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법가는 역사연구에 개입 말아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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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3-07-31 06:12 조회9,95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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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법가는 역사연구에 개입 말아야(1)
국가권력을 행사하시는 모든 분들께 이 글을 드립니다. 역사 위에 잠자는 국민은 국가를 가질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역사에 대한 연구는 학자들의 몫입니다. 역사를 바꾸는 능력은 과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 영혼이 병들지 않은 사람들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는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과 국가권력을 손에 쥔 사람들에 의해 왜곡돼 왔습니다. 이런 왜곡된 역사는 선량한 학자들에 의해 다시 원상복구되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권력가들이 역사에 대해 간섭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공론의 시장에서 자유롭게 다퉈지도록 시장관리만 잘해 주시면 되는 것입니다.
정치인-관료-법관들은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이들 비-연구자들이 학자들을 제치고, 역사를 점령해 왔습니다. 개인적 이해타산에 따라 또는 사리분별력이 모자라 대세에 영합하면서 타협과 절충하고 절대권력자들의 독선에 휘말려 정치인-관료-법관들이 역사를 함부로 규정해 왔습니다. 이는 오직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가능할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매우 부끄럽게도 그리고 또 슬프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전체주의적 현상들이 줄곧 있어 왔습니다. 이는 ‘인류보편의 규범’에 대한 위반행위인 것으로 우리 국민 모두가 반성해야 할 매우 중요한 대목일 것입니다. 이는 선진국에 해당하는 기준도 아니고 원칙도 규범도 아닙니다.
귀하들께서 다 아시는 매우 간단한 역사사건, 부산 동의대 사태에 대해서부터 말문을 열까 합니다. 국법을 수호하려는 경찰들이 폭력학생들에 의해 7명이나 사망하였습니다. 당시에는 그 폭력 학생들이 중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고 이념세력의 판도가 뒤바뀌자 가장 무거운 중형을 받았던 테러리스트가 6억원을 보상받고, 모든 범법자들에 평균 3천만 원의 보상금이 지급됨과 동시에 모두가 다 민주화공신들로 등극했습니다. 이게 정상적인 현상이라고 생각들 하십니까?
이 땅에는 참으로 어이없는 이변이 발생하였습니다. 북에 충성하는 간자들이 정권을 잡은 것입니다. 이들이 정치권력이 되어 역사를 뒤집었습니다. 북한이 발행한 대남공작 역사책들에서 스스로 자기들이 주도했다고 직-간접적으로 고백한 내남공작 역사들까지 거의 다 정통역사로 뒤집었습니다. 국가명령에 충실하게 따랐던 어제의 충신들이 역적 되고, 어제의 역적이 갑자기 충신으로 둔갑해 있습니다. 이는 국가가 적국에 점령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현상입니다. 노론이 득세하면 노론의 역사가 정사가 되었고, 소론이 득세하면 소론의 역사가 정사가 됐던 과거의 부끄러운 현상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국민적 자각이 필요한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거의 간첩사건들이 거의 다 민주화사건으로 둔갑해 왔습니다. 좌익정권이 민보상위를 설치하여 과거에 국가를 파괴했던 사람들에게 단지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권에 항거했다는 이유로 민주화 유공자의 지위를 부여하고 도합 1,000억원이 훨씬 넘는 보상을 했습니다. 우리국민들은 힘이 모자라 이를 지켜보며 한숨만 쉬어 왔습니다.
이는 무슨 뜻이었습니까? 우리사회의 기득권 세력이 우익에서 좌익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인재도 법운용도 통치 스타일도 다 시대의 산물입니다. 당대의 정의, 당대의 인물은 당대가 평가합니다. 박정희 시대에 당한 억울함을 법으로 뒤집고 보상으로 뒤집는다면 이조 시대에 고문당하고 능지처참 당하고 귀양 간 가문들에 대해서도 재평가-보상해야 할 것입니다. 세계 민주주의를 개척하고 민주주의 발전의 첨단을 달린다는 미국을 보십시오. 그들이 아프리카 노예들의 고통을 다 보상해 주거나 그들을 민주화 인사들로 등극시켜 주었는가요?
