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과 비-뉴턴의 관찰력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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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3-06-12 15:34 조회11,75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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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과 비-뉴턴의 관찰력 차이
1980년 3월 28일 경향신문이 북한특수부대 남파 보도
경향신문은 북한이 ‘1979년 5월 당시의 남한사회 혼란’을 “혁명전야의 시국”으로 규정하고 1980년 봄을 목표로 하여 남한에서 전국적 봉기를 일으키려 했다는 내용을 일본의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하면서 보도했다. 이 내용은 탈북자들의 진술(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 내용, 김대중의 행동, 광주의 행동, 군의 정보판단과 모두 일치한다. 부마사태, 사북탄광폭동, 광주반란이 다 설명되는 대목이다.
http://www.systemclub.co.kr/board/bbs/board.php?bo_table=board01&wr_id=6442&page=6
아래는 같은 내용을 다룬 동아일보 기사다.
김일성의 3호청사 비밀지령
최고의 거물간첩 출신 김용규는 1976.9.경 동료간첩 2명을 사살한 후 귀순했고, 그가 운영하던 동북아연구소에서 “김일성 비밀교시”를 작성하여 일본 산케이신문 및 문예춘추에 연재하였다. 김일성이 대남작전부서(통전부) 간부들에 지령한 이른바 ‘김일성의 비밀 교시“는 그가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놓은 ”-영웅칭호를 받은 남파공작원의 고백-태양을 등진 달바라기“(2013.5.8. 글마당) 207-260쪽에 수록돼 있다.
그 중에는 김일성이 1979년 11월, 3호청사 간첩 간부들에게 10.26사태가 수습되기 전에 남조선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전민봉기(주: 전국민의 봉기)를 적극 유도하라 했다는 비밀교시가 들어 있다. 참고로 김일성 집무실이 1호 청사인 모양이다.
“10·26사태는 결정적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징조입니다. 박정희가 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은 권력층 내부의 모순과 갈등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첨예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적들은 지금 계엄상태를 선포해 놓고 서로 물고 뜯고 하고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연락부에서는 이 사태가 수습되기 전에 선 손을 써야 합니다. 남조선의 모든 혁명역량을 총 동원하여 전민 봉기를 일으킬 수 있도록 적극 유도해야 합니다.” (1979년 11월 3호청사 부장회의)
김대중의 미친 듯한 망동
빨갱이 김대중은 김일성이 원하던 ‘전민봉기’를 획책했다.
김대중은 4월 10일, 5월 1일, 5월 10일 3회에 걸쳐 북악파크에서 문익환, 예춘호, 장기표, 심재권 등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 집단을 이끌고 전국 폭력시위에 의한 국가전복 계획을 수립하고 김대중의 혁명내각을 작성했다.
5월15일은 서울역에 10만 시위대가 모여 버스로 경찰을 깔아 죽이는 정도에 이르렀다. 이에 극도로 고무된 김대중은 5월 16일,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처럼 감히 제2차 ‘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을 발표했다. 5월 22일을 기하여 군인, 경찰을 포함한 전국의 모든 국민은 검은 리본을 달고 전국적으로 봉기하여 정부를 전복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이었던 것이다.
1980년 5월은 전민봉기의 달
김일성의 ‘전민봉기 획책 지령’과 김대중의 ‘전민봉기 획책 행위’가 세트로 맞아 떨어진 것이다. 1980년 5월 4일부터 남한 사회에서는 갑자가 데모의 광풍이 불기 시작했다. 김대중 세력은 주로 학생들을 선동하여 최규하 과도정부를 즉각 해체하라 겁박하였고, 감히 5월 22일을 기해 모든 국민에 검은 리본을 달고 전민봉기에 나서라 선동했다.
전국적으로 발생한 5월의 극렬한 시위는 정확히 북한의 대남작전부가 참으로 치밀하게 제작한 ‘시위 전략’과 ‘시위전술’을 그대로 실행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치밀한 북의 대남공작 두뇌들이 남쪽 학생들에게 그냥 ‘시위 전략’과 ‘시위전술’만 내 던져 주고 ‘이대로 하라’ 했을까?
이전에 침투해 있던 수많은 고첩들이 학생 전위세력을 양성하여 그들에게 일일이 행동을 지시해 주고, 시위 현장의 구석 구석에서 야구 감독들처럼 시위상황을 관찰하며 전위대 주장선수들에 사인을 주고, 순간순간의 상황을 개척-창조해 나가야 했을 것이다. 이렇게 하자면 전국적으로 발생한 과격한 시위현장들에는 얼마나 많은 요원들이 투입되어 기획-연출-현장지휘 감독-기록-통신 등의 작업들을 몰래 수행하였을까?
