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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 학습 3 (김제갈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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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제갈윤 작성일10-12-07 02:23 조회20,29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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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반골기질의 김문수


초등학교 3학년부터 영천군에서 늘 1등. 전남 신안의 신동 빨갱이 천정배와 비슷하게 영천군의 신동 빨갱이 김문수,  경북고를 졸업하고 서울대에 입학, 1975년 학생좌익운동의 핵심부로 활동, 타고난 반골기질로 입학하자마자 제적과 구속, 수배를 반복. 인혁당, 민청학련 등 무시무시한 조직사건이 발표될 때마다 빠지지 않았던 이름 김문수. 그는 무서운 자다.


큰 집의 형이 좌익운동을 벌이다 일본으로 밀항해 조총련으로 활동, 청년 김문수에게 영향을 끼쳤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김문수가 학창시절 활동한 주 무대는 수양동우회. 수양동우회는 1921년 상하이에 있던 이광수가 안창호로부터 흥사단 한국지부 조직의 사명을 받고 귀국해 만든 유서 깊은 조직.  도산 안창호 선생의 유지와 뜻을 받드는 곳. 대구지역 연대 서클이었던 이곳에서 김문수는 사회의식을 키웠다. 김문수는 고 3때 소위 3선 개헌 반대를 주도하다 무기정학을 받는다.

“학교에서 2.28 기념탑까지 전교생이 뛰어가서 성명서를 읽고 곧바로 해산했습니다. 대구에서 처음 일어난 3선 개헌 반대 데모였습니다. 저는 주동자로 몰렸습니다. 경찰 조사를 받는데 다른 친구들과 달리 대충 이야기 하지 않고 저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에 미운털이 박혔어요. 선생님한테도 지지 않고 3선 개헌 반대의 정당성을 주창했어요. 결국 무기정학을 받았다가 대학시험을 앞두고 무기정학이 풀려 다행히 대학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경북고 전반에 흐르던 엘리트 의식과 저의 잠재된 ‘끼’가 발동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김문수는 타고난 빨갱이임을 알 수 있다. 캘리포니아주립대학(UC 샌디에고)과 하버드 대학의 공동연구팀은 정치 이념은 사회적인 요인에서만 영향받는 것이 아니라 주로 DRD4라 불리는 도파민 수용체(dopamine receptor)에 의해 결정된다고 발표했다.

연구를 주도한 UC 샌디에고의 제임스 파울러 교수는 2,000명의 사춘기 청소년들의 DNA 자료를 집중 분석한 결과 DRD4 유전인자를 갖고 태어난 청소년들이 어른이 되면 반골적인 성향을 띄게 된다고 말했다.

파울러 교수는 특히 주목할 점은 DRD4 청소년들이 사춘기 시절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할 경우 나중에 대부분 좌익으로 굳어진다고 주장했다.종전까지는 성장 환경에 따라 정치적 이념이 결정된다고 알려졌지만 이번 조사결과 유전인자가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DRD4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좌파라는 것.

파울러 교수는 이번 조사에서 남녀, 인종, 문화적 배경, 나이에 상관없이 동일한 결과가 도출됐다고 설명했다. 한번 빨갱이면 영원한 빨갱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무기정학 동안 사회교과서를 정독한 김문수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후회 보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코앞에 닥친 대학입시를 앞두고 김문수는 진로 문제를 홀로 고민하다 사촌형에 조언으로 서울대 상대에 지원해 무난히 합격했다.

