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프란체스카 여사 비망록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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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thfinder12 작성일21-06-25 00:32 조회4,90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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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중앙일보에서 프란체스카 여사의 비망록을 찾아내어 소개하고 신문에 연재하였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검색이 되었고, 인터넷으로 검색이 되는 것은 그 일부분에 불과한데 6/25를 맞이해 이를 요약하여 시스템 클럽에 싣습니다. 연도가 표기되어 있지 않아 순서는 일부 틀릴 수 있습니다.
<프란체스카 여사 비망록 중 요약>
북한군이 침공했다는 보고
신 장관은 개성이 상오9시에, 그러니까 내가 치과로 떠나던 그 시간에 이미 함락되었고 탱크를 앞세운 공산당은 춘천근교에 도착했다고 보고했다. 대통령은 『탱크를 막을 길이 없을텐데…』라며 입속말을 했고 얼굴엔 어떤 위험을 느끼는 듯한 불안의 빛이 순간 스치고 있었다. (여러 사람이 걱정없다고 하였고) 신 국방까지도 대통령에게 『크게 걱정하실 것 없읍니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경찰 정보는 「상황이 심각·위급하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잠을 잊은채 자정을 넘겼다. 침통한 모습에 나는 그때까지 한마디도 말을 건낼 수가 없었다.
맥아더 장군과의 통화
26일 새벽3시, 대통령은 동경의 「맥아더」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속부관이 전화를 받았다. 그는 장군을 깨울수 없으니 나중에 걸어드리겠다고 대답했다.대통령은 벌컥 화를 내며 『한국에 있는 미국 시민들이 한사람씩 죽어갈 터이니 장군을 잘 재우시오』 라고 고함을 쳤다. 나는 너무나 놀라 수화기를 가로막았다. 대통령은 『마미, 우리 국민이 맨손으로 죽어가는데 사령관을 안깨우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요』라며 몸을 떨었다. 상대편도 미국민이 한사람씩 죽을 것이란 말에 정신이 들었는지 『각하,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하더니 「맥아더」사령관을 깨우겠다고 했다.
평소에 대통령은 「맥아더」장군을 그의 소령 시절부터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름은 기억에 없지만 「맥아더」장군의 장인이 「한국우호연맹」(League of Friends of Korea)의 고참멤버로 대통령의 독립운동 시절 때부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사령관이 전화를 바꾸자 대통령은 『오늘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은 누구의 책임이오. 당신 나라에서 좀 더 관심과 성의를 가졌다면 이런 사태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오. 우리가 여러차례 경고하지 않습디까. 어서 한국을 구하시오』라며 무섭게 항의했다. 맥아더 사령관은 바로 동경 극동사령부의 무기담당 「히키」(Hicky)장군에게 명해 무스탕전투기 10대, 1백5mm 곡사포 36문, 1백55mm 곡사포 36문, 그리고 바주카포를 긴급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대통령이 전황보고를 받고 경무대로 돌아올 때 서울상공에는 적의 야크기가 맴돌고 있었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적기였다. 적기가 뜰 때마다 대통령이나 나나 방공호로 들어가야 했고 서울시민들의 얼굴엔 공포의 그림자가 둬덮이기 시작했다.
대통령 피난
머리맡의 시계는 27일 새벽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신성모국방장관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이어 서울시장 이기붕씨와 조병옥씨가 들어왔다. 신장관이 간곡히 『각하, 서울을 떠나셔야 겠습니다.』 남하권유였다. 『안돼! 서울을 사수해! 나는 떠날 수 없어!』 대통령은 그 이상 아무말도 않고 문을「쾅」 닫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신장관은 침통한 표정으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탔다. 차창이 깨지고 좌석의 스프링이 튀어나온 3등객차였다. 대구에 도착한 것은 상오11시40분이었다. (...) (대구에서) 대전으로 돌아오는 중 대통령이 탄 비행기는 두번이나 야크기의 추적을 받았다. 조종사 「스미드」는 거의 땅바닥에 닿을 듯 저공비행을 하고 계곡을 타며 적기의 공격을피했다. 대통령이 돌아올때까지 7시간을 나는 비행장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밤8시반 「무초」대사와 함께 대통령이 도착했을때 반가와 왈칵 눈물이 솟았다.
나는 사람을 시켜 시내 쌀값을 알아보도록 했다. 소두 한말 (One Small Mal) 에 2천4백원이었다. 서울을 떠날때 1천5백원 하던 게 열흘사이에 60%나 뛰어오른 셈이다.
무초 대사, 적기의 공격으로 흙투성이
29일 상오8시30분「무초」대사가 도착했다. 그는 지사관저로 들어서면서 『꼴이 사나와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무초」대사의 모습은 꼭 쓰레기더미에 파묻혔다가 방금 나온 사람이었다. 옷은 몽땅 젖은데다 곳곳이 찢어졌고 흙탕투성이였다. 수원에서 지프를 타고 오는동안 서너차례 적의 야크기 기총소사를 받아 그때마다 논두렁과 수채구멍에 뛰어 숨어들었다는 것이다.
