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동과 진실화해위와 윤석열(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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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12-17 18:01 조회5,18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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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동과 진실화해위와 윤석열(6)
유신에 대한 김광동의 표현
“1972년 전개된 10월 유신은 당시 우리 민족과 대한민국이 맞이한 국가 생존의 위기에 대한 대응이자 도전이고, 그 대응과 도전에 위대한 승리의 시작이었다. 10월 유신은 우리 근현대사의 위대한 전환이자 성공의 기반이었다”
“5·16 한국군사혁명은 부패와 빈곤 시달리는 많은 후진국 국민들의 길잡이요 모범이 됐고, 실제 박정희 시대 이후 20년의 역사에서 그대로 입증된다”
“대한민국의 늦어진 근대화, 공산주의와의 싸움 속에서 자유민주혁명과 근대산업혁명 이뤄서 그 연장선상에서 계승적이고 발전되어 나가는 것인데, 오히려 1987년을 만든 세력들이 민주화세력이라고 주장하면서 1948년(이승만)과 1961년(박정희)을 독재라고 얘기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그 주장을 음으로 양으로 받아들인 결과다. 대한민국 역사가 계승되지 않고 단절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빨갱이들의 주장
“1기 진실화해위(2005~2010년)가 조사한 사건 가운데 보도연맹 학살 사건, 부마 민주항쟁, 인혁당 사건 등 상당수가 이승만·박정희 정권 때 자행된 사건들이다. 2020년 출범한 2기 진실화해위에서도 박정희 정권 때 발생한 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은 이어졌다. 1960년대 초 ‘사회 정화 정책’의 하나로 정부가 서산 간척지 일대 고아와 부랑인 등 1700여 명을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불법 체포한 뒤 강제 수용한 ‘서산개척단 사건’이 대표적이다.”
“1960년대 초 당시 박정희 정부가 사회정화정책의 목적으로 충남 서산지역에 개척단을 설립해 전국의 고아, 부랑인 등 무의무탁자 약 1700명을 경찰과 군인 등에 의해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체포, 단속해 집단 이송 및 강제 수용한 사건이다. 수용자들에 대한 감금과 폭행, 강제노역, 강제결혼 등 중대한 인권침해가 발생했다”
유신이 없었다면 한강 기적도 없어
1966년에는 포항제철 건설에 착수했다. 그리고 포항제철은 1973년 7월 3일부터 연간 103만톤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967년에는 과기처(과학기술처)를 설치하여 대한민국의 진로를 과학입국의 길로 안내케 했다. 얼마나 박정희가 과학을 중요시했던지 국무회의를 하다가도 과기처 장관이나 KIST 소장이 대통령에 전화를 하면 대통령이 뛰어나와 전화를 받아주었다.
1968년 2월1일에는 경부고속도로를 착공하여 1970년에 준공시켰다. 1970년에는 3,000명 규모의 ADD(국방과학연구소)를 설치했다. 그리고 박정희는 청와대에 박격포, M16소총, 군용전화기를 마련해 놓고 국방과학연구소장(심흥택)을 불러 “임자, 이와 똑같은 장비를 생산하시오”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명령은 각고의 노력 끝에 이행됐다. 1971년에는 석사와 박사를 양성하기 위한 한국과학원(오늘의 KAIST)을 설치했다.
그리고 1972년 8.3조치를 통해 당시 도산 직전으로 몰렸던 대기업들을 구해주었다. 대기업이 쓰고 있던 사채를 동결시킨 것이다. 오늘의 시장경제 시대에는 있을 수 없는 조치였다만 당시에는 모두가 박수를 쳤다. 원체 국민들이 못 살다 보니 은행에는 저축된 돈이 없었고 그래서 기업들은 암시장의 사채들을 썼다. 날이 갈수록 기업의 빚이 쌓였다. 박정희는 이 사채가 고관대작들이 부정해서 모은 돈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사채를 일체 갚지 말라 명령한 것이다.
화려무쌍한 유신
그리고 다른 한편 박정희는 지하자금을 지상으로 끌어내기 위해 지하자금으로 기업을 창업하면 문제 삼지 않겠다고 했다. 이로 인해 지하자금이 지상으로 올라와 오늘의 재벌 계열사들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이 때 김영삼, 김대중 같이 배운 게 없고 사색이 없는 정치 모리배, 뚝건달들이 사사건건 발을 걸며 국민을 선동했다. 미련한 국민들은 이들의 말에 솔깃하여 경제건설로 달려가는 진로를 차단하려 했다. 갈 길은 바쁜데 국민들에 일일이 설명할 시간이 없는 박정희는 거머리 같고 진득이 같은 이런 저질 건달들의 손과 발을 묶고 입을 막았다. 빨리 뛰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10월 17일에 통과된 유신헌법이었다. 이때부터 ‘한강의 기적’이 태동했던 것이다.
