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정화의 소금 삼청교육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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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1-12-19 09:33 조회3,00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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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화의 소금 삼청교육대
"공산당에는 몽둥이만이 약"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말씀이 현실적 진리다. 이 나라는 빨갱이들과 전라도만 아니면 그야말로 천국이다. 지금까지 문재인과 이재명 패들이 벌인 복마전과 도깨비놀음을 지켜보면서 다시 한번 공산당에 대한 진리를 확인하게 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당시 내무장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삼청교육대를 만든 것은 그 시대의 묘수였다고 생각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을 시작할 때, 마을에서 말썽을 부리고 동네사람들과 잘 지내지 못하는 이상한 성격을 가진 인간들을 동네 단위에서 정신 차리게 하라고 지도한 적이 있었다. 이의 연장선이 바로 삼청교육대라 할 수 있다.
암흑의 1980년
박대통령이라는 엄격한 대통령이 서거하자 국가에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벌어졌다. 박정희에 항거하던 소위 재야 이념세력들이 김대중을 중심으로 뭉쳐 국민연합이라는 사실상의 혁명조직을 이끌면서 김영삼의 신민당, 김종필의 공화당을 상대로 전국 주도권 잡기 경쟁을 시작했다. 이들은 학생시위와 노동시위를 부추기면서 조기대선을 치르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는 최규하 정부를 해체하고 거국내각을 구성하자고 압박했다. 이 압박수단이 학생시위요 노동시위였다. 이들에게는 정권만 중요했지 국가는 안중에도 없었다. 아니 김대중은 1973년 초 일본에서 배동호, 곽동의 등 가장 극렬한 친북 베트콩파들과 함께 반국가단체인 [한민통]을 조성해 나라를 북한에 넘기려 안간힘을 썼다. 김대중이 1981년 사형언도를 받은 것은 국내에서 벌인 내란음모사건 때문이 아니라 바로 한민통을 결성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북악파크에서 꾸민 내란음모사건에 대한 형량은 무기징역이었다.
사회혼란의 중심에는 북괴공작과 붉은 배우 김대중이 있었다
1980년 1월 9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농성투쟁을 벌였고, 이를 신호로 하여 4월 29일까지 5개월간 전국적으로 719건의 노사분규가 발생했다. 이는 1979년 12개월에 걸쳐 발생했던 노사분규 수의 7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80년 4월 17일, 강원도 동원탄좌 사북영업소 광부 1,000여 명이 노조지부장이 체결한 20% 임금인상안이 잘못됐다며 노조지부장 부인을 나체로 정문 기둥에 묶어 놓고 45시간 동안이나 린치를 가하는 등의 난동을 부렸다. 4월 21일부터 3일간 광부들의 부인까지 동원한 3,000여 명이 곡갱이, 파이프 등을 가지고 광업소, 경찰지서, 기차역, 도로를 점거함으로써 사북일대가 완전 무법천지가 되었다. 이런 폭동사태는 계엄군 11공수여단을 투입함으로써 4월 24일에 진압됐다. 여기에서 경찰 1명이 사망했고 7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22억 원의 재산피해를 입었다.
이에 김일성은 간첩사령부인 3호 청사에서 사북 폭동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라는 독총지령을 내렸다. 이후부터 노사분규가 전국규모로 확산되었고, 4월 25일부터 20일 동안에는 무려 987건의 노사분규가 발생했다. 이들의 구호 역시 단순한 노사문제에 대한 구호가 아니라, “죽기 아니면 살기다” “계엄령을 해제하라” “배고파 못 살겠다, 같이 살고 같이 죽자”는 정치적 구호로 변질됐다. 이러한 노사분규 역시 김대중이 이끄는 이른바 [재야세력]으로 포장된 빨갱이 조직이 간첩들의 지시를 받아 일으킨 사회혼란 공작이었다. 거물간첩 김용규가 그의 저서 [소리 없는 전쟁]에서 폭로했듯이 남한의 크고 작은 소요는 예외 없이 '북한의 공작'이었다.
삼청교육대 초대한 북괴공작
1980년4월초, 치안본부는 계엄위원회에 무정부 상태에 대한 통계를 보고했다. 1980년 1월부터 3월까지 발생한 범죄에 대한 통계였다. 살인이 64.3% 급증했고, 강도가 113.9%, 폭력이 20.1%, 절도가 21.4%, 밀수가 122.6% 급증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서정화 내무장관은 “강력범들에 대해서는 사회복귀가 불가능하도록 강제 노동이나 강제수용 등의 특별관리가 필요하니, 계엄당국이 이를 뒷받침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건의를 했다. 이는 삼청교육대의 필요성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대학세력과 노동세력의 폭력시위가 연일 끝 간 데 없이 치닫고 있었던 당시 사회적 인사들은 좌불안석이었다. 종교계, 경제계, 언론계 등에서 파국적 난국을 하루 빨리 수습해달라는 요구가 사회각층으로부터 빗발쳤던 것이다.