맥아더 장군, 전선 파악을 위해 도쿄에서 도착한 일화
수원농대에서 대통령은 감격적으로 장군을 얼싸 안았다. 대통령은 『장군! 장군 구두가 지금 모를 밟고있소.』「맥아더」장군은 『각하, 몰랐읍니다. 죄송합니다』고 깍듯이 사과를 했다. 대통령은 이 이야기를 뒤에 들려주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이승만 대통령, 최후 상황에 대한 대비를 하다
대전으로 남하한 뒤 대통령은 침실머리맡에 모젤 권총 한자루를 놓고 자는 습관이 생겼다. 나는 차디찬, 그리고 싸늘한 총구가 기분나빴다. 나의 이런 표정을 읽은 대통령은 『최후의 순간 공산당 서너놈을 쏜뒤에 우리 둘을 하느님 곁으로 데려다 줄 티킷(Ticket)이야』라며 내 손을 꼭 잡았다.
<대구에서 있었던 일> 이날밤 대통령은 나를 불러세우고 동경「맥아더」사령부로 떠나라고 했다. 거의 명령조였다. 『마미, 적이 대구방어선을 뚫고 가까이 오게되면 제일먼저 당신을 쏘고 내가 싸움터로 나가야돼요. 그쪽에 부탁을 해놓았으니 당신만은 여기를 떠나주시오.』
나는 절대로 대통령의 짐이 되지 않을 것이며 최후까지 대통령과 함께 있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야크기의 공격, 채병덕 장군 전사
27일 새벽, 갑작스런 비행기폭음에 대통령과 나는 소스라쳐 깨어났다. 시계는 새벽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적의 야크기가 대구상공에 나타난 것이다. 야크기는 우리집 위를 바짝 지나갔다. 적기는 대구운동장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갔다. 내 생각에 그들은 운동장을 비행장으로 오인한 것 같다. 그당시 대구지사관저 앞마당에는 방공호가 있었으나 피할 틈도 없었다. 국방장관은 정오쯤 와서 하동은 적의 수중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채병덕 장군이 전투중 상오11시45분에 전사했다. 그는 무기에 관한 전문지식과 무기관리에 관한한 제1인자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던 장군이다.
20일 저녁, 적군은 이리에서 전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태풍으로 오끼나와에서 B-29가 출격을 못해 적군은 여유만만하게 진군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군들이 버리고 간 그 무기들을 우리아이들이 주웠더라면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워커」장군은 민간인복을 입어놓으면 누가 누군지 구별할 길이 없다고 실토하고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총질을 할 수도 없다는 입장을 설명했다. 「워커」장군은 처음으로 대통령에게 자기네 병사들이 아직 게릴라전에는 미숙하다고 자백했다.
이승만 박사의 곡예 운전과 미국 경찰도 감동시킨 연설
옛날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대통령은 워싱턴의 프레스클럽에서 연설을 할 기회가 있었다. 뉴욕에서 워싱턴까지 가려면 시간이 급했다. 대통령은 헤드라이트를 켠 채 신호를 무시하고 논스톱으로 곡예운전을 했다. 2대의 기동순찰 오토바이가 추적을 했지만 대통령의 스피드를 따라잡지 못했다. 그때는 어찌나 혼이 났는지 당장 이 양반하고 결별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프레스클럽에는 정시에 도착했다.
대통령은 연설을 시작했고 입구에는 2명의 기동순찰대원이 연설이 끝날 때까지 지켜서 있었다. 연설은 감동적이었다. 수십번의 박수가 터졌다. 감시 경찰관은 대통령의 연설에 감동, 따라서 박수를 치는 것을 나는 보았다. 연설이 끝나고 대통령이 참석자들과 악수를 나누는 사이 경찰관은 나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기동경찰 20년에 내가 따라잡지 못한 단 한명의 교통위반자는 당신 남편뿐이오. 일찍 천당에 안가시려거든 부인이 조심을 시키시오.』 그들은 씩 웃고는 V자를 그려 보이며 되돌아갔다
(재빨리 운전해 무초대사를 방문한) 대통령은 미군들이 한국의 지형을 모르는 것이 큰 약점이라고 지적하고 우리군경을 북괴군과 구별조차 못하는 형편이니 미군부대에 한국군을 배속시켜 함께 싸우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했다.
공산군의 서울 약탈과 10대들의 천국이 된 거리
경무대를 지키다 7월3일 간신히 서울을 탈출한 경찰관이 서울의 비참한 소식을 알려왔다. 쌀값은 10배로 폭등했고 그나마 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화교들은 장개석 총통의 사진을 떼어버리고 공산군들을 맞이했다고 한다. 공산군들은 온갖 약탈을 자행, 쌀이며 손목시계·만년필 등 닥치는 대로 빼앗아 북쪽으로 보내고있다는 것이다.
감옥에 갇혔던 빨갱이들이 서울시의 책임자가 되고 거리의 공산군은 10대가 대부분이며 13살짜리도 끼어있다는, 모두가 처절하고 끔찍한 소식뿐이었다.
국방장관은「딘」장군의 사단병력5천명 중 절반이상이 희생됐고 미군은 금강에서 6마일을 후퇴했다고 보고했다. 미군은 군산에서 적과 대치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달았다.
약품을 모두 전선으로 보내버린 대통령
대통령과 나는 온몸에 땀띠를 뒤집어썼다. 대통령의 잔등은 모기에 물린 곳까지 겹쳐 보기에 딱할 정도였다. 워낙 물이 부족하여 밤이면 물 한 대야를 떠다가 수건에 적셔 대통령의 땀을 닦았지만 땀띠는 점점 심해져 진물까지 흘렀다. 나는 워커 장군에게 땀띠연고를 구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았다. 무초 대사나 워커 장군, 그리고 우리 집에 드나드는 미국인들은 나를 보면 “마담 리, 도와드릴 일이 없습니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라도 알려주세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렇지만 대통령은 그들에게 사사로운 부탁은 일체 못하도록 나에게까지 엄명을 내리고 있었다.
