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화야전군 민노총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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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7-21 13:49 조회4,46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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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화야전군 민노총의 뿌리
민노총의 거제도 반란이 점화된 지 50일이다. 대우조선에 1조에 육박하는 손해를 안겨놓고 국가나 회사로서는 들어 줄 수 없는 요구를 내걸면서 내란 폭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킬 조짐이다. 1946년 전국경제를 얼어붙게 했던 9월 총파업, 소련이 배후 조종한 파업이었다. 지금은 간첩이 배후 조종할 것이다. 이 나라의 모든 소요는 100% 간첩이 주도했다. 정부는 물론 국민 모두가 민노총의 뿌리를 공부해야 한다.
1. 뿌리: 목사집단 [한국도시산업선교연합회]
1964년 3월, 교회목사 300명이 [한국도시산업선교연합회], 약칭 [도산]을 구성하여 도시산업 근로자에 대한 선교를 한다는 구실로 성경 교리를 소위 [해방신학], [민중신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근로자들을 의식화시키고 선동하여 노사분규를 연출하기 시작했다. 69.9월의 ‘제일물산’, 72.3월의 동일방적, 77.5월의 ‘남영나일론’, 79.8월의 ‘YH’, 80.4월의 ‘반도상사’ 들에 대한 분규들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이를 배후 조종한 사람들은 지금도 거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목사 인명진이 그 수괴였다. 이로 인해 대다수의 경제인들은 도시산업선교회에 대한 노이로제에 걸려 있었다. ‘도산이 오면 도산한다“. 도사산업선교회가 기른 위장취업자가 기업에 오면 기업이 도산한다는 말이었다.
2. 돌파단계: 대학생들의 위장취업
도시산업선교 사업이 탄압을 받게 되자 1976년 11월에 영등포에서 결성된 [사회선교협의회]가 중심이 되어 제조업체들에 은밀한 방법으로 지하조직을 심기 시작했다. 이들은 1981년 말, 경기지역에 비밀 지하 교육기관인 [다락원]을 설치하여 4개월 코스로 합숙훈련을 시키면서 소위 [도산이론]을 무장시켜 주었다. 1개 기에 30-40명, 82년 말까지 1년간 배출된 200여 명의 전문세포들은 구로, 인천, 부천, 성남 지역의 문제 많은 기업체로부터 ‘위장취업’하기 시작했다. 손학규, 김문수 부부 등이 이에 속했다.
이들은 [기존노조]를 [어용노조]로 몰아붙이고 [민주노조]라는 이름을 내세우면서 선량한 근로자들을 선동하여 수많은 직장을 폐쇄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선량하고 순진한 노동자들이 소모품으로 희생됐으며 심지어는 [인간불화살]의 신화를 만들어 내는 데 제물로 이용됐다. 핵심세포들에 의해 포섭-훈련된 급진 노동 해방군은 83-88년간 2,696명에 이르렀다.
3. 혁명단계: [민주노조]에서 [노동해방]으로!
이들은 80년대 후반을 민주화가 꽃피는 시대, [혁명]을 실천할 결정적인 시기라고 판단하여 노동자들을 혁명의 주력군으로 전력화하였다. 근로조건 향상, 인금인상 등을 목적으로 하는 기존의 노조를 [어용노조]로 매도하면서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사용자를 적으로 규정하고 사장실 점거-협박-린치-파괴-방화-분신 등 온갖 불법-야만적인 투쟁을 연출해 냈다.
학생을 선봉대로 노동자 및 농민을 주력군으로 하는 연대투쟁을 통해 수많은 기업을 무너뜨렸지만 당시 국민들은 이를 군사정권에 항거하는 민주화 운동이라는 차원의 운동인 것으로 이해하고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못했다. [민주노조]의 목표는 임금인상이나 근로조건 개선 같은 것이 아니라 자본가를 몰아내고 노동자에 의한 기업지배를 목표로 한다.
