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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일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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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2-07 23:04 조회2,7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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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일 선생이 조선일보를 아주 떠났다고 한다. 그동안 그는 보수우익을 대변하는 시원한 글들을 많이 써서 많은 우익 독자들에게 위로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필자는 몇 차례에 걸쳐 그의 글 속에 숨어있는 메시지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글들을 쓴 바 있고, 의심이 많은 필자는 그의 전력을 뒤져 본 일이 있었다. 이제 류선생도 인생을 정리하기 위한 마지막 발걸음을 옮겼고, 필자 역시 곧 그처럼 인생정리의 발걸음을 옮겨야 하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인생의 무상함 앞에서 무엇을  따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좌에서 우로 돌아섰다는 전형적인 인물, 류선생으로부터 배워야 할 점이 있는 것 같기에 아래 글을 게시한다.  
    
류근일 선생은 2008년12월22일, “기적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리”라는 제하에 “25년 연재한 칼럼 마치며 간절히 소망하고 기원합니다”라는 뜻을 전하는 칼럼을 썼다. 그리고 2008년12월24일, 조선일보 박두신 논설위원이 분당의 어느 아파트로 류근일을 찾아 인터뷰를 했다. 필자는 바쁜 때였기에 류근일의 마감 칼럼의 제목만 훑어보고 읽지는 못했다. 그 후 몇몇 선배님들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류근일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 사람, 완전히 돌아온 줄 알았더니 역시 뿌리는 못 뽑는 모양이야” 이런 이야기들이었다. 필자는 오늘에야 조선일보에 들어가 그의 마감 칼럼과 인터뷰 기사를 읽어 보았다.

                                                     마감 칼럼에 있는 글

“1948년에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되고 대한민국이 건국된 것부터가 우선 기적 같은 사태였다. 북쪽에는 스탈린이 지시하는 계급혁명이 착착 진행되고, 남쪽에는 그에 호응하는 통일전선이 좍 깔린 난국 속에서도, 당시의 지도자들이 우익독재 헌법 아닌 순수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제정했다는 것 자체가 기적 아니고 무엇인가? 이 헌법 덕택에 오늘의 우리의 민주화가 가능했고 산업화가 가능했다. 그 헌법 정신이 아니었다면 "유신체제 물러가라!" "산업화를 넘어 선진화로!" 같은 구호들이 발붙일 땅이 없었을 것이다.”

“1950년대 말, 어느 외국인 기자는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를 구하는 것과 같다"고 썼다. 그러나 한국의 학생, 지식인, 시민, 언론은 4·19 혁명으로 그 기사를 보기 좋게 엿 먹였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제헌정신은 그 후로도 1987년의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계속 쓰레기통에서 장미를 피워냈다. 민주화에서도 한국, 한국인은 기적 같은 '예외'였던 것이다.”

                                                 인터뷰 기사에 있는 글

“그는 글쓰기가 50년 넘은 일생의 업(業)이었다고 했다. 서울대 정치학과 2학년생이던 1957년 문리대 주간신문에 실은 '무산대중을 위한 일고찰'이란 글 때문에 필화 사건에 휘말려 4개월 복역했다. 이어 1961년 5·16 직후, 1974년 민청학련 사건까지 세 번에 걸쳐 8년6개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1968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1981년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옮겨 2003년 주필을 끝으로 퇴직했고, 이후에도 조선일보에 칼럼을 써 왔다.. .그의 아버지 류응호(柳應浩)씨는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난 직후 동료 교수들과 월북해 김일성 대학 교수를 지냈다.”

문: 1980년 이전까지 '좌파'로 분류됐는데 요즘은 일부에서 '극우'라고 몰아세운다.

답: 나는 한 번도 어느 극단에 속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에 관심을 가졌지만 극좌와는 거리가 멀었다. 천성적으로 '지나침에 대한 반발' 성향이 강하다. 1970년대까지는 권위주의 통치에 반발했던 것이고,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극좌 세력의 등장에 반대한 것이다."

문: 글쓰기나 이념적 모색에서 아버지의 영향은 없었나.

답: 아버지가 극좌로 넘어갔기에 극단에 빠지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선친은 1950년대 후반 대숙청에 걸려 함경도 모처로 쫓겨갔다. 집에 있는 영문 서적과 '외국인과 통역 없이 대화한다'는 트집을 잡아 간첩죄로 몰았다고 한다. 10년쯤 뒤 평양으로 돌아와 김형직 사범대에서 영어를 가르치다 1994년 무렵 작고했다고 들었다."

문: 마지막 칼럼에서 대한민국의 기적 중 으뜸으로 제헌헌법을 꼽은 이유는?

