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 아부한 역사의 죄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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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0-12-21 16:31 조회21,79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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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아부한 역사의 죄인들
권정달에 대한 세인들의 평가
아래는 “월간 인물과 사상” 2004년 5월호에 실린 내용이다.
한국자유총연맹을 기억하는가? 1954년 결성된 아시아민족반공연맹을 모태로 박정희 시절 한국반공연맹을 거쳐 89년2월 창립된 한국자유총연맹은 말할 나위 없이 반공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를 거치면서 한국자유총연맹은 반공이라는 두툼한 외투를 벗어던지고‘햇볕정책’의 적극 지지자로 돌아서더니, 최근에는 평화운동 사업과 빈곤퇴치 등 각종 시민운동을 벌이고 있다. 한마디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변신인데, 이 중심에 2000년에 이어 2004년에도 연맹의 총재로 재선된 권정달이 있다.
1936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권정달은 육사 15기로 79년 부마항쟁 당시 부산지구 보안부대장을 지냈으며, 이후 보안사 정보처장을 지냈다. 그는 12.12 당시 쿠데타 세력의 중추를 구성했던 하나회 출신이 아니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의 핵심 참모그룹에 합류해 신군부의 실세로 활동했다. 96년 김영삼 정부가 야심차게 시도했던‘역사바로세우기’과정에서 검찰에 출두한 그는, 자신이 전두환 집권에 공을 세운 보안사 간부 가운데 이학봉에 이어 두 번째 공신이었다고 증언했는데, 실제로 신군부의 정권 찬탈 과정에서 그의 활약은 빼어났다. 80년 5월 최규하가 중동 순방에 나선 와중에 계엄의 전국확대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의 설치 등을 담은 국내외 정세를 분석한 ‘극비보고서’와 ‘5ㆍ17 시국수습방안’ 등을 작성한 인물이 바로 그였다.
그는 국보위 내무분과위원장과 입법의회 의원 등을 거쳐 육군 준장으로 예편했고 민정당 창당 작업을 주도했다. 그리고 민정당 초대 사무총장까지 지낼 만큼 5공 초창기 실세 중의 실세였다. 그러다 82년 예기치 않게 터진, 단군 이래 최대의 금융사기 사건이라는 장영자ㆍ이철희 사건의 파편을 맞아 사무총장직에서 물러난 후, 85년에는 남북국회 수석대표로 활동했다. 그러나 이런 그도 88년 노태우의 ‘전두환과의 차별화’ 과정에서 권력 핵심에서 밀려나 88년 13대 총선에서는 공천조차 받지 못하는 수모를 겪었다. 민정당 창당의 일등 공신으로 자신의 피와 땀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정당에서 공천조차 받지 못하자 그가 심한 배신감을 느꼈음은 말할 나위 없다. 이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연구위원으로 국제정치 등을 공부한 후, 14대 총선(1992)에서 재기하려 했지만 이마저도 6공화국과 갈등을 빚으면서 출마를 포기해야 했다.
95년 5.18 특별법 제정으로 신군부의 12.12 쿠데타가 사법부의 도마 위에 오르면서 권정달이라는 이름 석 자는 세인들의 입길에 자주 올랐다. 당시 그는 검찰 수사에 대단히 협조적으로 나왔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5.17 시국수습방안과 국보위 설치 등에 관한 증언은 전두환의 정권 찬탈 음모의 구체적 전개과정을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로 쓰였다. 전향적인 협조 때문이었을까? 그는 전두환과 노태우는 물론이고 장세동을 비롯한 신군부의 핵심 인사들이 줄줄이 구속되는 가운데서도 불기소 처분을 받아 옥살이를 면했다. 이 무렵 전두환이 느낀 배신감은 대단히 컸다고 하는데,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꼴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96년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후, 이 해 12월 신한국당에 입당했던 그는 국민의정부 시절인 99년9월 새정치국민회의로 당적을 변경했다. 그가 반DJ 정서가 강한 대구경북 출신인데다 80년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한 신군부의 핵심 인물이었던 까닭에 그의 당적 변경은 사람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했다. 물론 그의 당적 변경은 지역감정 해소라는 명분을 앞세운 김대중 정부의 동진정책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렇지만 정권이 무려 4차례나 바뀌는 동안 큰 탈 없이 권력 자기장 안에서 보신하며 권력의 양지만 쫓았던 그에게 ‘권력의 달인’이요 ‘처세의 달인’이란 달갑지 않은 비판이 따라붙는 것을 면할 순 없었다.