한 발 더 나아가 이들은 [통일노동]을 내세워 반미-친북 노선을 선포하면서 전교조 전공노 386정치세력과 연대하여 기업 전복-대한민국 전복을 기도하고 있다. [민주화]의 부대 마크를 단 [386세포]들의 투쟁 목표는 대한민국 전복이다. 이것이 현 민주노총의 정체다.
4. 이념적 특성
1) 계급 투쟁:"노동자와 사용자는 공존관계가 아니라 적대관계다". "사용자를 폭력으로 타도하고, 계급해방(노동해방)을 이룩해야 한다". "사용자는 쓸어버려야 할 한 줌의 적이다. 항복하느니 차라리 죽자". "구걸하여 얻느니 싸워서 빼앗자".
2) 폭력 투쟁: 공권력은 제도폭력이다. 기업주 및 관리 계급은 보조폭력이다. 이에 대항하기 위한 노동자의 폭력은 정당한 것이다. 지배계급과 자본가는 절대로 그냥 물러나지 않기 때문에 역사 발전을 위해 노동자의 폭력 사용은 필연적이고 정당하다.
3) 연대 투쟁: 노동자는 순수한 노동운동이 아니라 혁명 세력의 주력군이다. 혁명 세력은 학생, 농민, 교사, 도시빈민 등의 민중 세력들과 연대하여 투쟁한다. 노동 운동의 지도자는 재야 단체에 의해 발굴되고 교육된다. 1989년, 현대중공업, 대우조선, 대우자동차, 금성사 등의 대규모 분규에는 수백 명의 재야 인물들이 현장에 가서 배후 조종을 하고 분위기를 띄웠다. 노무현도 그랬다.
4) 정치 투쟁: 노동자의 권익의 차원을 넘는 [노동 계급의 정치적 진출], [노동 해방]을 목표로 한다. 노조는 재야 혁명 세력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한 주력군이다. 살아 있을 때에는 노동 전사요 죽으면 노동 열사가 된다.
5. 투쟁의 확산 방법
1) 조직화 전술
먼저 운동의 씨앗(핵)이 되는 세포(소련어로 '야체이카')를 발굴한다. 이는 재야 단체가 주도했다. 70년대의 [도산], 80년대 중반까지의 [위장취업] 등은 모두 은밀히 전개된 지하 활동이었다. 그러나 1987년 6.29 선언으로 민주화의 물결이 사회의식을 지배하면서부터 노동상담소, 민족학교, 민주시민학교, 자주학교, 노동자대학 등 의식화 교육 기관들을 공공연히 차려놓고 혁명 인자들을 유인-양성했다.
배우고 싶어서, 또는 자문을 받고 싶어서 학교나 상담소를 찾아간 순진한 근로자들을 감언이설로 현혹시켜 투쟁 인자들을 모집한 것이다. 저들은 이를 [거미줄 작전]이라고 자랑한다. 거미줄(상담소 및 학교)을 쳐놓고 먹이가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작전이라는 뜻이다.
1989.6.30일 당시 재야 단체가 운영하는 노동상담소는 72개, 민족학교 등 지하 의식화 교육기관이 52개였다. 노동상담소는 서울 20개, 경기-인천 33개, 부산-경남 11. 대구-경북4, 광주-전남 4개였다. 의식화 교육기관은 서울 18, 부산-경남 8, 인천-경기 9, 대구-경북 1, 대전-충님 1, 광주=전남 5, 강원 3, 충북 4, 전북 2, 제주 1개였다. 이들 조직들은 공단지역에 자리를 잡고 매일 수천 씩의 근로자들을 [노동해방]이라는 달콤한 선동으로 의식화시켰다.
이런 노동운동은 세포조직인 단위 조합에서 지역별, 업종별 조직으로 확대됐고, 드디어 1990년1월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 결성되었다가 다시 1995년 11월에 오늘의 [민노총](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으로 확대되었다.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업종회의),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 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노동조합 연맹체가 바로 오늘날의 [민노총]인 것이다.
