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신부 관련 상고이유
페이지 정보
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3-05 12:23 조회2,513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광주신부 관련 상고이유
1. 공소장 범죄사실 대상이 된 표현
원 게시물: 2014.11.16. 게시한 '5.18광주의 유언비어는 위장한 천주교신부들이 담당' 제목의 글에 내포된 표현
(1) “정의평화위원회는 신부를 가장한 공산주의자들이다”
(2) “사진집 사진들은 북한의 정치공작원들과 공모-공동하여 만든 후 유포시킨 것이다.
(3)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는 지금도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사회적화를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2. 원심 판결의 요지
(1) 삐라를 만든 주체와 제작 및 배포 시기가 불분명하다.
(2) 삐라에 실린 사진들이 북한이 제작한 작품이라는 근거가 없다.
(3) 1987년 얼굴들의 일부가 광주희생자 사진으로 확인되었다(판결서 18쪽)
(4) 사진 출처에 대한 김양래의 주장은 사실로 보인다.
(5) 따라서 피고인 지만원의 표현은 허위에 해당하고 표현마저 단정적이고 악의적이라 의도적인 범죄에 해당한다.
3. 피고인의 반론
1) 1987년 ‘광주대교구정의평화위원회’ 명의로 발행된 사진집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에 15구의 으깨진 얼굴사진이 기재돼 있습니다. 광주신부들은 이 얼굴이 공수부대가 광주시민을 야만적으로 살해한 증거라고 선전했습니다.
‘5.18기념재단’ 홈페이지에는 광주사망자 154명에 대한 영정사진이 전시돼 있습니다
1982년 발행된 북한 삐라(증61)에는 5점의 얼굴사진이 있는데 이 5점의 얼굴이 1987년 사진집 얼굴 5점과 일치합니다.
여기에서 피고인이 내린 결론은 두 가지였습니다. ① 1982년의 북한 삐라에 있는 5점의 얼굴이 1987년 광주신부들이 발행한 사진집 얼굴에 들어 있다면 광주신부들은 북한으로부터 얼굴을 수집한 것이 된다. ② 1987사진집 얼굴 15점이 광주사망자 총수 154점의 영정사진에 들어 있지 않으면 15점의 얼굴은 북한의 제품이 된다.
2) [5.18답변서] 제31~31쪽에는 얼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16구의 시체까지도 영정사진의 누구라고 규명돼 있다는 사실이 증명돼 있습니다. 규명되지 않은 얼굴이 없는 것입니다.,
반면 1987년 사진집 얼굴은 식별이 가능한 얼굴들입니다. 이 사건 소송을 주도한 김양래는 소송 당시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로 154점의 영정사진을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2017.10.12.자 증인으로 출석하여 ‘15구의 얼굴이 총 광주사망자 154구 중 누구에 해당하는지 찾아보지 않았고, 찾아 볼 필요조차 없다’는 무책임한 말로 규명을 회피하였습니다(김양래 녹취서 제10쪽). 1,2심 심리과정에서도 이를 심리한 바 없습니다. 답변서와 USB 발표 과정에서 피고인은 피고인이 15구의 얼굴을 154점의 얼굴에서 찾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15점의 얼굴은 154점에 없는 얼굴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① 신부들이 1982년에 북한이 소지했던 5점의 사진을 1987년 화보집에 사용한 것이 되고, 1987년 발행한 화보집 15점의 얼굴 역시 광주시민이 아닌 것이 됩니다. 바로 이 단계에서 피고인의 죄는 소멸돼야 할 것입니다. 신부들이 북한으로부터 사진을 가져와 계엄군을 모략했다면 그들은 ‘북한과 공모한 빨갱이’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상천외하게도 원심은“15구 중 일부는 광주시민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판시하였습니다. 15구 중 누구누구가 광주시민에 해당한다는 데 대한 설명도 전혀 없습니다. 원심 재판부가 거짓을 꾸몄고, 그 거짓을 잣대로 피고인의 무죄를 강탈한 것입니다.
