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의 북한군 정황들 (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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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비바람 작성일10-05-15 03:03 조회20,56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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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에 북한군 개입이 없었다라고 단언하는 것은 어리석다, 더구나 당시 광주에서 북한군 출현이 보고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이런 결론을 내린다면 잠수함을 목격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천안함 침몰을 암초 탓으로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북한군이 따발총을 메고 인민군복을 입고 온다면야 모를까 북한군이 목격될 리는 없다, 그들의 목적이 국군과 교전하여 국군 몇 명을 사살하는 것에 있다면 더욱 우습다, 그들의 주요 목적은 교전이 아니라 사람을 선동하여 혼란을 증폭시키는 심리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공식 증거는 없다, 그러나 정황은 많다, 과학적 수사를 통한 증거가 아니더라도 천안함의 범인이 북한이라는 것을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광주 5.18의 여러 정황들은 북한의 손길이 닿았다는 것을 짐작하는데 어려움이 없게 한다, 그 정황들을 몇가지 소개한다,
1. 난무하는 유언비어
광주폭동의 격발쇠는 유언비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의 감정을 흥분시키고 증오로 몰아가는 잔인한 표현들이 난무하며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이런 표현은 제주4.3에서부터 현재까지 전형적인 좌익(북한)의 수법이었다, 5월 18일부터 유언비어가 인쇄되기 시작했고, 광주 외곽에서는 19일 아침부터 김대중의 외곽단체에서 계엄군들이 총칼로 사람을 죽인다고 선동하고 있었다,
(김동문의 세상바로잡기http://www.newstown.co.kr/newsbuilder/service/article/mess_column.asp?P_Index=40469 참조) 이때까지는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던 시간이다, 김일성과 밀착했던 김대중의 정체는 조갑제가 저서에서 밝힌 바 있다,
2. 정체불명의 선동자들
광주사태에는 폭력을 부추기는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군인과 시민들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도열해 있는 군인들에게 다가와 흉기를 들이대고 위협을 하며 군인들의 감정을 건드리고, 시민들의 뒤에서 군인들에게 돌을 투척하며 시민들에게서 폭력을 유도하며 양측 간의 충돌을 이끌어내었다,
광주사태의 북한군들은 국군을 향해 총질하는게 아니라 민간인들이 국군을 향해 총을 쏘도록 유도하는 것이 더 큰 임무였을 것이다, 광주사태의 시나리오는 이런 방향으로 흘러갔다, 유력한 정황이 아닐 수 없다,
3. 전남도청에 거대한 폭발물 설치
도청이 점령되자 도청 지하실에는 화순광업소에서 탈취한 다이너마이트와 TNT가 설치되었다, 트럭 8대 분량이었다, 폭발한다면 이리역 대참사와 맞먹는 비극이 벌어질 판이었다, 정체불명의 폭도들은 이 폭탄으로 광주시를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계엄군을 협박했다,
시민의 도움으로 폭발물은 무사히 해체된다, 시민이라면 당연히 시민의 목숨을 생각해야 하는게 당연하다, 그러나 시민을 폭탄의 불바다로 몰아넣으려 기도했던 세력은 누구였을까, 막대한 분량의 폭발물을 재빠르게 다루는 솜씨는 특수훈련을 받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4. 장갑차를 운전하는 사람들
시민군이라고 불리는 폭동단체에는 9대로 편성된 장갑차 부대가 있었다, 장갑차 운전은 고도로 훈련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이다, '시민군'이 편성되자마자 장갑차 부대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광주사태가 일반적 폭동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탈북장교는 장갑차 운전병들이 바로 북한군의 정체라고 증언하고 있다, 이들은 장갑차로 공수부대원의 머리를 짓이겨 살해했다,
