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재판 3.18일 오후 4:30분으로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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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0-01-02 14:28 조회23,28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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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재판 3.18일 오후 4:30분으로 연기
5.18부상자회 회장 신경진은 숨지만 말고 증인석에 떳떳이 출두해 질문 받아야
1월 14일로 예정돼 있던 5.18재판이 다시 3월 18일 오후 4:30분으로 연기되었습니다. 안양법원 405호실입니다. 지난번에는 저를 고소한 사람들의 대표인 5.18부상자회 회장 신경진이 재판장의 호출에 응하지 않아 그를 향해 질문하려 했던 수십 개의 질문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재판은 싱겁게 끝을 맺어 법정을 가득 메워주신 100여 분들께 실망을 안겨드렸습니다. 이번에는 그가 꼭 나와 질문에 응할 것을 기대합니다. 아마도 여러 방청인들 앞에 쏟아질 질문들이 퍽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흑기사로 나타난 서석구 변호사
이런 가운데 매우 반갑고 고마운 소식이 있습니다. 정의의 화신 서석구 변호사님께서 기꺼이 무료변호를 맡아주신 사실입니다. 저는 변호사 없이도 충분히 재판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혼자 재판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변호인을 선임하라는 재판장의 강력한 권유로 일단 국선변호인을 선임한 바 있습니다. 이 재판은 개인의 재판이 아니라 공공의 재판이요 역사적 의미를 갖는 재판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재판을 낯선 국선변호인에게 맡긴다는 것이 무책임하다는 생각에 서석구 변호사님께 전화를 드려 변호를 부탁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제 부탁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흔쾌히 무료변론하시겠다 하셨습니다. 승소를 기원하시는 모든 분들께 서석구 변호사님에 대한 아낌없는 박수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지난주부터 12월 31일까지 서석구 변호사님은 로버트박에 대한 행사 등 많은 행사에 주야로 참가하여 많이 피로하셨습니다. 1월 1일, 아침 제게 새해전화를 주셨습니다. 밤 3시까지 국내외 여러 곳에 보낼 메시지를 한글과 영문으로 직접 작성하여 보내놓고 곧바로 제가 쓴 “수사기록으로 본 다큐멘터리 역사책 12.12와 5.18”(상하)을 읽기 시작하여 상권 473쪽을 모두 읽고 하권의 69페이지를 펼쳐들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며칠 밤낮을 추위에 떨며 수고하시고 12월 31일 밤을 꼬박 새우신 것입니다. 저는 어디에서 그런 열정과 에너지가 나오시는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3월 18일은 많은 분들이 오셔서 싸워주시고 서석구 변호사님께 격려의 박수를 드려주시기 바랍니다.
공수부대 출신들은 황석영과 장계량을 고소해서 명예 회복해야
초대 5.18유족회 회장이었던 장계량은 1985년 전남사회운동협의회 대표의 자격으로 황석영이 작성한 “광주 5월 민중 항재의 기록”에 다른 제목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을 달아 발간했습니다. 이 책을 읽어보니 영화 ‘화려한 휴가’가 바로 이 책을 바탕으로 하여 제작됐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광주 곳곳에 출몰하는 공수부대가 한 손에는 철심이 박힌 살인용 곤봉으로 머리를 패고, 다른 한 손에는 대검으로 남녀노소 없이 마구 배를 찔러 한 손으로 걸레 같은 시체를 번쩍 들어 차에 던졌으며, 부상자를 싣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택시 기사들을 끌어내려 곤봉으로 때려 죽였고, 시민군을 향해 조준사격을 하여 시가에는 죽은 사람과 살아남은 사람들로 나누어져 있었고(물 반 고기 반이라는 뜻), 7-8명의 어린 학생들에 대해서도 조준사격을 하여 살해했고, 계엄군은 환각제와 독한 술을 마시고 빼갈을 수통에 채운 채 살인짐승처럼 날뛰었다는 등 실로 수사기록과는 너무나 판이한 소설이었습니다.