4월 27일, 최규하 대통령으로부터 학원소요사태에 강력하게 대응하라는 명령을 받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4월 30일, 전국 계엄지휘관회의를 열어 학원-노조의 난동이 법치주의의 한계를 넘은 것이므로 단호하게 대처할 것을 지시했다. 5분 대기조 편성, 진압훈련 등 소요사태 대비훈련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국보위]는 행동력 가진 싱크탱크
당시 세상물정에 어두웠던 최규하 대통령에게 전두환은 계엄 시에 한시적으로 대통령을 도울 수 있는 대통령 자문기구의 필요성을 보고했다. 이른바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였다. 1980년 5월 21일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은 국보위 설치 요강을 마련하여 이원홍 청와대 민원수석비서관에게 제시했고 이원홍 수석은 이에 대한 조문화 작업을 마친 후 5월 25일경 국보위 설치에 대한 대통령령을 성안했다. 이는 계엄법과 정부조직법을 근거로 한 것으로 합법적인 것이었다.
5월 26일 권정달은 국무총리실에서 주영복 국방장관과 박동진 외무장관이 배석한 가운데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에게 국보위 설치안을 보고했고, 이어서 5월 27일 16시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에 주제로 열린 제46회 정례국민회의에서 의결되고 5월 31일 대통령령 제9897호로 공고됐으며, 5월 31일 오전10시 국보위 의장인 최규하 대통령 주제로 첫 국보위 전체회의가 열렸다. 국보위의 당연직 위원은 15명이며, 국무위원 및 각군 총장 이상의 군수뇌들로 구성되었다. 임명직 위원은 육군소장 이상 10명의 장군들과 8명의 각료, 청와대관계자 2명으로 구성되었다. 국보위에는 상임위원회가 있었다. 위원장은 전두환이었고 그 밑에 13개 분과위원장이 있었다. 임명직 상임위원은 18명의 군장성과 10명의 공무원으로 구성되었다.
국보위에는 4대 기본목표가 있었다. 안보태세강화, 합리적 경제시책, 기강확립이었고, 추진 지침으로는 계급선동 근절, 국가전복기도의 제거, 불법시위 근절, 사회비리 척결, 정치풍토 쇄신, 국가이익을 우선시하는 언론풍토, 종교를 빙자한 정치활동 통제, 건전한 노사관 확립, 사회악 근절, 과외과열 진정 등이었다.
6월 18일 계엄사는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자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혐의자들은 당국의 정화 의지에 순응하여 853억 원의 부정축재 재산을 자진 헌납하기로 하고 모든 공직에서 사퇴할 것을 밝혀 형사처벌을 유보한다고 발표했다.
국보위와 삼청교육대는 사회기강 확립을 위한 예술적 앙상블
7월초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과 김만기 정화 분과위원장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2급 이상의 공무원에 대한 숙정 결과를 마련하였다고 보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은 적법하고 합리적인 기준에 의하여 관계부처의 장과 충분한 협의를 거쳐 공정하게 처리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국보위 상임위원회는 7월 9일 장관 1명 차관 6명 도지사 3명을 포함 2급 이상 공무원 232명을 숙정하였다고 발표했고, 그 후 7월 31일까지 입법부11명, 사법부 61명, 행정부 5,418명 등 공직자 5,490명과 국영기업체 금융기관 및 정부산하단체 등 127개 기관 임직원 3,111명 등 총 8,601명이 사임했다.
7월 30일 국보위는 과외금지, 대입 본고사 폐지, 대학졸업정원제 등을 골자로 하는 교육정상화 방안을 발표했다.
8월 4일 국보위는 사회악 일소를 위한 특별조치를 발표하고 불량배 소탕에 관한 삼청계획 제5호에 따라 11월 27일 제4차 단속까지 모두 57,561명을 검거하여 그중 3,052명을 재판에 회부하고 38,259명을 ‘군부대 정화교육’ 이른바 ‘삼청교육’에 회부했으며 16,250명을 훈방 조치했다. 그밖에 국보위는 부정불량 식품 및 약품단속을 실시하고 전과기록을 말소하는 등 신원 기록에 대한 정비작업을 단행했고, 해외인력 송출절차와 수출입 절차를 간소화했고 ‘연좌제’를 폐지했다.
5.18 군사적전은 계엄사의 직무분야, 전두환은 대통령 직무 보좌에 올인했다
이처럼 전두환은 5.18을 전후한 시기에 극심한 사회혼란을 수습하고 사회를 정화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광주사태에는 개입할 시간도 없거니와 이희성의 증언 그대로 개입할 처지가 아니었다. 광주사태가 발생하고 있던 그 순간에 전두환은 전국적으로 혼란을 일으키는 빨갱이 공작을 진압하고, 사회기강을 바로잡는데 혼신을 다했다. 특히 국보위를 통해 국가정책을 일신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당시 전두환의 얼굴을 보았던 육사 선배들은 당시의 전두환 얼굴이 까맣고 여위였다고 증언한다. 5.18은 전두환 어젠다(agenda) 서열의 등외에 자리하고 있었다.
2021.12.19.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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