좌파세력은 역사변조에 목숨을 겁니다. 좌파의 정당성은 오직 역사를 통해 정당화되기 때문입니다. 눈에 불을 킨 이들이 뒤집으려다 뒤집지 못한 매우 중요한 역사사건들이 있습니다. 1946년의 9월총파업과 10월 대구폭동입니다. 9월 총파업은 1개월 동안 전국의 산업을 동결시켰습니다. 엄청 무서웠습니다. 10월 1일로 시작한 대구폭동은 지하에 조직됐던 좌익 폭도들이 병원에 있는 시체들을 탈취하여 거리로 끌고나와 이한렬식의 시체장사를 하면서 촉발돼 100일 동안 지속된 빨치산들의 살인잔치였습니다.
이 부끄러운 사건들을 미화하기 위해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쓴 좌익 사가들은 이 두 사건을 미군정의 탄압으로 인해 야기된 국민들의 정당한 항거였고, 미제의 식민화 정책에 항거한 의거였다고 선전-선동해 왔습니다. 생활에만 충실해오던 일반국민들은 이런 좌익들의 선동-선전에 홀딱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1994-95년, 소련의 북한점령군 사령관 스티코프의 비망록이 발표되면서 좌익 역사학자들은 부끄러운 철퇴를 맞게 되었습니다,
9월 총파업과 10월 폭동은 둘 다 소련이 일화 500만엔을 지원하고 소련이 전략과 전술을 지휘한 사건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이는 좌익 사가-전략가들에 엄청난 낭패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에 좌익 전략가-사가들은 현대사의 핵이라 할 수 있는 5.18역사와 4.3역사를 바꿀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5.18역사 뒤집기는 스티코프 비망록이 밝혀진 직후인 1995년 10월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95년 택시운전사에나 어울리는 박계동 의원이 노태우 비자금을 터트렸습니다. 박계동은 그 후 이와 같은 정보력을 과시한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룸싸롱에서 여성의 신체 부위나 만지는 정도의 평범한 국회의원이 어떻게 감히 그 누구도 해낼 수 없는 ‘꼭꼭 숨은 비자금’의 비밀을 하루아침에 들추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까?
이 나라에서 못할 게 없는 그 어떤 검은 세력이 정보를 캐내 박계동이라는 도구(vehicle)을 통해 폭로했다고 생각합니다, 북한 대남사업부의 이런 작전은 이후 또 보여드리겠습니다. 1995년 10월 25-31간 김대중은 평민당 의원들과 일부 학자들을 이끌고 중국에 갔습니다. 학자로서는 저와 김태동 당시 성군관대 교수가 따라 갔습니다. 제가 증인인 것입니다. 당시 저는 한국군의 비리를 많이 폭로했기에, 김대중과 좌익의 거두들과 심지어는 북한의 현 고위자들에도 ‘민족주의적 애국자’(빨갱이)로 오해돼 있던 시기였습니다.
10월 28일 경. 김대중은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고 혼자 기자들을 불러 노태우로부터 20억을 받았다 발표했습니다. 김대중을 따라 북경에 갔던 임동원-이종찬-천용택-김상현-임채정 등 그 누구도 김대중의 속뜻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이들 중진들은 물론 김대중을 수행했던 모든 30여명의 정치인들 모두가 다 김대중에게 “왜 그런 발표를 했느냐”며 원망을 했으니까요.
하지만 김대중의 술수는 졸개 정치인들보다 앞섰습니다, 그것이 김대중의 창작물인지 아니면 간첩의 지령인지는 모릅니다. 그러자 새누리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이 ‘20억 +알파’론을 폈습니다. 이는 수가 한참 모자라는 자충수였습니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은 김대중은 늘 술수가 매우 높은 간첩들의 보좌를 받고 있다는 가정(assumption)입니다. 지면상 여기에서 설명드릴 수는 없지만 이 가정은 언제나 성립했습니다.
고수의 작전은 늘 쿠션의 역학을 이용합니다. 새누리당의 ‘플러스 알파’는 국민으로부터 역풍을 맞았습니다. 국민의 목소리는 이러했습니다. “야, 탄압받던 김대중이 20억 받았다면 노태우 밥상머리에서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도대체 몇 천억을 받았다는 가냐?” 김영삼이 코너로 몰렸습니다. 감이 뛰어나다는 김영삼이 졸부적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자기에게 집중된 시선을 전두환과 노태우에 전환시켰습니다. “야, 저 두 군사독재자들이 죽일놈들이다, 12.12쿠데타 해서 정권잡고, 광주에서 시민학살한 놈들이다. 당장 잡아넣어라”
당시는 언론이 다 민주화 편이었고, 여당과 검찰은 집권자 김영삼이 물라면 무는 개들이었으며 법관들도 알아서 기었습니다. 검찰보고서 내용은 1980년의 내용이나 1995년의 내용이나 똑 같습니다. 단지 다른 것은 똑 같은 사실을 놓고 1981년의 대법원 판사들과 1997년의 대법원 판사들의 해석이 다른 것입니다.
