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앞 발포 없었다. 오로지 금남로 인간사냥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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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5-09 18:25 조회3,16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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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앞 발포 없었다. 오로지 금남로 인간사냥만 있었다
이용식 교수의 분석을 중심으로
광주사망자 154명에 대한 사망원인 조사는 1980.5.28.일부터
당시 시위대 측은 시민들을 자극하고 선동할 목적으로 각 병원에서 보관하던 시신을 전부 도청 앞 광장에 운반시켰다. 신원이 확인된 시신은 도청광장 건너편 상무관이라는 곳으로 운반했고, 무연고 시신은 도청 안에 보관해 놓았다. 5월 27일 상황이 종료되고 이어서 민군 검찰, 민군 의사, 광주의 유지, 변호사 등 모든 관련 전문가들과 유지들을 동원하여 5월 28일부터 6월 초까지 사망원인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합동조사반의 검시조서와 병의원에서 발행된 사체검안서가 현재로서는 가장 정확한 입증자료다.
1980년 조사 결과와 1995년 조사 결과와의 차이
5.18당시 광주에서 사망한 사람은 모두 154명이다. 이 중 총상 사망자 수는117명, 이 117명 중 88명이 카빙소총 등 시위대가 무기고에서 탈취한 총기에 의해 사망했다. 총상 사망자의 75%를 시민군이 사살했다면 이는 단순한 오발이 아니라 조직적인 살인일 것이다.
그런데 1995년 민주화세력에 떠밀려 검찰이 5.18관련 사건을 재수사했을 때, 위 사망원인에 대한 통계가 대폭 변경되었다. 가장 많이 변한 것은 총상 사망자가 카빙총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계엄군이 소지했던 M16소총에 의한 것인가에 대한 통계다. 이 통계는 1982년 육군본부가 발행한 [계엄사‘] 141쪽에 기재돼 있고, 동시에 1985. 5. 국가안전기획부가 작성한 보고서 [광주사태상황일지 및 피해현황]의 자료를 정리하면 도출된다.
1995년 검찰이 발표한 통계는 이와는 정반대다. 카빙총상이 26명, M16총상이 96명, 계 132명이 총상사망자라는 것이다. 이 자료는 월간조선 2005년 1월호 별책부록에 실려 있다. 총상 사망자가 16명이나 늘어났고, 카빙 총상 사망자가 85명에서 26명으로 줄어든 반면, M16 총상 사망자가 31명에서 96명으로 늘어난 것이다.
1995년 당시 사망자들의 뼈는 15년 동안이나 땅속에 묻혀있었다. 설사 땅을 파서 뼈를 꺼낸다고 해도 뼈를 가지고는 사망원인을 밝힐 수 없다. 1995. 검찰이 통계를 광주에 유리하도록 함부로 조작한 것이다. 이에 더해 최근에는 5.18기념재단 홈페이지의 기록들이 몰래 조작되고 있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총상에 대한 상식
1980년 5월 18일 오전 9시 30분부터 시발된 광주폭동은 1980년 5월 27일 새벽 4시경에야 종결됐다. 5.28일 민군검사, 경찰, 변호사, 의사, 군의관 그리고 시민대표들로 구성된 합동조사반에서 시신을 검시할 때 어느 총기에 맞았는지를 감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래와 같은 제원의 탄두직경이 잣대가 되었다.
M16 탄두직경은 5.56mm, 카빙 및 M1은 7.62mm. 카빙은 탄두 끝이 둥그스럼해서 피부를 뚫고 들어간 구멍이 M16 보다 조금 더 크고, 들어간 자리와 나간 자리의 크기가 거의 동일하지만, M16의 경우에는 들어간 자리는 아주 작고 나간 자리는 주먹 크기 정도로 넓다. 당시의 시체 검안보고서에 따르면 총상 사망자의 75% 정도가 카빙 또는 M1 소총에 의해 사망했다.
