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통합위원회는 친북좌익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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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09-12-24 17:16 조회24,25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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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통합위원회는 친북좌익위원회
사회통합위원회의 구조적 한계
고건 전총리가 사회통합위원회 위원장에 확정됨에 따라 사회통합위원회는 2009년 12월 23일, 정식 출범했다. 이 위원회는 사회적 6대 갈등을 해소하고 시민사회와 공공부문, 중앙과 지방과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대통령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6대 갈등이란, 빈부갈등, 지역갈등, 이념갈등, 세대갈등, 남녀갈등, 인종갈등이라 한다. 이런 6대 갈등이 위원회에서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또 다른 새로운 갈등이 이 위원회 내부에서 용솟음 칠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고소영, 강부자”로 시작했다. 갈등은 여기에서부터 증폭되기 시작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갈등은 청와대와 정치권으로부터 유발된다고 불 수 있을 것이다. 황강댐을 통해 눈이 시퍼런 국민이 살해당하고, 박왕자 여인이 살해당하고, 개성공단의 문을 잠그고, 현정은을 마음대로 부르고, 김대중의 조문을 박지원을 통해 접수받는 데서 대대수의 국민의 자존심이 찢어지듯 상했다. 이것이 국민 사이에, 국민과 정부 사이에 갈등을 증폭시켰다. 이런 경우 사회통합위원회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4대강 살리기 사업, 세종시 사업, 제2롯데월드, 한미연합사 해체, 대통령의 중도 선언, 좌파정권 10년의 청산 거부 등의 문제로 인해 갈등이 일고 있다. 이런 갈등을 고건 황석영, 인명진, 박효종, 이문열 등이 모여 어떻게 해결한다는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좌익 인사와 우익인사를 한 위원회에 집어 넣으면 이들은 모일 때마다 갈등하고 얼굴들을 붉힐 것이다.
중요한 것은 위원회가 아니라 사회통합적 관점에서 비전 있는 정치를 펴는 것이고, 대통령이 모범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국민은 그리로 따라가게 돼 있으며, 사회통합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물이 흐르지 않고 고이면 물이 썩는다. 한국에 존재하는 모든 갈등은 리더십 문제에서 발생한다. 리더십이 없으면 사회통합 위원회를 1,000만 개 만들어도 갈등은 갈수록 증폭될 것이다.
고건의 정체
“내가 한총련의 원조다”
2005년 6월은 북한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공격이 가시화됐던 공포의 시기였다. 이런 긴장의 시기에 이명박, 고건 등 정치인들은 국가안보 정세에 무관심했다. 이때에 두 사람은 공히 김정일에 추파를 보내고 있었다. 이명박은 평양 거리를 리모델링해 주겠다고 했고, 같은 때에 고건은 북한의 산을 푸르게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4.19 학생 주도세력인 ‘신진회’의 멤버였다. 고건은 2004년 탄핵정국 대행 시에 술에 거나하게 취한 상태에서 스스로를 ‘한총련의 원조’라 했다. 그 자료는 이 주소에 있다.
http://blog.khan.co.kr/jk4free/2236102(2004-05-05 자료)
빨갱이 세력의 파괴ᐨ전복행위 덮어주는 발언들
2005년 11월 23일, 그는 연세대학교 주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동아일보 보도내용)
“진보와 보수의 이념논쟁에 사로잡힌 정치 리더십은 시대착오적이며, 통합의 리더십으로 가야 한다.”
“민주화의 기수이며 진보세력임을 자임하는 현 정권은 자유와 평등 사이에서 평등을 우선적으로 추구하고, 야권은 보수를 지향하며 자유에만 매달리고 있다.”
“자유냐, 평등이냐는 갈등은 효용성이 사라진 냉전시대의 유물이다. 이념논쟁에 사로잡힌 정치 리더십은 권위주의 시대 흑백논리로 돌아가자는 시대착오적 리더십이다.”
고건은 2006년 6월 2일, SBS ‘현수진의 선데이 클릭’에 출연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진보다, 보수다 하는 것은 구시대의 유물로 없어져야 한다. 구소련이 무너지면서 이러한 이념대립은 없어졌다.”
