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개입역사” 은닉한 국정원과 월간조선 기자들 청문회 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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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3-06-03 14:59 조회12,29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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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개입역사” 은닉한 국정원과 월간조선 기자들 청문회 서야
1996년 11월 10일, 김용삼 기자는 중국에서 황장엽과 김덕홍을 만나기로 했지만 황장엽이 나올 수 없는 처지가 되어 김덕홍만 만났다. 황장엽은 급하게 수첩을 찢어 딱 한 가지 메모를 써서 김덕홍에 주면서 이 메모를 김용삼 기자에게 주라 했다. 얼마나 중요한 내용이었으면 다시는 못 만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급하게 수첩을 찢어 메모를 썼을까?
그 메모지에는 “광주학생문제도 그들을 뒤에서 사주한 북의 공명주의자들이 책임전가한 일이다”라는 표현이 있었고, 아마도 이 메모지는 지금도 김용삼 기자가 보관하고 있을 것으로 믿는다.
황정엽과 김덕홍은 1997년 2월 12일 귀순했다. 그리고 귀순 16개월만인 1998년 6월, 김용삼은 그의 공작 스토리를 월간조선 7월호에 싣기 위해 황장엽과 김덕홍을 만나자 했다. 만나는 목적 가장 중요한 것은 “광주학생문제”가 5.18을 의미하는 것인지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김덕홍의 폭탄발언이 나왔다.
“여기 남한에 와서 꼭 하고 싶은 얘기를 해야 되겠다. 조선노동당 대남 부서가 있는데 그 부서에 소속되어 있던 상당수 사람들이 광주민주화운동이 끝난 후에 일제히 훈장을 받았다. 내 친구들이 그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들도 광주민주화운동 후에 훈장을 탔다고 축하 술을 마시면서 그들에게 직접 들은 것이다”
이 자리에서 ‘광주학생문제’라는 말은 5.18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결론적으로 북한의 핵심 권력부에 있던 두 사람은 “5.18은 북한이 저질렀고, 그 결과 광주개입을 주동한 고위간부들이 무더기로 훈장을 받아 주모자들이 모두 훈장을 받아 축하연을 벌였다”는 기막힌 역사적 진실을 김용삼 기자에 털어놓은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황장엽이 마치 마지막 숨을 쉬는 순간에 마지막으로 남겨야 한다는 유언자의 심정으로 수첩을 찢어 광주의 진실을 전했을까?
그런데! 이렇게 어렵게 그리고 귀하게 확보한 ‘역사적 진실’을 역적 김대중이 임명한 이종찬과 월간조선 기자들이 공모공동하여 땅에 묻기로 합의했다. 용서할 수 없는 범죄행위를 한 것이다. 이 시기가 바로 1998년 6월이었다. 그들이 묻기로 하면 영원히 묻힐 줄 알았겠지만 이는 이번 월간조선 5월호를 통해 김용삼 기자의 작심한 폭로로 사회일각에 알려지게 되었다.
김용삼 기자는 이번 월간조선 5월호에서 “광주 부분은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니 기사화 되면 정말 큰일 난다면서 국정원이 강력하게 보도자제 협조요청을 해오는 바람에 기사작정 과정에서 빠졌다“고 증언했다. 이 기사가 나갔더라면 당시의 상황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김영삼과 김대중이 날아가고 전두환이 동정을 받았을 것이며 노무현도 당선될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확실한 사실로 드러난 것은 국정원의 은닉음모다. 당시의 국정원장은 이종찬이었다. 이종찬은 김대중의 심복이다. 그 다음의 범인은 누구인가? 누가 진범이었는지를 우리는 반드시 밝혀야 한다. 김용삼 기자는 당시부터 지금까지 이 기사에 대한 애착을 느끼며 지난 16년 동안 참았다가 5.18 진실 규명 운동이 한창일 때 비로소 이를 세상에 알렸다. 서희건이라는 사람은 족적이 별로 발견되지 않는 무명인(N0body)으로 2002년 1월 19일 오랜 지병으로 사망했다 한다.
2013.6.3.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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