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 건아여, 멋쟁이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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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1-01-25 23:38 조회18,28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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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 건아여, 멋쟁이가 되자!
육군사관학교 1학년 세계사 시간이었다. 자그마한 대위 교수 한 분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여러분은 지금 인생에서 가장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나이에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가슴에는 깨끗한 백지가 하나씩 들어 있습니다. 그 백지 위에 여러분들이 무엇을 그리느냐에 따라 여러분의 인생이 결정될 것입니다. 그 인생은 출세를 하느냐 돈을 버느냐에 대한 인생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가슴을 얼마나 풍부하고 향기롭게 가꾸느냐, 그리고 인격을 얼마나 균형 있게 기르느냐에 대한 인생입니다.”
“학과 점수란 인생에서 큰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90점 맞는 학생이 91점을 맞으려면 하루에 세 시간을 더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80점을 맞는 학생이 90점을 맞으려면 하루에 한 시간만 더 공부하면 됩니다. 그 1점이 무엇이기에, 인격형성에 투입해야 할 그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려 합니까. 여러분들의 생도생활은 육사라는 조그만 테두리 내에 제한돼 있습니다. 많은 사회현상에 접할 기회도 없고, 훌륭한 사람을 대할 수도 없고, 밤을 새워 독서할 시간도 없습니다. 그런 제한된 생활에서 1등과 2등을 하겠다고 경쟁해 보십시오. 4년 후 여러분들의 인간성은 볼품없이 망가질 것입니다. 책을 읽으십시오. 효과가 증명된 고전소설부터 읽으십시오. 영웅전과 위인전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많은 상식을 기르십시오. 여러분들은 살아있는 백과사전(living dictionary)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육사 13기 정하명 대위였다. 육사에서 만난 교수들 중에서 이 선배만큼 내 일생을 통해 가장 훌륭한 가르침을 준 사람은 없다. 1994년 1월 17일(월), KBS2의 「인생 이 얘기 저 얘기」라는 프로에 내가 1시간동안 출연했다. 담당부장이 내 글을 어디에서 읽었는지 물을 먹여준 이철 대령님과 월남에서 내가 포대장이었을 때 대대장이었던 이신오 대령님, 그리고 위의 정하명 대령님을 깜짝쇼로 무대 위에 불러냈다. 그 후 이 아이디어는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로 발전하여 주로 연예인들에게 사람을 찾아주는 프로로 발전했다.
나의 육사생도 시절은 독서의 계절이었으며 이는 정하명 선배님의 첫 강의로 촉발됐다. 다른 생도들은 외출을 위해 토요일을 기다렸지만 나는 책 읽는 즐거움을 위해 토요일을 기다렸다. 토요일에는 일과가 끝나기 무섭게 도서관으로 향했다. 좋은 책 몇 권을 고르는데 두 세 시간이 걸렸다. 여러 권의 책을 빌려다 책상 위에 놓고 있으면 부자가 된 것 같았다.
독서는 즐거움을 넘어 희열을 주었다. 동기생들은 하루라도 빨리 졸업을 해서 자유를 만끽하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졸업이 싫었다. 독서시간이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일생 내내 결혼도 하지 말고 독서만 하고 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늘 이런 생각을 했다. 오후 8시부터 10시까지 할당된 자습시간에도 한 시간 이상은 소설과 위인전과 교양서적을 읽는데 사용했다. 한번 책을 잡으면 기말 시험이 하루 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놓지 못했다. 영어와 수학, 물리, 전기와 같은 수학계열 과목들에서는 상위권에 들었지만 외우는 과목들은 낙제점만 간신히 면했다.
내가 수학계통에 투입한 시간에 비해 비교적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던 것은 독학을 통한 집중력과 응용력의 덕인 듯싶다. 고3 때, 물리학 선생님이 문제를 하나 내주었다. “성냥갑에는 12개의 모서리가 있다. 각 모서리에 1Ω씩의 저항이 연결되어 있다. 양쪽 대각선 귀퉁이 사이에 존재하는 총 저항은 몇 Ω인가?”