6월 2일자 일간지들에는 또 그가 중도개혁을 위한 ‘국민운동’을 만든다고 했다. 중도를 지향하는 정치인들을 유치하겠다고 했다. ‘중도’란 위장된 빨갱이다. 김대중, 노무현, 김진홍, 열우당 사람들 대부분이 스스로를 중도라고 말해왔다. 고건은 좌익을 ‘평등’주의 세력, 우익을 ‘자유’주의 세력이라 불렀다. 노무현 세력을 국가를 파괴ᐨ전복하는 적화통일 공산세력으로 보지 않고, 단지 ‘평등주의자’들로 표현하는 것은 저들의 정체를 숨겨주는 행위였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돼 있다. 하나는 고건 역시 좌파들을 국가전복⋅파괴 세력이라고 보지 않고, 단지 애국의 방법이 다른 애국집단으로 호도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고건 역시 주사파와 일맥상통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고건은 자기의 이념적 정체를 숨기기 위해 또 이런 말을 했다.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 시도는 일부 친북좌익 세력의 극단적 행동으로 분명히 잘못됐다. 인천 상륙작전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평택 미군기지 이전을 둘러싸고 미군 철수를 주장한 것도 분명히 잘못된 행동이다.”
분석이 없는 보수들은 이 두 마디만 듣고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이와 아주 똑같은 말을 김진홍 목사도 했다. 옛날 중앙정보부장, 총리, 장관 등의 수준급 원로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김진홍 목사가 이와 똑같은 연설을 했을 때 많은 박수를 받은 적이 있었다.
고건의 색깔, 2006년 8월 24일에 드디어 드러내
고건의 색깔이 2006년 8월 24일, 극명하게 나타났다. 이날 오전 용산기지 공원화 선포식에 참석했던 고건은 자신의 싸이월드 홈페이지에 이런 글을 남겼다.
“용산 민족공원 예정부지는 124년 전 임오군란을 빌미로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던 것을 시작으로 해서 일본군, 미군 주둔에 이르기까지 1세기 이상 외국군이 주둔해 오던 곳이다. 한 세기 넘어 지속되어온 오욕과 굴절의 역사를 바로 잡고 민족의 자존심을 되살리기 위하여, 이 부지를 세계적인 명소 수준의 민족공원으로 조성하는 일을 힘써 추진해온 것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용산기지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1945년 해방 이후 모두 철수했다. 그리고 1953년 6⋅25 남침전쟁 종전 이후부터는 주한미군이 전쟁 재발방지를 위해 54년간 한반도에 주둔했다. 미국은 용산기지를 강점한 것이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용산기지로 초대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건은 ‘한 세기 넘어 지속되어온 오욕과 굴절의 역사’라고 발언한 것이다. 대북 억제력을 위해 ‘인계철선’ 역할을 해주던 주한미군을, ‘조선을 강점했던 일본 및 청나라’와 같은 격의 침략자로 규정한 것이다. 이는 주한미군의 주둔 근거인 한ᐨ미 상호방위조약까지도 부정하는 발언이다. 노무현과 주사파들의 역사관과 100% 일치하는 것입이. 2004년 3월, 노무현은 용산 미군기지를 ‘간섭과 침략과 외세의 상징’이라 말했다.
8월 24일 아침, 조선일보가 차기 대선주자들에게 작통권 문제에 대한 질문서를 보냈다. 박근혜, 이명박, 손학규는 재고돼야 한다고 대답한 반면, 고건은 “문제가 있다면 재고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연합사 해체가 문제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모른다는 말이었다.
4.3사태 역사왜곡 날치기, 고건이 주도했다.
고건씨는 노무현 밑에서 국무총리를 할 때, 날치기식으로 4⋅3사태를 좌익사관으로 바꿔놓은 장본인이다. 제주4⋅3사건에 대한 역사뒤집기가 이루어 졌다. 제주4⋅3사건은 구소련의 스티코프 중장의 명령과 자금을 가지고 5⋅10선거를 저지시키기 위해 김달삼이 주동이 된 빨갱이들이, 경찰과 경찰가족을 무참히 살육한 좌익폭동이었다. 그러나 김대중과 노무현 세력은 이를 양민학살사건이요, 민주화운동이라 하고, 그들을 진압한 경찰과 군인들을 국가폭력배라고 규정했다. 이 일을 노무현 정권의 첫 총리를 하면서 고건이 마무리한 것이다.