또한 폭도들은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수십 군데의 무기고를 마치 예행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일사분란하게 털었다, 어느 모로 보나 아마추어 시민들의 솜씨는 아닌 것이다,
5, 광주교도소 습격
5.18은 민주화운동과는 거리가 멀었고, 폭동의 수준을 한참 넘어선 반역이었다, 시위대가 교도소를 습격한 사건은 5.18의 정체를 잘 설명해주는 사건이다, 교도소에는 총 수감인원 2700여 명에 간첩과 좌익사범이 170여 명 수감되어 있었다, 복면을 쓴 폭도들은 한두 번도 아닌 5차례에 걸쳐 교도소를 습격했다,
교도소에 있는 불순분자들을 거리에 쫙 풀어놓는다면 혼란은 더욱 증폭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국군에게 직접 총질하는 것보다 이들을 거리에 풀어놓는게 더욱 효과적이었을 것이고 이것은 이들의 주요임무였을 것이다, 그래서 다섯번씩이나 교도소를 향해 돌격해야 했을 정도로 교도소 '해방'에 집착했던 것이다,
6. 해방구 건설
해방구는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라는 뜻도 있지만 본디는 공산주의자들이 점령한 지역을 가리키는 좌익들의 용어이다, 광주에서 공수부대원들이 물러섰을 때 광주에는 해방구가 선포되었다, '해방구' 의미대로 해석해보면, 전자라면 광주는 대한민국을 물리쳤다는 해방구이고, 후자라면 광주는 김일성의 세상을 만들었다는 해방구이다, 광주는 어느 해방구였던가, 광주를 해방구로 만든 자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아마도 대한민국 국민들은 아닐 것이다,
7. 무등갱생원의 36인조 무장조
광주사태의 시민들이 무기 반납을 결의했을 때 끝까지 무기 반납을 거부한 쪽은 기동타격대와 36인조 무장조였다, 36인조 무장조는 수류탄과 M-16으로 중무장한 일종의 비상대기조였다, 이들은 무기를 반납하라는 설득에, 우리는 돌아갈 데가 없다, 차라리 싸우다 죽겠습니다,라고 강변한다,
이들은 다른 조에 달리 흩어지지 않고 함께 행동했으며 특수조직으로 보였다고 한다, 무등갱생원은 지체부자유자, 버려진 자, 알콜중독으로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수용되는 곳으로 5.18 당시에는 36명이라는 인원이 안될 정도로 소규모였다고 한다, 반란군에서 갱생원들을 엘리트로 대접했던 것치고는 본색이 아주 초라하다, 우리는 돌아갈 데가 없다라는 대목에서 의미가 심장하다, 돌아갈 곳은 있었지만 너무 멀었던 것은 아닌가,(지만원.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 3권에서 참조)
8. 평양방송 광주사태 실황 중계
광주 방송국은 불타버렸고 언론은 통제가 되어 오직 유언비어만이 나부끼고 있을 때 광주사태를 정확하게 방송하는 방송사가 있었다, 평양방송이었다, 당시 광주에서 북한방송을 들었다는 증언은 많다, 지만원의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 3권에는 당시 방위병으로 시위대에 참가했던 사람의 이런 증언이 나온다,
"우리는 전반적인 광주의 상황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주 이북방송을 청취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곳의 방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래서 나는 분명히 광주에 간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그곳에서 그렇게 빨리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9. 13구의 신원미상 시체
광주사태 사망자 중에는 남한에 연고가 없는 시체가 26구였다고 한다, 현재도 13구의 신원미상의 시체가 있다, 30년이 넘도록 정체를 밝히지 못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광주사태의 사망자라면 영웅 대접을 받고 유족들은 거액의 보상금도 받을 수 있다, 이런 상황인데도 유족이 나타나지 않는 걸로 본다면 이들은 대한민국 사람들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인가, 현재 대한민국 '진보'의 지적 수준으로 대답한다면 이들은 외계인이다, 대한민국에는 외계인이 너무 많아 바닷속에서 군함을 동강내기도 하고, 대낮에 장갑차를 몰고 총을 쏘며 군인들을 깔아 죽이기도 한다,
10. 5.18 유공자 윤기권의 월북
윤기권은 당시 고3생으로 파출소를 습격하여 쳐부수고 최규하 대통령의 사진을 떼어내어 짓밟아버린 공로, 그리고 경찰차를 부수고 차안의 경찰 10~15명을 인질로 잡은 공로로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 받았다, 그리고 5.18부상자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1991년에 2억여 원의 광주 보상금을 챙기고 월북했다, 평양방송은 '위대한 수령님과 참조국을 찾아 의거 월북했다'고 발표한다,
