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에서 발생한 소요사태는 김일성이 지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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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1-12-19 10:00 조회2,87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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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서 발생한 소요사태는 김일성이 지휘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와 관련해 당시의 북한주재 중국대사관이 5월 16일, 작성한 '남조선 군사정변 정황 보고서'가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북한의 김일 부수상이 중국 대사관에 설명한 바에 의하면 북한은 박정희 쿠데타 세력을 빨갱이 세력이라고 평가했다 한다. 김 부수상은 “이번 쿠데타는 진보세력의 조직적 행동일 가능성과 당시 정부에 불만을 품은 소장파 군인 세력일 가능성 등 2가지가 있다”고 분석했다 한다. 북한은 특히 쿠데타의 주도자인 박정희가 한때 남로당원이었다는 점을 제시하며 “미국 제국주의의 막후 사주를 받은 쿠데타가 아닐 가능성은 90%”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이런 분석에 따라 들뜬 북한은 "정변을 지지하는 성명 발표를 준비하고 있다"는 발언까지 했다고 한다. 미국의 우드로 윌슨 센터와 공동사업으로 보고서를 입수한 북한대학원은 북한이 "남한의 쿠데타 가능성을 상당 정도 예견했다"고 한다. 그만큼 간첩들의 예견이 정확했던 것이다.
하지만 쿠데타 발생 이틀 만에 혁명 주도 세력과 미국에 대한 북한의 태도는 급변했다고 한다. 5월 18일 북한의 노동당 중앙상임위원회는 "이번 군사정변은 매우 반동적이고 미 제국주의에 의해 고의로 조장된 것"이라고 규정했다 한다. 또한 “쿠데타 도당이 '공산주의 타도'와 북진통일을 주창하고 있다면서 북한이 국방력 강화에 매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다. 북한은 이후 민간경제부문을 희생하더라도 국방력 강화에 주력하는 이른바 ‘국방-경제 병진노선’을 채택하고 당초 추진했던 ‘인민경제 향상을 위한 1차 7개년 계획’의 시작을 미루는 결정을 내렸다 한다.
1인당 GNP에서 남한의 3배였던 북한 경제는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인프라 건설로 인해 이제는 20:1로 역전되었다. 만일 그 당시에 김대중이 정권을 잡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탈북인들의 증언집을 빌리지 않더라도 김일성의 앞잡이 김대중은 그때 나라를 북에 바쳤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위 사실은 김일성이 남한을 적화통일시키기 위해 얼마나 눈동자처럼 남한 내부를 꿰뚫고 결정적 시기를 마련하기 위해 광분했는가를 알 수 있다. 아래는 김일성이 간첩들에게 내린 1970년대의 지령들이다. 이 지령들은 [김일성 비밀교시]라는 이름으로 일본 산케이신문에 연재됐다.
(1974년 1월 대남 담당요원들과의 담화)
“혁명의 전 전략적 단계에서 결정적 시기는 단 한 번 밖에 오지 않습니다. 결정적 시기를 조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시기 포착을 잘해야 합니다. 결정적 시기가 조성되었다 해도 그 시기를 포착하지 못하면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4·19 때의 교훈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가 좋은 기회를 놓쳤던 것처럼 평양에 앉아서 무전으로 보고나 받아 가지고서는 서울에서 일어나는 결정적 시기를 제때에 포착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혁명정세를 자체로 분석 평가하고 스스로 전략전술을 작성할 수 있는 노숙한 혁명가들을 파견하여 현지당 지도부를 시급히 꾸려야 합니다. 조선혁명을 모스크바에서 지도할 수 없듯이 평양에 앉아서 남조선혁명을 지도한다는 것은 혁명의 원리에도 맞지 않습니다.”
(1974년 4월 3호청사 간부회의)
“해외에 나갔던 전 정보부장 이후락이 지금 충무호텔 2층 특실에서 휴양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는데 연락부에서 그자를 평양으로 데려 오도록 작전을 한번 해보시오. 지금은 공직에서 물러난 상태니까 경호원도 별로 없을 것이고, 장소도 바닷가니까 감쪽같이 잡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그리고 상대가 보통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혀를 깨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해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강력 마취제를 써서라도 내 앞에 데려오기만 하면 됩니다."
(1974년 4월 3호청사 부장회의)
“년초부터 박정희가 긴급조치를 연발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렇게 강한 탄압에 의거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유신체제를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결정적 시기가 박두했다는 징조입니다. 우리는 유신체제가 더 굳어지기 전에 선손을 써야 합니다.···남조선에서 대통령이 출두하는 행사 일람표를 보니까 해마다 8·15 광복절 경축 파-티가 경회루에서 벌어지는데 매우 흥미 있는 곳입니다. 이번에는 68년 청와대 육박 당시의 교훈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빈틈없이 잘 준비해야 합니다.”
