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교육대, 사회정화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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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7-31 18:21 조회3,94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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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교육대, 사회정화의 예술
"공산당에는 몽둥이만이 약"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말씀이 현실적 진리다. 이 나라는 빨갱이들과 전라도만 아니면 그야말로 천국이다. 삼청교육대는 당시 내무장관의 건의에 의한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을 시작할 때, 마을에서 말썽을 부리고 동네사람들과 잘 지내지 못하는 이상한 성격을 가진 인간들을 동네 단위에서 정신 차리게 하라고 지도한 적이 있었다. 이의 연장선이 바로 '삼청교육대'라 할 수 있다.
무주공산의 1980년
박정희라는 엄격한 대통령이 서거하자 국가에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벌어졌다. 박정희에 항거하던 소위 전라도 이념세력이 김대중을 중심으로 뭉쳐 국민연합이라는 사실상의 혁명조직을 이끌면서 김영삼의 신민당, 김종필의 공화당을 상대로 전국 주도권 잡기 경쟁을 시작했다.
학생시위와 노동시위를 부추기면서 조기대선을 치르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는 최규하 정부를 해체하고 거국내각을 구성하라고 압박했다. 이 압박 수단이 학생시위요 노동시위였다. 이들에게는 정권만 중요했지 국가는 안중에도 없었다.
김대중은 1973년 초 일본에서 배동호, 곽동의 등 가장 극렬한 친북 베트콩파들과 함께 반국가단체인 [한민통]을 조성해 나라를 북한에 넘기려 안간힘을 썼다. 김대중이 1981년 사형언도를 받은 것은 국내에서 벌인 내란음모사건 때문이 아니라 바로 한민통을 결성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북악파크에서 꾸민 내란음모사건에 대한 형량은 무기징역이었다.
김대중, 극렬시위 리더
1980년 1월 9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농성투쟁을 벌였고, 이를 신호로 하여 4월 29일까지 5개월간 전국적으로 719건의 노사분규가 발생했다. 이는 1979년 12개월에 걸쳐 발생했던 노사분규 수의 7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80년 4월 17일, 강원도 동원탄좌 사북영업소 광부 1,000여 명이 노조지부장이 체결한 20% 임금인상안이 잘못됐다며 노조지부장 부인을 나체로 정문 기둥에 묶어 놓고 45시간 동안이나 린치를 가하는 등의 난동을 부렸다. 4월 21일부터 3일간 광부들의 부인까지 동원한 3,000여 명이 곡갱이, 파이프 등을 가지고 광업소, 경찰지서, 기차역, 도로를 점거함으로써 사북일대가 완전 무법천지가 되었다. 이런 폭동사태는 계엄군 11공수여단을 투입함으로써 4월 24일에 진압됐다. 여기에서 경찰 1명이 사망했고 7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22억 원의 재산피해를 입었다.
이에 김일성은 간첩사령부인 3호 청사에서 사북 폭동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후부터 노사분규가 전국규모로 확산되었고, 4월 25일부터 20일 동안에는 무려 987건의 노사분규가 발생했다. 이들의 구호 역시 단순한 노사문제에 대한 구호가 아니라, “죽기 아니면 살기다” “계엄령을 해제하라” “배고파 못 살겠다, 같이 살고 같이 죽자”는 정치적 구호로 변질됐다. 이러한 노사분규 역시 김대중이 이끄는 이른바 [재야세력]으로 포장된 빨갱이 조직이 간첩들의 지시를 받아 일으킨 사회혼란 공작이었다. 거물간첩 김용규가 그의 저서 [소리 없는 전쟁]에서 폭로했듯이 남한의 크고 작은 소요는 예외 없이 '북한의 공작'이었다.
삼청교육대 초대한 북괴공작
1980년 4월초, 치안본부는 계엄위원회에 무정부 상태에 대한 통계를 보고했다. 1980년 1월부터 3월까지 발생한 범죄에 대한 통계였다. 살인이 64.3% 급증했고, 강도가 113.9%, 폭력이 20.1%, 절도가 21.4%, 밀수가 122.6% 급증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서정화 내무장관은 “강력범들에 대해서는 사회 복귀가 불가능하도록 강제 노동이나 강제 수용 등의 특별관리가 필요하니, 계엄 당국이 이를 뒷받침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건의를 했다. 이는 삼청교육대의 필요성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대학세력과 노동세력의 폭력시위가 연일 끝 간 데 없이 치닫고 있었던 당시 사회적 인사들은 좌불안석이었다. 종교계, 경제계, 언론계 등에서 파국적 난국을 하루 빨리 수습해달라는 요구가 사회각층으로부터 빗발쳤던 것이다.
4월 27일, 최규하 대통령으로부터 학원소요사태에 강력하게 대응하라는 명령을 받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4월 30일, 전국 계엄지휘관회의를 열어 학원-노조의 난동이 법치주의의 한계를 넘은 것이므로 단호하게 대처할 것을 지시했다. 5분 대기조 편성, 진압훈련 등 소요사태 대비훈련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삼청교육대는 바로 극렬한 시위를 지령한 김일성이 초치한 것이었다.
2022.7.31.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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