나는 참다못해 워커 장군에게 땀띠약을 부탁한 것이다. 장군은 땀띠연고 외에도 다른 상비약과 영양제를 한 박스 보내왔다. 그런데 내가 부엌일을 보러 잠시 들어간 사이에 약상자가 대통령의 눈에 띄고 말았다. 대통령은 나에겐 한마디 의논도 없이 아침보고를 하러 들어온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일선의 우리 아이들(병사들)에게 갖다 주라”며 약상자를 맡겨버렸다. 약상자뿐만 아니라 친정에서 보내온 비타민까지 몽땅 합쳐 주어버린 것이다. 내가 부엌에서 나올 때 신 장관이 막 약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가려는 참이었다. 너무나 안타까워 말도 못한 채 땀띠연고 하나만 빼놓으라는 사인을 신 장관에게 보냈다. 장관은 알았다는 듯 슬쩍 한 개를 빼돌리려했다. 그때 뒷머리가 따갑다는 느낌에 고개를 돌리자 대통령이 무서운 눈으로 우리 두 사람을 노려보고 서있었다. 나는 무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고, 장관도 멀쑥한 표정으로 냉큼 나가버렸다.
미군의 도둑질도 엄히 다스려야
(임 장관이 화가 나서 찾아왔다.) 미군 GI가 장관 지프를 훔쳐 타고 달아났다는 것이다. 임 장관이 미군사령부에 이 사실을 항의했더니 그 쪽에서는 『우리가 당신나라에 수많은 지프를 주었는데 그까짓 한대쯤 없어진걸 뭐 그리 대단해서 항의를 하느냐』고 대답하더라며 흥분을 참지 못했다. 대통령은 임 장관에게 「무초」대사를 부르라고 했다. 대통령은 대사에게 『당신나라 정부는 그런 일을 용납하는지 몰라도 한국정부에서는 안됩니다. 미군병사들이 한국을 도우러 왔다해서 도둑질을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해서는 안돼요. 우리 땅에서는 한국인이건 미군이건 도둑질을 하면 벌을 받아야 됩니다.』
「무초」대사는 금시초문이라며 즉시 판상을 하고 그 병사를 색출, 처벌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상한 것은 모든 게 참담하고 헐벗고 굶주렸어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도둑질을 한다는 사건보고는 한 건도 없었다.
전선을 오가는 젊은이들을 실은 기차
기차는 밤새도록 북으로 올라가고 내려오고 있었다. 젊은이들을 가득 태우고 올라간 기차가 남으로 내려올 때는 그만큼 많은 부상병들을 태우고 왔다. 삶과 죽음의 교차를 매일같이 목격하는 것이다.
전선으로 향하는 열차는 불빛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차단을 해 검은 공룡이 움직이는 것 같았고 오로지 전의에 불타는 젊은이들의 군가와 함성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열차가 되돌아 올 때는 불을 환히 켰고 창문을 통해서는 붕대를 감고 피로 얼룩진 우리 젊은이들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이 생생히 보였다. 나는 『하느님, 어서 이 전쟁을 끝나게 해주옵소서』 하며 기도를 올렸다.
최근 서울을 탈출해온 사람으로부터 또 소식을 들었다. 그는 중앙청에서 소련장교 3명이 걸어나오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서울 쌀값은 소두한말에 2만7천원이라고 한다. 대구보다 10배나 비싸다.
대통령은 적이 포진하고 있는 지역에 『동족의 가슴에 총을 겨누지 말고 국군에 투항하라』는 내용의 전단을 비행기로 살포할 것을 명령했다. 우리측의 심리전에·당황한 적은 어린아이들이 전단을 줍는 것까지도 총으로 쏘아 감히 어느 누구도 선뜻 전단을 주우려들지 않았다.
7월18일 대통령과 「무초」대사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언쟁을 했다. 대통령이「트루먼」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 중에서 『우리 한국국민은 공산군을 우리의 본래 국경인 압록강과 두만강이 북으로 완전히 몰아낼 때까지 싸울 것을 다짐하고 있다』고 밝힌 부분을「무초」대사가 빼자고 하여 두사람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이다.
날계란을 먹고 반찬 가짓수를 줄인 대통령 내외
피난 생활도 어느덧 한달이 다가온다. 이곳 대구에서 누구보다 고생을 하는 사람은 조 지사부인이다. 부인은 가정부 2명을 데리고 임시경무대의 살림을 꾸려나갔다.
대통령은 나에게 계란을 날로 먹자고 했다. 반숙이나 프라이를 하게되면 그만큼 조 지사부인의 일이 많아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대통령이 계란을 날로 먹으면 밑의 사람들도 따라서 그렇게 할 것이고 지사부인의 일감이 훨씬 줄어든다는 아이디어였다.
대구에는 사과와 토마토가 흔했다. 우리부부는 아침식사로 사과와 토마토에 날계란 2개씩을 먹기 시작했다. 모시옷에도 풀을 먹이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대통령의 눈치를 채지 못한채 전과 같은 식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신국방장관은 어김없이 상오 5시반이면 나타나 꼭 반숙을 요구했다. 지사 부인은 『대통령 모시기는 쉬운데 다른 장관님들이 더 힘들다』며 웃을때도 있었다. 대통령은 매끼의 반찬을 3가지로 제한했다.
