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략의 극치’ '전남도청 앞 발포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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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6-05-23 17:44 조회5,16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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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략의 극치’ '전남도청 앞 발포사건'
5월 21일 오후 1시 경에 발생한 도청 앞 사건은 반란자들이 사기극을 꾸며내고, 국민을 기만하는 데 악용된 가장 좋은 소재였다. ‘도청 앞 사건’은 영화 ‘화려한 휴가’(2007 개봉)가 ‘환각제를 독주에 타마시고 벌였다는 공수부대의 만행’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표현한 클라이맥스였으며, 북한 김일성이 직접 황석영과 윤이상을 데려다 제작한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1991년 개봉)가 가장 드라마틱하게 부각시켰을 만큼 남북한 빨갱이들이 공동으로 노리는 모략의 소재였다.
1990년대 민주화와 주사파와 운동권이라는 레떼르(라벨)가 붙은 사람들이라면 환장한 한국의 거의 모든 매체들이 북한 노동당 출판사들이 내놓은 대남공작 역사책들(‘광주의 분노’,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이 내놓은 모략 내용들을 앞 다투어 사회에 전파했다.
이 매체들이 이런 행동을 한 이유는 1985년 황석영이 쓴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일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이라는 책이 북한의 위 책들을 그대로 옮겨놓았기 때문이다. 남북한 반란자들이 공수부대의 만행을 가장 극적으로 묘사한 무대가 도청 앞 광장이었고, 그런 빨갱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도청 앞 광장은 그야말로 환각제를 마시고 짐승처럼 날뛰는 공수부대원들이 벌인 “살육의 현장” 이었다.
지금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영화와 언론매체들이 전해준 모략의 내용들은 5.18의 진실인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아래의 수사기록을 보면 남북한 반란자들이 얼마나 진실을 왜곡하고 과장 확대하여 소설을 썼는지 금방 드러날 것이다. 아래 내용은 전두환 등 이른바 ‘신군부’를 영창에 집어넣는데 결정적인 근거로 사용된 1995년 당시의 검찰 수사기록이다.
5월 21일, 광주일원에서 발생한 민간 사망자는 61명이다. 이 중에서 28명은 도청과는 거리가 먼 다른 곳들에서 사망했고, 33명만이 도청 앞에서 사망했다. 그런데 도청 앞 사망자 33명 중 20명은 칼에 찔리고 몽둥이에 맞아 사망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당시 도청 앞 상황은 계엄군과 시민이 수십 미터의 거리를 두고 대치해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공수대에 맞아 죽고 찔려죽는 일이 발생할 수 없었다. 그러면 이들 20명은 누가 죽였는가? 여기에 더해 13명이 총상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총상 13명 중 9명이 카빈총에 의해 사망했고, 4명은 총기불상으로 기록돼 있다. 한마디로 5월 21일에 칼에 찔리고 몽둥이로 맞고 총에 의해 사망한 61명 모두가 계엄군과는 무관한 사망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청 앞에서 계엄군은 사격을 하지 않았는가? 사격을 했다. 그러나 연속적으로 돌진하는 장갑차에 대해서만 집중 사격을 했다.
반란자측은 5월 21일, 13:30분경에 도청 앞에서 군에 의한 집단발포가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정당방위로 무기를 탈취하여 계엄군을 향해 발포했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아시아자동차에 모인 북한 특수군 600명(고정간첩+남파군인)이 무기고를 털러 출발한 시점이 바로 5월 21일 아침 9시였다. 그리고 수사기록을 보면 도청 앞 발포는 5월 19일 첫 번째 발포로부터 9번째 발생했던 자위용 발포였다.
그 이전에는 반란자들이 대형 버스를 몰고 집결해 있는 공수부대를 향해 전속력에다 지그재그로 돌진해 오는 순간 죽음을 눈앞에 둔 지휘관들이 발포를 했고, 소수의 공수부대가 수만의 폭도들에 포위돼 있는 순간, 도주로를 확보하기 위해 쏜 공포였다. 이 과정에서 시민군도 1회의 발포를 했다. 5월 21일 이전에 이미 시위대에는 26정의 카빈과 7정 이상의 M-16이 있었다.
남북한 반란자들이 가장 공을 들여 모력한 도청 앞 사건은 이 글 앞에 추풍낙엽으로 전락할 것이다.
2016.5.23.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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