2000년 12월26일, 그는 권노갑의 지원을 받아 양순직의 뒤를 이어 한국자유총연맹의 8대 총재로 선출됐다. 이후, 그는 반공과 이념 위주였던 자유총연맹의 고유한 색깔을 탈색하며 햇볕정책을 지지하고 나서는 것은 물론이고, 비록 조건부였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언젠가는 개정돼야 할 것”이라며 국가보안법 문제에 대해서도 너그러운 입장을 취하고 나서, 반공정신으로 똘똘 뭉친 과거의 동지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자유총연맹의 변신은 남북화해 시대에 발맞춘 것이기도 했지만‘재정 위기’에서 비롯된 측면도 컸다. 97년까지 매년 정부로부터 27억 원 가량을 지원받았던 자유총연맹은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정부의 직접적인 지원이 끊겨 재정난에 허덕였다. 그러니까 반공과 이념 대신 자유와 인권, 민주와 평화 등을 표방하며 평화운동 사업과 빈곤퇴치, 자원봉사활동 등 각종 시민운동을 단체의 존립을 위한 출구로 삼은 것이다. 자유총연맹은 2002년 7월 23일, 유엔경제사회이사회가 부여하는 NGO 회원 자격을 획득하기도 했다. 자유총연맹은 2002년 11월 2일, 재정난을 해소하고 안정적인 수익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한국전력의 자회사로 한 해 순익이 무려 80억 원에 이르는 알짜 기업으로 알려진 한전산업개발을 인수했는데, 재밌는 것은 이 과정에서 과거 이념적 형제였던 한나라당과 적잖은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 주영복 >
주영복과 이희성은 5공의 거목들이었다. 그런데 그 화려했던 거목들은 5공이 법정의 심판대에 오르자 권정달처럼 “나는 시키는 대로만 했다”는 의외의 진술들을 했다. 필자는 그들의 진술 내용들이 법적인 측면에서 진실인지 아닌지 공개적으로는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사람은 국방장관을 또 다른 한사람은 계엄사령관을 했으면서도 그 위엄과 명예를 초개처럼 내버리고 나이 어린 검사들 앞에서 “나는 그 자리에 있었지만 새까맣게 어린 하급 장교들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라는 실로 부끄러운 증언을 했다. 더구나 주영복은 어린 검사 앞에서 전두환이 최규하 대통령의 눈퉁이를 주먹으로 때려서 하야시켰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증언까지 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공군총장이 되고 국방장관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이렇게 질문을 유도해가는 검찰이나 마주 앉아 답하는 주영복이나 참으로 민망스럽기 이를 데 없다. 더구나 주영복은 1974년 공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어 1979년 4월까지 4년7개월 동안 최장수 총장을 지냈고, 79년12월14일부터 82년5월21일까지는 국방장관, 83년7월7일부터 85년2월18일까지는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그 외에도 한국반공연맹 이사장(1983),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1985~1989) 등을 지내며 5공에서 한껏 영달을 누렸던 사람이다.
권정달과 유사한 배신(?)을 하고서도 주영복은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서 7년 형을, 이희성은 8년형을 선고받은 반면 권정달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이 두 거목들이 받은 형량은 ‘자신들의 역할이 정당했다’고 당당하게 주장한 이른바 12.12 핵심들이 받은 형량과 대동소이했다. 유학성의 8년, 이학봉 및 허화평의 10년, 허삼수의 8년, 장세동의 7년과 비슷한 것이다. 세 사람이 검찰에 협조를 했지만 검찰은 오직 권정달 한 사람에 대해서만 반대급부를 준 것 같아 4성장군 출신인 두 거목의 모양새가 더욱 초라해 보이는 것이다. 월간조선 1999년1월호 별책부록 “총구와 권력”(5.18수사기록 14만 페이지의 증언)에는 “주영복 전 장관이 전두환 장군의 압력과 자신이 역할을 구체적으로 진술함으로써 신군부 측을 유죄로 몰아넣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래는 1995년12월12일, 서울지검에서 진술한 내용 중 기막힌 대목만 발췌한 것이다.