4.3사건 역사뒤집기는 2003년 고건씨가 노무현의 총리로 있을 때 서명함으로써 공식화됐다. 2003년 3월 21일(금) 15:00부터 고건 국무총리 주재하의 4⋅3사건 진상조사 및 명예회복위원회 (4⋅3위원회)가 열렸다.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 작성기획단(단장 박원순 변호사)에서 작성한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를 심의 의결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위원장인 고건은 위원회 4명을 좌익계 3, 우익계 1명으로 구성했다. 불공평한 인적 구성에 대해 우익인사들의 집단으로 항의하며 다그치자 그는 위압적이고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면서 우익위원 1명을 급히 추가한 후 날치기 식으로 박원순 안을 통과시켰다. 이게 당시 항의를 주도했던 원로들의 전언이었다.
제주4.3사건에 대해 기존의 정통사관과 주사파들의 사관이 다르다. 정통사관은 4.3사건을 빨치산이 1948년 5월 10일 첫 국회의원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일으킨 반란이며 경찰 및 군인가족을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살해한 대량학살사건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좌익들은 당시의 빨치산을 민주화세력으로, 당시의 군과 경찰을 국가폭력배로 다시 규정했다. 어제의 충신을 역적으로, 어제의 역적을 충신으로 뒤집은 것이다. 이는 국가가 적의 수중으로 넘어가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이변이었다.
고건씨는 이런 역사뒤집기에 총대를 메었던 사람이다. 고건씨가 4⋅3사건의 역사적 성격을 뒤집는데 총대를 메었다는 사실, 대부분의 국민은 모른다.
이러한 이념적 색깔을 떠나 그에겐 떼어버릴 수 없는 부끄러운 꼬리표가 하나 붙어 있다. 5⋅17 비상계엄시에 정무장관으로 있으면서 무단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비난의 소리다. 수배하여 찾고 보니 병원에 있었다 한다. 하지만 그는 최근 병원이 아니라 집에 가 있었다고 합한. 왜 그랬느냐 물었더니, 군사정권이 싫어서 그랬다 했다. 그런데 그는 전두환 시절 9년 내내 2개의 장관을 했고, 민정당 국회의원을 내내 했다. 군사정권이 싫어서 청와대 자리를 오랫동안 비우고 의도적으로 행방불명이 됐다던 사람이 왜 9년 내내 전두환의 사랑을 받았는지, 그는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두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았다. 2002년 8월, 「김대중 정부가 숨겨놓은 병역비리자」라는 제하에 이런 기사가 있었다.“조선일보가 입수한 정⋅관계 인사 아들 병역면제 자료를 분석한 결과 병역면제를 받은 정치 관료 출신 아들의 전체 숫자는 총 125명이며 이를 직업별로 세분하면 장관급 7명, 차관급 8명, 1급 이상 공무원 10명 ….” 고건씨의 아들들도 여기에 포함돼 있었다.
고건씨는 김대중 정부가 출현하자마자 서울시장이 됐고, 되자마자 그는 서울시시정개혁위원회를 만들었다. 그 위원들 중에 김병준과 최열이 있었다. 2006년 1월 23일, 고건은 서울프레스센터에서 ‘미래와 경제’라는 포럼을 발기했다. 이는 사실상 고건의 자문그룹이라 한다(일요시사 제560-561호 2006.10.14). 바로 여기에 최열, 박권상, 이종훈(경실련) 등이 끼어 있다.
고건과 단짝인 최열의 정체
오세훈 서울시장 당선자가 시정인수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최열 환경재단 이사장을 선임했다. 최열은 전국연합 오종렬, 통일연대 한상렬, 민중연대 정광훈, 평통사 홍근수 등 민족해방(NL)계열 인물들과 함께 친북·반미·반세계화 및 반한나라당 활동을 벌여온 인물이다.
△국보법폐지국민연대 공동대표: 최씨는 2004년 8월10일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가 결성되자 오종렬·한상렬·정광훈 및 민노당 김혜경, 민주노총 이수호, 한국노총 이용득, 문규현 신부 등과 함께 공동대표로 참여, 국보법폐지운동에 전력했다.그는 같은 해 9월 14일「국보법폐지촉구시민단체공동선언」을 통해 “인권억압의 수단이요 독재시대의 정권유지 수단이었던 국보법을 폐지하지 않고서야 어찌 암울했던 과거사를 청산한다 하겠는가? 국보법은 청산되어야 할 분단독재시대의 망령일 뿐이다”고 주장했다.
