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에 대한 추억(세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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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세상은 작성일09-11-30 00:05 조회23,049회 댓글4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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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영화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아는 것은 이 영화를 찍은 세트장소가 신의주였고 신의주시내 모든 대학생들이 3일동안 강의를 중단하고 이 영화촬영에 동원되었고, 우리 대학(사범대) 일부 학부와 경공업대학 일부 학부 학생들이 계엄군으로 동원되었기 때문입니다.
때는 1990년 여름이었습니다. 신의주시내 7개 대학과 모든 전문대 대학생들을 3일 간 영화촬영에 동원된다는 당중앙위원회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광주사태 관련 영화를 찍는데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영화라 하면서 아무튼 온 대학이 슬렁거렸습니다.
다음 날 전 대학생들을 운동장에 모여 놓고 광주관련 영화에 동원되는 것과 관련하여 상급간부들이 내려와 일장연설을 하더군요.
요약하면 "조국통일의 귀중한 기회를 놓쳤다. 이 영화를 잘 만들면 남조선 사람들이 보고 제2의 광주가 곳 곳에 일어날 것이다. 남조선 사람들이 입는 옷을 지급할테니 영화가 끝나면 모두 바쳐야 한다. 자본주의 옷이니 숨기거나 하면 큰 일이 날 것이다. 남조선은 겉은 화려하나 그 속은 썩었으니 옷이나 신발을 보고 다른 생각이나 말을 하면 안 된다. 등....)
바로 학부별로 이쪽은 계엄군, 저쪽은 대학생, 시민, 간호사 하면서 무리를 지어 주더니, 얼마 후 차들이 들이 닥치는데 옷이며 신발, 곤봉, 방패막 등을 막 내려 놓더니 사이즈 상관없이 알아서 교환해 입으라고 하더군요.
우리 학부(사범대 물리, 혁명력사학부)는 남학생들이 많아서인지 계엄군 옷을 나눠주더군요.
계엄군 옷을 입은 학부는 평북도당 앞으로 가라고 하여 갔더니 다른 대학들에서 계엄군 옷을 받은 대학생들이 와 있더군요. 그렇게 계엄군이되 온 대학생들이 1500 여명 되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역할에 따라 무리를 지었는데, 조총련에서 온 영화관련인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 지에 대해 설명하면서 해야 할 임무를 주더군요. 저는 계엄군 장교복을 받은 지라 무리의 맨 앞에서 손으로 공격하라는 지시를 주는 부분을 맡았는데, 군화를 신었던 지라 발이 부르터 며칠 동안 고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속한 무리는 300명 정도였는데 하루 종일 하는 연습이란게 도로에 나와있는 엑스트라 민중을 향하여 나눠준 엠소총으로 쫓아 가면서 때리는 것이었는데, 에피소드는 아무리 시늉을 낸다 할 지라도 계속 반복해 훈련을 하니 악에 바치고 힘이 드니 실제상황 비숫한 연출이 나와 부상자가 속출했다는 것입니다.
다음 날 부터 실제 촬영에 들어 갔는데 죽는 줄 알았습니다. 도청을 점령할 때 총으로 사격을 하는데, 실제상황에서 이렇게 민중들을 향해 쏠 수 있을까 의문들 정도로 순간 치가 떨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도청을 접수하고 살아 숨쉬는 민중들을 확인사살하는 장면도 연출했는데 영화에는 나오지 않더군요.