미 24사단장 딘 장군의 생사 불명
아직도 「딘」장군에 관한 소식은 없다. 대통령은 몹시 걱정을 하며 군과 경찰에 대해 그의 생존여부라도 빨리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미 대사관 직원들은 부산으로 떠나
미대사관은 「드럼라이트」참사관을 비롯한 대부분의 직원이 부산으로 떠났다. 연락용 지프 몇대만을 남겨놓고 차량과 집기들도 부산으로 옮겨졌다. 이것은 무엇을 예고하는 징조일까? 대통령과 나는 「무초」대사가 매일같이 전화를 걸어오는 시간전에 교회를 다녀오기로 했다. 교회는 초만원이었다. 두분 목사는 차례로 『하느님은 언제고 정의의 편에 서신다』며 자유와 정의를 위해 피를 흘리는 이 땅의 젊은이와 우방군을 하느님의 은혜로 보살펴 달라고 기도했다. 설교가 끝나고 대통령은 15분간 교인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며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자』고 위로했다.
미 관계자들, 대통령의 대전 이동 만류
대통령은 지사관저식당에 앉아 모기에 시달리며 이날 밤을 꼬박 새웠다. 다음날 새벽동이 트자마자 대통령은 대전으로 가 전항을 봐야겠다고 했다. 우리 모두가 깜짝 놀랐다. 「워커」장군과「무초」대사도 극구 만류했다. 「워커」장군은 앞으로 10일 이내에 전황이 달라질 터이니 그때까지만 참으라며 제발 대전으로는 오지 말라고 했다. 장군의「제발」이란 단어에서 나는 대전을 포기하는 시간이 임박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통령이 특무대에 훈방 위주로 할 것을 지시
대통령은 김창룡장군에게 경미한 부역을 했던 서울시민들이 수사기관마다 끌려다니며 곤욕을 여러번 치르고 또 특무대에 대한 원성이 있다는데 어찌된 일인가를 물었다. 김장군은 군·검·경의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기 이전에는 과잉수사와 보복감정에 의한 여러가지 불상사가 있었지만 지금은 시민들이 억울하게 당하는 사례가 전혀 없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특무대에서 잘못된 일이 있다면 즉시 시정하겠다고 하면서 자기의 불찰로 대통령께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고 사죄했다. 대통령은 하루 아침에 바보나 병신을 만들수는 있지만 인재는 단시일에 만들수 없으니 특히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사람들은 더욱 신중히 다룰것이며 처벌보다는 훈방위주로 일을 처리하라고 단단히 일렀다.
행색이 누추해 대통령과 서울시장을 몰라본 참외 장수
이날밤도 대통령은 만송(서울시장 이기붕)의 잣에 대한 담례로 참외를 사주려 했던 것이다. 그 참외는 만송의 어린 두 아들 강석·강옥에게 주라는 것이었다. 참외는 1천원에 7개였다. 대통령은 참외장수에게 『덤으로 하나만 더주시오』 하며 덤한개를 집으려 하자 참외장수는 『할아버지라 싸게 드렸는데 덤까지 가져가면 순사가 잡아가요』 하며 뺏더라는 것이다. 만송의 외모가 워낙 작고 쪼글쪼글 한데다 대통령도 풀 안먹인 후줄근한 모시차림의 늙은이였으니 참외장수가 대통령과 서울시장의 일행을 알아볼리가 없었던 것이다. 『거참 참외 덤 얻으려다 순사한테 잡혀갈뻔 했다니까….』 대통령은 재미있었다는 듯 자꾸만 웃었다
부산의 식수 사정
부산의 물사정 역시 피난민의 밀집지역이 아닌 곳까지도 심각한 실정이다. 옷과 침구의 세탁은 커넝 식수도 부족한 터에 화재가 났을 경우엔 어찌나 마음이 졸이는지 사람의 목숨을 10년정도 줄어들게 한다해도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여기서 별로 멀지않은 곳에서 누더기를 걸친 수많은 피난민들이 골목을 메우고 서서 작은 주전자로 물을 얻으려고 몇시간이고 줄지어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내가슴이 이토록 아픈데 하물며 대통령의 심정이 얼마나 괴로울 것인가를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오늘이 새봄이 시작되는 「입춘날」이라고 한다. 어서 빨리 날씨가 따뜻해져 추의로 떨고 있는 국민들의 고통을 덜어주었으면 좋겠다. 주방에서 일하는 양학준노인의 말에 의하면 쌀한되에 1천1백원이고 보리쌀 한되에 팔백원이라고 한다.
서울 수복 후 맥아더 장군 차량 앞세워
「맥아더」장군이 대통령의 차를 앞세우도록 지시하려하자 대통령은 『오늘은 개선장군이 먼저 환영을 받아야하오. 장군의 차를 앞세우시오. 이것은 한국국민 전체의 뜻이요!』하고 우리차를 장군의 차 뒤에 따르도록 했다. 「맥아더」장군은 수도 서울의 기능과 권한을 한국정부에 돌려준다는 요지의 훌륭한 연설을 감격어린 어조로 말했다. 대통령도 이에 감동하여 연합군의 노고에 감사하고 전사한 유가족에 위로를 보내며 승리자로서 적에 관용을 보일 것을 바라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맥아더」원수는 주기도문으로 엄숙히 식을 끝냈는데 우리 모두는 함께 주기도문을 따라 외었다.