△한총련 이적규정 철회 주도: 최씨는 한총련 등 이적규정 철폐 및 송두율·곽동의 등 소위 「해외민주인사」로 알려진 북한의 「대남공작원」들을 입국시키는 데도 주력해왔다. 그는 2002년 7월19일 서울 안국동에서 발표된「한총련 이적규정철회·합법화를 위한 민주사회단체 지도자1000인 선언」에 이어 2003년 4월8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발표된 소위 「양심수와 정치수배전면해제를 촉구하는 사회원로·각계인사 기자회견」을 주도했다. 이어서 2003년 8월 7일 소위 「해외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추진위원회(해외인사귀국추진위)」에 오종렬·한상렬·정광훈·홍근수 및 강정구 동대 교수, 이장희 외대교수, 열린당 국회의원 천정배·김원웅, 박원순 변호사 등과 함께 공동대표로 참여했다. 해외인사귀국추진위는 열린당 국회의원 임종인 등이 집행위원장으로 실무를 책임지고 황인성 전 청와대시민사회수석 등이 집행위원으로 참여, 송두율·곽동의 등을 입국시킨 단체이다. 송두율은 2004년 7월21일 항소심 재판에서 『북한의 대남공작원』임이 확인됐고, 곽동의 역시 반국가단체 한통련을 이끈 인물로서 공안당국에 의해 『북한의 대남공작원』으로 확인돼왔다.
△北서해도발 후 화해·협력 지속 주장: 최씨는 2002년 6월29일 북한의 서해도발이 이후 지속적인 대북지원을 주장하는 일련의 「선언」 및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2002년 7월11일 「서해사태에 따른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의 성명서」를 통해 『남북이 다시 대결로 나아가는 것은 분명 민족공멸의 길에 이르는 것이다』며『이번 사건으로 남북간 화해협력정책을 후퇴시켜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7월 18일에도「서해교전사태해결 위한 각계 300인 선언」에 참여, 같은 날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성당마당에서 선언을 발표했다. 선언은“남측만이 아닌 민족 전체의 관점에서, 전쟁이 아닌 평화의 관점에서 해결할 것이며, 남측 정부의 화해협력 정책기조는 유지돼야 하며 금강산 관광, 대북쌀지원 등 인도적 지원, 민간교류는 중단없이 계속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무력도발 앞에서 대북지원을 주장한 최씨는 2004년 2월11일 오종렬·한상렬 및 민주노총 이수호, 함세웅신부 등과 함께 공동대표 자격으로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이사장 최병모 前민변회장)」에 참여했다. 겨레하나는 김일성종합대학에 지난 해 6억원 상당의 물품을 지원한 데 이어 올 해 총 40억원의 물품지원을 계획하는 등 대북퍼주기에 주력하고 있다.
△『불평등한 한미관계 청산』주장: 최씨의 또 다른 코드는 「반미」이다. 평소 불평등한 SOFA개정을 주장해 온 최씨는 2002년 6월13일 미군훈련 중 여중생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미군장갑차여중생故신효순·심미선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여중생범대위)」를 만들어 집요한 반미촛불시위를 이끌었다. 여중생범대위에도 평소 그와 같이했던 오종렬·한상렬·홍근수 및 문정현 신부, 민노당 천영세, 민주노총 단병호 등이 공동대표로 참여했다. 여중생범대위를 통해 대중운동에 성공한 최씨는 노무현정권 출범 이후 『불평등한 한미관계 청산』을 주장해왔다. 그는 2003년 1월13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가진 소위 시민단체 기자회견에서 『2003년을 자주평화의 해』로 선포한 뒤 『여중생 사망사건의 책임자 처벌』『불평등한 SOFA전면개정』『평등한 한미관계 기초 마련』 등을 주장했다.
2003년 5월9일에는 「대통령방미(訪美)관련300인선언」을 통해 『50년간 지속되어 온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청산』『미국이 강요하는 대북적대정책에 동조해 온 잘못된 과거청산』『미국의 부당한 압력에 맞선 SOFA개정』등을 주장했다. 2005년 8월1일에는 「광복60돌민족자주평화 제2의광복선언」을 통해 『60년간의 민족분단, 몰주체적 예속 극복』을 주장하며 『국가보안법 완전 철폐』『불평등하고 종속적인 한미관계 재정립』을 주장했다.