5.18의 정체성을 뒤돌아볼수 있는 사건이다, 제주4.3에서도 반란군 두목이던 '인민군 유격대장' 김달삼도 월북하여 훈장까지 받았다, 제주4.3도 폭도들이 파출소를 습격하여 무기를 털고 군인들에게 총질했던 사건이다, 4.3과 5.18은 시대만 다를 뿐 대한민국을 향한 좌익들의 폭동이다,
10. 간첩 이창룡 침투 사건
5월 23일 간첩 이창룡이 체포되었다, 간첩 이창룡은 광주에 갔다가 다시 광주에서 서울로 왔다가 다시 광주로 가다가 붙잡혔다, 왜 이리 바쁘게 왔다갔다 했을까, 당시 광주는 통신체계가 무너졌기 때문에 인편으로 연락을 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창룡 뿐만이 아니라 5.18을 전후하여 많은 간첩들의 침투가 있었다, 아래는 시스템클럽 홈피의 내용이다,
① 3.23. 한강하류로 수중 침투해 오는 간첩 3명 사살
② 3.25. 무장간첩선이 포항 앞 바다에 침입, 우리 어부 3명을 사살하고 도망하다가 해공군 작전에 의해 격침
③ 3.27. 금화지구 비무장지대에 3명이 침투, 그 중 1명만 사살
④ 5.12. 판문점 미군 순찰병에 총격
⑤ 5.15. 판문점 미군 순찰병에 총격
⑥ 5.20. 남해안으로 침투한 간첩 생포(증9, 계엄사 47쪽).
⑦ 6.21. 서산 앞바다 무장간첩선 침투, 9명 사실, 1명 생포
11. 총상의 70%가 폭도들이 소유한 총에 의해 사망
신원이 확인된 학생과 민간인 152명 중 M-16으로 사망한 사람은 36명, 카빈 및 기타 총상으로 사망한 사람은 80명이다. 신원이 확인된 학생 및 민간인 사망자 152명 중 총상 사망자는 116명, 76.3%가 총상 사망자다, 총상 사망자 116명 중 36명이 M-16 총상이고, 80명이 무기고에서 나온 총상이다. 즉 총상 사망자 중 69%가 무기고에서 나온 총상인 것이다.-(시스템클럽 홈피)
폭도들의 총에 의한 민간인 사망자가 많았던 것은 불순분자들이 계획적으로 민간인에 대해 총질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당시에 폭도들도 경찰 복장이나 군인 복장이 많았다, 군인복장의 폭도들이 민간인을 향해 쏜다면 목격자들에게는 군인이 민간인을 사살하는 것으로 비쳐진다, 그래서 껍데기는 '공수부대의 만행'이라고 하지만 알맹이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광주에서 민간인을 향해 총질했던 군인복장의 민간인들이야말로 북한군일 확률이 농후하다,
12. 도청 광장에 들어온 리어카의 시체
21일 새벽 리어카에 실린 2구의 시체가 도청 광장으로 들어온다, 계엄군이 사람을 죽였다며 사람들을 선동하기 위한 도구였다, 연출자의 의도대로 시체는 사람들을 흥분시켰고, 폭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다, 이 때부터 폭동은 극렬해졌고 계엄군은 광주를 내주게 된다, 시체 공연은 대성공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나중에 서울지검 수사기록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시체는 카빈총에 의한 사망자였다, (역사학도 시사토론 글방 http://cafe.daum.net/issue21/3IBb/568?docid=rUoh|3IBb|568|20100509090222&q=5.18%20%BF%AC%B0%ED%B4%EB%BB%FD%20600%B8%ED&srchid=CCBrUoh|3IBb|568|20100509090222 참조)
군인들이 죽였다고 한 시체는 폭도들에 의한 희생자였던 것이다, 10월 대구폭동에는 데모에 쓸 시체를 구하러 다니는 좌익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혼란이 휩쓰는 5월의 광주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총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체를 구하기 위하여 민간인을 살해하고, 군인이 죽였다며 리어카에 시체를 끌고 다니며 선동했던 자는 고도로 훈련된 심리전의 전투원이었을 것이다,
13. 홀연히 사라진 600 명의 연.고대생
21일은 힘의 관계가 역전되며 계엄군이 광주에서 쫒겨난 날이다, 도대체 무엇이 막강한 공수부대를 제압해 버린 것일까, 여기에는 정체불명의 시위대 600여 명이 등장한다, 21일 새벽에 군인 지휘차량과 고속버스 5대에 300여 명씩 두 팀이 홀연듯 나타난 것이다, 이들이 등장하면서 무기고가 털리고 장갑차와 대형버스 등 차량 수백 대가 탈취당한다, 그리고 교도소가 습격 당한다,
5.18 단체에서는 이들이 시위를 지원하러 나온 연고대생들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이들은 시체를 실은 리어카의 연출자였다, 시체를 실은 리어카 뒤에서 계엄군을 향해 카빈총을 쏘아대는 자리에 연고대생들이 있었다는 동아일보 기자의 국회증언이 존재한다, 이들 연고대생들이야말로 5.18폭동의 주역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광주사태가 종료 되었을 때 이 연고대생들은 홀연히 사라진다, 사망자 중에도 존재하지 않고 그 흔한 5.18참여기록같은 것도 없다, 공수부대를 제압하는 혁혁한 공로를 세웠으면서도 유공자가 될려는 사람도 없다, 이들은 누구이며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대한민국에는 외계인이 너무나 많다,