선생님은 이 문제를 풀어오는 학생에게 상금을 주겠다고 하셨다. 그 돈은 당시 학생들에게는 꽤 크게 보이는 돈이었다. 나는 그 문제 하나를 놓고 3일에 걸쳐 밤낮으로 씨름을 했다. 길을 가면서도 어디가 직렬이고 어디가 병렬인지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한 시가 귀중했던 고3처지에서 그것도 야간을 다니는 처지에서 시험에 나오지도 않을 이 한 문제를 놓고 이렇게 많은 시간을 투입하는 것은 참으로 무모한 짓이었다. 그러나 그런 무모한 노력이 있었기에 내게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응용력이 길러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무모한 짓이겠지만, 또 달리 보면 목가적이고 낭만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에는 독서열이 대단했다. 다독이냐 정독이냐에 대한 논란도 많았다. 나는 정독파였다. 신중하게 책을 골랐고, 일단 선택한 책은 정독을 했다. 10쪽을 읽을 때마다 저자가 내게 무엇을 가르쳐 주려 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다시 10페이지 전으로 돌아가 대각선으로 내용을 훑었다. 그리고 다시 상상했다. 감수성이 예민한 때인지라 상상의 꼬리는 그칠 줄 모르고 이어졌다. 읽는 시간보다 상상하는 시간이 여러 배 길었다.
의미 있거나 멋진 표현들은 노트에 적어 외우려 했다. 이러한 독서 방법은 훗날 수학을 공부할 때에나 사회문제를 진단하는데 엄청난 보탬이 됐다. 복잡한 현상에서 핵심적인 맥을 짚어내고 이를 단순화하는데 필요한 특유의 분석력과 직관력은 바로 이때부터 길러진 것 같다. 훗날 미국에서 응용수학으로 박사과정을 공부할 때 주임 교수는 나를 심사위원회에 회부시키면서 ‘처음 보는 상당한 직관력’을 가진 학생이라고 극찬을 해주었다.
당시 마음의 양식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에게는 ‘관조’라는 개념이 유행했다. 마음속에 내장돼 있던 복잡한 파일을 지우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무아의 경지를 의미했다. 나에겐 독서의 세계가 곧 관조의 세계였다. 일생을 통해 가장 잔잔한 평화를 누렸던 이 시절, 가을 나비의 지친 몸짓에서도 인생이 보였고, 스치는 바람결에서도 인생을 읽는 듯 했다. 보는 것, 읽는 것, 듣는 것 모두에 의미가 있었다.
때로는 섬세해지고, 때로는 격정적이고, 때로는 센티해지기도 했다. 독서 문화가 창궐했던 당시 사회의 젊은이들은 대부분 정서적인 멋을 추구하려 했다. 괴테를 읽고, 브람스를 듣고, 아네모네를 볼 줄 아는 인생이 멋쟁이 인생이었다. 그 때 서울 시내에는 고전음악 감상소가 몇 개 있었다. 컴컴한 방에서 조용한 클래식을 듣고 명상하는 것도 멋의 일부였다.
인터넷에 시간을 빼앗기고, 소란한 음악을 들으며, 명상할 시간을 갖지 못한 지금의 인스턴트식 문화와 비교해 보면 가히 낭만과 여유가 흐르는 목가적인 시대였다. 독서란 단순히 책을 읽는 것만이 아니다. 독서는 사색을 유도하고 꿈을 키우고 자기의 갈 길을 찾아내게 하는 고독한 수행이었다.