2) 위장 전술
처음부터 자본론, 계급투쟁론, 민중운동사 같이 어려운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감상적이고 정열적인 20대의 노동자이면 누구든지 공감할 수 있는 쉬운 내용을 가지고 입맛을 들이게 했다. 현장 근로자들의 불평과 불만을 수집-정리하고 기업주와 기존의 순수한 노조집행부의 약점을 세밀하게 분석하여 공분을 갖도록 했다.
1970.11.13일, 이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한 가난한 노동자 전태일을 희생양으로 삼아 분신케 한 후, 그의 죽음을 극도로 활용했다. [전태일 수기]를 제작하여 전태일을 노동계의 영웅으로 미화시킨 후, 이를 교육 자료로 활용함과 동시에 일반 국민에게는 군부 독재에 대한 비인간성을 부각시키는 데 활용했다. 그 외에도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노동의 새벽],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빼앗긴 일터] 등 노동자의 삶을 비참하고 절망적인 내용으로 노래한 소설, 수기, 시 등을 읽게 하여 사회에 대한 적개심을 키우고 투쟁의 눈을 뜨게 한 다음, 서서히 근로기준법, 노동조합관계법 등 실제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해주었다.
그 다음엔 민족모순, 계급모순, 민중민주주의 등 좌경 역사를 교육했다. ‘모순’이라는 말을 쉽게 사용하는 사람은 일단 공산주의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의심해야 한다. 독서서클, 애인 만들어주기, 친목서클 등을 통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연결고리를 만들어 나갔다. 여기에 이르게 되면 어제까지도 "열심히 일하고 알뜰히 생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순진한 근로자들도 "1,000만 노동형제의 해방을 위해 이 한 몸 바치는 노동전사"로 둔갑한다. 현 사회를 문제투성이로 보고, 정부를 타도 대상으로 여기게 된다. 마치 자기가 새로운 세상을 건설해야 하는 영웅이라도 되는 것 같은 착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설익은 사람들을 소영웅주의자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화 작전과 병행하여 저들은 노조의 민주화, 권익 향상 등을 바라는 순수한 근로자들을 더 많이 끌어들이기 위해, 그리고 사회로부터 용공분자라는 명시적인 비난을 피하기 위해 [노조의 민주화], [참노동], [노동해방] 등 명분 있어 보이는 구호를 내걸어 오고 있다.
3) 투쟁 확대
이들은 기존의 순수한 노조를 어용노조로 매도하면서 대부분의 일반 근로자들이 좋아할 구호를 만들어 투표를 통해 기존의 노조 간부자리를 장악해 나갔다. 일단 노조가 장악되면 재야 세력과 연대하여 극한 투쟁을 전개했다. 사용자에 대한 극한 투쟁의 면모를 보자.
""김XX 개새끼 불고기 해먹자", "사람 잡은 김XX 새끼 X를 잘라 버리자"(89년 5월 대우조선 분규에서) 등의 구호를 내걸고, 사용자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목을 매달거나 태우고, 사용자의 관을 만들어 파묻고, 사용자를 화장실에 가둔 채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하고, 사용자를 크레인에 묶어놓고 날이 선 칼로 배를 긁어 약간씩의 피를 내면서 하루 종일 욕하고 협박하는 등 그야말로 살벌하고 섬뜩한 투쟁을 벌여 왔다.
한편 순진무구한 근로자를 [불화살 투사]로 내몰아 죽음에 이르게 한다. 풍물이패를 동원하거나 중요한 소식이 있다는 등의 기회를 만들어 사람들을 불러 모아 몇 명의 몸에 신나를 뿌리고 칼을 높이 들게 하여 비장한 분위기를 연출해 낸 후, "개돼지로 사느니 차라리 죽자", "내 한 몸 불살라 천만 노동형제를 해방시키자" 등 끔찍한 구호를 외치다가 누군가가 그어 댄 성냥불에 의해 불화살이 됐다. 1980년대에 발생한 인간 불화살이 된 노동자는 18명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 1호가 전태일이었다.