다음 해 영화가 나온 것을 보니 제 얼굴이 나오더군요. 그 때는 좋았지만 지금은 당혹스럽네요. 에스트라로 강제동원을 받은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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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가설로 지었던 광주도청을 보고 사람들이 이렇게 현대적인 건물이 있나? 감동을 받았고, 현재까지를 포함해 신의주시 전체가 화려한 시민들로 붐볐던 적은 없었습니다. 훗 날 남조선 옷이 많이도 없어졌습니다. 대학생들이 남한티셔츠 대신 북한 티셔츠를 바쳤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남한 장교복 옷 질을 보고 친구들끼리 "이거 보라 남조선 애들 옷은 고급이야" 하며 나누던 얘기가 귀에 선하네요. 참고로 남한 옷은 전부 조총련에서 중고 옷을 남한에서 직접 가져 왔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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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박사 선생님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번 추석 때 자유북한군인연합 임천용 대표님이랑 친목모임에서 만났던 일이 있습니다. 그 때 "광주관련 책을 냈는데 광주사람들이 뭐라 안 그러던 가요? " 하니 웃으시면서 광주에서 제일 많이 팔렸다고 웃으면서 답했습니다. 힘내십시오.
댓글목록
bananaboy님의 댓글
bananaboy 작성일
소중한 증언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생생한 증거들이 많은데도, 우리 대한민국 높으신분들은 바보인가요? 아니면 김정일의 사주를 받고 눈감아 주시는겁니까?
광주폭동을 민주화 운동이라고 말하고, 이건 정말 말도 안되는겁니다. 세계가 웃을일입니다.
이번 지만원 박사님 재판 잘되시면 세계에 다알려서, 대한민국은 자극좀 받아야할것입니다.
청곡님의 댓글
청곡 작성일세상은 님께 감사 드립니다.
김경종님의 댓글
김경종 작성일
광주사태가 1980년 5월 18일에 났고 10년 후인 1990년에 영화제작이 되었군요. 그리고 그 이듬해 영화가 완성되었으니 10년간 시나리오며 소품과 세트장등을 준비하였나 봅니다.
특히 한국군 군복과 한국산 중고 의류품을 대량으로 조총련을 통해 북송하는데 남한의 고첩들이 매우 바쁘게 움직였겠지요. 국가정보원에서는 그런 여러가지 움직임들을 꿈에나 알고 있었는지..
세상은님께서 앞으로도 박사님께 참고가 될만한 정보들을 마니마니 올려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저도 여러가지 중국사이트를 통해서 북한의 공화국영웅묘지와 그앞에 세운 비석의 비문사진들을 구하려고 애쓰고 있으나 일반적인 혁명열사능 외에 5.18에 관련된 사진을 아직 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은님이 혹시나 5.18공화국영웅묘비를 찍은 사진을 구하신다면 꼭 올려주셔서 광주시민들에게 보여주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만원님의 댓글
지만원 작성일
'세상은'님, 매우 감사합니다. 혹시나 하고 도움을 청했는데 이렇게 빨리 흑기사가 나타나 도와주시는군요. 북한에서 본 5.18에 대해 틈나는 대로 토막 토막이라도 여러 개의 글을 올려주시면 역사를 바로 잡는데 매우 중요한 기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과 동료들께도 동참하도록 노력해 주시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영화제작은 1990년 여름에 한창이었고, 제작이 완성된 시기가 1991년이라 하니 시나리오는 1989년에 쓰였겠군요. 황석영이 방북한 기간이 바로 1989년 3월, 오랫동안 여러 차례 갔었고, 거기에서 김일성으로부터 "재간둥이"라는 애칭을 받게 된 것입니다. 무슨 작품을 보았기에 재간둥이라는 칭찬을 받았을 것이 아닐까요?
결국 '님을 위한 교향시'의 시나리오는 공식적으로는 북한 제1의 작가 리춘구가 썼고, 남한 좌익계에서 가장 소설을 잘 쓴다는 황석영이 1989년 3월에 북한으로 몰래 잠입하여 상당기간 머물면서 시나리오 제작을 도와주었고, 영화 제목은 황석영이 1982년에 작사한 빨갱이 노래 "임을 위행 행진곡"과 남매관계를 시사할 수 있도록 "님을 위한 교향시"로 명명하였다는 것을 연상시키는요.
김정일이 신상옥과 최은희를 납치해 가서 영화를 만들었듯이 제아무리 리춘구가 북한 제1의 시나리오 작가라 해도 남한의 사정과 정서를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황석영을 데려갔다는 것이 제 추측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