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 앞에 선 5.18 역사(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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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0-06-18 14:52 조회20,53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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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앞에 선 5.18 역사(머리말)
1995년 12월 21일, 5.18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이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의 판결문을 내놓았다. 이 두 가지 법 절차에 의해 5.18은 민주화운동으로 굳어져 왔다. 그 후 국민의 그 누구도 감히 5.18에 대한 다른 평가를 내놓을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오랜 시간이 흘러옴으로써 5.18은 더욱 공고한 금단의 성역으로 군림해 왔다. 그러던 중 2005년 대법원이 '이제부터는 5.18관련 역사를 연구할 시점이 되었음으로 역사바로세우기 수사기록 및 재판기록을 공개하라'는 요지의 판결문을 내놓았고, 이로부터 창고에 꼭꼭 갇혀 있던 방대한 양의 수사 및 재판 기록들이 공개될 수 있었다.
이 덕분에 5.18관련 수사 및 재판 기록들을 접하게 되었다. 접하고 보니 1995년 7월 18일에 검찰이 내놓은 “5.18관련사건 수사결과‘가 1980년에 조사된 사실자료 그대로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1980년의 수사결과와 1995년의 수사결과는 바뀌지 않고 그대로였는데 오직 판결문만 바뀐 것이다. 똑같은 사실들을 놓고 이를 해석하는 시각이 1980년 판사들 다르고 1995년 판사들이 달랐던 것이다. 1980년의 재판부는 5.18이 국가를 전복하기 위한 폭동이요 김대중의 내란행위라고 판결한 반면, 1996-97년의 재판부는 5.18 시위대를 준헌법기관으로 정의했다. 광주시위대는 헌법을 지키려 한 사실상의 준헌법기관이기 때문에 국가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도록 도와주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신군부가 최규하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만들면서 이를 조기 진압한 것은 분명한 내란행위였다고 판결한 것이다. 상식을 가지고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광주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면 이 나라는 그 당시 적화통일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바로세우기에 동원된 판사들은 1980년대를 살았던 수많은 상식인들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1990년대 민주화세력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라 할 것이다.
과연 1990년대 판사들의 시각은 건전한 것이었는가? 아니다. 그들은 간과해서는 절대로 안 될 매우 중대한 사실들을 판결에 반영하지 않았다. 수사기록을 보면 광주에서 사망한 민간인 수는 166명, 그 중 총상으로 사망한 사람이 116명이다. 이 116명 중 69%에 해당하는 80명의 총상사망자가 무기고에서 탈취한 총들에 의해 사망했고 계엄군이 소지했던 M16소총에 의해 사망한 민간인은 불과 36명뿐이었다. 이 69%라는 수치는 오발이나 실수로 불 수 있는 수치가 아니라 5.18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수치이며, 이는 광주에서 사망한 총상 사망자의 대부분을 광주시위대가 쏘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놓고 냉철한 과학적 시각으로 본다면 5.18에서의 민간사살은 광주시민들이 광주시민들을 쏘아죽인 자작극이라는 엄청난 결론이 유도되는 것이다. 광주사위대가 이렇게 많은 광주시민을 조직적으로 쏘았다면 거기에는 그럴만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왜 광주시민이 광주시민을 쏘았을까? 필자는 광주사람이 광주사람을 그렇게 조직적으로 쏘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광주시민들도 필자의 의견에 동의할 것이다. 만일 필자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5.18은 자작극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수만 단위, 수십만 단위로 몰려다니던 광주시위대들은 순전히 광주시민들로만 구성이 돼 있었을까? 순수한 광주시민들로만 구성돼 있었다고 주장한다면 광주의 희생은 자작극이 되는 것이다. 광주의 희생은 절대로 자작극이 아니며, 명예를 중시하는 광주시민들은 결코 이런 천인공노할 자작극을 저지를 사람들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으려면 이 69%의 소행이 순수한 광주사람들의 소행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만 한다. 광주시민들이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그 69%는 광주사람들이 저지른 행위가 아니다” 이런 주장만을 반복한다 해서 자작극의 멍에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어느 이방인들이 수만 수십만 단위의 시위대에 끼어들었는지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 책에서 광주시민들로하여금 ‘자작극’의 멍에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69%의 소행이 누구의 소행인지 밝혀낼 것이다.
