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탐험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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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8-26 21:53 조회3,32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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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탐험 [31]
10.26 줄거리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을 마치고 헬기로 돌아오는 도중이었다. 오후 4시, 박정희 대통령을 수행하던 차지철이 김재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궁정동 안가에서 각하의 저녁식사를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자마자 김재규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오랫동안 엿보다 놓쳤던 기회를 이번에는 꼭 잡아야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그가 키워준 육군총장 정승화를 궁정동 안가로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김재규의 덕으로 참모총장이 된 정승화는 김재규의 지시대로 궁정동에 와 대기하고 있었다.
김재규는 각하를 시해할 권총을 준비하고 두 대령(박선호, 박흥주)들을 불러 무서운 얼굴로 지시했다. “오늘 내가 각하와 차지철을 해치운다. 각하 방에서 총소리가 나면 경호원들을 모두 사살하라.” 헬기가 도착하기 전,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이 별장 앞마당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형님, 오늘 차지철 해치웁니다”. 평소 차지철로부터 수모를 받아온 김계원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차지철을 해치우면 박정희 대통령까지 해치운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었다. 만찬시간 1시간 40분 만이었다. 각하, 김계원, 차지철, 심수봉, 신재순이 앉아 있는 상태에서 김재규가 차지철에게 총을 쏘았다. 팔뚝에 총을 맞은 차지철은 화장실로 도망갔다. “뭣들 하는 짓이야?” 꾸짖는 대통령을 향해 김재규의 총탄이 날아갔다.
이어서 궁정동에 M16총소리가 요란했다. 중정요원들이 대통령을 수행하던 경호원들을 쏘아 죽이는 총소리들이었다. 이 소리를 정승화는 바로 40m 거리에서 들었다. 김재규는 김계원에게 각하의 시신에 대한 보안처리를 해달라 명령조로 말하고 자기는 정승화가 기다리고 있는 이웃 별관으로 뛰어갔다. 맨발에다 와이셔츠는 양복바지에서 튀어나와 있었고,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가 허리춤에 꽂은 권총에서는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 김재규는 정승화를 밖으로 나오라 불러놓고 주전자 꼭지를 입에 대고 한동안 물을 들이켰다.
“총장 총장 차 대시오”. 두 사람은 정승화 차를 타고 궁정동을 나갔다. 김재규가 정승화에 손동작을 했다. 엄지를 세웠다가 밑으로 내렸다. 각하가 쓰러졌다는 뜻이다. 총소리로 미루어 능히 짐작할 수 있었던 정승화는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외부의 소행인가요 내부의 소행인가요?” 김재규는 이에는 답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총장의 어깨가 무겁소, 계엄을 선포하면 어느 부대들이 동원되오?”
정승화의 수상한 행보
육본 벙커에 도착하자마자 정승화는 김재규를 앞방에 모셔놓고, 자기는 상황실에서 국방장관이 옆에 와 있는데도 무시하고, 국방장관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상황 처리를 했다. 1,3군 사령관에 전화를 걸어 진돗개2를 발령하고, 20사단장에 전화해 육사로 출동하라 지시하고, 9공수 여단장에게는 육군본부로 출동하라 명했다. 수경사는 차지철의 명령만을 듣게 돼 있다. 그런데 정승화는 월권하여 수경사령관에게 청와대를 포위하고 청와대 경호실 인력이 궁정동으로 가지 못하도록 했다. 그뿐만 아니라 차지철 바로 밑에 있는 경호실 차장 이재전 장군에 명령을 내려 경호실 병력을 동결하라 지시했다. 차지철이 죽었다고 믿기 전에는 있을 수 없는 행동인 것이다.
최규하의 양다리
한편 김계원은 각하의 시신을 국군병원에 옮겨놓고 군의관으로부터 각하가 확실하게 사망했음을 확인하고 청와대로 들어가 비상소집을 했다. 8시 40분 최규하 총리는 김계원으로부터 은밀히 김재규가 차지철과 각하를 살해했다는 정보를 듣고도 각료들에게 일체 알리지 않고 김재규가 원하는 대로 비상국무회의를 국방부에 가서 열었다. 밤 11:30분 비상국무회의가 국방부 회의실에서 열렸다.