동기 동료들의 인생관은 ‘청운의 꿈’으로 상징되는 출세주의 인생관이었다. 4성 장군이 되고 대통령이 되는 것이 생도들의 꿈이었다. 하지만 독서를 통해 터득한 나의 인생관은 사뭇 달랐다. ‘자유인’으로 사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의 목표는 출세가 아니라 아름다움이었다. 높은 사람이 되어보려고 인생의 아까운 순간들을 남의 기분에 따라 일희일비하며 살아가는 것은 나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의 삶에 춤을 추는 부나비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삼국지를 여러 차례 읽으려고 노력했지만 끝까지 읽은 적이 없다. 삼국지에는 인생의 멋이나 낭만 같은 것들이 전혀 없다. 출세와 승리를 위한 권모술수, 속임수와 협잡으로 가득한 삭막한 세상이 그려져 있는 아름답지 못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도 음악도 없는 삭막한 세계, 꾀죄죄한 옷을 입고, 베고 자던 빵을 먹는 되놈들이 노는 세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책이 젊은이들에 널리 읽히면 읽힐수록 인격형성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대한민국에 삼국지 식의 권모술수가 넘친다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 김대중씨는 고전소설이나 위인전 같은 책보다는 삼국지를 많이 읽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김대중씨의 출세과정을 보면 삼국지 문화가 보인다. 김대중, 아마도 그는 삼국지식으로 출세한 사람의 가장 전형적인 케이스가 아닌가 싶다.
내게는 유비나 제갈공명보다는 ‘황야의 무법자’ 같은 서부 사나이가 훨씬 더 멋있었다. 세상을 내리깔고 거칠 것 없이 도도하게 살아가는 그런 인생을 살고 싶었다. 인습과 통념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정한 목표에 도전하며, 스스로의 기율에 따라 세상을 자유분방하게 살아가는 풍운의 사나이, 재산에 속박되지 않고 집시처럼 떠도는 낭만의 사나이, 임종의 순간에 절대자 앞에서 당당히 인생을 결산할 수 있는 기개와 배포를 가진 사나이, 바로 그런 사나이가 내 가슴에 들어있는 멋쟁이 인간상이었다.
법과 질서가 강요하기 때문에 물건을 훔치지 않는 사람은 감시가 허술해질 때 얼마든지 훔칠 수 있다. 그래서 대통령도, 교수도, 판사도 남의 것을 훔치고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멋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은 감시가 없어도 훔치지 않는다. 거짓말도 하지 않는다. 훔치고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 ‘멋쟁이’라는 표상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인생의 하루하루가 죽음을 준비해 가는 삶으로 채워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임종의 순간에 지친 육신을 절대자에게 편한 마음으로 의탁하려면 순간적인 이기주의가 발동하거나 가치관에 갈등이 일 때마다 그 자신을 임종의 순간에 세워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이면 누구나 임종의 순간에 절대자 앞에 서게 된다. 그 임종의 순간, 절대자에게 지친 육신을 당당히 의탁하는 모습이 진짜 멋쟁이의 표상이 아닐까? “절대자시여! 저는 절대자께서 주신 생명의 길이를 마음껏 누렸습니다. 절대자께서 부여해 주신 재능을 마음껏 가꾸고 사용하다 왔습니다. 후회도 없고, 아쉬움도 없습니다. 용서를 빌 일도 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절대자께서 제 입장에 서 계셨다면 그 일을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만일 절대자가 내게 “어린 시절을 되돌려 줄 테니 인생을 다시 살겠느냐”고 물으면 당당히 “아닙니다,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래서 인생의 하루하루는 농도 있고 행복하고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18세의 주인공 잭 도슨이 상류사회 인사들 틈에 끼어 식사를 하면서 자신을 소개했다. “어제는 다리 밑에서 자고, 오늘은 당신들과 같이 고귀한(prominent) 분들과 식사를 합니다. 하루하루를 셀 수 있는 날들로 채우면서(make everyday count)!” 이 말에 상류사회 인사들 모두가 건배를 했다. “make it count”를 위하여!
손해 보는 기분으로 살아가면 마음이 편했다. 받는 사람이 되기보다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렇게 생각을 다듬은 뒤부터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너그러워지기 시작했다. 생도대의 고통스런 순간들도 인생이라는 긴 안목에서 해설하고 수용할 수 있었다.
자유인이 되려면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유로운 영혼을 갖지 못하면 자유인으로 살아갈 만큼의 능력을 기를 수 없다고도 생각했다. 인습과 통념이 찍어낸 판박이 인생, 그래서 누군가가 고용해 줘야 살아갈 수 있는 머슴 같은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되고 싶어 하는 인간상, 훌륭한 스승은 살아 있는 생물 세계에 별로 없었다. 그들은 책 속에 있었다.