△이라크파병 반대로 반미확산 :최씨는 이라크파병반대를 주도했던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2003년 3월31일 명동성당에서 오종렬·한상렬·정광훈·홍근수 등과 함께 「반전평화비상국민회의」를 제안하는 기자회견을 가진 뒤 『이라크 파병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일 뿐 아니라 전략적으로도 잘못된 것』이라며 미국의 일방적 전쟁선포에 맞선 범국민적 반전평화운동을 주장했다. 최씨는 2003년 9월23일 역시 오종렬·한상렬·정광훈·홍근수 등과 함께 「이라크파병반대비상국민행동」을 결성, 공동대표로 참여했다. 이 단체는 국제반전공동행동의 날(2003년 9월23일), 국제반전공동행동의날(9.27 대학로), 이라크전투병파병반대1차범국민대회(10.11 대학로), 이라크전투병파병반대1차범국민대회(10.11 시청), 2차범국민대회 반전평화국제행동의날(10.25) 등 일련의 이라크파병반대집회를 통해 반미분위기를 확산시켰다.
△오종렬 등과 MD저지 운동: 최씨는 이밖에도 오종렬·홍근수 및 민노당 단병호, 문정현 신부, 승려 법륜 등과 함께 「MD저지와 평화실현 공동대책위원회」를 조직, 『MD전투체계를 장착한 차세대 구축함 도입은 우리나라의 對美군사적 종속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최씨는 또 2002년 3월21일 「투자협정WTO반대국민행동」에 참여,『한일·한미투자협정 반대, 한칠레자유무역협정 체결 반대』등을 주장해왔다.
황석영의 정체
1) 위장취업 제1기생인 손학규는 2006년11월24일 한국발전연구원에서 이런 강연을 했다.
“저는 실제로 대학을 졸업하면서 취직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소설가 황석영씨와 같이 구로동 수출공단에 들어가서 일을 했습니다. 제가 거기에 취직을 하려고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노동자들을 조직해서 이 사회를 뒤엎을까 하는 생각만 했습니다. 공장에 취직해서 다니다가 친구에게 들킬 형편이 되어서 다른 공장을 찾고 있던 중에 박형규 목사님께서 노동운동보다 더 중요한 것이 빈민운동이라고 해서 청계천 판자촌에 가서 살았습니다. 지금 뉴라이트의 기수가 되어 있는 김진홍 목사님도 같이 일을 했습니다.”
2) 님을 위한 행진곡, 산자여 따르라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리기 위한 노래로 윤상원과 그보다 한 해 전인 79년 겨울 연탄가스로 숨진 그의 여인 박기순과의 영혼결혼식을 내용으로 하는 노래굿 '넋풀이'에서 두 영혼이 부르는 노래로 발표되었다. 전남대 선후배 사이로 들불야학에서 만난 두 사람은 1982년 2월 망월동 묘역에 합장되어 부부의 연을 맺었고, 님을 위한 행진곡은 1982년 5월18일 윤상원-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서 처음 불려졌다. 영혼으로 맺어진 부부가 함께 부르는 노래라는 것이다.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에서 황석영이 내용을 따다가 작사를 했고, 여기에 김종률이 곡을 붙인 것이다
3) 청계천 전태일 동상 앞에 김대중과 나란히 황석영이 바친 전태일 헌시가 있다
4) 2003년10월 송두율의 변호인을 자처하고 나선 또 다른 인물, 황석영씨! “송두율이 후보위원이라면 북에서 편한 일생을 보냈을 텐데 왜 그러지 않았겠느냐”.
반공닷컴 http://bangong.co.kr/) http://bangong.ca.to/)
5) 범민련은 1988년 남한의 운동권 인사의 제의와 북한조국통일위원회의 화답으로 북한, 남한, 해외동포로 구성되는 통합단체를 만들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북한의 대남사업에 활용되는 전위조직에 불과하다. 이들은 1989년 문익환, 임수경, 문규현의 밀입북으로 고무되어 1990년 8월 15일 판문점에서 남측 대표로 황석영이 참가한 가운데 첫 출범식을 가졌다. 이들은 1990년대 들어 운동권의 투쟁 노선이 민주화에서 통일 운동으로 변화함에 따라 맞춰진 조직이며, 이런 이유로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자가 대단히 많다. 한편, 범청련은 밤민련의 청년단체로 남측 대표는 한총련이 맡고 있다. 이 단체와 관련되어 구속된 사람은 다음과 같다.