 

서울대시절 민주당 국회의원을 역임한 심재권의 사회과학동아리인 ‘후진국사회연구회’에 가입, 길고 긴 운동권 인생의 출발한다.동아리는 학내 시위를 조직하고, 광주 대단지 등 빈민 대상 사회조사 등이 주업이었다. 허허벌판에 군용텐트가 가득한 ‘포로수용소’와 다를 바 없는 광주대단지를 오가며 그는 비참한 사회현실에 분노했다. 완전히 ‘행동하는 운동권’으로 변신한 그는 대학 2학년 때 교련 반대, 한일조약 반대 등에 적극 참여했다가 끝내 제적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적으로 190명의 대학생을 짤랐는데, 거기에 내 이름이 낀 거예요. 고학년은 다 빼주고 저학년 위주로 제적시켰어요. 그때 난 장티푸스에 걸려 시골 가서 40도가 넘는 고열에 연일 피를 쏟고 누워있는데 제적이 된 거에요. 설상가상으로 곧바로 '징집영장'까지 나왔어요. 몸이 아파 사경을 헤매는데 학교는 짤리고, 영장까지 나오니 정말 막막하더군요.”

그는 앓아누워 있던 집에서 국군보안대 요원들에 의해 강제로 차에 태워져 국군통합병원으로 끌려갔다. 반송장 상태였던 그에게 군의관이 물었다. “아픈데 없지.” 초췌한 모습의 김문수가 답했다. “아이고, 장티푸스에 중이염까지 걸려서 죽겠습니다.” 김 지사의 하소연에 군의관이 정밀 진단 결정을 내렸고 징집 면제 판정을 받고 풀려났다. 이 점은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김근태 ‘구로공단’ 취업 주선…청계천 등에서 근로자 의식화 교육


 학교에서 제적당한 김문수는 고향에서 야학과 농민운동을 하면서 소일했다. 그러나 한계가 많았다. 겨우 21살의 청년이 동네 어른들을 상대로 농촌계몽운동을 하니, 아예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고 결국 서울로 올라왔다.


김문수는 이후 우여곡절을 거쳐 두 번의 제적과 두 번 투옥되었다가 25년만에 대학을 졸업했다. 노동운동은 김근태와 안병직 교수의 영향이 컸다. 안 교수는 김문수가 진로를 고민하면 “너 대학이 중요하냐, 대학 보다 더 중요한 게 사회, 나라를 바로 잡는 것”이라며 노동운동을 권했고 김근태는 구로공단 취직을 주선했다. 청계천도 그의 활동무대였다. 청계천 노조 간부들에게 노동법을 가르치면서 노동현장 분위기를 익혔다. 그는 청계천의 한 미싱공장에 취직했다가 74년 복학했다.


“청계천이 정말 힘든 곳이었습니다. 본래는 복학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엄마와 형님이 서울에 올라와서 ‘뭘해도 좋으니까 학교는 들어가서 졸업하라’고 애걸복걸하더군요. 나도 데모만 했지, 제대로 못 다닌 것 같아 복학해서 학교 운동권의 핵심으로 활약했습니다.”


안병직 교수는 물론 유인태 전 의원, 신철영 경실련 전 총장, 박재완 청와대 수석, 김병곤 전 민청련 의장 등이 당시 김 지사와 함께 활동한 사람들이다.

75년 면도칼과 지퍼 생산업체인 한일공업 보일러공으로 위장취업해 꼬박 6년을 작업했다.


차명진과의 만남

한편, 1979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들어간 차명진은 경제철학회라는 이념 서클에 들어가 의식화 공부에 빠졌다. 그해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18년 장기 집권이 끝났고 이듬해엔 5공 신군부의 한파가 서울의 봄을 덮쳤다. 차명진은 정보부에 끌려갔고 강제 징집되어 강원도 산골짜기 부대로 갔다. 제대하고 복학한 후 차명진은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현장에서 활동하다 보니 김문수라는 ‘지도자의 이름’이 들렸다고 한다. 차는 김을 찾아가 “당신은 나의 지도자다. 당신을 따라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했다. 그때부터 차는 김의 그림자가 되었고 위장취업 투쟁을 시작했다. 부천철탑공장, 주안공단의 전선제조업체, 구로공단의 대한광학 등에서 그는 노동자를 조직하고 파업을 지원했다.