답: 지금 읽어보면 초(超)현실적이란 느낌까지 든다. 60년 전 그 시절 어떻게 자유민주주의의 대장전을 쓸 수 있었을까 싶다. 역대 정권이 헌법에 투철하지 못했고,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헌법정신은 도도히 이어져 내려왔다. 4·19도 초등학교 때부터 이 헌법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 마음속에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내재됐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문: 직접 맞닥뜨린 역대 대통령들을 평가한다면.

답: 이승만 대통령은 건국의 공이 있는 반면 독재와 부정부패라는 부정적 유산도 남겼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도 산업화와 그 그늘을 같이 봐야 한다.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민주화 세력의 대표로, 한국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완성시킨 공로가 있지만 아들 비리를 피해가진 못했다. 이승만·박정희의 리더십을 인정하지만, 양김씨는 보스십(boss-ship)이라고 하겠다.

문: 정치 칼럼을 쓰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인가?

답: 아무래도 5공 마지막 해였던 1987년이다. 그때는 단어 하나, 표현 하나에도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문: 가장 기업에 남는 칼럼은?

답: 87년 1월부터 6월까지,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에서 6·29 선언으로 이어지는 기간의 글들이다. 87년 2월 8일자 칼럼에서 "박종철군의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우리가 지금까지 눈이 벌게 가지고 정신없이 추구해 온 도덕성을 무시한 성취욕과 발전지상주의의 무서운 마성(魔性)과 그 재앙을 들추어 보인 한 알의 밀알 같은 희생"이라고 했다. 5공 정권에 대한 비판은 '정의를 요구하는 시대'(3월 1일자), '이 모양으론 안 돼'(5월 31일자), '선거가 있게 하자'(7월 19일자) 등이었다.



                                                 아직도 류근일 마음속엔?

1. 유신에 대한 비판이 크게 자리한 것으로 보인다.

2,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격으로 인식하고 있다.

3. 4.19와 87년의 민주화운동을 민주주의의 장미꽃으로 평가한다.

4. 이승만은 건국은 했지만 독재와 부정부패로 얼룩진 사람, 박정희는 산업화는 이룩했지만 그늘을 많이 만든 사람, 김대중-김영삼은 민주화의 대표이며, 한국정치권력의 정당성을 완성시킨 공로자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주: 양김만이 민주화에 의해 선출된 정당한 대통령이었다는 뜻으로 보임)

5. 1987년에 글을 쓰면서 글자 하나하나에 신경썼다는 말은 5공을 비판했다는 말로 들린다. 그는 박종철의 죽음을 5공-3공의 마각을 드러낸 값진 희생으로 평가한다.(주:5공에 대해 강한 불호감을 가진 것으로 보임)

이상의 5개항에서 필자가 느낀 점은 세 가지다.

1. 류근일은 김대중-김영삼을 민주화에 의해 정치권력을 획득한 정당성의 상징으로 보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반공정권을 무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이 탄압했던 대상들은 국가를 파괴하는 빨갱이들이었고, 그들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은 근면하게 일을 열심히 했던 사람들이다.

2.  류근일은 한국 민주주의의 뿌리를 4.19와 386 주사파들이 벌인 87년 극렬시위에 두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민주주의의 뿌리를 세 곳에서 찾고 있다. 첫째, 이승만 대통령이 제정한 헌법과 근대화된 행정기구 설치, 둘째, 박정희 대통령의 빈곤퇴치와 전두환 대통령의 경제대국 건설 셋째, 밤낮없이 조국근대화를 이끈 엘리트 및 가난퇴치를 위해 열심히 일 해온 산업역군들과 법 테두리 속에서 착실하고 열심히 살아온 일반 국민이다. 필자의 눈에 류근일이 높이 평가하는 민주화란 공산화를 의미한다. 류근일-고건-김지주가 이끄는 ‘신진회’는 오늘날 한총련의 원조이며, 4.19 학생시위를 주동한 원류로 알려져 있다.          

3.  류근일이 돌아왔다 해도 뿌리는 그대로라는 것이 필자가 받은 인상이다.