서울 연설 도중 공비가 수류탄 투척
거리에는 시민들이 어지러진 길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남대문 근처에 이르자 대통령을 본 시민들은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대통령은 차를 멈추게 한 후 거리에 나섰다. 삽시간에 시민들이 모여들고 대통령과 그들은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 (흐느끼기도 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대통령은 갑자기 시민들에게 연설을 하고싶어 어딘가 올라설 곳을 찾았고 마침내 그는 자동차 범퍼를 발판으로 딛고 앞에선 경호경관의 등에 몸을 의지하며 말을 시작했다.
그동안 공산치하에서 고생한 시민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이때 나는 이선영경사가 갑자기 당황하는 모습을 보았고 황비서관이 『수류탄!』이라고 외치는 소리에 대통령이 위급하다는 생각이 머리에 번쩍 떠올랐다. 나는 대통령을 끌어내려 얼른 자동차에 밀어넣었다. 또 하나의 위험이 스치고 간 것이다. 아직 서울에는 게릴라가 있다. 이경사에 의하면 수류탄이 굴러들어 왔는데 마침 그것이 불발탄이어서 우리는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북괴군의 학살과 납치
북괴군은 서울탈출에 앞서 8천여명의 요인들과 애국인사들을 납치하여 이북으로 보냈고 3천여명을 살해하였다고 조병옥 내무장관이 보고해 왔다.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다행히 형무소에 있던 2천여명의 애국인사들은 구출되었다 한다.
신국방장관이 대전에서 많은 우리 양민들의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보고해 왔다. 프란시스코수도원(천주교)내에서 7백명의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대전에서만 약 6천명이 학살당했다는 보고를 받고 대통령은 무척 비통해 했다.
대통령은 화목대신 석탄이나 토연 및 무연탄을 연료로 사용하도록 해서 산림을 보호하고 식목하여 산사태를 막아 좋은 농지를 유지하며 금수강산을 만들자고 강조하였다. 대통령의 나무에 대한 관심은 예나 어제나 다름없는 집념인 것이다.
대통령과의 만남 회상
내가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33년2월 제네바의 한 호텔식당에서였다. 어머니와 함께이던 나는 웨이터의 요청으로 한 동양신사와 합석을 하게됐다. 시선이 마주치자 『어느 나라에서 오셨나요?』하고 물었더니 신사는 『코리아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으로 1주일 전 독서클럽에서 받아보았던 『코리아』란 책의 한 귀절, 「금강산」과 「양반」이 떠올랐다. 『코리아엔 아름다운 금강산이 있고 양반들이 산다지요?』하는 나의 말에 신사는 깜짝 놀라며 반가와 했다.
국공합작을 권유했던 마셜이 국무장관이 돼 실망
세계대전을 피한다는 것 이상으로 미국국민에게 호소력을 가지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자기들이 어떤 대가를 치르면서 그짓을 하고있는지도 모르며 전쟁은 연기되는 것이지 피할 수 없다는 사실에는 생각이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다. 소련은 언제든지 준비만 되면 밀고 내려올 것이며 그들의 외교정책은 오랜 세월에 걸쳐 세밀히 계획되고 거기에 따라 준비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한국사람은 고사하고 미국인의 피의 댓가로 한국을 또다시 소련에 팔아 넘기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소련에 대한 「애치슨」의 태도가 대강 알려졌고 조만간에 소련과의 유화정책에 대해서는 다른 방침을 주장하는 사람으로 교체되기를 바랐는데 「마셜」의 임명은 우리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마셜」은 중공의 겉만 보고 장개석총통에게 강제로 국공합작의 연립정부를 세우도록 압력을 가했던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북한 지역에서의 연설에서 경호 어려워 식은땀
연설을 마친 대통령이 군중 속으로 들어가서 수많은 시민들과 악수하며 껴안고 등을 두드리는 바람에 수행했던 사람들과 정일권 장군이 무척 애쓰고 혼이 난 모양이었다. 신국방장관은 물론 항상 느긋한 김광섭 비서도 대통령의 뜻하지 않은 행동에 어찌나 놀랐던지 『목숨이 10년 이상 단축되었다』고 말했다.
무기를 숨기고있는 패잔병이나 적색분자가 끼어있을지도 모르는 군중속에서 대통령에게 몰려드는 시민들때문에 경호원들은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식은 땀을 흘렸고 김장흥총경은 그저 무사하기를 하나님께 빌었다고 한다.
대통령은 술 먹고 실수하는 사람은 쓰지 않아
이승국씨가 술을 무척 좋아해서 건국초에 대통령이 이화장으로 초청해 술로 테스트를 한 결과 너무 기분이 좋았던지 술을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 정부요직을 맡기지 않았지만 인간적으로는 무척 가까운 친척이었다.
대통령은 공직자는 사심이 없고 공정해야하며 술먹고 실수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여 술과 담배를 일체 안한다. 대통령은 젊어서 서당친구들과 어울려 시를 지으며 제법 술을 들었다고 하는데 매일신문을 발행하면서부터 『나라위해 중요한 일하려면 술마시고 실수하면 안된다』고 술을 끊은뒤 담배도 입에 안댄다.
