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폭동에 각계각층의 임무분담 누가 시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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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0-05-31 15:29 조회25,88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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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폭동에 각계각층의 임무분담 누가 시켰나?
북한의 5.18역사책 “광주의 분노” 29-31쪽에는 다음과 같은 역할 분담 내용이 기술돼 있다. 이런 내용은 그 어느 남한의 분석가들도 내놓지 못하고 그 어느 자료에도 없는 것이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5.18이 북괴에 의해 기획되었다는 뜻이다. 북한은 광주폭동의 주역들의 공로를 빠짐없이 두루 챙겨주었다.
<대학생들의 역할>
이 싸움의 선두에는 전남대학교, 조선대학교, 광주교육대학,조선대학교병설공업전문대학, 동신대학, 서강대학, 성인대학, 송원대학, 전남대학교 간호전문대학 등의 10여개 대학 학생들이 섰다.
<고등학생들의 역할>
고등학교와 <<국민학교>>학생들도 용감하게 싸웠다. 그들은 집단적으로 혹은 개별적으로 놈들을 까부시거나 봉기자 들을 위한 모금운동과 식사운반에 적극 참가하였다. 봉기자들이 거리에서 며칠씩이나 싸우면서도 빵을 비롯한 식료품들을 충분히 공급받을 수 있는 데는 이런 학생들의 정열적인 노력이 깃들어있었다.
<로동자들의 역할>
로동자들도 봉기에서 적극적으로 활약하였다. 화순탄광 로동자들은 화약고를 들이쳐 수많은 폭약상자를 탈취하여가지고 광주시내로 달려왔고 운전수들은 자신의 희생을 무릅쓰면서 봉기자들의 앞장에 서서 싸웠다.
<농민들의역할>
농민들도 시, 군으로 진출하는 봉기군중을 열렬히 환영하면서 그들에게 식사를 보장하여 주었으며 직접 수천명씩 집단을 지어가지고 광주시로 밀려와 봉기군중과 합세하였다.
<인테리, 소상인, 종교인, 중소기업가들의 역할>
봉기에는 인테리, 소상인, 종교인, 중소기업가들도 수많이 참가하였다. 이들은 <<전남지역학생총련맹>>의 호소에 호응하여 봉기에 직접 참가하거나 봉기군중을 물심량면으로 도와나섰다. 중소상인들은 총격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빵을 비롯한 식료품을 자동차로 실어다 봉기군중에게 공급하는가 하면 휘발유저장고에서 휘발유가 동이 나도록 봉기군중들의 차에 휘발유를 공급하였다.
<일반 광주시민들의 역할>
광주의 기독교관계자들로부터 보내온<<현지보고>>라고 하면서 일본잡지<<세까이>>(1980년 10월호)가 소개한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공포와 전률의 도시, 살육의 거리이기는 하였으나 시민들의 가슴은 뜨거웠다. 시위군중이 집결되어있는 골목들에는 시민들이 가져온 주먹밥, 닭알, 음료수들이 충분하게 준비되여있었다. 한목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시민들은 누구나 다 주먹밥을 만들어 가져왔으며 음료수를 가져왔다. 한 구멍가게방의 70살나는 할머니는 자기가 팔고 있던 식료품을 모조리 싸들고 왔다. 닭알, 빵, 우유 등 무엇이든 다 가져왔다. 먹을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한 녀성들은 물통을 가지고 달려왔다. >>
<의사들의 역할>
봉기군중에 대한 의사들의 협력 또한 전투적이였다. 광주시에 있는 병원과 <<보건소>>들에는 부상당한 봉기군중이 1만 명 이상이나 수용되었다. 침대가 없었으나 의사들은 부상자들을 책상이나 걸상 우에 심지어는 복도에까지 눕히면서도 한명의 부상자라도 더 받으려 하였고 모자라는 피를 보충하기 위해 헌혈운동을 버리고 급할 때에는 자기의 피를 뽑아 부상자들에게 넣어주기도 하였다.
<종교인들의 역할>
광주에서는 종교인들도 봉기자들을 적극 지원하여주었다. 그들은 광주시민들의 희생적인 투쟁소식을 묶어 해외에 전하였으며 남조선 언론의 표리부동한 행위, 괴뢰들의 귀축같은 만행과 비렬한 음모의 내막을 낱낱이 고발하였고 어떤 종교인들은 봉기군중을 적들의 추격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기도 하였다.
<경찰과 예비역 장교들도 봉기에 가담>
광주에서 각계각층, 남녀로소 가림이 없이 싸움에 일떠서자 불안과 공포에 떨던 일부 괴뢰경찰들도 괴뢰군예비역 장교들도 봉기군중을 도와 나섰다. 자료에 의하면 광주에서 봉기에 일떠선 주민이 30만 명이라고 기록 되여 있지만 실지에 있어서는 80만의 광주 시민 모두가 일심동체가 되어 전두환 괴뢰도당을 반대하여 싸웠다.
2010.5.31.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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