우리의 이웃에는 북한이라는 집단이 있다. 북한은 호시탐탐 남한의 정국불안을 틈타 이른바 결정적인 시기를 만들어내고 이를 구실로 적화통일을 실현해보겠다는 끈질긴 야욕을 집단의 목표로 규정하고 있다. 5.18은 해방 후 최대 규모의 반정부 소요다. 안보를 걱정하고 안보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이라면 광주소요에 북한이 특수부대를 보내지 않고 손 놓고 구경만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백령도 근방에서 천안함을 어뢰로 폭침시켰다면 그 범인은 북한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극히 자연스럽듯이 건국 이래 최대의 반정부 소요사태에서 광주시민을 등 뒤에서 쏘아 광주시민들의 분노를 일으켜가지고 이 분노를 국가전복에 필요한 에너지로 사용하려 한 집단이 있었다면 그 집단은 북한 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냄새가 물씬 나는 중요한 사실을 판검사들은 간과한 것이다.
5월 21일 낯 12시에서부터 오후 4시까지 시위대는 전남 17개 시군에 숨어있는 38개 무기고를 동시에 털었다. 누군가가 사전에 무기고 위치를 알아가지고 아시아자동차에 모인 600명을 대상으로 조를 짜서 무기고 약도를 하나씩 나누어주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반국민은 무기고 옆을 지나가면서도 그것이 무기고인지를 알지 못한다. 당시는 조금만 거동이 수상해도 간첩으로 신고했던 반공의 시대였다. “선생님, 혹시 이 근처에 무기고 같은 거 보지 못하셨습니까?” 하고 물으면 신고 되는 세상이었다. 그렇다면 이 38개 무기고 위치를 파악하려면 얼마나 많은 고정간첩들이 얼마나 오래 조사를 해야 찾아낼 수 있는 것일까? 아무리 많은 고첩들이 동원된다 해도 여러 달은 걸릴 것이라는 생각은 들어도 5월 18일부터 5월 21일 아침 9시까지 단 3일 만에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할 상식인은 없을 것이다. 이런 일은 북한 특수군이나 간첩 같은 고도의 전문가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 결코 일반시민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5.18무장폭동은 5.18사람들이 극구 주장하듯이 ‘공수부대의 폭력에 맞서 일어난 즉흥적인 저항’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돼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광주시민이 아니라 북한 간첩들에 의해 준비돼 왔다는 생각이 든다. 이 중요한 사실을 역사바로세우기 판검사들은 간과했다. 북한의 공작을 잡아내야 할 판검사들이 전두환 등 신군부에 죄를 덮어씌우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5.18 민간인 사망자 중에서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시체가 12구 있다. 이들은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며, 그래서 시체의 주인도 없다. 그렇다면 이 12구의 시체는 어디에서 온 시체일까? 대부분의 상식이리라면 이들은 북한의 시체일 것이라고 생각들 할 것이다.
방위병 이재춘이 시위대 기동타격대원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시위를 하면서 북한 방송을 많이 들었는데 조금 전에 발생했던 상황들이 정확하게 방송되었으며 이는 간첩이 현장에 없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는 진술을 했다. 호남출신으로 합참의장이었던 문형태는 위컴 회고록을 통해 광주에 북한 불순분자들이 끼어 있었다는 것을 확신한다는 증언을 했다. 역시 호남출신으로 전라도 계엄분소장이자 광주작전을 현지에서 지휘한 전교사 사령관 소준열 중장역시 법정에 나와 위 방위병과 똑같은 내용을 증언했다. 조금 전 상무관에서 발생했던 상황을 북한 방송이 정확하게 보도했다는 것이다. 전라도 출신의 전 거물간첩 김용규는 그의 저서 '소리없는 전쟁'에서 김대중은 김일성이 키운 사람이고, 전라도는 간첩들의 교두보이며, 5.18은 북한이 배후 조종한 것이라고 증언했고, 탈북한 최주활 상좌와 거물 탈북자 강명도 역시 같은 증언을 했으며 실제로 5월 23일 독침과 무기와 난수표와 거금을 가지고 광주와 서울을 오가던 간첩 이창룡이 검거되었다.