신성모국방장관이 김창룡장군과 이선근대령을 대동하고와서, 북진중인 우리애들이 곧 평양과 함흥에 유엔군보다 먼저 진입할것이라고 보고했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크리스마스
저녁에 나는 나의 친정언니가 몇가지 크리스머스선물과 함께 보내준 작은촛불 6개를 켜놓았다. 언니의 크리스머스카드에는 『참으로 어려운 고난을 이겨내고 있는 내동생 「페니」(프란체스카의 애칭)야, 하느님께서 하루속히 한국에 평화를 내려주시어 전쟁의 공포와 괴로움으로부터 모든 사람들을 구해주시고 보호해주시기를 기도드리고 있다. 자기몸을 태워서 어두운 구석을 밝혀주는 촛불처럼 주님의 뜻에 따라 거룩하고 기쁜 성탄을 맞이하기 바란다. 새해에도 하느님께 하느님께 큰 영광을 돌릴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고 적혀있다.
재소자 상황도 고려한다
공산군들은 후퇴할때 형무소에 있던 모든 담요들을 가져가버렸고 감방의 유리창까지 다 깨뜨려 부쉈다. 전시중이라 예산이 없어 유리창도 못끼워주고 담요를 제로 줄수있는 형편이 못되어 이 엄동설한에 수감자들의 고생은 이루 형언할 수가없었다. 대통령은 사법이란 법률을 철저히 적용해서 벌을 주는것 보다는 형벌을 경감함으로써 더좋은 성과를 거둘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늘 이것을 강조해왔다. 법없이도 살수 있는 세상이 제일 좋은 세상이라고 항상 대통령은 말했다. 대통령은 여자죄수나 병자는 아무리 악질일 경우라도 특별히 고려할것을 당부했었다.
쌀값이 오르다
쌀값이 뛰어 올랐다. 사람들에게는 쌀값 오르는 것이 전황이 호전되고 있다는 오직 하나의 신호였다. 만약전쟁이 아군에 불리해 진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쌀값은 즉시 떨어진다. 쌀값은 증권시장의 주식시세처럼 민감하다 (중앙일보 필자주=일반적으로 긴급한 사태를 당하면 사람들이 먹을 쌀을 비축하려고 해서 쌀값이 오르게 마련이지만 이때는 전황이 불리해지면 사람들은 남쪽으로 피난을 가게되고 공산군이 들어와 식량을 송두리째 약탈해 갈 것이기 때문에 살값이 떨어지게 된 것이다)
대통령이 조약돌을 가져온 이유
부상병들을 위문한후 대통령은 서울역부근을 돌아 보았는데 추위속에서 대통령이 장갑도 끼지 않고 맨손으로 다니는것을 본 어떤 노인이 물에 데워 꼭꼭 싸서 자기손에 쥐고 있던 그 따뜻한 조약돌을 대통령에게 주자 그에 대한 답례로 대통령은 자기 호주머니에 들어있던 작은 잣주머니를 피난가는 그 노인에게 선물했다고 김장흥총경이 말해주었다.
대통령 공문서를 어려운 상황 속에 타자하고 있는 프란체스카 여사
요즈음 전기사정이 좋지 못해서 밤에는 촛불이나 등불을 켜고 타자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눈이 몹시 피로하다. 산업시설에 전기를 조금이라도 더 송전하여 싸우고있는 우리 장병들에게 필요한 물자와 일반 국민들의 생활필수품을 생산해 내려면 당분간 어두움을 참고 견뎌야 한다. 대통령은 ECA와 유엔이 하고있는 구제사업을 점검할 우리측 전문가가 있어야한다고 느끼고 있다. 아무튼 영어로 타자해야할 많은 일들이 내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경무대 직원도 차례를 지켜 구호품을 받아야
경무대의 비서들과 경호경관들도 전쟁의 피해를 본 전재민들인데, 폭격받고 불탄 집터위에 천막을 치고 살면서 덮을것이 없어 고생하고 있다고한다. 이 보고를 받고 대통령은 한동안 고생이 되겠지만 자기가 사는 동네의 동회나 적십자사에 각자 신청해서 차례를 기다려 구호품을 배급받도록 지시했다. 경무대 직원이라고 해서 남보다 먼저 특전을 누린다면 다른 관청직원들도 모두 같은 특전을 원할 것이니 병든 노부모를 모시고 있는 직원에겐 대통령 자신이 덮고있는 담요를 내주도록 나에게 지시했다.
국군이 미군보다 앞서 행군할 수 있는 이유
대통령은 외국으로 보내는 비밀서한은 자신이 직접 타이프하거나 나에게 타이프하도록 했다. 미제l기변사단은 차량만도 1천대이상을 보유하고 있지만 우리애들은 겨우 50대밖엔 안된다고 대통령은 염려했었다. 그러나 굳센 의지와 각오로 우리애들은 비를 맞으며 밤낮으로 산길을 행군하여 미군의 탱크와 차량을 앞지르게된 것이라고 대통령은 나에게 설명해주었다. 저녁에는 「무초」대사 축하만찬과 함께 평양입성축하까지 겹쳐 기쁨에 넘치는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대통령도 시종 「무초」대사와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만 「워커」장군이 셀러리와 당근곁에 있는 조그만 유리그릇에 담아놓은 초고추장을 야채와함께 찍어먹고 매워서 어쩔줄을 모르는 모습을 보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식량 보급을 우선하고 북한 지역 통치 생각은 나중에 해야
<대통령이 올리버 박사에게 보내는 편지 중> 북한주민들이 굶주리고 있기 때문에 북진중인 우리국군들은 식량을 주민들과 나누어 먹기 위해 하루 세 번의 식사를 두 번으로 줄이기도 했다는 보고를 받았읍니다.북한으로 식량을 보내려면 적어도 한달 이상은 걸릴 것입니다.지금부터 우리 돈으로 열심히 구호미를 사들여서 보낸다해도 시간은 더 이상 걸릴 것으로 생각됩니다.그런데도 국제연합군과 군정당국은 식량운반 같은 시급한 문제보다는 주민을 다스리는 방법과 대한민국을 여기서 제외시키는 방법에 대해서만 의논을 거듭하고 있답니다.
