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김대중) 과 북괴(김일성) 이 발행한 애국열사 6인방 중 김구 우표 발행. ..어느 쪽의 애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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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elotin 작성일13-10-28 18:24 조회10,61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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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괴 애국자 반열 우표에 실린 김구..!! 과연 그는 한국의 애국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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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gelot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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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대한민국에선 소위 애국자로 지칭되는 "김구"님이 북괴의 애국자 반열 우표에 실렸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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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유명인사들 – 앞줄은 려운형, 김책 과 함께 아래줄 가운데가 북한의 최고 영웅중 한명 - 김종태 ** 뒷줄은 10전 최영도, 30전 홍명희, 20전 김구
Most highly hornored N. Korean figures. (of course other than Kim, Ilsung and Kim, Jungil) Front from right, Ryeo Woonhyng, Kim Jongtae, Kim Chaek
Kim Jongtae was a political figure in S. Korea but later found to be a N. Korean spy. He was executed in 1969 N. Korean leader Kim Ilsung try to rescue him by sending special miliatry unit to S. Korea, but they were all killed by S. Korea army. After his death, N. Korean leader Kim, Ilsung gave Kim, Jongtae the most high honor. And there are university, street, and manufacturing facility that are named after him in N. Korea. Some S. Korean argue that Kim Jongtae was in fact not a spy but set up by S. Korean government. But this stamp is one of the proof that Kim Jongtae WAS in fact sent by Kim Ilsung to overturn S. Korea government in late 1960s
One more sad piece of history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
위에 영문으로 간략한 김종태가 어떤 자인지 설명보다... 김종태가 어떤 놈인지 사실을 알아보자..
전 거물간첩 김용규는 그의 저서 “소리없는 전쟁”(증18)에서 김대중은 북한이 키운 사람이라고 증언했다.
1967년 6월 4일 오후2시 목포역전 광장에서 김대중은 이렇게 유세연설을 했다.
통혁당은 1969년 8월에 정식 중앙당 창당을 하게 됐고, 창당하자마자 그달 8월 24일에 비밀 조직망이 탄로나 73명이나 검거되면서 표면적으로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사형 5명, 중형 30명! 통혁당이 검거된 이후 남한의 학생 서클은 조평통(조국통일평화위원회) 산하에 있는 한민전(한국민족민주전선)의 지휘를 받아왔다. 4.19를 주도한 ‘신진회‘(고건, 류근일) 세대에서 박정희를 몰아내고 김대중을 지지하자는 ‘민청학련’(이해찬, 김근태, 정동영, 손학규, 장영달, 유인태, 이철, 유흥준, 이강철, 김문수, 김동길, 류근일) 세대로 넘어가는 길목에 통혁당이 있었던 것이다.
사형자는 김종태(북괴노동당 대남공작원), 김질락 (북괴노동당 대남공작원, 가명 백두오), 이문규(북괴노동당 대남공작원 가명 백두육) 이관학(괴뢰군인) 김승환(괴로군인).주동자였던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는 월북해 조선로동당에 입당했고, 통혁당 하부선이었던 이진영·오병헌은 68년 4월 22일 월북해 교육을 받다가 통혁단 사건이 노출되면서 귀환하지 않았다.
김종태는 4차례에 걸쳐 북한을 왕래하면서 김일성을 면담하고 미화 7만 달러, 한화 3,000만 원, 일화 50만 엔의 공작금을 받고 A-3지령만 167회를 수신했다. 그는 민중봉기, 간첩의 무장 집단유격투쟁을 통한 수도권 장악, 북한으로부터 무기수령을 위한 양륙거점 정찰, 특수요원 포섭, 월북 등 14개 항목의 공작임무를 띠고 있었다.
‘김종태를 구하라’는 특별지령을 받은 북한 753부대 소속 무장공작선은 68년 8월 20일 제주도에 도착했으나, 우리 군경과의 교전 끝에 14명 중 12명이 사살되고 이관학, 송승환 등 2명은 체포됐다. 이들 무장공비들은 김종태를 구출하여 월북시킨 뒤 백두일이라는 가명으로 북한정권 수립 20주년 기념일인 9.9절에 남한대표로 김일성 앞에서 연설하게 할 예정이었다.
김종태가 69년 7월 10일 사형집행을 당한 후 김일성으로부터 영웅칭호가 내려졌다. 평양대극장을 비롯해 각 시·도·직할시·區분대·區분대당위원회·공업기업소·협동농장·교육문화·보건기관에 이르기까지 대대적 추도식이 거행됐다.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책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증31)의 383쪽에는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을 지도지침으로 하는 통일혁명당의 창립”이라는 제목이 있다. 이처럼 통혁당은 김일성이 노골적으로 인정한 북한의 역사인 것이다.