당시 김일성은 10.26 직후의 권력 공백기를 틈타 남한에 전국봉기를 촉발시키라는 지령을 내렸다는 정보들이 입수됐고, 남파간첩들이 폭증했으며, 5월 4일부터는 북한의 시위전략 및 전술에 따른 시위들이 서울 등 전국 주요도시를 무법천지로 만들었고, 10만 이상이 모인 서울역 집회에서는 시위대가 버스를 탈취하여 경찰들 깔아 죽였다. 당시 내무장관은 시위가 경찰력의 한계를 훨씬 벗어났다며 최규하 대통령에게 계엄군의 투입을 건의했다. 당시의 국민들은 치안과 안보를 걱정했지만 김대중은 신이 났다. 그가 이끄는 재야세력들은 5월 22일을 기해 전국봉기를 일으켜 국가를 전복시키겠다는 선전포고를 공개적으로 했다. 김대중이 국가를 전복하느냐, 아니면 그 이전에 정부가 김대중을 격리시키느냐, 건곤일척의 순간에 5.17이 있었다. 24명의 김대중 내란음모 주모자들이 밤중에 전격 구속되고, 10.26직후에 발령된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5.17조치가 없었다면 5월 22일의 전국은 치안부재, 안보 부재의 사회가 됐을 것이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이 중요한 위험요소들을 재판에 긍정적으로 반영하기는커녕 이와는 반대로 신군부가 내란을 획책하기 위해 북한의 위협을 불필요하게 과장했다고 판결했다. 그리고 5.17조치를 내란이라고 판결했다. 5월 22일의 전국 폭동을 허용했어야 한다는 기막힌 판결인 것이다. 역사바로세우기에 동원된 법관들이 과연 대한민국 법관들이었는지 의심케 하는 매우 중요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결론적으로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은 전형적인 색깔 재판이었다고 생각한다.
최근 필자는 매우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5.18의 문화 분야 대부인 황석영과 윤이상이 1989년 3월 김일성에게 불려가 북한의 5.18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를 제작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는 현재 통일부 북한자료센터에 보관돼 있다. 이는 2007년 7월에 개봉된 남한의 5.18영화 ‘화려한 휴가’와 맥을 같이 하며, 관중들에게 적화통일의 당위성을 고취시키고 통일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들을 모략함으로써 적개심과 의협심을 유도하는 영화다. 5.18 사람들과 북한이 하나로 내통하여 자매관계에 있는 두 개의 영화를 남북에서 각기 제작하여 반미-반한 운동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5.18과 북한이 내통 야합한 한편인 것이다. 5.18의 명예는 5.18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일치할 때에만 유지되고, 순수한 민주화운동으로 남아 있을 때에만 유지되는 것이다. 우선 이 영화들만 보아도 우리는 5.18의 명예를 인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많은 독자들은 5.18에 철저히 기만당했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내통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5.18광주에 북한군이 확실하게 내려왔다고 믿을만한 매우 중요한 증거자료들을 찾아냈다. 1982년 및 1985년 북한이 발간한 두 개의 5.18관련 역사책을 포함해 수많은 간행물들을 찾아낸 것이다. 이들 북한 책들에는 당시의 광주상황들이 매우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이는 계엄군의 상황일지나 경찰의 상황일지보다 훨씬 더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다. 심지어는 군을 향해 돌진하다가 가로수를 받고 정지한 버스의 번호판 번호(광전교통소속 전남5아3706호)까지 기술돼 있다. 이번호는 가공으로 지어낸 번호일까? 아니다. 이 번호는 황석영 저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에도 그대로 담겨있다. 남한의 비밀자료들은 2004년에야 비로소 공개됐지만, 여기에는 차량 번호 같은 것이 들어있지 않다. 같은 시기에 발간된 북한 책들과 황석영의 책을 비교해 보면 상황자료들이 거의 일치하고, 모략내용들이 대동소이로 일치하고, 통일을 갈구하는 톤(Tone)이 일치한다. 이것도 5.18과 북한이 내통된 하나라는 믿음을 갖게 하는 중요한 근거일 것이다.
북한 당국의 출판사들이 광주의 수많은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상황들을 이미 1982년에 일목요연하고, 구체적이며, 상세하게 정리했다면 이는 수많은 북한 사람들이 수많은 광주현장들에 와서 조직적으로 상황을 관찰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시의 광주에 북한 상황실이 있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광주에서 북한 상황실을 본 사람은 없다. 하지만 북한상황실이 남긴 기록물들은 있다. 5.18광주에 북한 사람들이 왔던 것이다.