대통령이 왜 살해됐는지 누가 살해했는지 묻지 않았다. 단지 신현확 부총리 및 몇 사람만 시신이라도 확인하자 따졌다. 각하 앞에서는 그토록 충성심을 자랑했던 국무위원들은 각하가 왜 사망했는지에 대해 따지려 하지 않고 권력이 누구에게 가느냐에 대한 계산에 눈들만 반짝이고 있었다. 국가는 무주공산이었다, 국무회의는 익일 새벽 00:25에 끝났다. 회의 결과는 익일 아침 4시에 비상계엄을 선포할 것, 정승화를 계엄사령관으로 할 것이었다. 최규하는 이 회의 결과를 즉시 회의장 밖에 있는 김재규에게 귀띔까지 해주었다. 명색이 국무총리가 이러했으니 다른 국무위원들이야 오죽 눈치를 보았겠는가? 그 많은 국무위원들 가운데 범인이 누구냐를 따지는 사람이 없었고 모두가 쥐죽은 듯 눈치들만 보았다. 위기에서 국가를 생각하여 나서는 자가 일체 없었던 것이다.
김계원의 극적인 배신
26일 밤 11:40분은 역사적인 시각이다. 벙커에 온 김계원은 김재규에게 동조세력이 없다는 것을 간파한 후 노재현과 정승화가 있는 자리에서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노재현은 정승화에게 김재규를 체포하라 명했다. 그러나 정승화는 다른 일을 꾸몄다. 헌병감 김진기와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불러 김재규를 안가에 정중히 모시라고 했다. 이상한 것을 눈치챈 전두환은 육군본부 부안대장 오일랑 중령에게 전화를 했다. “자네 김재규 얼굴 아나?” “네” “김재규는 자네 얼굴 아나?” “모를 겁니다” 지금 헌병복장으로 갈아입고 애들 데리고 국방부에 와서 김재규 체포해.“ 11월 27일 00:30분, 김재규는 오일랑 중령에 의해 체포됐다. 극적인 체포 과정은 [12.12와 5.18 다큐멘터리 압축본] 상권 앞부분에 상세히 묘사돼 있다.
전두환이 막은 김재규-정승화 혁명
정승화는 노재현 국방장관으로부터 김재규를 체포하라는 명을 받고서도 그를 비호했지만, 김재규는 전두환의 순발력에 의해 드디어 서빙고 분실로 연행됐다. 거기에서 김재규는 자기가 범인이고 정승화와 함께 행동했다는 것을 털어놨다. 이에 이학봉 중령은 정승화를 즉시 체포하자 했지만 불과 두 시간 정도의 시차로 정승화는 이미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돼 있었다.
계엄사령관이 된 정승화는 김재규를 비호하고 자신의 개입 사실을 부인하려 갖가지 시도를 했다. 이학봉은 여러 차례에 걸쳐 정승화의 구속을 건의했지만 전두환은 12월 6일에야 구속을 결심했고 디데이(D-day)를 12.12로 결정했다. 1997년 대법원 판결문에는 전두환이 동경사로 발령 날 것을 눈치 채고 정승화 체포를 결심했다고 하지만 전두환에 대한 인사이야기는 12월 9일 골프장에서 노재현과 정승화 두 사람 사이에 오갔던 말이다. 체포하라 결재한 날은 12월 6일, 인사발령 이야기는 12월 9일이었다. 황당한 판결이었다.
10월 27일 새벽 4시가 되어 정승화가 서슬퍼런 계엄사령관이 된다. 만일 전두환이 그보다 3시간 30분 앞선 시각에 김재규를 서빙고 조사관실로 연행하지 않았고, 김재규의 입으로부터 시해 현장에 정승화가 함께 있었고, 육군본부 B2벙커로 정승화 승용차에 동승해 왔다는 정보를 입수하지 못했다면, 새벽 4시가 되자마자 정승화는 김재규를 풀어주라 전두환에게 명령했을 것이다. 이런 명령이 일단 내려지면 그것은 즉시 공개되는 것이라 전두환이 거부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이를 거부하면 세간에는 정승화와 전두환 사이에 내전이 일고 있다고 소란을 떨 것이다. 그래서 전두환은 센스 있게도 정승화에 미리 접근해 말했다. “김재규가 시해범입니다. 그는 지금 서빙고 조사실에 있습니다. 시해 사실을 인정하고 이후의 상황들을 줄줄 불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정승화는 김재규가 자기와의 관계를 불고 있겠구나 하는 짐작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정승화는 새벽 4시에 계엄사령관이 되어 놓고서도 김재규에 대해 손을 쓰지 못했다. 그 대신 도둑이 제발 저리듯 정승화는 허세와 위엄을 연출하면서 전두환의 수사를 지속적으로 방해하고, 자기의 정치적 위상을 필요 이상으로 과장해 나가다 12.12를 맞게 되었다.
2022.8.26.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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