법등의 정체
조계종 호계원장인 법등 위원은 법등(法燈) 조계종 호계원장은 경실련 구미지역 대표 및 경실련 공동대표(2005)를 지냈으며, 「불교환경연대」 대표를 역임했다. 불교환경연대는 불교계 내에서 소위 반전평화를 부르짖어온 단체이다. 이 단체는 그간 실적으로 새만금사업저지, 경부고속철도 금정산·천성산 관통 백지화 활동, 지율 스님과 생명 평화를 위한 종교인 참회기도 추진, 도룡뇽 소송인단 100만인 서명 범불교운동본부 활동, 한미FTA반대종교환경회의 연대 등을 홈페이지에 올려놓고 있다. 불교환경연대는 2005년 2월 25일 전국연합·민중연대·통일연대 등 91개 단체와 함께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한반도 비핵화 달성」등을 주장하는 선언을 발표했다.「한반도 비핵화」는 남북한의 핵이 모두 없어져야 한다는 것으로서, 북한은 자신의 핵무장 해제에 앞서 미국의 핵우산이 사라져야 한다며 「한반도 비핵화」를 주장해왔다. 이날 선언은『북한의 核포기와 미국의 대북적대 정책의 동시 철회』운운하며 북한의 핵무장이 미국의 소위 대북적대 정책 탓이라는 억지를 부렸다.
불교환경연대는 2003년 9월27일 소위 「9.27국제반전공동행동 결의문」에 참여,『이라크에 발목 잡힌 미국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는 것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중요하다...대북적대로 한반도 위기를 조장하는 부시가 이라크 「수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며 북한정권 보호를 위한 이라크파병철회를 주장했다. 2003년 2월12일 「국회의 이라크 파병동의안 부결을 촉구한다.」는 성명에서는 『이라크 전쟁은 점령군 미국이 전범행위를 인정하고 이라크에서 조속히 철수 하지 않는 한 해결의 실마리는 찾을 수가 없다』며 미군을 전범으로 비난하고, 이라크 파병은 『엄청난 한국군의 희생과 사회적 혼란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재천의 정체
이화여대 교수인 최재천은 2007년 이래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를 맡아왔다. 환경운동연합은 「환경보호」를 앞세워 국군과 주한미군을 압박하고, 평택범대위·여중생범대위 등에 소속돼 반미운동에 동참해왔다. 소위 「불평등한 SOFA 전면개정」을 지속적으로 촉구하는 한편, 1995년 3월 「우리 땅 되찾기 시민대책위원회」에서 2002년 5월 「우리 땅 미군기지 되찾기 운동연합」에 이르기까지, 「미군기지 신설 백지화와 조건 없는 기지반환」을 주장해왔다.
환경연합은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 소속으로서 2004년 보안법 폐지를 위한 투쟁에 앞장섰다. 2004년 9월에는 「국가보안법 폐지촉구 시민단체 공동선언문」을 발표했고, 2004년 12월에는 「국가보안법 연내 폐지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활동가들이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환경연합은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를 일으킨 광우병대책회의와 범국본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해왔다. 2008년 7월9일 구성된 제2기 광우병국민대책회의 실무진에 현직 환경연합 간부가 참여하기도 했다.
강신석의 정체
강신석 위원은 5.18기념재단 이사장(2003 ~ 2004)을 거쳐 조선대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며, 친북단체인 전국연합(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과 통일연대(6.15공동선언 실천연대) 고문으로 이름을 올렸다. 광주가 거점인 강신석은 광주전남 통일연대 대표로 활동했었다. 전국연합(대표 오종렬)과 통일연대(대표 한상렬)는 주한미군철수-국가보안법철폐-연방제통일을 주장해 온 단체로서 2004년 9월 인천 맥아더동상 파괴 책동 등 반미시위를 주도하다 2007년 한국진보연대로 탈바꿈한 단체이다. 개신교 목사인 강은 2002년 7월18일 이적단체인 「한총련 합법적 활동 보장을 위한 종교인 1천인 선언」, 2004년 9월16일 「국가보안법 폐지를 촉구하는 각계 인사 공동선언」, 2004년 10월6일 「국가보안법 폐지 기독교 원로 선언 및 기자회견」및 2008년 「6.15공동선언, 10.4선언 이행 및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각계 인사 공동선언」에 참가했다. 2004년 10월6일 선언에서는 『국가보안법 폐지는 그리스도인의 선교적 사명』이라며 『국회의원들은 국가안위를 명분으로 독재정권안보, 인권탄압, 분단고착화, 그리고 수구매국세력의 도구가 되어온 국제적 악법 국가보안법 폐지에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재규의 정체
노무현 정권 때 통일부 장관을 지낸 박재규는 2008년 6월 「6.15공동선언, 10.4선언 이행 및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각계 인사 공동선언」에 참여했고 현재 윤이상평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김일성은 윤이상을 ‘재간둥이’라 칭했고, 평양에 윤이상음악당을 지어줄 정도로 윤이상을 사랑했다. 윤이상은 지독한 『문화공작원』으로 반대한민국 활동을 벌여온 자다.