3) 삐라는1982년에 발행됐으며, 발행주체는 당시 한국에 없었던 ‘민주화추진위원회’로 기재돼 있습니다. 전두환이 광주대학살을 자행했다는 메시지를 담은 것입니다. 이 삐라 뭉치 중에는 “광주대학살 잊지 말자”라는 제목의 삐라가 있었습니다(증61). 이 삐라 뭉치는 2012.2.23. 파주시 해이리마을 [근현대사 박물관] 3층 [불온삐라 코너]에도 전시돼 있었습니다(증192,193). 이 삐라에는 5구의 시체 얼굴 영상이 기재돼 있고 아울러 광주희생자에 대한 통계수치가 문자로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 희생자 관련 통계자료는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북한이 1982년에 발행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 제591쪽에 7줄에 걸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증194).
이 삐라에 기재된 5구의 얼굴이 1987년의 사진집 15구의 시체 얼굴 중 5점의 얼굴과 일치합니다(책 5.18답변서 32쪽 사진 참조). 원심은 삐라가 북한이 발행한 것이 아니라고 반론합니다. 설사 북한이 발행했다 해도 그 사진만큼은 북한이 제작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도 판시합니다. 삐라에는 ①사진과 ②텍스트가 있습니다. 텍스트를 보면 이는 분명 북한 삐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원심의 판시대로라면 위 삐라는 북한이 제작하기는 했는데, 삐라 속 텍스트는 북한 문헌에서 인용했고, 5점의 사진은 광주시민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5점의 얼굴은 154점의 영정사진에서 누구라고 특정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를 특정하지 않았습니다. 텍스트가 북한에서 나온 자료이고, 5점의 사진이 154점의 영정사진 중에 없는 것이면, 논리상 5점의 얼굴은 북한이 제작한 얼굴이 되는 것입니다. 원심의 설시과정에는 논리가 보이지 않고 억지와 거짓말만 보입니다.
4)이 사건 재판의 초점은 피고인이 아무런 증거도 없이 황당한 주장을 하는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믿을만한 상당한 증거가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지, 무엇이 진실인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아, 이 정도의 정황증거들이면 그렇게 믿을 만도 하겠다”라는 데까지만 인정이 되면 피고인은 무죄가 되는 것입니다. 피고인은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원심 재판부는 삐라에 대한 피고인의 주장이 재판부가 생각하는 정답이 아니라는 이유로 죄를 물었습니다. 이는 대법원 판례를 무시한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5) 2019.5.16.자 이영선 녹취서 제3쪽에는 이영선이 1987년 사진집 발행 당시 신부가 아니라 신학생이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그의 주장 모두가 진실이었다고 판결했습니다. 이는 무서운 자의적 독재입니다. 증거기록 472-477에는 이영선이 연평도 폭격을 옹호했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증거기록 476-477에는 이영선이 제주도 해군기지 저지 시위를 주도해 사업을 지연시키는 바람에 273억원의 국고손실을 유발시켰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이 자체만으로도 이영선 신부는 빨갱이로 불릴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상 1)~5)는 [5.18답변서] 25~35쪽에 요약돼 있습니다.
소 결
1) 신부들이 계엄군 소행이라고 비난하기 위해 사용한 비참한 얼굴들은 광주시민의 얼굴이 아닙니다. 그 사진들은 북한의 삐라가 중명해주듯이 북한이 제작한 얼굴입니다. 따라서 신부들은 북한으로부터 자료를 얻어다가 계엄군을 모략한 빨갱이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2)피고인이 제출한 주장과 증거들이 각기 논리적 배척과정을 거치지 않고, 전혀 다른 자의적인 이유로 무시당했습니다. 이 무단판결은 파기되거나 다시 심리되어야 합니다.
3) 피고인은 법 앞에서 고소인들에 비해 부당한 대우를 현저한 수준으로 받았습니다. 고소인들의 진술은 틀려도 맞는 것이고, 피고인의 주장과 증거는 모두 반론과정 없이 허위라고 판결하였습니다. 이는 법 기관이 아니라 양육강식 시대의 점령군에나 어울리는 재판일 것입니다.
4) 재판부가 거짓말을 지어낸다는 것은 산천초목이 경악할 사법폭력입니다.
2022. 3. 5. 지만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