1995년 검찰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록했습니다.
1) 5.18 첫날, 시위대 학생 250여명이 전남대 정문 앞에 정렬해 있는 공수부대원들에 각이 진 돌멩이를 가방에서 꺼내 먼저 공격함으로써 7명의 공수부대원의 얼굴에 피가 흘렀다
2) 살인행위를 먼저 시작한 측도 시위대였다
3) 시위대의 대부분은 광주에서도 천대받는 양아치-철공-목공-석공-껌팔이-구두닦이 등 59종의 막노동 분야에 종사하는 부나비들이었고 이들의 수는 불과 400명 정도였다.
4) 이들과는 별도로 600명의 조직화된 외지로부터 온 시민군이 형셩돼 있었고, 이들은 5월 21일, 극비리에 이동 중인 20사단 지휘부를 공격하여 사단장 지프차를 포함한 20사단 지휘부 차량 14대를 탈취하고, 그것을 아시아자동차라는 방산업체로 끌고 가 증표로 보여주며 신형 장갑차 4대와 370여대의 군용트럭을 빼앗아 전라남도 17개 시군에 꼭꼭 숨어있는 44개 무기고를 사전정찰에 의해 파악한 후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전광석화의 속도로 털어 5,408정의 무기와 8톤 TNT-뇌관-도화선을 탈취하여 도청지하실에 순식간에 폭탄으로 제조해 놓았다
5) 시위대는 광주 대부분의 파출소를 불태웠고, 경찰을 포로로 잡았으며, 경상도 사람들을 집단폭행하여 살해했고, 경상도 차량과 상점을 불태웠고, 방송국들을 불태우고 세무서를 불태우고 사가에 들어가 강간, 원한살인, 강도-강간 행각을 벌였다.
6) 시위대는 장갑차를 앞세워 김대중이 키운 여배우 문근영의 외조부 류낙진 등 좌익수 170여명이 수용돼 있고 2,700여 수감자가 들어있는 광주교도소를 6차례 공격했다. 공격한 동기는 북한 지령이었으며, 목적은 이들을 해방시켜 폭도화 하자는 것이었다.
7) 폭도들은 무장하여 계엄군에 대적하여 수많은 전투를 벌였다.
이런 검찰보고서를 읽은 1981년의 대법원 판사들은 ‘5.18은 김대중이 배후 조종한 내란사건’이라 판결했고, 1997년 대법원 판사들은 ‘5.18은 전두환이 일으킨 내란 사건’이라 판결했습니다.
어째서 민주화 판사들은 5.18을 전두환이 일으킨 내란사건이라 했는가요? 1997년의 좌익판사들은 이렇게 판결했습니다. “광주시위대는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결집된 준-헌법기관인데 이를 무력으로 탄압한 행위는 내란이고, 이 민주화 시위는 전국적으로 빠르게 확산됐어야 했는데 전두환 등이 이를 조기에 진압한 것은 내란이다. 5.17은 내란을 목적으로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여 선포한 것으로 그 자체가 국민에 외포감을 심어준 해악의 고지이며 그 자체로 내란이다. 그리고 바지에 불과한 최규하 대통령을 억압하여 재가를 얻어내 집행한 것은 헌법기관인 대통령을 무력화시킨 것임으로 이 행위 역시 내란이다”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 저는 팩트가 들어 있는 문서로만 말씀드립니다, 이런 판결문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오직 인민군 판사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번 채동욱 검찰이 국정원을 파괴하기 위해 쓴 공소장 내용을 아시나요? 새누리당 율사출신 김진태 의원이 말한 대로 이 공소장은 인민군이나 쓸 수 있는 적색 공소장입니다. 1997년 인민군 판결을 이끌어낸 나쁜 검사가 바로 지금의 검찰총장 채동욱이었습니다. - 이후 계속
2013.7.31. 지만원
http://system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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