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북의회의장 최태복, 북내각총리박봉주, 연형묵, 누가 더 광수자격 있을까?
페이지 정보
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5-07-25 11:31 조회8,010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71광수 황장엽에 대한 영상분석은 100% 이상 확실하다. 노숙자담요님의 분석 내용을 세밀히 따라가 보면 그는 100% 광수다. 뺨에 붙은 크고 작은 사마귀 점, 얼굴에 나타난 S자형의 튀어 오른 근육, 독특한 입, . 틀림 없는 광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황장엽이 1980년 57세였고, 김일성 사상만 연구한 학자의 경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광주에 올 수 없었다고 지레 단언들을 한다.
그리고 우리 500만야전군이 그동안 이룩해 놓은 확실한 광수, 누구의 눈에나 한번 척 보아도 광수일 수밖에 없는 다른 광수들에 대한 신뢰를 갉아 먹을 수 있다며 우려들을 표시한다. 어제도 어느 선배분이 사무실에 오셔서 그런 말씀 하시기에 컴퓨터로 안내하여 차분하게 노숙자담요님의 논리를 따라 가며 설명해드렸다. 그러자 100% 이해가 간다며 앞서의 우려를 취소한다 하셨다. 그분은 어려서부터 나를 동생처럼 사랑해주신 육사선배 4성장군출신이다.
기재님이 광수를 또 지명했다. 북한의 내각수반인 박봉주(1939)와 최고인민회의의장인 최태복(1930)이다, 연형묵(1931)은 이미 광수로 분석완료된 인물들이다,
이 4 명의 인물을 위키백과 기록으로 비교해보자. 황장엽은 김일성종합대학교와 모스크바 대학을 나와 김일성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궤변을 만들어놓고 이를 마치 철학적 사상인양 포장해 출세한 추악한 인물이다.
히틀러에게는 헤스가 있었다. 그는 '나의투쟁'(Mein campf)이라는 책을 써서 히틀러에 바쳤다. 이와 똑 같이 황장엽은 ‘사람중심철학’을 김일성에게 바쳤다. 황장엽의 손에 있는 ‘사람중심철학’이 김일성에 손에 가자 ‘주체철학’으로 포장명이 바뀌었다. 그리고 황장엽은 노동당 선전선동부 차장을 지냈다. 학자가 무슨 노동당 선전선동부를 지휘하는가?
반면 북한 의회 의장인 최태복은 동독의 라이프치히 대학을 나와 일생을 줄곧 순수한 상아탑 속에서 살아온 사람처럼 보이고, 연형묵은 체코의 프라하 대학을 나와 엘리트 정치 코스를 달려온 사람인 것처럼 보이고 박봉주는 공장경영으로 일생을 보낸 사람처럼 기록돼 있다. 이들 중에서 가장 정치공작에 앞장 서 있는 사람은 단연 황장엽이다. 김일성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주체사상이라는 궤변을 만들어 냈고, 선전선동부를 지휘한 경력은 절대로 순수한 학자의 경력이 아니다.
황장엽
황장엽
황장엽은 1923년 2월 17일에 평양 강동군에서 황원택의 아들로 태어나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아버지 황원택은 본부인을 여의고 재혼한 부인에게서 황장엽 형제를 보았다. 일찍 사망한 그의 아버지 황원택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은 없다.1942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주오대학교에서 공부하였으나 일제의 패망으로 강제소환되어 졸업을 하지는 못했다. 약 1년 6개월 동안 강원도 삼척 탄광에서 징용을 하던 중 해방을 맞이하였으며, 그 후 서울을 거쳐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갔다.[1]해방 후인 1946년 24세에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하였고 1950년에 졸업한 후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철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55년에 귀국하고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교수직을 맡았으며 1965년 10년 후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에 임명되었고 김일성 유일사상체계 확립에 관여하였으며 김정일을 후원하여 주체사상 개인강사를 맡기도 했다.
조선로동당 선전선동부 차장[편집]
김일성 유일통치체제를 전당과 전사회에 구현하였고, 제1부-선전지도부, 제2부-교양지도부, 제3부는 선동선전부, 제4부는 출판보도부문과 문화예술부문 지도부 운영 했다.
박봉주(북한 행정부 수반 총리)
http://news.ichannela.com/politics/3/00/20131210/59467373/1

박봉주,
1939년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가이자 기업인으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이다. 2003년 9월 3일부터 2007년 4월 11일까지 북한 내각의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기업인으로는 평안북도의 식료품 공장장,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 지배인을 지냈다.
1962년에 평안북도의 식료품 공장장이 되었고, 그 후 1993년부터 조선로동당 경공업부 부부장을 맡았고 1998년부터 화학공업상이 되었다. 당내의 서열은 제6위이다. 2003년 9월 3일 홍성남 후임으로 북한내각 국무총리에 임명되었으나 2007년 4월 11일 해임되었다. 해임 사유는‘선군정치’ 시대에 군수경제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이며, 2007년 4월 평안남도 순천시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 지배인으로 좌천됐다.[1] 박봉주는 유류 사용 문제를 놓고 군부와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2]
최태복 (북한식 국회의장)
최태복
1930년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조선로동당 비서 (국제 담당), 최고인민회의 의장(국회의장)을 맡고 있다. 1930년 평안남도의 남포에서 태어나, 만경대혁명유자녀학원을 졸업하고, 동독의 라이프치히 공업 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61년 ~ 1980년 함흥화학공업대학 교수, 화학연구소 함흥연구소 소장, 김책공업대학 교원, 학부장, 학장, 교육위원회 위원장 등을 거쳤으며, 1982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다. 이후 1986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 1990년 당 정치국 후보위원, 1992년 당 국제담당 비서, 1993년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 당 교육담당 비서, 1998년 최고인민회의 의장, 2001년 당 총비서 (국제 담당) 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2010년 9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에 선출되었으며,[1] 같은 해 12월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해 천즈리[2], 우방궈[3] 등을 만났다. 2011년 3월 영국 의회를 방문하였다.[4]
연형묵
1931년 11월 3일~2005년 10월 22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내각 부총리, 조선로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겸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공과대학교에서 유학하였으며, 1970년에 조선로동당 당비서에 취임했다. 1989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총리에 취임하였으며, 당 비서는 해임되었다. 1991년 남북 고위급회담 북측 수석대표로 대한민국을 방문하였다. 연형묵 전 총리는 총리 재임 기간 동안 경제개혁을 실시했지만, 이미 정권을 장악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개혁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결국 개혁은 실패하고 1992년 12월 총리직에서 해임당했다. 총리직 해임 후 조선로동당 자강도당 책임비서로 강등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1]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군과 군수공업에 대한 김정일의 관심이 집중되고 자강도 군수공장들에 대한 현지시찰이 잦아지면서 다시 김정일의 신임을 받게 되었고, 1998년 1월 노력영웅[2] 칭호를 받았다.[3]
2003년 9월부터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2005년 10월 22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2015.7.25.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