광주에는 악성 유언비어들이 만연했다. 내용들을 보면 광주시민들의 경상도에 대한 지역감정을 자극하고 공수부대와 전두환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선동 물들이었다. 이런 것들이 유포되면서 광주시민들을 자극했고,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이런 흑색 선전물들을 광주시민들이 만들었다고 하면 5.18은 순수한 민주화운동이 아니다. 5.18사람들 중 그 누구도 이런 유언비어들을 광주사람이 만들었다고 증언하지 않았으며, 역사바로세우기 검찰도, 그 어느 국가의 정부기관도 유언비어의 진원지를 알아내지 못했다. 단지 북한이 했을 것이라는 믿음들만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최근 필자는 그 유언비어들의 발상지(Fountainhead)가 북한이라는 사실을 발견해 냈다. 이는 무슨 뜻인가? 5.18광주에 북한이 깊숙이 개입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광주시민들을 흥분시켜 거리로 나오게 한 원흉이 바로 북한이라는 뜻이다. 이는 다시 북한이 광주시위를 기획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북한 책에는 시위 전략 및 전술, 그리고 광주의 교훈이 상세하게 기술돼있다. 시위는 작전이다. 작전에는 전략과 전술이 있고, 전략과 전술은 극비사항이다. 극비사항인 전략과 전술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시위에 가담한 사람들도 아니고 경찰이나 한국군도 아니다. 오직 그 시위를 기획한 지도부만이 아는 것이다. 그런데 그 극비의 전략 및 전술이 북한 당국이 발간한 역사책들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그리고 1980년 5월의 서울시위와 광주시위에 대한 상황기록들을 보면 당시의 시위상황들이 북한 책에 기술돼 있는 시위 전략 및 전술에 정확히 일치한다. 북한이 일반 광주시민들 모르게 5.18 시위를 기획하고 집행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노동당에서 운영하는 출판가 발간한 이 책에는 또 5.18이 김일성을 흠모하는 남조선 혁명세력과 통일을 원하는 민중세력이 김일성이 지도해주는 교시에 따라 들고 일어선 반미-반파쇼 무장폭동이라고 기술돼 있고, ‘5.18은 김일성이 지도한 대남공작 역사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최상의 것’이었다고 기술돼 있다. 이런 표현들은 북한의 역사왜곡일까 아니면 사실일까? 필자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법률적 개념에 의하면 이는 북한이라는 피의자의 자백이다. 피의자의 자백만큼 확실한 증거는 없다고 한다. 필자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위에서 필자는 무기고 위치 사전파악 , 69%의 사살, 12명의 신원불상, 북한이 작성한 5.18상황일지, 유언비어의 발상지 등 핵심 이슈를 다루면서 5.18 광주사태는 북한이 사전기획 및 연출을 주도했고, 5.18광주에 수많은 북한사람들이 왔다는 믿음을 갖게 된 이유들을 설명했다. 그리고 여기에 도 하나를 추가한다. 해마다 5.18이 다가오면 북한 전역에서는 여러 날에 걸쳐 노동당이 주최하는 5.18추모행사가 열리며, 김일성은 기계, 공장, 천리마 운동, 모범공장 등 북한 최고의 것들에 5.18이라는 칭호를 하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5.18에 북한이 연루돼 있지 않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5.18을 북한이 사전기획-연출한 것이라면 도대체 5.18사람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남한에 가까운 사람들일까, 아니면 북한에 가까운 사람들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5.18사람들은 북한에 더 가까운 사람들이다. 5.18의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있다. 이는 전교조 전공노 등 친북좌익들이 공식행사에서 애국가 대신 부르는 반역의 노래이며 2010년 정부는 이를 공식행사에 부르지 못하도록 조치한 바 있다. 2008년 건국 60주년을 맞아 보훈처는 거액을 들여 5.18묘지에 건국 60주년 예술 조형물을 설치했다가 5.18단체로부터 “어디다 감히 건국개념을 심으려 하는가, 당장 철거하라 ”는 거친 항의를 받고 철거한 바 있다. 5.18단체들이 건국개념을 공식 부정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5.18유족회 첫 회장을 지낸 전계량과 황석영은 5.18의 목표가 적화통일(민족자주통일)이었다고 썼다.