김문수가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을 결성하자 차명진도 조직원이 되었다. 서노련은 86년 5월 3일 노회찬등과 함께 인천에서 폭동을 주도했다. 폭도시위대는 5공 독재 타도와 노동권 쟁취를 외쳤고, 집권 민정당 지구당사와 경찰차량이 불에 탔다. 김문수가 잡혀가자 심상정(전 민노당 의원)이 서노련을 이끌었으며 차명진은 중앙위원이 됐다. 차명진은 서노련의 해고자복직투쟁위에서 지금의 부인을 만났다. 부인은 서울대 출신으로 위장취업 3년 선배였으며 지금은 사회복지사가 되어 노인요양시설에서 일한다.

▲ 지난 81년 김문수 전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은 세진전자 노조위원장 출신의 설난영씨와 결혼했다(왼쪽). 그로부터 25년이 흐른 2006년 7월, 그는 3선 국회의원을 거쳐 경기도지사에 취임,대선을 꿈꾸고 있다.

강삼재 기조 실장의 권유로 여당 입문'…"학생운동권 멤버들이 추천"


서노련 활동이 쇠락하면서 김문수와 차명진은 노동운동의 한계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장기표 등과 함께 89년 빨갱이정당 민중당을 창당했다. 92년 총선에서 민중당은 처절한 참패를 겪은 후 안병직 교수의 조언으로 두 사람의 극렬좌익빨갱이들은 ‘자본주의 정당’ 민자당(한나라당의 전신)으로 화려한 변신에 성공, 지금 그 당에서 지사와 의원이 되어 있다. 차는 김의 지역구(부천 소사)를 물려받았다.


96년 총선은 당시 여당이던 민주자유당이 공천 물갈이와 함께 각계의 전문가들을 대거 영입하던 시기였다. 김영삼 대통령 쪽에서 김문수에게도 제안이 왔다. 강삼재 기조 실장이 접촉 창구였다. 운동권 출신 중에는 김 지사 유일했다. 김 지사 입당 10개월 후 이재오 전 의원이 들어왔다.


“아는 선배들이 문민정부와 접촉이 많았고 중요한 직위를 맡고 있었죠. 대학때부터 따르던 안병직 교수를 비롯해 김정남 전 교육문화수석, 김덕룡 전 의원 등이 학생운동권의 같은 멤버였고, 그분들이 추천한 것 같습니다. 당시 민주당에서 입당 제안이 왔다면 민주당에 입당했겠지만 제안은 민자당에서 먼저 왔던 것이죠."

새빨간 극렬좌익분자 김문수의 화려한 변신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인천 5.3 폭동의 성격

5․3 폭동은 대중의 정서에 맞게 전개되지 못하면서 5공정권에 의해 폭동․소요로 규정되면서 탄압의 계기를 제공했다는 평가처럼 극렬좌익 폭동이었던 것이다.


5.18 광주사태 뒤 학생들이 노동현장에 많이 들어갔는데, 인천은 그런 위장취업자가 1천여 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이들과 기존의 노조 활동가들이 결합해 인천의 노동운동은 강한 조직력을 갖추었다.

1986년 들어 3월 10일 인천지역 임투전진대회(임금투쟁)를 계양산에서 열려 했으나 경찰의 봉쇄에 밀리고 밀려 결국 강화도 전등사에서 5백 명이 모여 대회를 열었다. 4월 12일 해고자가 부평역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서울에서는 4월 13일 전국노동자임투위 대회를 열었다. 5․3전야에 노동자가 투쟁하려는 기운이 상당히 높았다.

그리고 5․3운동에서 노동자 시위를 서․인노련이 주도했다. 서․인노련은 ‘대중정치조직(MPO)’이라는 조직노선을 표방해 정치노선은 삼민(민족․민주․민중) 사회를 지향하는 노동자조직이었다. 당시 학생운동 출신 노동자의 투쟁력이 강한 반면 기존 한국노총은 정부나 기업에게 협조하는 노선을 걷는 상태 아래 전두환 정권의 강한 노동운동 탄압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이런조직형태와 선도투쟁론(선도투)이 나왔다.