중공군의 참전과 무자비한 보복
중공군의 참전과 함께 자행되고 있는 북한공산패잔병들의 무자비한 보복행위 때문에 공포에 질려 고향을 떠나온 피난민들이 날마다 서울 근교의 여러 마을로 한없이 몰려들고있다. 우리정부의 행정요원들이 이 피난민들을 학교와 교회, 마을회관과 모든 민가에 수용시키고 있는데 서울 동쪽 근교에 집결된 피난민의 수효만 11만명이 훨씬 넘는다는 보고를 받았다. 물밀듯이 밀고 내려오는 30만명이상의 중공군과 공산패잔병들은 유엔군의 공격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수천명의 선량한 시민들을 앞세워 방패를 삼고 있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흰옷을 입고 일반시민으로 가장하고 있다고 한다.
병사를 아끼지 않는 무자비한 중공군
지난 며칠동안은 날씨가 몹시 추워 임진강물이 얼어 적이 별 어려옴 없이 강을 건널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적이 공격해올 위험이 커지자 적을 분리시키기 위해 아군은 철수해야만 했고 거의 1개 연대의 병력을 회생하게 된 것이었다. 미군들은 설치해놓은 가시철망이 적의 공격을 지연시킬 것으로 확신했었으나 적에겐 병력의 손실이란 전혀 안중에도 없다는 것을 잊은 것이다. 적은 가시철망 위에 쓰러지고 쌓여서 마치 사람으로 된 침대요 같이 된 데를 뒤따르는 병사들이 밟고 넘어 오더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트루먼 대통령, 원자탄 사용 고려하다 취소
트루먼」 대통령은 11월3O일 기자단과의 주례회견 석상에서 『필요한 단계에는 중공군에 대하여 원자폭탄을 사용하기 위하여 모든 적극적인 고려를 하도록 명하였다』 고 밝히고 그는 계속하여 3차 대전은 피할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워싱턴으로 달려온 영국수상 「애틀리」와의 회담뒤에 「트루먼」 은 원자탄은 사용되지 않을 것이며 동맹국과의 사전협의 없이는 미국이 결코 원자탄을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밝히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추위에 고생
날씨는 몹시 추운데 땔감이 부족하여 피난민들의 고생은 말로 표현할수없이 극심하다. 앞으로 석탄공사에서 연탄을 대량으로 만들어내어 염가로 보급하게 되면 지금보다 연탄값이 훨씬 싸질것이고 연료난도 타소 해소될 것이라고 한다. 지금 내 손가락도 동상으로 여러곳이 부어올라 타이프를 치는데 무척 괴로움을 느낀다. 손과 발에 동상이 걸려 보기는 내평생 이번이 처음이다.
난로도 피우지 않는 대통령
오후에 김활난 박사가 와서 국방부 제3국의 여자 의용 대원들이 우리나라의 자유를 위해 싸우다 희생당한 고 「워커」 장군의 동상 건립 기금으로 써달라고 월급을 모아 가지고 자기를 찾아왔었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보일러 시설이 없는 우리 관저에서 난로도 못 피우게 하고 온몸을 담요로 감싼 채 집무실에서 일하고있는 대통령을 보며 김활난 박사가 눈물을 글썽이면서 연세도 있으시니 난로 정도는 피우고 일하시도록 대통령에게 권고했다. 그런데 대통령은 다리 밑에서 떨고 있는 수많은 피난민 동포들을 생각하면 이것도 과분하다고 말했다. "찬 손을 따뜻하게 해줄 테니 내게 가까이 오라" 고 대통령이 김 박사에게 말하자 "허락 없이는 안 된다" 고 내가 농담을 해서 우리는 모두 한바탕 웃었다.
한국같은 피난민 못 봐
뉴욕타임즈의 일요 잡지 여기자 「거푸르트·새뮤얼즈」 양이 와서 우리와 함께 점심을 들었다. 그녀는 우리나라의 피난민에 관한 기사를 쓰고 있다고 한다. 그녀는 팔레스타인이나 독일 등의 피난민 수용소를 가보았지만 여기와 같이 비참하고 불쌍한 광경은 보지를 못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수용소에 있는 우리 한국의 어린애들이 영양실조의 상태는 보이지 않지만 특히 평양에서 나오려했던 그토록 많은 애들이 부모를 잃었다는 것은 참으로 큰 비극이라고 솔직히 말해주었다. 미군은 피난민들이 간선도로에 몰려드는 것을 원치 않았고 교량을 폭파해서 그들이 건너오지 못하도록 제지를 한 것이었다. 우리 주민들은 다른 교량으로 나오게 해달라고 호소를 했건만 담당자이던 미군 대령은 간선도로를 군대가 사용할 수 있게 비워두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워커 장군 교통사고 사망
12월26일.