송호근의 정체
서울대 교수인 송호근은 2003년 10월 23일 「송두율 교수 석방을 요구하는 시민사회 1000인」및 2000년 7월18일 「국가보안법 폐지를 지지하는 전국교수」선언에 참여했다.
김명자의 정체
김대중 정권 당시 환경부 장관을 지낸 김명자는 현재 경실련 환경정의시민연대 이사 및 열우당 중앙선거대책본부 공동본부 부장(2004), 제17대 국회의원(비례대표, 열우당)을 거쳐 현재 김대중평화센터 자문위원으로 있다.
기 타
통합위에는 김대중-노무현 정권 당시 전남 제2의 건국범국민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참여했던(1998) 노진영, 대통령자문 동북아시대위원회 위원장(2004~2005)을 맡으면서 좌경 발언을 쏟아냈던 문정인, 국무총리 국무조정실 실장을 맡았던(2003~2004) 이영탁, 대통령 비서관 출신의 이원덕(2004~2006) 등도 있다.
사회통합위원회 민간위원 명단(총 32명, 가나다 순)
△고건(71) 전북 / 기후변화센터 이사장, 전 국무총리
△강신석(71) 광주 /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공동대표, 목사, 전 5·18재단 이사장
△강지원(60) 전남 / 변호사, 전 청소년위원회 위원장
△김명자(65) 서울 / 전 환경부장관, 전 숙명여자대학 교수
△김성국(62) 부산 / 부산대 사회학과 교수, 전 부산 경실련 공동대표
△김수지(67) 전남 / 서울사이버대학교 총장, 한국호스피스협회 회장
△김영신(66) 전북 / 경원대 신방과 초빙교수, 전 한국여기자협회 회장
△김희상(64) 경남 / 한국전략문제연구소 소장, 전 비상기획위원장
△노진영(67) 광주 / 전 초당대·목포대 총장
△라종일(69) 전북 / 우석대 총장, 전 주일대사
△문정인(58) 제주 / 연세대 교수, 전 동북아시대위원회 위원장
△박재규(65) 경남 / 경남대 총장, 전 통일부 장관
△박효종(62) 서울 /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
△법등(61) 전북 / 조계종 호계원장, 전 경실련 공동대표
△복거일(63) 충남 / 소설가, 경제평론가
△서정돈(66) 대구 / 성균관대 총장, 전 서울대 의대교수
△송석구(69) 대전 / 가천의과대학 총장, 전 동국대 총장
△송영욱(72) 서울 / 변호사, 전 한국장애인연맹회장
△송호근(53) 경북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전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장
△신달자(66) 경남 / 시인,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오웅진(64) 충북 / 신부, 학교법인 꽃동네 현도학원 이사장
△윤평중(53) 광주 / 한신대 철학과 교수, 한신대 대학원 원장
△이문열(61) 경북 / 소설가, 한국외국어대학교 석좌교수
△이배용(62) 서울 /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대학교육협의회 회장
△이에리사(55) 충남 / 용인대 사회체육과 교수, 전 태릉선수촌장
△이영탁(62) 경북 / 세계거래소연맹 이사회 이사, 전 국무조정실장
△이원덕(58) 경북 / 삼성경제연구소 고문, 전 청와대사회정책수석 비서관
△이원복(63) 대전 / 덕성여자대학교 예술대학 학장, 전 한국애니메이션 학회 회장
△임혁백(57) 경북 / 고려대 정치외교학 교수, 고려대 정책대학원장
△정진성(56) 충남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유엔 인권이사회 자문위 부의장
△최재천(55) 강원 / 이화여대 석좌교수, 전 환경운동연합공동대표
△황석영(66) 중국만주 / 소설가, 유라시아문화 특임대사
2009.12.24. 지만원
http://system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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