 서노련은 서울에서 청계피복노동조합 노동운동탄압저지투쟁위원회, 구로지역노조민주화추진연합, 서울노동자연대투쟁연합이 연합해 위원장 민종덕(근로자)을 내세워 1985. 8. 25 결성했다.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노복, 1984. 3. 10 결성)처럼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 출신의 위장취업활동가들이 조직해 한국노총 민주화를 주장하던 인천지역노동자복지협의회(인천노복, 1984. 11 결성, 의장 양승조)가 스스로 해체하고 서노련과 노선을 같이하던 노동3권쟁취위원회(1985. 9. 7 결성)와 결합해 인천지역노동자연맹(인노련, 1986. 2. 7 결성)을 결성했다.

인노련은 조직원이 5, 6백~1천명이었는데, 회원수 집계가 신축적인 것은 서노련과 같이 조직이 공개 비공개의 이원 조직(점조직)이어서 노동자 스스로가 인노련 회원인지 아닌지를 모르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노련은 선진노동자 중심으로 움직여 소모임이 지역에게 의식화교육을 하며 지역 대중조직을 일방적으로 지도하는 활동을 했다. 이런 흐름은 선진노동자와 노동조합이 상호 침투하는 노동운동의 전형과는 달랐다.

신민당의 개헌 현판식은 노동자가 야당이 독재를 연장하는 이원집정제를 지지하는 것을 막고 아울러 자신의 주장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런 배경에서 신민당은 노동자의 힘이 필요하고, 노동자는 신민당이 만든

합법적인 공간이 필요했다. 이렇게 해서 보수적인 제도야당 신민당과 1980년 이후 민주주의와 사회변화를 요구하며 성장한 지하의 노동자 세력이 수면위로 올라와 5․3 폭동의 현장인 인천에서 조우했다.

서노련은 대검찰청의 발표에 따르면 4월 23일 김문수 지도위원, 이옥순 부위원장, 이봉우 사무국장이 만나 인천집회에 결합하기로 정하고 경인지역 18개 산업체 노동자를 동원하기로 정했다.

5․3현판식직전인 4월 28일 서울대생 김세진 이재호가 반미 구호를 외치며 분신하고 5월 1일 인천의 삼한택시 노동자 변형진이 분신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나 인천폭동시위는 수도권에서 처음 갖은 집회이며 대규모 공장이 밀집한 지역이어서 이후 빨갱이운동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고비였다.

1986년 인천지역 기관장 회의자료에 따르면 신원을 확인한 인천지역 ‘위장취업자’만도 246명으로 서울 181명, 경기 178명, 부산 40명, 광주 20명, 대구15명에 비해 훨씬 많았다. 이들은 공장 안팎에서 노조 결성이나 노조의 민주적 변화 그리고 각종 소모임을 조직해 노동운동의 저변을 넓혔고 노학연대 활동을 했다. 이것은 5․3폭동에 노동자들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선동활동이었다.

민통련과 인천기독노동자연맹(기노련, 1985),JOC(가톨릭노동자회),도시산업선교회(인명진) 등에 소속한 노동자들도 참여했다. 5․3시위를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오전부터 개헌 현판식을 열 예정이던 오후 2시 사이에 노동자 학생 민통련은 각기 집회를 갖고 민정당사를 불 지르는 첫 단계, 신민당의 개헌 현판식이 무산되고 이를 공식 발표하는 5시 30분까지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있던 두 번째 단계, 이후 주안역 동인천역을 비롯한 시내 곳곳에서 산발 시위를 한 셋째 단계다.


노동자, 학생, 민통련은 각기 시위에 참여하는 입장이나 전술이 달랐고 집회도 따로 따로 열었다. 민통련은 연좌집회가 주된 전술이었고, 학생은 전투대오를 구성하고 경찰과 대치해 화염병을 썼다. 노동자는 시위행진에 주력하며 소수가 전투대오에 참가해 경찰에게 화염병을 던졌다.