검사: 진술인은 최대통령의 하야 소식을 하루 전인 8월15일에 들었다고 했지요?
주영복: 세종문화회관에서 광복절 행사가 끝나고 쉬고 있는데 대통령이 불러서 갔습니다.
문: 대통령이 진술인만 불렀나요?
답: 여러 사람들을 함께 불렀습니다.
문: 대통령이 무어라 하시던가요?
답: 평화적 정부이양의 선례를 남기기 위해 사퇴를 결심했다고 말씀하셔서 한동안 눈물을 흘렸습니다.
문: 그 때 대통령의 눈 부위 등에 어떤 폭행을 당한 자국이 없던가요?
답: 어느 쪽인지는 모르지만 한쪽 눈이 부자연스러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 그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나요?
답: 그전에는 없었습니다.
문: 진술인은 대통령이 스스로의 판단과 결심으로 하야했다고 보십니까?
답: 참 진술하기 곤란한 질문입니다.
문: 180년8월21일, 진술인의 주도로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소집하여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자는 결의를 했나요?
답: 제가 주도한 것은 아니고 보안사 측에서 하라 해서 했습니다. 제 입장에서 거절할 수 없어 회의를 소집한 것입니다. 그날 저녁인지 다음날 저녁인지는 몰라도 부부동반 500명 정도가 모인 자리에서 보안사의 주선으로 윤성민 1군사령관과 윤자중 공군총장이 전두환을 앞에 세워놓고 “위대한 영도자 전두환 대장을 위해 건배를 하자”고 소리를 지르자 모두가 “위하여”를 소리 지르고 건배를 했습니다.
문: 진술인은 그 회의에서 훈시를 통해 “구국 일념으로 탁월한 영도력을 발휘해 국가의 위난을 수습하고 새 시대 새 역사의 지도자로 국내외에 뚜렷이 부각된 전두환 장군을 차기 국가원수로 추대할 것을 여기 모인 육해공군 지휘관과 더불어 제의하고 전국적 합의로 결의를 다짐한다. 오직 이 길만이 우리 국가목표인 항구적 안정과 보람찬 민주복자국가 건설을 앞당길 수 있음을 확신한다”라는 말을 했지요?
답: 예
문: 그 훈시도 전두환이 시킨 것인가요?
답: 예, 보안사 측에서 가져와 읽으라 해서 읽은 것뿐입니다.
문: 더 할 말이 있나요?
답: 전두환은 12.12 신군부 세력을 등에 업고 10.26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정승화 총장을 연행 구속하고 심지어 노재현 장관까지 거의 연행하다시피 해 군권을 장악했습니다. 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보위 설치 국회해산 등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그래서 군 인사까지 포함한 거의 모든 중요사항에 대한 결정을 전두환 지시에 의해서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 고령이라 나머지 인생을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이제 고령이라 나머지 인생을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라는 마지막 말에 검사의 선처를 바란다는 뜻이 듬뿍 들어 있어 보인다. 그의 나머지 진술 중에서 눈에 띄는 내용들을 몇 가지만 추려본다.
1) 국방장관은 중요 정책에 대해 보안사령관에게 지시할 위치에 있었지만 그들이 실세여서 지시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들이 시키는 일이면 다 해야 했다.
2) 전두환이 중정부장서리를 겸직한 것은 정보를 장악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전두환이 실권자였기 때문에 신현확과 이희성은 꼭두각시였다.
3) 5월17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는 국방부 국장들 및 국방차관 조문환과 상의한 결과 모두의 뜻에 따라 내가 열기로 결정했다.
4) 5월17일21:40분에 국무회의가 열렸는데 긴장감이 돌았고, 국무원들 모두가 약간 겁먹은 얼굴이었다. 비상계엄전국확대는 만장일치로 가결됐다.