이렇게 수사기록과는 전혀 다른 가공된 소설을 써서 공수부들을 천인공노할 살인귀로 만들어 가고, 이런 책들을 널리 읽게 하고, 이런 책을 기초로 하여 영화를 제작하여 1,000만에 가까운 관객으로 하여금 공수부대와 전두환을 증오하도록 하는 동안, 충돌의 다른 당사자들은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5.18은 충돌의 역사입니다. 충돌의 한 당사자들은 이렇듯 사실과도 다르고 사리에도 어긋난 소설들을 만들고 영화를 만들어도 되고, 충돌의 다른 당사자들은 침묵만 하고, 충돌의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국민의 자격으로 역사적 진실을 탐구하기 위해 공론의 장에 글을 올리면 그것마저 충돌의 당사자인 5.18단체들이 소송을 제기하는 실로 코미디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공수부대 출신들에게 권고합니다. 이 책을 상대로 하여 고소를 하시기 바랍니다. 이에 필요한 수사기록은 제가 발췌해 드리겠습니다.
대한민국 검찰은 북한 편에 섰는가?
황석영은 이렇게 거짓말을 만들어 내 공수부대 아니 국군을 야수집단으로 매도해도 되고, 반면 엄연한 수사기록 자료들을 가지고 5.18광주에 북한특수군이 와서 작전을 하고 갔다는 심증이 간다고 표현한 것에 대해서는 국가기관인 검찰이 나서서 기소한다? 도대체 검찰은 어느 나라 검찰입니까?
“5.18광주에 북한특수군이 왔다갔는가”에 대한 명제는 5.18단체의 명예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명제입니다. 그들을 광주가 초대한 것도 아니고, 특수군이 왔다고 해서 광주시민들이 식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북한 전문특수군이 왔다 갔을 것이라는 의문을 표시한 것에 대해 518의 명예가 훼손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5.18단체가 북한의 명예를 옹호하고 있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는 것입니다. 5.18단체와 북한이 한통속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국가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5.18의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을 생각해 보십시오. 5.18노래는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노래, 애국가 대신으로 부르는 노래입니다. 5.18단체는 2008년에 건국개념을 공식적으로 부정한 바 있습니다. 여기에 5.18의 정체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광주에 북한군이 왔다고 믿을 만한 증거와 증언은 많아도 북한군이 오지 않았다고 믿을만한 증거와 증언은 없다
5.18에 북한군이 왔느냐에 대한 문제는 역사가 규명할 일이지 재판부가 규명할 일이 아닙니다. 북한으로부터 나온 “5.18청년호”라는 사진이 두 개 있습니다, 1호기와 2호기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적어도 김일성 정권이 5.18광주를 굉장히 기념하고 있다는 것을 웅변하는 강력한 증거인 것입니다. 물적 증거만 증거가 아닙니다. 물적 증거가 없을 때 법원은 증인을 불러 판결의 근거로 삼습니다. 한 두 사람의 증언이 아니라 36명의 증언이 기록으로 공개되고 있습니다.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에는 광주시민으로서는 도저히 저질렀다고 볼 수 없는 여러 가지 상황들이 발췌돼 있습니다. 그런데 매우 신기하게도 탈북자들의 증언을 보면 그 모든 것들을 북한특수군이 저질렀다고 이실직고 합니다. 광주시민을 북한특수군이 학살했다고 하면 5.18의 명예가 훼손되고, 광주시민을 공수부대가 학살했다고 하면 5.18의 명예가 유지된다는 이 기막힌 5.18의 주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물적 증거만이 증거라며 논리를 흐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광주의 여인들을 공수부대가 살육했다 하면 5.18의 명예가 보존되고, 북한특수군이 저질렀다 하면 5.18의 명예가 훼손된다?
북한군의 개입문제는 5.18의 명예를 따지기 이전에 국가 최고의 가치인 국가안보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렇게 큰 문제를 조그만 집단에 불과한 5.18단체의 명예가 훼손된다고 공론화를 방해한다는 것은 단체의 횡포요 억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5.18에 북한특수군이 왔었다는 증언은 차고 넘칩니다. 물적 증거는 시간의 함수이지 오늘의 법원이 결판을 낼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북한군 개입 여부는 공론의 장에서 다뤄야 할 문제이지 법정에서 다룰 문제가 아니다.
지금은 옛날에 없던 자료가 두 가지 더 있습니다. 첫째 수사자료가 있습니다. 수사자료를 보면 북한군이 몰래 작전을 했다는 의혹이 들게 하는 장면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둘째 탈북자들의 증언들이 있습니다. 36인의 증인들이 쓴 수기들이 마련돼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마당에 판사가 어찌 5.18광주에 북한군 개입 사실이 전혀 없었다고 판시를 할 수 있겠습니까? 북한군 개입사실이 전혀 없었다면 없었다는 증거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증거는 없습니다.
2010.1.2. 지만원
http://system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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