14. 북한군 출신들의 증언
2006년 12월 세실레스토랑에서 자유북한군인연합의 임천용 대표는 기자회견을 열고 '5.18은 북한의 김정일과 군부의 계획대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증언하였다, 자유북한군인연합에서는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이라는 책도 출간하였다, 이 책에는 탈북자들이 증언하는 5.18 광주사태의 진실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광주지역에서도 이 책의 주문이 많고 그쪽 사람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의외로 보수 일각에서 북한군 개입을 부정하고 나섰다, 정작 범인으로 지목받는 북한쪽에서는 맞다고 하는데 남쪽에서는 아니다라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5.18은 거대한 권력이다, 이런 권력의 진실을 파헤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진실은 용기있는 자들의 편이었다,
15. 김일성 비밀교시
아래 내용은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에 나오는 김일성 교시의 내용이다, 인터넷에서 펌했다, 광주사태의 시나리오는 김일성의 교시와 맞아 떨어진다, 이 교시를 읽으면 자유북한군인연합 대표의 발언대로 5.18의 감독은 김일성이라는 확신이 들 것이다,
...혁명적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각종 형태의 대중투쟁을 적극 조직 전개하여 적들의 강경 탄압을 유도해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시위도중 경찰에 의해 살해된 것처럼 위장하여 자해공작을 할 필요도 있습니다
적들은 지금 계엄상태를 선포해 놓고 서로 물고 뜯고 하고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연락부에서는 이 사태가 수습되기 전에 손을 써야 합니다. 남조선의 모든 혁명 역량을 총동원하여 전 민중봉기를 일으킬 수 있도록 적극 유도해야 할 것입니다
1980년 5월 18일 남조선의 광주에서 일어났던 영웅적인 인민항쟁의 정신을 끊임없이 이어가자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또한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을 위해서 광주인민봉기에서 용감하게 전사한 우리 혁명 전사들의 넋을 기리고 위로하자는 것이 ‘5.18무사고정시견인초과운동’속에 있는 중요한 과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6. 대한민국의 좌익화
5.18은 남한의 좌익분자들이 선동하고 주도한 폭동이다, 그 중심에는 정권욕에 눈이 먼 김대중이 있었다, 김대중은 김일성과 밀착된 인물이었다, 이런 연유로 광주폭동은 그 색갈 자체가 붉은 색이었다, 이런 광주폭동이 민주화로 미화되면서 주사파가 득세하고 대한민국 정통세력은 고사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좌익정권 2대를 거치면서 대한민국은 빨갱이 세상이 되어버렸다,
5.18은 대한민국 좌익화의 첫걸음이었다, 남한 좌익들이 북한의 영향만을 받았던지, 아니면 물질적 지원을 받았던지 어쨌간에 5.18은 남북한 좌익의 합작품이었다, 그래서 5.18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다만 북한군이 광주에서 직접 총질을 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정황은 많다, 안보에 관한한 백에 하나만이라도 수상하다면 그것을 의심하는 것은 보수의 의무이다,
광주사태에 북한군 개입을 밝히는 것은 학자나 논객의 선에서는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이 임무는 정권에 있을 것이다, 이명박이가 하지 못한다면 다음번 주자는 틀림없이 언터쳐블의 5.18과 대결할 인물이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 때까지 언론이나 논객은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해야 할 것이며, 혹 여기에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쪽박을 깨는 사람은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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