당시 M16 소총은 계엄군이 보유하고 있었지만 실탄이 지급되지 않아 등 뒤로 메고만 다녔고, 무장 시위대들도 최소한 34정의 M16을 보유하고 있었다. 카빙총상과 M16총상은 확연히 구분돼 있었지만 그 외 총상은 그냥 ‘총상’으로만 기재돼 있었다. M16 총상 이외의 모든 총상은 무기고로부터 탈취한 총기들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 M16소총의 총상은 원체 특별하기 때문에 다른 종류의 총상과 혼동될 수 없다. 따라서 1980년에 시체를 직접 검시하여 내린 판결은 정확하고 1995년 유가족들의 진술에 의한 총상 변경은 모두 허위일 수밖에 없다. 당시 유가족들은 M16에 맞았다고 진술해야 더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거나 선동됐을 것이다.
1995년 자료는 조작된 자료, 1980년 자료가 더 정확
1995년 검찰이 다시 작성한 사망 원인 통계에 의하면, 5.18 소요 10일 동안 가장 많은 사람이 사망한 5월 21일, 그날 광주 일원에서 사망한 시민은 모두 61명, 이 중 32명은 M16총상이고, 17명은 카빙 등 무기 총기에 의한 총상이다. 이날 계엄군 총기에 의해 32명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자료는 민주화세력의 입김으로 조작된 자료다.
1980년 5월 28일 합동조사반 검시 결과에 의하면 계엄군 총기에 의해 사망한 사람은 전무하다. 1980년의 검시보고서에 의하면 M16 총상사망자가 14명이다. 이 14명 중 등 뒤로부터 총을 맞아 사망한 사람이 6명이다. 5월 21일 당시 계엄군이 소지한 실탄은 31사단 한동석 중위가 건네준 3개의 탄창뿐이었다. 1개 탄창에 15발씩의 실탄이 있었다. 이 45발은 계엄군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하는 장갑차를 향해 다 사용했다.
계엄군은 비록 M16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실탄이 없는 빈총이었다. 하지만 당시 시위대는 21일 아침 행군해오는 20사단 지휘부 차량부대를 습격하여 사단장 지프차를 포함해 14대의 지프차를 탈취하면서 실탄과 함께 M16도 탈취했다. 시위대가 당시 보유했던 M16은 27정이나 되었다. 따라서 M16총상이라 하여 모두 계엄군이 발사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계엄군과 마주한 곳에서 사망했느냐, 아니면 계엄군이 없던 곳에서 사망했느냐다.
5월 21일 오후 1시, 계엄군에 의한 집단 발포는 없었다
5월 21일, M16총상을 입고 사망한 14명 중에는 등 뒤로부터 날아온 총을 맞은 사람이 6명이나 된다. 계엄군과 미주하고 있었던 시민들 6명이 총을 맞았으면 가슴 등 신체의 앞부분을 맞았어야 한다. 등 뒤로부터 날아온 총알에 의해 사망한 광주시민의 이름은 장하일, 채이병, 김용표, 김완봉, 나종기, 박세근이었다.
M16 총상자 14명 중 나머지 8명은 임균수을 포함해 머리 위에서 발사된 총에 맞아 사망한 사람들이다. 금남로는 4차선 거리로 서울에 비하면 골목과 같은 거리였다. 도로 양측에는 10층 내외의 건물들이 가로수처럼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고, 이 골목길은 도청 앞을 지키고 서 있었던 계엄군의 시야에 잡히지도 않았고, 총알도 날아갈 수 없는 사각지대였다. 지상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발사된 총은 운집해 있는 군중의 가장자리 사람을 맞춘다. 그런데 이들은 군중의 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었다.
102개 자료에 대한 이용식 박사의 분석 결과
이용식 교수는 전남대 5.18연구소가 보유한 자료 중 102개를 확보해 분석했다, 사망자 또는 부상자 바로 옆에 있었던 ‘목격자’의 증언 48개, 실제로 부상을 당한 사람의 증언 31개, 의사의 검시 결과 23개를 종합하여 아래와 같은 결론을 얻었다.