서․인노련 등 노동자단체는 주안사거리 중앙에 연단을 설치하고, ‘삼반정권타도 및 삼민헌법 쟁취 실천대회’를 개최했다. 김문수 전희식 서기화 등이 합판을 깐 리어카 위에 올라가 삼반정권의 억압과 폭력성을 말하고 ‘노동자해방투쟁’을 선언하고, 선언서를 길가에서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민통련은 시민회관 앞 사거리에서 인사연이 주관해 농악을 울리고 사물놀이를 하며 ‘민주화촉진 인천시민대회’를 열었다. 이호웅 인사연 의장과 수배중인 민통련의 장기표, 안희대, 광주폭동 관련자 정동년 등이 ‘군사독재 타도하고 민중민주정부를 수립하자’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을 물러가라’며 연설했다. 이들은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광주학살 책임지고 미국은 사죄하라! 저임금, 실업 강요하는 재벌정권 타도하자!” 등의 구호를외쳤다. 그리고 연좌해 즉석 ‘민주화대토론회’를 가졌다. 이날 오전 인천에 도착한 이민우 총재, 김영삼 고문 (김대중은 가택연금, 배후조종여부는 확인필요)등 신민당 지도부 차량 50여대가 10시부터 11시 반까지 시내를 돌며 직선제개헌 추진과 이날의 개헌 현판식을 알리는 카퍼레이드를 하고 오후 1시 50분 무렵 대회를 열 예정이었던 인천시민회관 앞에 도착했으나 학생들이 길을 터주지 않아 대회장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노동자 학생들은 “신민당은 각성하라” “이원집정제 반대한다”는 구호를 외쳤다. 신민당 지도부는 대회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1.5km를 걸어 주안역 뒤쪽에 있는 명화섭 의원 사무실로 퇴각했다. 그 후 경찰가스차 1대가 시위 군중 깊숙이 들어왔다가 포위당하는가 하면 경찰 4명과 사복경찰 1명이 각목으로 얻어맞았고 4시 20분 시위대가 경찰 1백여명을 가두고 최루탄을 실은 트럭을 빼앗아 최루탄 10박스 1,500개를 빼앗고 차량을 불 지르고, 가스차를 포위해 못 움직이게 막는등 장장 11시간에 걸친 극렬폭동은 끝났다.



각 단체의 구호는 “노동자 피땀 짜는 미제국주의자 몰아내자!” “반미 반제 양키 고홈” “노동자의 철천지 원수 미국놈들 몰아내자” “속지말자 신민당 몰아내자 양키 고홈” “미일외세 몰아내고 민중정권 수립하자”와 “외세압력 물리치고 민족자존 수호하자!”(민통련), “군사독재 조종하고 수입 개방 압력으로 민중생활 파탄시키는 미제국주의 몰아내자!”(인노련), “군사독재 앞장세워 광주민중 학살하고, 노동자 민중 피땀 짜는 미국놈을 몰아내자”(서노련․인노련), “광주학살의 교사범 미제국주의 물러가라! 이원집정제 강요하는 미국은 물러가라! 불황 실업 강요하는 미일자본 물러가라! 핵기지 철수하고 작전지휘권 이양하라!”(자민투․서노련․인노련) 등이었다.

서.인노련의 조직형식주의는 조직운영에서 지도부는 개인주의에 빠져 있으면서 조직원 개개인에게는 운동의 주체가 아닌 수단으로 파악해 수동화시키는 전체주의 경향을 보였다. 그 결과 조직내 민주주의는 실종하고 복종이 미덕이되었으며 분파주의와 관료주의가 만연했다는 평가다. 한마디로 순박한 근로자들을 선동,배후조종 했다는 얘기다.



<구성 자료>

인터넷 신문기사와 “5․3 인천민주화운동과 노동자의 역할” 김영곤. 으로 구성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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