전태일의 가면
중고생이 읽는 “다시 쓰는 이야기 한국사 2”의 195쪽과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사 편지 5”의 203쪽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위인 전태일>
“새마을 운동은 농촌의 겉만 번드르하게 도색-미화한 것이고, 실상은 농촌을 더 못살게 한 것이었다.”
“1969년, 전태일 열사는 평화시장 봉제공장에서 재단 일을 하고 있었다. 근로기준법을 늘 끼고 다니면서 노동법을 공부했다. 하루에 8시간만 근무하고 일주일에 하루는 쉬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고 기계 취급을 받아 왔다’고 노동자들을 일깨웠다. 재단사들을 모아 ‘바보회’를 만들어 근로기준법대로 일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자고 설득했다.”
“전태일 열사는 쌍문동, 도봉산 기슭에 있는 판잣집에 살았다. 1970년 11월 12일 아침,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내일은 좀 심상치가 않습니다. 오후 1시에 국민은행 앞으로 나와서 구경하세요.”
“국민은행 앞, 현수막에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500여 명의 노동자들이 경찰에 쫓기고 있었다.
바로 그 때였다. 시위대 옆 골목에서 불길로 온 몸에 불길을 뒤집어 쓴 사람이 튀어 나왔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바로 전태일이었다.”
이 책들에는 전태일이 영웅으로 묘사돼 있다. 그런데 그들의 글에서 자가당착이 발견된다.
전태일 미화에 나타난 자가당착
전태일은 11월 12일 집에 나오면서 그의 모친에게 11월 13일 오후 1시에 국민은행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전태일이 만일 자기의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화살이 되려 했다면 어머니에게 “내일 오후 1 시에 국민은행 앞으로 나와”서 아들이 불에 타고 있는 모습을 ‘구경하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장엄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까지는 이미 노동세력과 사전에 기획돼 있었을 것이다. 그 모습을 어머니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이 불에 타 죽는 모습을 어머니 더러 나와서 ‘구경하라’고 말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누군가가 골목에서 불을 질러 강제로 내보냈을 것이라는 판단이 가능해 진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불을 붙이려면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확실하게 성냥불을 그어댔을 것이다. 옆 골목에서 이미 불화살이 되어 나온 전태일, 그 불을 전태일이 붙였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둘째, 전태일처럼 불화살이 된 노동자 18명 중에는 ‘장엄한 광경까지만 연기하라’고 속여 놓고는 여러 사람들이 바람을 잡는 틈을 이용하여 누군가가 성냥불을 그어댄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셋째, 전태일은 분신해서 몸이 다 탔다. 그런데 어떻게 종이로 만들어진 근로기준법 책이 꼭~ 쥐어져 있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평 가
대한민국에서는 건국 이래 박정희대통령이 집권하여 일자리를 폭발시키기 전까지 전태일처럼 일할 취직자리도 없었다. 전태일이 평화시장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만 해도 과거에는 꿈이었다. 전태일은 공산주의자들이 박대통령을 비난하기 위해 만들어 낸 거짓 신화다. 빨갱이들은 1980년대에 18명의 인간불화살을 만들어 국민 여론을 왜곡했고, 전태일은 그 18명의 불화살 가운데 제1호였다. 불화살이 될 사람을 제비로 뽑았다는 말도 있다. 죽는 순간에 죽기 싫다고 발악을 했다는 정보도 꽤 많다.
시체장사는 김일성 교시
김일성의 비밀 교시에 전태일에 관한 교시가 들어 있다. “전태일의 분신 자살···! 이것이 얼마나 좋은 선동 자료입니까···? 물론 청계천 피복노동조합이라는 것이 보잘 것 없는 조직이지만 우리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전태일을 영웅으로 만들고 추모사업회도 가지면서 대대적으로 선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남조선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더 단결할 수 있고, 그의 죽음을 헛되이 여기지 않고 그 정신을 본받게 됩니다.” (1976년 4월 대남 공작원들과의 담화)
2022. 7.21.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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