북한 내각은 김종태에게 영웅 칭호 외 북한 최고훈장인 금성메달과 국기훈장 제1급을 추서하고 “평양전기기관차공장”을 “김종태전기기관차공장”으로, “해주사범대학”을 “김종태사범대학”으로 개명했다. 평양 시내에는 김종태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겨났다. 김일성은 김종태를 구출하기 위해 특수부대를 내려 보낼 만큼 김종태를 사랑했고 그 사랑과 뜻을 이루지 못한 데 대한 애석함이 여러 갈래로 표현됐다.
영웅칭호와 1급 훈장을 추서하고, 1주일동안의 추모기간을 정하여 북한의 모든 사업장 단위로 추도식을 거행케 하고, 북한 최고의 공장에, 최고의 대학에, 평양거리에 “김종태”라는 호칭을 부여한 것이다. 남조선에서 싸운 영웅에 최고의 상징성을 부여함으로써 주민들에게 적화통일의 의지를 주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는 파격적인 대우다. 적화통일에 대한 김일성의 의지와 욕구가 그만큼 대단하다는 의미인 것이다. <지만원 http://system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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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혁당 사건은 68년 8월 24일 중앙정보부에 의해 검거된 대규모 간첩단 사건이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통혁당이 합법·비합법, 폭력·비폭력의 배합투쟁을 통해 1970년까지 소위 「결정적 시기」를 조성, 민중봉기함으로써 공산정권 수립을 획책해왔다고 발표했다.
《통일혁명당이 북괴의 무력남침에 대비한 사전 공작으로 조직된 단체로서 유격전을 기도하여 무력행사를 준비하였으며, 과거의 남로당 조직을 부활시킨 조직체일 뿐만 아니라 지식층의 청년을 포섭하였으며, 잡지 반포, 당소조의 조직, 당원에의 적색사상 교양, 데모 조정, 해안선 답사, 유격전술요원 입북, 간부진의 빈번한 입북과 국가기밀 누설, 거액의 공작금 지원 등이 있은 사실…》
<『북지령받는 지하당이 분명』주범 김질락의 자인> 통혁당의 기본성격은 중앙당인 조선로동당의 지시를 받는 지하당이었다. 김종태·김질락·이문규는 월북해 조선로동당에 입당했고, 당원 이진영·오병헌은 68년 4월22일 월북해 교육을 받던 중 68년 6월 말 통혁당 사건이 발생하자 북한에 머물렀다.
통혁당 서울시당 위원장 김종태는 4차례에 걸쳐 북한을 왕래하면서 김일성을 면담하고 미화 7만 달러, 한화 3천만 원, 일화 50만 엔의 공작금을 받고 간첩지령형식인 A-3지령만 167회를 수신했다.
그는 민중봉기, 간첩의 무장집단 유격투쟁을 통한 수도권장악, 북한으로부터 무기수령을 위한 양륙거점 정찰, 특수요원 포섭, 월북 등 14개 항목의 공작임무를 띄고 있었다.북한은 통혁당에 대한 검거망이 좁혀오자 김종태 등을 구출하기 위해 무장공비를 남파하기도 했다.
북한 753부대 소속 무장공작선은 68년 8월20일 제주도에 도착했으나, 우리 군경과의 교전 끝에 14명 중 12명이 사살되고 이승탁, 김일룡 등 2명은 체포됐다. 이들 무장공비들은 김종태를 구출하여 월북시킨 뒤, 북한정권수립 20주년 기념일인 9·9절에 남한대표로 김일성 앞에서 연설하게 할 예정이었다.
통혁당 사건의 주범인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는 사형을 당했고, 신영복(현 롯데소주 "처음처름" 로고 특허소유권자)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북한은 통혁당 사건 이후 연루자들에 대한 영웅화에 나섰다. 69년 1월25일 김종태와 이문규에게 사형이 확정되자 평양 모란봉극장에서는 김종태와 이문규를 지지하는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다.
김종태는 69년 7월10일 사형집행을 받은 후 김일성으로부터 「영웅칭호」가 내려졌다. 69년 7월12일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는 「김종태 추도 결의문」을 채택했고, 같은 해 7월13일부터 19일까지 북한 전역에서 「김종태 추도기간」이 설정됐다.
평양대극장을 비롯해 각 시·도·직할시·구(區)분대·구(區)분대당위원회·공업기업소·협동농장·교육문화·보건기관에 이르기까지 대대적 추도식이 거행됐다.북한 내각은 김종태에게 영웅 칭호 외 북한 최고훈장인 「금성메달」과 「국기훈장제1급」 을 추서하고 평양 전기기관차 공장을 「김종태 전기기관차 공장」으로, 해주사범대학을 「김종태 사범대학」으로 개명했다. 평양 시내에는 「김종태 거리」가 생겨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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