5월 21일, 오후 1시 이전, 무장괴한들이 무서운 얼굴을 해 가지고 높은 건물에 있었던 사람들을 모두 위협하여 높은 건물 옥상들을 장악했다. 무장괴한들이 옥상을 점령한 건물들은 전일빌딩, 카톨릭센터, 광주은행, 수협, 노동청, YMCA 등이다. 그리고 오후 1시 전후에 사망하고 부상당한 시민들 대부분이 옥상으로부터 사격을 당했다. 70도 내외의 각도로 내려 쏜 것이다. 조남신과 최미애는 계엄군이 존재하지도 않는 먼 곳에서 머리에 M16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5.18유족회의 초대회장 전계량의 아들 전영진은 노동청에서 도청을 향해 트럭을 타고 돌진공격을 하다가 오른쪽 관자놀이에 M16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이 역시 계엄군의 총알이 갈 수 없는 곳이었다. 박창권은 오른쪽 팔 상위에 총상을 입었지만, 치명상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직접 사인은 여러 사람의 발에 밟혀 죽은 것으로 보인다.
조대훈의 경우는 14:00에 이미 기독병원에 사체가 옮겨졌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집단 사격 이전에 이미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부상당한 사람들의 증언, 총이 맞아 쓰러지는 시민을 직접 옆에서 보았던 시민들의 증언, 그리고 검시 보고서를 종합해 보면 집단 발포로 수백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알려진 도청 앞 집단 발포는 없었다.
도청 앞 사격 45발은 오로지 계엄군을 향해 지그재그로 돌진하던 장갑차를 향해 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도청 앞 발포]는 뒤집어씌운 모략이었고, 진실은 금남로 옥상으로부터의 집단 발포였다. 금남로에 울려 퍼진 총성은 결국 금남로 빌딩 사이사이를 콩나물시루처럼 가득 채우고 있던 시민들을 향해 수많은 옥상 스나이퍼들이 발사한 인간사냥의 소리였다. 순식간에 금남로 빌딩 숲에서는 40명이 즉사했고, 또 다른 4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때 도청 앞 계엄군에는 실탄이 없었다.
금남로 옥상을 점령한 존재가 계엄군일 수 없는 이유
일본 프리랜서 기자, 카지마 고이치(증언2)가 광주에서 취재를 하고 있었다. 그의 중언에 의하면 그는 관광호텔 옆에 신축 중인 광주백화점 옥상에 올라갔다가 돌팔매에 못 이겨 내려와 관광호텔 옥상에서 촬영하려고 접근하다가 문전박대를 당했다. 누군가가 호텔 직원들에게 말하기를 누구든 호텔 안에 사람을 들이면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했다며 종업원들이 못 들어가게 사정사정했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도청 뒤 동자여관으로 들어갔더니 마침 취재하려고 전일빌딩 옥상에 올라가 있던 기자들도 똑같은 이유로 쫓겨나 여관으로 왔다고 말했다 한다. 당시 금남로 건물에 계엄군이 없었다는 점은 황석영 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에도 밝혀져 있다.
5.18 사료편찬위원회 기록에 의하면 계엄군 측에서 4층 건물인 도청별관 옥상과 상무관 등에 공수부대원이 배치된 때가 있었다. 시민군 장갑차의 공격을 2번이나 받고 나서 3번째 3차 공격이 시작되었던 오후 2시 50분 이후였다(5.18 사료편찬위원회,2009.50:153). 따라서 병원 응급실 도착시간이 오후 2시 50분 이전에 병원 응급실에 도착한 사람들은 계엄군에 의한 피해자가 아니다. 게다가 이 때 계엄군에게는 총알이 전혀 없었다. 계엄군이 도청에서 철수를 시작한 시각이 5시. 6시에야 인간방벽을 간신히 뚫고 조선대에 집결할 수 있었다. 조선대에서 석식을 하고 오후 7시, 어둠을 틈타 무등산 방향으로 광주를 탈출했다. 따라서 6시 이후에 도청부근에서 총격을 받은 사람도 계엄군의 사격에 의한 것이 아니다.
총상자들을 조사할 때 응급실 기록과 입원 기록이 다른 경우가 많다. 총상의 경우에는 겉으로 보는 것과 실제 입은 손상 사이에 많은 차이가 난다. 얼굴과 목에 총상을 입은 환자는 피부에 조그만 구멍만 보이지만 엑스선 촬영을 해 보면 턱뼈가 산산조각이 난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이용식 교수와 같은 법의학적 분석가가 필요한 것이다.
2022.5.9.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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