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의 결혼기념 특사령으로 유관순의 형기도 1년 6개월로 단축되었으나, 딱 부러지게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1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위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들이 없어 여러 가지 설들이 존재한다. 어느 정도라도 부풀려졌을 위 기록을 보더라도 18세의 유관순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특별히 독보적으로 부각돼야 할 이유가 보이지 않는다.
당신의 역사 지식은 다 가짜
좌익들은 일본과 이승만, 박정희와 전두환 등을 모략하기 위해 늘 영웅을 만들어 냈다. 김구는 이승만을 격하시키기 위해 만들어 낸 영웅이고, 장준하와 전태일은 박정희를, 윤상원은 전두환을, 유관순은 일본을 격하시키기 위해 만들어 낸 초라한 영웅들이었다. 이상에서 살폈듯이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중 일본의 위인들과 조선의 위인들 사이에는 모든 면에서 현격한 격차가 확인된다. 일본이 선정한 일본의 위인들은 인류사상 엄청난 금자탑을 세웠지만, 한국이 정한 위인들은 “개념 없는 젊은 혈기”로 살인마 김구의 종이 되었던 애송이들이었다. 이것이 나의 역사관이다.
이씨조선, 이씨조선 하고 영화도 만들고 드라마도 만들지만 이 무든 노력들은 장삿속이거나 북괴의 앞잡이 노릇 하는 짓이었다. 이씨조선은 지금의 북괴처럼 10%의 당원(양반)과 90%의 노예로 구성돼 있었다. 이성계를 시조로 하는 이씨 성을 가진 27명의 왕들이 518년 동안 권세를 누렸지만 이들이 일본에게 내준 조선땅의 모습은 무엇이었나? 한양이 온통 똥밭이고 초가집이고, 우물에는 똥오줌이 스며들어 악취가 진동하고 전염병이 창궐했다. 그런데 일본이 조선을 맡아 경영한 10년 동안 서울은 어떠했는가? 넓은 도로구획과 고층건물 그리고 전국에는 유치원, 초중등학교가 2층 건물, 3층건물로 들어섰다. 관공서 빌딩이, 기차역 역사가 예술품처럼 들어섰다,.
1945년의 결산결과 일본이 36년 동안 한국 땅에 건설한 사회간접자본, 대기업, 유동자산은 모두 23억 달러였고, 조선왕들이 518년 동안 유지해온 자산은 겨우 땅뿐이었고 그 가치는 불과 4억 달러였다. 80:20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이나라의 대기업들은 거의가 다 일본이 물려준 기업들이다.
조선글을 말살한 사람은 연산군이었고, 조선어 시험을 보게 하여 합격된 조선인들에는 수당을 지급했을 정도로 조선어를 보급시킨 존재는 일본 총독이었다. 1923년 동아일보에는 일본 총독이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했다는 기사가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지식은 정확히 180도 왜곡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을 180도 뒤집으면 역사의 진실이 나온다. 누가 뒤집었는가? 해방 직후부터 한국역사 문서를 장악한 공산주의자들이 뒤집었다. 역사 안다고 으스대지 말라, 그대가 잘난 체 하고 말하는 역사는 모두가 다 북에 의해 세뇌된 것이다. 창피한 줄 알아야 할 것이다.
2022.11.10.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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