사람마다 판단이 다르겠지만 줄여 잡아도 후방인력을 빼고 전방에 투입된 인력만 해도 2,000명은 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들은 정체가 폭로되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 철칙이다. 서울에는 1,000만 이상의 판단력을 가진 시민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그들 중에 간첩을 보았다는 사람 거의 없다, 그렇다면 서울에는 간첩이 없다는 말인가? 정체를 숨기지 못하면 자기도 죽고 북한의 가족들도 죽는다, 그러니 이들의 위장기술이 얼마나 뛰어나겠는가? “요새 간첩이 어디 있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대부분 전라도 사람들이거나 빨갱이들이다. 지각 있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면 그는 위장된 빨갱이일 것이다.
5.18광주에는 얼마나 많은 폭동의 감독-코치-주장선수들이 파견됐을까?
우선 북한의 ‘조선노동당출판사’가 1985년에 발간한 “광주의 분노” 제35면에 게재된 글을 보자.
”600여명으로 구성된 폭동군중의 한 집단이 무기고, 폭약, 뢰관들을 빼앗아내었고, 200여명으로 구성된 또 다른 한 폭동집단은 괴뢰군 199지원단 제1훈련소의 무기고를 기습하여 숱한 미기를 탈취하였고, 지원동 석산의 독립가옥에 보관되어 있는 많은 폭약과 뢰관들을 빼앗아내었다.
200여명으로 무어진('묶어진'의 북한말) 또 다른 한 폭동집단은 시내의 향토예비군 무기고들을 들이치고 많은 총들을 뢰획하였다. 그리고 카토릭센터 앞에서는 괴로군 지방계엄군을 포위하고 놈들의 군용차와 여러 대의 버스를 탈취하였다.
이리하여 21일 오전부터 오후 4시까지 카빈총 2,240정, M1보총 1,235정, 권총 28정, 실탄 46,300여발이었고, 장갑차 4대, 군용차량 400여대에 달하였으며, 수백키로그람에 달하는 폭약과 수백개의 뢰관들을 획득하였다. 무기획득을 위한 봉기군중들의 투쟁은 이날 오후부터 광주의 주변지역으로 확대되었다. 라주에 진출한 폭동군중은 괴뢰 경찰서 산포지서, 로안지서 . . . 털은 무기고들 나열“
북한 책을 보면 600여명 + 200여명이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게 한다.
뉴톤의 관찰과 비-뉴톤의 관찰
600여명이 출현한 사실과 그들이 수행한 현란한 작전내용이 “5.18관련사건수사결과” 보고서 92쪽 하 5줄로부터 93쪽 상 3줄에 이르기까지 총 8줄에 걸쳐 명시돼 있다.
"02:30경 용산을 출발,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08:00경 광주에 도착한 20사단 지휘차량 인솔대는 광주공단 입구에서 진로를 차단한 수백 명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공격을 받고 사단장용 짚차 등 지휘용 짚차 14대를 탈취 당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사병1명이 실종되고(수일 후 복귀), 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09:00경 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온 시위대 3백여 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시위대 3백여 명이 아세아 자동차 공장을 점거하고, 장갑차 4대와 버스 등 차량56대(주: 356대의 오타로 보임)를 탈취하여 광주시내로 진출하였음"
바로 위 기록에 북한특수군 규모가 600명이라는 것이 진하게 암시돼 있다. 이런 의심의 생각을 가지고 같은 검찰보고서의 기록들을 읽어내려가면, 300여명의 정예 특공대들이 극비중의 극비인 20사단 사령부의 이동계획을 알아내, 광주톨게이트 부근에 매복해 있다가 사단장 1호차를 포함하여 사단사령부 지휘용 지프차 14대 및 트럭을 빼앗아 아시아자동차로 달려가 위세를 보이고 명령에 복종하라며 4대의 장갑차와 374대의 군용트럭 및 그 열쇠들을 탈취해 전남 전지역에 위치한 44개 무기고로 향했고,
전남 전 지역에 산재한 44개 무기고를 4시간 사이에 털어 2개연대분 5,408정의 무기를 탈취하였고, 8톤트럭 분의 TNT와 뇌관 및 도화선을 탈취하여 도청 지하에 옮긴 후 순식간에 폭탄으로 조립하여 계엄군을 향해 광주시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겠다 협박했고, 좌익수가 득실거리는 광주교도소를 6회씩이나 공격했고, 경찰과 군을 차량으로 깔아죽이고, 돌로 때려죽이고, 총으로 쏘아죽였다.
20만명 이상이 동원된 전남 전지역의 도시게릴라작전을 기획-지휘-연출한 지휘부는 절대로 전라도 사람들이 아니다. 왜? 김대령 박사도 그의 책에서 지적했듯이 계엄군이 광주에서 빠져 나간 직후인 5월 22일 오전에 광주의 원로-지식인들은 그 엄청난 사태를 지휘한 지휘부가 보이지 않는 데 대해 경악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발성한 탄식이 “속았다!” " 무기를 반납하자" 였다. 당시의 광주원로-지식인들 스스로가 외부세력의 존재를 감지했던 것이다.
5월 21일 오후 4시에, 계엄군에는 뒤늦게 자위용 발포권이 허락됐다. 그동안 극도로 자제해왔던 발포가 정식으로 허용된 것이다. 이로 인해 광주시민들은 총에 맞아 죽을까 거리로 나오지 않았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은 오직 어린 중고등학생들과 천대받고 지각없던 부나비 인생들이었다. 대규모로 떼지어 다니는 군중, 집경한 군중이 사라진 것이다.
