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획] 운동권의 실체를 밝힌다.(전경웅)-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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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1-10-07 22:36 조회3,58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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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 운동권의 실체를 밝힌다.
2007년, 전경웅 (코나스 칼럼니스트, 군사평론가)
대한민국 권력의 핵심부에는 소위 운동권 출신들이 대거 포진되어있다. 70~80년대 대학을 다니면서 각종 시위를 주도했던 이들 중 상당수가 지금은 국회의원으로, 청와대, 정부기관, 각종위원회소속 공직자로서 국가 주요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하는 권력자로 탈바꿈해 있다. 일반적으로 ‘운동권’ 하면 ‘친북’, ‘반미’, ‘좌익’으로 이미지가 각인되어있다. 대충은 맞는 지적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들 중에는 국제 공산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친북주의자, 주체사상을 재해석한 비친북주체사상파, 반 제국주의자 등으로 다양하게 분파되어있다. 또 최근 발족한 ‘자유주의연대’처럼 과거 운동권 시절을 반성하고 뉴라이트 운동으로 방향을 선회한 486(40대에 접어든 386세태)들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학생시절 그대로 주사파로 남아있는 부류들도 있다.
<코나스>는 권력의 요직에 진입한 운동권들이 과거에 어떤 사건을 주도했으며 사건 관련자들의 현재 모습은 어떤가를 특집기획으로 다루고자 한다. “운동권의 실체를 밝힌다”라는 주제로 코나스 컬럼니스트인 군사평론가 전경웅씨가 10회에 걸쳐 시리즈로 집필할 계획이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성원을 부탁 드린다.(편집자 주)
[1편] 들어가기 전에
지금 대한민국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는 바로 386 운동권이라는 단어다. 이들은 그 참신한 이미지와 젊음이라는 무기로 현 정치권에 파란을 몰고 왔다. 이들 중 상당수는 과거의 혁명 위주의 사고에서 벗어나 우리 사회의 핵심 인재들로써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반면, 지금도 과거의 혁명 사상과 전투적 행동 방식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들을 우리는 左派, 혹은 親北 세력이라 부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정체성은 그렇게 쉽게 판단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운동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그들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현실은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조차도 보통 사람들이 사용하는 일반적인 의미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예를 들자면, 진보라는 단어는 발전한다는 사전적인 개념이 아니라, 마르크스 이론에 따른 사회주의로의 발전을 향한 전진이라는 의미이며, 개혁이라는 것은 사회 구조의 혁명이라는 뜻이다. 또한, 운동권에 대한 정확한 노선 발전의 모습, 구성원들 간의 내부적 갈등과 헤게모니 쟁탈전, 관련 활동 등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복잡하다. 그렇기에 이들을 살펴보는 첫 출발점으로 최근 사회적으로 중요한 화두가 되는 386 운동권들과 관련된 핵심적 사건들, 이 사건의 관련자들의 현재 모습을 통해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진 운동권들에 대해 먼저 이해해야만 현재의 행동들 또한 이해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 과거의 주요 사건들과 관련자들의 현재를 간략하게 서술함으로써 이해를 돕고자 한다.
사회주의 운동권(이하 운동권)의 역사는 엄밀히 말하면 독립운동 당시였던 1920년대, 사회주의적 단체 조직과 활동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그 이후, 해방과 더불어 각종 사회주의 단체들이 합쳐 남조선 노동당을 결성하고, 이후의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한국 내에서 이들은 대부분 지하 세력화했다. 많은 사람들은 한국전쟁 이후에는 강력한 반공 정책으로 인하여 사회주의 추종 세력들이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민중당 등을 통해 서서히 싹을 틔우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전체 좌익 활동 단체를 어우르게 된 전국연합에서 명예 의장을 맡고 있는 자들이나 기타의 각종 연대 고문을 맡고 있는 자들이 바로 이런 민중당 계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자들이라는 점은 주의 깊게 봐야 할 부분이다.