(1974년 12월 대남 공작원들과 의 담화)
“지금 남조선 정세가 매우 흥미 있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동아일보 광고 해약사태는 결정적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징조입니다. 동아일보에 대한 구제운동을 벌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세를 더욱 격화시키기 위해서는 이 사태가 장기화되도록 기름을 치고 부채질을 해야 합니다. 현지 당 지도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광고주들에게 공갈, 협박을 해서라도 광고 해약자들이 더 늘어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번 동아일보 사태를 잘 이용하기만 하면 결정적 시기가 성큼 다가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1974년 12월 대남 공작원들과 의 담화)
“결정적 시기가 포착되면 지체 없이 총공격을 개시해야 합니다. 전국적인 총파업과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대 곳곳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전신 전화국, 변전소, 방송국 등 중요 공공시설들을 점거하는 동시에 단전과 함께 통신 교통망을 마비시키고 임시혁명정부의 이름으로 북에 지원을 요청하는 전파를 날려야 합니다. 그래야 남과 북의 전략적 배합으로 혁명적 대 사변을 주동적으로 앞당길 수 있습니다.”
(1976년 8월 대남 공작원들과 의 담화)
“결정적 시기는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혁명 정세는 오직 혁명가들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 성숙되게 됩니다. 혁명의 객관적 정세가 아무리 성숙되었다 하더라도 혁명가들이 주동적으로 조성하지 않으면 결정적 시기는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혁명적 대 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각종 형태의 대중투쟁을 적극 조직 전개하여 적들의 강경 탄압을 유도해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시위 도중 경찰에 의해 살해된 것처럼 위장하여 자해공작을 할 필요도 있습니다. 시위군중들이 동료들의 피를 보게 되면 더 격렬하게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1979년 11월 3호청사 부장회의)
“10·26사태는 결정적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징조입니다. 박정희가 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은 권력층 내부의 모순과 갈등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첨예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적들은 지금 계엄상태를 선포해 놓고 서로 물고 뜯고 하고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연락부에서는 이 사태가 수습되기 전에 선손을 써야 합니다. 남조선의 모든 혁명역량을 총동원하여 전민 봉기를 일으킬 수 있도록 적극 유도해야 합니다.”
(1979년 12월 20일 중앙당 확대간부회의)
“12·12사태는 미제의 조종 하에 신군부가 일으킨 군사 쿠데타입니다. 계엄사령관 관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남조선 정세가 그만큼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지금 남조선에서는 군 수뇌부가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연락부와 인민무력부에서는 언제든지 신호만 떨어지면 즉각 행동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24시간 무휴상태로 들어가야 합니다.”
(1980년 5월 3호청사 부장회의 )
“남조선에서 노동자들이 드디어 들고일어났습니다. 사북 탄광의 유혈사태는 반세기에 걸친 식민지 통치의 필연적 산물이며 인간 이하의 천대와 멸시 속에서 신음하던 노동자들의 쌓이고 쌓인 울분의 폭발입니다. 지금 남조선에서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청년학생, 도시 빈민 할 것 없이 전 민중들이 이글거리고 있습니다. 남조선 혁명가들과 지하혁명 조직들은 이번 사북사태가 전국으로 확산되도록 적극 불을 붙이고 청년학생들과 도시 빈민 등 각계각층 광범한 민중들의 연대투쟁을 조직 전개하여 더 격렬한 전민 항쟁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1983년 9월 3호청사 부장회의) - 아웅산 테러 지시
“남조선의 대통령이 각료들을 이끌고 동남아를 순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작전부에서 결사대를 파견해 보겠다고 했다는데 절대로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틀림없이 해야 합니다. 버마가 허술한 나라라고 해서 너무 쉽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방문 일정에 따라 사전 답사도 해 보고 빈틈없이 잘 준비를 해서 감쪽같이 해치워야 합니다. 만약 이번 작전에서 성공하게만 된다면 결정적 시기가 성큼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아웅산테러, 10월 9일)
(1987년 7월 3호청사 부장회의)
“전두환이가 드디어 백기를 들었습니다. 4·13 호헌이요 뭐요 하다가 노태우의 6·29 선언이 나왔다는 것은 6·10 항쟁에 겁을 먹은 전두환 정권이 항복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현지 당 지도부는 앞으로 있게 될 대통령 선거에 대비해서 우리의 민주투사들을 상도동과 동교동 쪽으로 접근시키고 김영삼과 김대중으로부터 인정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장차 그들의 후광을 업고 제도권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1987년 7월 3호청사 부장회의)
“서울 올림픽이 성공하게 된다면 그만큼 내외적 환경이 불리하게 됩니다···올림픽을 파탄시킬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최소한 흠집이라도 많이 내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남조선 도처에서 폭발사고를 일으킨다든가 해서 각국 선수단과 관광객들이 남조선에 안심하고 들어갈 수 없도록 공포분위기를 조성해야 합니다.” (KAL858기 폭파, 1987년 11월 29일)
2021.12.19.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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