조갑제가 광주에 갔다는 날은 더욱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던 5월 23일이었다. 당시는 그의 말대로 광주시가 계엄군에 삼엄하게 포위되어 있었다는 그 시간 대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조갑제야 말로 어떻게 그 삼엄한 포위망을 뚫고 광주로 들어갔는지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조갑제는 자기 눈에 북특수군이 보이지 않있기에 특수군이 오지 않았다 강변한다. 그렇다면 조갑제가 광주에 들어갔다는 주장도 당시에 보았다는 사람이 없으니 거짓말이 아닌가?
만일 이 시간대에 행동거지와 눈빛이 다른 북한특수군이 집단 단위로 행동한다면 금방 발각이 된다. 소요사태를 기획-지휘-연출한 북한특수부대 요원들의 대부분도 인근 산으로 피했을 것이고 그 일부가 보이지 않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소단위로 다니면서 교도소 공격을 지휘했을 것이고, 시민들끼리 오인사격이 발생하도록 장면 장면을 꾸미고 다녔을 것이다. 이 때의 게릴라작전에 필요한 특수군 인력은 다다익선이 아니다. 많으면 들킨다.
군의 정규전, 게릴라작전을 이해하는 사람들, 적의 생태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군인들 중에서도 그리 많지 않다. 이런 정규-비정규 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과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검찰보고서’의 내용만 읽어도 600여명의 북한특수부대원 규모를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600여명의 결집력과 기획력, 대담성은 5.18주력부대인 420여명으로 집계된 오합지졸, 양아치들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절대로 아니다,
조갑제의 관찰력, 청맹과니 수준
조갑제는 2007년 “공수부대의 광주사태”라는 책을 냈다. 그 90%는 남의 글들을 마우스로 긁어다 붙인 것들이다. 공수부대 대대장의 증언, 현장 지휘관들의 증언, 시민군 증언, 공무원 증언, 그리고 맨 뒤에는 “서울지검·국방부 검찰부의 5·18수사보고서(全文)”이 붙어 있다. 분석을 위한 책자라기보다는 자료들을 마우스로 긁어다 붙인 합철물인 것으로 생각됐다.
그런데 이번 6월에 갑자기 급조된 책이 또 하나 나왔다. 이번의 책 제목은 “조갑제의 광주사태”다. 이 책은 지난 2007년에 낸 “공수부대의 광주사태”라는 책 내용에 1. 북한군은 오지 않았다! 4. 全斗煥 단죄는 正義를 구현했나? 이 두개의 항만 더 추가된 것이다.
그런데 매우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서울지검·국방부 검찰부의 5·18수사보고서(全文)”은 2007년 책에 제7항으로 붙여져 있고, 2013책에는 제9항으로 붙여져 있다. 바로 조갑제가 두 권의 책에서 동시에 취급했던 이 검찰 보고서에 “300명이 20사단 지휘부를 기습하고 600명이 아시아자동차로 몰려가고...”의 매우 중요한 내용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중요한 부분은 조갑제의 시선을 끌지 못했다. 바라 보면서도 보지 못한 청맹과니였던가 아니면 아예 읽어보지도 않았던 것인가?
열 사람을 인솔하여 같은 것을 보여주었는데도 ‘무얼 보았느냐’ 물었더니 본 것이 다 달랐다. 관찰력의 차이다. 뉴턴에 비친 사과와 비-뉴턴에 비친 사과가 다르듯이 이른바 내공의 차이인 것이다.
솔직히 필자는 예로부터 조갑제의 ‘조’자도 피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그는 최근 언론방송 매체들을 마치 안방처럼 드나들면서 그리고 수많은 강연기회를 만들어 매우 중요한 애국활동에 찬물을 끼얹고 있으며, 국가의 장래를 위태롭게 만들고 있기에 이 글을 쓰는것이다.
그는 1) 5.18에는 절대로 북한군이 오지 않았다“며 역사를 바로 잡으려 노력하고 있는 애국세력의 진로를 맹렬하게 방해하고 있으며 2) 최근 며칠 사이에 갑자기 행동방향을 180도 바꾸어 한미연합사 해체와 주한미군철수, 나아가서는 한미동맹 파기까지 주장하면서 내적과 외적의 주장을 대변하고 있다. 이로 인해 5.18세력, 전라도 세력, 좌익 세력, 야당세력은 조갑제의 발언을 내세워 그들의 주장에 날개를 달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이 글은 분석에 대한 조갑제의 내공이 매우 빈약하니 무시해 달라는 주문을 하기 위해, 그리고 국가안보를 위해서라면, 그의 방해 행위는 ‘무시’하고 넘어갈 가벼운 대상이 아니라, 적극 나서서 제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데 대한 당위성을 부각하기 위해 쓴 것이다. 이는 우익간의 내분이 절대 아니다.
2013.6.12.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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