1972년부터 남한은 북한의 경제를 능가하기 시작했다. 1972년부터 경제성장은 연평균 13%의 가파른 가도를 달렸다. 이 때 세계경제는 1973년의 오일쇼크를 맞아 침체하기 시작했다. 1972년부터 1979년까지 8년간 박정희는 율곡사업계획(전투력증강사업)을 세웠다. GNP의 6%를 국방예산으로 투입했다. 1971년 계획당시의 경제성장 속도로 계산해 보니, 1972-79, 8년 동안의 예측된 율곡예산은 15억 달러였다. 그런데 1972년부터는 박정희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GNP가 마구 성장했다. 그래서 15억으로 예상했던 율곡예산은 무려 4배나 늘어난 60억 달러가 됐다.
일자리 창출의 귀재
박정희는 주로 미국에서 사양화된 군용제품의 기술자료(TDP)를 배로 한없이 들여와 공단을 세우고, 기업을 입주시켜 한두 가지 제품씩 기업에 배급해 주었다. 외국말로 된 설계도면과 설명서를 읽을 사람이 기업에는 없었다. KIST 과학자들와 국방연구소 과학자들이 기업에 나가, 적당히 하려는 기업인들에 시쳇말로 조인트를 까면서 강도와 정밀도를 강요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생산기술은 이런 훈련을 통해 이룩된 것이다. 그리고 실업률은 사실상 0%에 가까웠다.
실업으로 인해 헐벗고 못 먹은 국민들은 월급을 받으면서 행복해 했고, 기업이 생산하는 모든 제품들이 시장에 나오자 말자 금방 흡수해 갔다. 눈부신 경제성장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세계가 부러워하고 배우고 싶어 하는 ‘정신혁명, 의식혁명의 메카 새마을 운동’은 또 어떻게 되었는가? 바로 유신시대에 급성장했던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을 쓴 사람이 아는 것은 오직 ‘민주화’ 하나뿐이다.
대전의 국방과학연구소에는 박대통령이 며칠 씩 묶으면서 유도탄 개발을 격려했던 작은 집이 있었다. 이름하여 ‘영빈관’이었다. 하지만 박정희가 서거한 다음에는 그 누구도 이 집을 찾지 않았다. 그 이후의 대통령들은 과학을 모르는 건달들이 했다.
세계 경제사를 다시 쓴 유신의 기적
유신시대 8년간 세계경제가 침체의 길을 내려 달리고 있는 때 오직 한국경제만 연평균 13%의 눈부신 성장을 했다. 당시 미국에서 경영학석사 과정을 밟고 있던 필자는 경제학 교수들이 한국의 경제성장을 세계 경제역사상 유례없던 일이라고 이야기 할 때 어깨가 으쓱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었다. ‘조선일보는 5.16이 ’산업화의 공신‘이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유신’은 “세계에 경제역사를 다시 쓴 위대한 기적의 공신‘이라 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결 론
[진실화해위‘는 2005년 ’과거사위원회‘로 발족했다. 이후 수많은 간첩사건을 무고한 학대를 받은 선량한 시민으로 탈바꿈시켜 1인당 수십억 원씩의 보상을 해줌으로써, 간첩집단을 기득권 세력으로 만들었다. 1989년 부산 동의대에서 경찰관 7명을 불태워 살해한 극렬주의자들에게 많게는 2002년 화폐로 6억원에서 수천만 원씩 민주화보상을 받게 한 단체들 중 하나다. 빨갱이들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시절에 이루어졌던 모든 것을 폭력과 학대로 규정했다. 이는 그들이 일본과 미국을 살인집단으로 모략하고, 공수부대를 학살집단으로 매도하는 것과 조금도 다름없다.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이 들어서면서 시작된 [서산개척사업]은 전두환 대통령의 삼청동 사업과 궤를 같이 한다. 장면정권 때 양성된 부랑자 깡패들을 서산으로 이주시켜 땅을 개척게 하여 그 개된 땅의 원주민이 되게 한 것은 매우 잘한 일로 칭송되었다. 10.26이후 부랑자 깡패들의 기승 역시 사회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박대통령은 1971년,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빨갱이들로 들끊던 청계천 판자촌 인구를 성남으로 이주시켰다. 성남이 빨갱이 고장으로 출발한 것이다. 이런 박대통령의 결단은 당시 국민들로부터 박수와 존경을 받았다. 그런데도 빨갱이들은 일본이 한 모든 행위, 미국이 한 모든 행위, 한국의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이 행한 모든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이래서 김광동 위원장은 이래와 같이 말했다.
“과거사위 활동은 대한민국의 정체성 부정과 대한민국 정통 주도 세력을 짓밟는 정치 공세의 수단이나 방법으로 변질됐다. 특별법을 근거로 3권 분립을 짓밟고 정상적 법 제도와 기존 판결 등을 무력화시키며 ‘현재’의 정치 논리로 ‘과거’ 역사를 재단하고 있다.” “권력투쟁적 세력 내지 반체제적 세력의 정치투쟁과 용어전술로 펼쳐지는 ‘과거사 정리’는 각종 반민주적 조치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이 발언도 빨갱이들이 물고 늘어진다. 12월 12일, 그가 과거사위 위원장으로 임명되면서 빨갱이들의 진면목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빨갱이들이 그를 향해 소리를 많이 낼수록 잠자던 국민이 깨어날 것이다.
2022.12.17.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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