5) 5월17일 22시에 정치인들과 자야인사들을 체포한 것은 전두환 등 실세들이 정권을 잡는데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사전에 제거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6) 전두환은 12.12이후 군권을 탈취하고 80년5월경 국보위를 설치하여 모든 권한을 좌지우지 했다. 대통령은 물론 본인, 계엄사령관 무두가 전혀 실권이 없는 사람(바지)들이었다.
< 이희성 >
계엄사령관이었던 이희성은 광주 전교사사령관 윤흥정과 동기생(육사8기)이며 정승화가 총장이었을 때 참모차장을 했고, 10.26 직후에는 정승화에 의해 중정부장서리직에 임명됐고, 12월13일, 육군총장 겸 계엄사령관이 됐다. 그래서 그는 정승화 총장이 키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1779년에 계엄사령관겸 육군총장을 지냈고, 1980년에는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위원, 1981년에 대장으로 예편하여 대한방직협회 회장, 1982년에는 교통부 장관, 1984년에는 국토통일원 고문, 1984년에는 대한주택공사 이사장을 지내면서 5공의 단물을 한껏 마신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정승화에서 전두환으로, 다시 전두환에서 검찰로 마음을 바꾸었다는 불명예스러운 평을 듣고 있다. 1995년12월12일 그는 서울지검에서 매우 놀라운 진술을 했다.
“전두환의 말을 듣지 않고 내 의사대로 한다는 것은 원초적으로 불가능했다” “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워낙 곧은 사람이라 합수부측 뜻대로 움직일 수 없다고 판단, 그를 제거하기 위해 정승화를 김재규 사건에 관련시켜 연행한 것으로 보인다” “군 인사는 측근인 노태우나 정호용을 통해 직접 예하부대에 지시했고, 계엄사령관이 발령하는 계엄포고령도 보안사 요원들이 알아서 발령했다” “전두환이 관사를 도청하지 않는가 하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국보위는 계엄사령관의 관장업무를 빼앗아 가는 것이었다” 등의 진술을 함으로써 스스로를 ‘바지’계엄사령관으로 격하시켰다. 그를 발탁 중용해준 은인 정승화에 대해서는 “정승화총장은 성품이 온화하고, 정의감이 강하고, 일하는 데에는 치밀하고 조직적이며 투철한 군인정신을 가진 매우 훌륭한 분이었다”고 추켜세운 반면, 전두환에 대해서는 각을 세웠다. 하지만 그는 아래와 같이 솔직한 진술도 했다.
1) 광주에 병력을 증파하는 것은 내가 직접 결정한 것이다. 증파과정에 정호용과 전두환이 간여한 적 없다.(주: 이 말은 “전두환의 말을 듣지 않고 내 의사대로 한다는 것은 원초적으로 불가능했다”는 윗말에 정면 배치된다)
2) 자위권 보유 천명은 전두환과 정호용이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
3) 광주시위 진압작전을 전두환과 정호용이 배후에서 지휘했다는 말은 참말이 아니다. 그들은 간섭한 사실이 없고, 그래서 광주사태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는 사람들이다. 광주사태 진압작전은 모두가 내 책임 하에 내가 결정했다.
4) 5월14일부터 전국 주요 계엄목표 즉 국가주요시설과 대학들에 비상계엄군을 배치한 것은 규정에 따른 것이므로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5)12월13일 새벽, 국무총리 전용차에는 나, 노장관, 총리가 뒤에 앉았고, 김용휴 국방차관이 앞자리에 앉았다. 차가 보안사 앞을 통과할 때 노장관과 김용휴 차관이 함께 내렸다가 1시간 후에 결재서류를 준비해가지고 대통령에게 왔다. 나는 대통령과 같은 방에 있었지만 멀리에서 결재과정을 지켜보았다. 전두환은 그 자리에 없었고, 결재를 강요하는 행위는 없었다. 결재는 20분 정도에 걸쳐 끝났고, 그 자리에서 노장관이 내에 오라고 손짓을 하기에 갔더니 대통령이 계시는 자리에서 “자네가 참모총장에 임명될 것이니 부대를 장악하고 수습을 하게” 이렇게 말했다
2010.12.21. 지만원
http://system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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