나폴레옹을 읽을 때에는 나폴레옹이 되었다. 혈혈단신 엘바섬을 탈출해 나와 그를 잡으러온 수많은 관군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연설 내용을 상상해 봤다. 호손의 주홍글씨를 읽을 때엔 여주인공 헤스터가 되어 밤새 베개를 적신 적도 있었다.
입을 열 때마다 마음을 파고드는 철학적 명언과 감미로운 시를 남기면서 인생을 멋과 낭만으로 장식했던 위대한 전사 맥아더의 배짱, 시대적 통념의 벽을 뛰어넘어 종횡무진 한 시대를 누비고 갔던 세기의 쾌남 나폴레옹의 기개, 작은 체구의 유태인으로 세계 정치무대에서 오벨리스크 적 존재로 우뚝 섰던 명연설가 디즈레일리의 당돌함, 이런 것들이 내 가슴속에 표상 화됐던 멋쟁이들이었다.
그들 같이 위인은 될 수 없다 해도 그들이 가졌던 기개와 자유정신만큼은 핏속에 아낌없이 용해시키고 싶었다. 멋이란 무엇인가? 창의력, 자기기율(Self Discipline), 우아한 매너를 기른 인간에서만 피어나는 ‘인간의 꽃’,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이런 멋쟁이가 될 수는 없겠지만 이를 숭상하고 추구하다보면 사회 전체가 멋쟁이 사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통념이 정해주는 인생의 목표는 많다. 대통령이 돼야지, 변호사가 돼야지 등등의 목표는 이 세상에 흔하다. 이런 목표를 가진 사람들은 그 목표 하나만을 위해 숨 가쁘게 달리느라 가슴을 아름답게 가꾸지 못한다. 그래서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가슴이 메마르고 행동이 추한 것이다.
멋과 낭만과 극기로 인생의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에는 향기가 있다. 절대자가 내려준 재능을 연마하면서, 하루하루 재미있고 농도 있게 살다보면 어느 날 자기도 모르게 출세도 하고, 부도 쌓고, 향기도 축적한다. 이러한 출세, 이러한 부라야 아름다운 것이다.
대한의 건아여, 내면적인 우아함과 자신감과 자기역사를 창조하라. 공짜 젖을 먹기 위해 광야에서 눈물 흘리며 어미를 부르는 불쌍한 송아지가 되지 마라. 부모가 이룩한 것을 물려받지 마라. 부모가 이룩한 것은 부모로 하여금 세상과 결산케 하라. 물려받으면 세상은 편하게 살지 몰라도 자신의 창조가 없지 않은가. 기억하라. 부모로부터 공짜로 받아 살아가는 인생, 남으로부터 공짜로 받아 살아가는 인생에 무슨 멋이 흐르겠는가? 겉은 화려하겠지만 속은 초라할 것이다. 부모의 재산과 남의 재산을 가지고 편하고 풍족하게 사는 인생들 중에서 아름다움 인생은 절대로 탄생되지 않는다.
재산을 좋아하지 마라, 재산은 멋을 파괴한다. 인생의 멋은 겉에 있는 게 아니라 내면의 세계에 있다. 화려한 곳에는 절대로 멋이 없다. 멋은 옹달샘에 있다. 빛나는 것에는 멋이 없다. 멋은 깨우치는 순간의 희열, 거기에 있다.
일생을 걸쳐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면, 그 그림을 반추하기에도 인생을 짧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피카소의 그림이 아니라 자신이 그린 그림이어야 할 것이다.
대한의 건아들이여, 200년 전, 어느 미국인 식물학자는 Boys be ambitious(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는 말을 했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멋쟁이가 되라”고 조언하고 싶다. 멋은 겉에 있지도 않고 부에도 있지 않다. 오직 영혼에 있다. 주름진 영혼에는 멋이 없다. 그리고 영혼에는 나이가 없다.
2011.1.25.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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