4. 연좌제는 법적으로 없어졌지만 연좌정신은 현실적으로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류근일의 인생 역정

류근일은 1938년생, 서울대 정치학과를 다니다가 자유당 말기인 1958년, 대학신문에 ‘사회민주주의’를 주장하다가 퇴학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서울대필화사건’이었습니다. 1심과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1960년 재입학했다가 박정희 시대인 1961년에 다시 ‘민통학련’(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사건으로 1961년부터 1968년까지 투옥되었습니다. 민통학련 사건은 굴욕적 대일경제협력 반대, “가자 판문점으로”, “여기가 뉘 땅인데 내 마음대로 갈 수 없느냐” 등의 구호를 외친 위험한 학생운동이었습니다. 참고로 류근일과 고건은 함께 통일하러 판문점으로 가자는 ‘신진회’에서 함께 활동했습니다. 1974년, 그는 민청학련 후배들을 배후 조정했다는 이유로 김지하, 이현배와 함께 1심에서는 무기징역, 대법원에서는 20년형을 선고 받았지만, 2.15조치로 1년만 살고 나왔습니다. 1961년부터 모두 3차례에 걸쳐 8년 1개월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그가 7년간 감옥생활을 한 것은 중앙일보 논설위원 시절이었습니다.

이런 감옥 경력을 놓고 류근일은 지금도 좌익들을 향해 “나도 할 만큼 했다”며 투쟁경력을 자랑합니다. 민통학련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충격적인 일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980년대 후반까지 전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1980년대 말에 ‘종속이론’(미국에 종속), ‘네오 맑시즘’ 등 좌파이론을 더 배워 지식을 업데이트 시키기 위해 다시 서울대 대학원을 찾았다”고 말합니다. 1990년대에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딴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는 1968년부터 중앙일보에서 근무했고, 논설위원도 했습니다. 1981년부터는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했습니다. 중앙일보와 조선일보에서 논설위원을 하면서도 그는 20여 년간 좌익세계에 집착해 왔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거물간첩 김용규씨는 그의 '소리 없는 전쟁'에서 4.19 이전의 좌익 이념서클인 ‘신진회’에 대해서도 언급했습니다. 인터넷 자료에 의하면 신진회에는 류근일, 고건, 전 법무부 장관 김태정의 친형 김지주(金志柱)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합니다. 신진회의 이념은 영국 노동당의 이념과 비슷했고, 특히 파비안이즘을 추종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파비안이즘은 토지의 주인을 마음대로 바꾸는 공산주의 사상이라 합니다. 마르크스 이론과 종속이론에 빠진 사람이 이러한 사상을 갖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고건은 2004년 탄핵정국 대행 시에 술에 거나하게 취한 상태에서 스스로를 ‘한총련의 원조’라 했다. 그 자료는 이 주소에 있다. http://blog.khan.co.kr/jk4free/2236102
2004-05-05

                                          고건의 말 “내가 한총련 원조입니다”

“다음은 최근 고건대행이 몇몇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과거 대학시절을 회고하면서 나눈 대화중 일입니다.  서로가 편안하게 부담없이 속에 담아둔 살 깊은 얘기를 나누는 자리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대화였습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속은 모른다고 고대행의 또다른 숨겨진 이면을 들여다보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이하 고건 대행의 말

아마 내가 한총련 원조라는 걸 잘 모를 거다. . .서울대 입학당시 당시 유명한 운동권 서클이 3개 있었다.  하나가 문리대에 있던 신진회(新進會)고, 다른 하나가 법대 신조회(남재희)였고, 고려대에 협진회가 있었다.

이 중 신진회는 3년선배로 부산상고를 나온 김지주(金志柱, 김태정 전법무장관 실형)씨가 주동이었고 그 밑에 이자헌(국회의원), 최서영(경향신문), 최영철(서울신문)씨가 있었다.

내 동기로는 유근일(조선일보)이 있었는데, 신진회 가입서명을 권유해 멤버가 됐다.  당시 신진회는 서울대 17동 강의실에서 강사를 초청해 강연을 듣고 토론도 하고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영국 토니블레어가 주장하고 있는 제3의 길이나 노동당 노선보다 다소 우측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유근일이 대학학보에 ‘공산당선언’을 그대로 번역해서 실었다가 신진회 멤버들이 필화사건에 연루돼 남대문서에 대거 불려가서 조사를 받았고 나도 같이 끌려갔다. 나도 거기서 “조직원들 이름을 대라“며 엄청 두들겨 맞았는데 당시 서울대 교수로 있던 부친(고형곤박사)이 보증을 서서 간신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부친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너 유근일이 아버지가 김일성대학의 유홍우 (다른 자료에는 柳應浩유응호)교수 라는 걸 아느냐”고 물어보더라.  나는 그 당시까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당시 4학년이었던 김지주 선배는 졸업후 LG에 들어갔는데 개인적으로 내 취직자리도 알아봐주고 했다.  나중에 김선배가 죽은 뒤 문상을 하러 갔더니 그곳에 상주로 김태정(전법무장관)이 있더라. 나머지 신진회 멤버들은 대부분 언론계에 들어갔는데 학보에 공산당선언을 기고한 유근일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보수논객이 돼있으니 아이러니 아니냐.

2008.12.30.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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