워싱턴의 알링턴묘지에 묻히게 될 고「욀튼·워커」장군은 그가 죽기 전에 대장승진이 「맥아더」장군에 의해 내신되어 있었다고 한다. 신성모국방의 말에 의하면 사고당시「워커」장군의 지프는 미군 트럭이 아닌 우리6사단 소속의 드리쿼터와 충돌을 했으며 장군이 직접 차를 운전했었다고 한다.「워커」장군도 대통령처럼 항상 차를 과속으로 운전하는 버릇이 있었다.
1월19일. 우리는 피난민수용소를 돌아 보았는데 피난민의 반수가 폐결핵과 질병을 앓고 있어 대통령은 무척 침울하다. 전쟁을 수행하며 고생하고 있는 국민들을 위해 할 일은 많은데 나라의 재정은 바닥나고 생활고에 허덕이는 국민들로부터 새금을 거둘 수도 없는 형편이다.
적군의 비열한 수작
심지어 중공군과 북괴군은 백기를 들고 항븍하는체 하면서 수류탄으로 공격해 오고 온갖 비겁한 수법으로 아군을 속이며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다고 한다.
후퇴한 알몬드 장군에게 훈장 수여
대통령은「리지웨이」장군에게 자기는「알몬드」장군의 공헌에 사의를 표하고 훈장을 수여하러 왔다고 말했다. 장군은 즉시 의장대와 함께 야전장에 훈장수여식을 위한 준비를 갖추어주었다. 대통령이 「알몬드」장군의 가슴에 훈장을 달아주었을 때「알몬드」장군의 볼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대통령도 무척 감동되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도 그의 공적을 인정하면서 모두 함께 같은 기분으로 눈물을 흘렸다.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고 철수했던 군대는 누구나 사기가 저하되어 있게 마련이다. 「알몬드」장군의 부관들은 대통령이 수여한 훈장이 자기의 모든 군단의 사기를 북돋워 줄 것이라고 대통령에게 말했다.
대통령이 일본군 파병 징조를 미리 알고 거절
대통령은 일본이 얼마나 간교한 책략으로 우리나라의 국권을 찬탈해 갔으며 우리민족이 40년동안 어떠한 수난과 곤욕을 겪어왔는가를 적고 만약 일본군대가 한국에 파병된다면 한국민전체가 일본군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될것이라고 한국인의 국민감정을 솔직이 표시해 보냈다. 그후 일본군 파병의 이야기는 「맥아더」장군의 결단에 의해 일본에서 더 이상 거론되지 않게 되었다.
서울 거리 풍경과 군경 미망인 돕기
2월7일.
우리 전몰장병 미망인들을 위해 여러모로 지원해주고 있는 미공군의 「엔더슨」장군이 서울거리에는 별로 사람이 보이지않더라는 말을 전하였다. 신앙심 깊은 손원일 제독부인은 군경미망인들을 돕고 있는데 이 미망인들이 만든 아름다운 수공예품을 같이 다니며 팔고 있다.
중공군은 진격을 해도 물자 얻기가 곤란
중공군들은 북한 공산군들이 약속했던 식량과 보급품이 전혀 없다는 것과 점령한 지역마다 고을의 통치자들이 항복함과 동시에 식량문제를 해결해주어 모든 것이 보장되었던 중국과는 우리 나라가 아주 다른 나라라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청주는 완전히 비여있는 폐허의 도시였다.
빨치산 공비에게 미군 4명 살해돼
또 「리지웨이」장군은 밀양에서 4명의 미군이 살해당한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다. 『본인은 한국 민간인들이 미군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불상사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고 장군은 말했다. 그에 대해 신 국방장관이 설명을 했다. 그 미군들은 무엇인가를 찾느라고 자기들의 총을 한쪽으로 비켜놓고 당을 파고 있었는데 그때 농부 옷으로 가장한 지리산의 공비들이 총기를 빼앗아 가지고 그 미군들을 쏘아 죽인 것이다. 미군들을 죽인 사람들을 우리 민간인들이 아니었다고 국방장관은 해명했다.
대통령의 근검 절약
대통령은 비록 작은 종이 쪽지나 곡식 한 톨이라도 절약하여 우리 관저에서 쓰는 비용을 줄이려 애쓰고 있다. 심지어 대통령은 비서실 휴지통에 쓸만한 종이가 버려져 있으면 그것을 꺼내다가 편지 초안도 적고 붓글씨도 연습하고 있다. 지금 무기부족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우리 장병들은 설상가상으로 전비가 부족하여 겨우 콩나물만으로 부식을 삼고 있는 실정이다. 콩나물이 맛있는 반찬이긴 하지만 계속 먹으면 질리게 마련이라고 대통령은 장병들의 부식을 걱정했다.
우방에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전비를 부담하자는 대통령 연설
대통령은 국민에게 발표할 특별담화를 준비하였다.
『우리의 전쟁경비는 지금 국제연합의 우방각국에서 보내오는 원조자금으로 충당하고 있으나 우방의 도움에 의뢰하지 않고 우리의 힘을 다해 우리자신의 전비를 부담해야 떳떳한 국민이 되는 것이다. 남의 도움을 가지고 우리의 국권과 민권을 보호할수는 결코 없는 것이니 세금을 완납함으로써 이 전쟁에 승리하고 하루 빨리 우리나라의 통일을 앞당겨 완수하도록 해야한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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