광주는 민주화의 성지로 군림해 왔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민주화의 정체를 파악해왔다. 전직 386 주사파를 교육시켜왔다는 강길모씨가 전향하면서 주사파의 정체를 폭로했다. 386주사파를 상징하는 민주화운동라는 것은 자주 민족 민주 통일이라는 아름다운 이름들을 내걸고 이 나라를 파괴해온 적화통일 운동이었으며, 386주사파는 북한의 지령을 받고 움직였던 반역자들이라고 폭로한 것이다. 천암함 폭침의 주범이 북한이라는 사실을 미국-영국-호주-스웨덴으로부터 파견된 22명의 전문가와 민군 합동으로 조사했다. 바다 밑에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증거(Forensic Evidence)를 발굴하여 국제사회로부터 과학적인 분석이라는 칭찬을 받은 엄연한 사실을 놓고도 ‘북한이 범인이라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억지를 쓰며 북한을 옹호하는 ‘적대적 이단자’들이 바로 민주화 세력인 것이다. 그리고 이 민주화세력들의 성지가 바로 광주 5.18인 것이다.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공식화되기 전까지 간첩들은 남한 사회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접근하여 누가 들을까를 살피면서 귀에 대고 "선생님,민주화 하셔야지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등극하고부터는 간첩들이 하는 간첩행위들은 민주, 통일, 민족이라는 말로 다 정당화 됐다. 심지어는 김대중처럼 국민 몰래 적장에 5억 달러를 건네준 것도 통일과 민족을 위한 것이라며 정당화 됐던 것이다. 이런 세상에 누구를 간첩으로 지목할 수 있을 것이며 누구를 국보법 위반으로 입건할 수 있겠는가? 5.18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런 민주화의 가면을 벗겨내지 못한다면 당장의 안보가 위기를 맞을 것이며, 우리의 후손들에게는 황당하게 왜곡된 역사를 물려주게 될 것이다. 5.18에 대해 무엇이 어떻게 잘못 알려져 있는지, 왜 갑자기 역사를 뒤집게 되었는지, 5.18특별법은 무슨 법인지, 법관들은 어떤 기막힌 재판을 했는지, 5.18과 북한은 어떻게 내통돼 있는지 우리는 반드시 밝혀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이와는 정반대로 치닫고 있다. 5.18을 놓고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참으로 기막힌 코미디가 벌어지고 있다. 북한에서는 5.18을 북한의 적화통일 노력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남한에서는 5.18을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를 이끌어낸 가장 훌륭한 역사라며 매년 보훈처 주최로 행사를 한다. 5.18을 놓고 북한 당국은 북한에 소유권이 있다 하고, 남한 당국도 남한에 소유권이 있다 하니 이런 기막히고 서글픈 코미디가 지구상에서 우리 말고 어디 또 있겠는가?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는 일은 국민에 지워진 4대의무보다 천배 만배 더 중요한 의무일 것이다. 필자는 5년 동안 18만 쪽에 달하는 수사기록, 재판기록, 그 외의 기록들을 종합 분석하여 2008년 1,700여 쪽의 다큐멘터리 역사책“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4권)을 내놓았다. 여기에는 5.18 전후의 시대상황, 10.26의 생생한 기록, 12.12에 대한 생생한 기록, 5.18에 대한 상황기록, 5.18특별법이 제정되던 당시에 벌어진 정치인들과 헌법재판소 판사들이 벌인 추태들, 역사바로세우기에 동원된 판검사들의 파행적 행태, 법리논쟁들이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다. 이어서 2009년 이를 2권으로 요약한 요약본을 내놓았다. 수천의 독자들이 이 책들을 읽었고, 많은 독자들이 독후감을 전해왔다. 한마디로 역사뒤집기에 동원된 정치인들, 검사 및 판사들,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에 대해 극도의 공분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북한 측 자료들과 5.18측 자료들을 수사기록에 접목시켜 5.18의 진실을 보다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그리고 5.18은 북한의 역사이지 우리의 역사가 아니라는 매우 충격적인 결론을 이끌어 냈다.
2010.6.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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