이러한 사회주의 추종 세력은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이후에는 유신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이론적인 자극과 조직적인 활동에 대해 조언을 해주는 것과 동시에 서서히 그들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0 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각종 운동권 단체들에 영향력을 끼치지 시작했다. 1980년대 초반까지 운동권들은 전체 국민의 정서와 사회적 분위기 등을 감안하여 공개적으로 북한과의 직접적인 교감을 표현하거나 반미 감정을 가지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5.18을 계기로 하여 점점 바뀌기 시작했고, 1980년대 중반, 북한 통일 전선부에서 운영하는 대남 방송인 “한국민주주의민족전선”의 방송으로 주체사상을 학습하고 그 이전의 주류 세력들과는 다른 학습 방법과 투쟁 방법을 제시한 세력들이 나타나면서, 전국 학생 운동권을 단번에 장악했던 것이다. 이들이 지금까지도 학생 운동권뿐만 아니라, 사회운동권에까지 그 영향력을 발휘하는 주체사상파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운동권 내 자료들에서는 1980년 ~ 1983 년을 이념의 성장기, 1984년 ~ 1985년을 이념의 실천 방안 모색과 조직화를 통한 확립기, 1986년 ~ 1987년을 대중투쟁 극대화와 학생조직 활성화, 1988년 ~ 1993 년을 전투적 운동의 쇠멸과 대중혁명역량 강화기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결국,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운동권들은 그 조직력, 자금력, 이론적 토대를 강화하게 되었고, 1970년대의 운동권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운동권 역사를 전체적으로 설명하고 정확한 자료를 찾는 것은 필자에게도 솔직히 무리였다. 때문에, 우선 그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사건들 중에서 일부를 추려내어 해당 사건의 내용과 과정, 관련자들의 당시와 현재 등을 설명하면서 여러분들에게 판단의 근거를 제시하려 한다.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자료는 각종 운동권 단체의 세미나 자료 및 강연 자료, 민주화기념사업회, 성공회대 NGO 자료실, 공안자료, 언론보도, 운동권 내부의 학생운동사 관련 글, 각 해당 인물들의 동정 및 홈페이지다.
그리고, 먼저 이 글을 읽기 전에 여러분들께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운동권에는 親北 세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反김정일로써 북한 체제에는 극렬하게 반대하여 외부에서 볼 때에는 반공주의이면서도 장기적으로는 민중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는 세력 또한 상당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도 사회 곳곳에서 민중혁명에 의한 사회주의 실현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계속) (konas)
이념의 성장기 : 1980년 ~ 1983년, 上編
이 시기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어진 12.12 사태, “서울역 회군”사건, 5.18 사건 이후, 학생 운동권뿐만 아니라. 기존의 국민들도 미국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 시기이다. 그 이전까지 대부분 사람들의 인식은 미국이 자국을 제쳐두고서 라도 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힌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한국의 강력한 동맹국이기는 하나, 미국 또한 엄연히 한 국가로써 자국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과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 사회의 변화, 국제사회의 냉혹함을 깨닫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때 운동권들은 자신들이 미국에 대해 가졌던 환상이 깨진 것을 미국의 탓으로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문에 운동권들이 본격적인 반미, 반제국주의 노선을 견지하고 그 기초가 되는 사회주의 학습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1980년 12월 11일 서울大 '반파쇼학우투쟁선언' 배포 사건(일명 霧林 사건)
1980년 5월 서울역 회군 사건 이후 학생들 사이에서는 기존의 운동권 지도세력에 대한 비판과 이념 투쟁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에 운동권 지하 조직인 “한국사회연구회”라는 지도세력은 민중역량의 부족을 혁명의 실패 원인으로 꼽은 반면, 반대하는 학생들은 전면적인 사회혁명을 통해 투쟁을 완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노선 차이로 인해 양자 간의 노선 투쟁이 심해졌다. 이 시기에 서울大 교내 학생식당과 도서관 계단에「 반파쇼 학우 투쟁」,「반파쇼 투쟁」등의 구호가 적인 유인물을 뿌려져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검거된 김명인이 수사 과정에서 운동권을 지도하는 지하조직이 있다고 진술하면서 대대적인 수사가 이루어졌다. 이때 경찰은 최초로 조직적인 학생 운동권 활동을 접하게 되었고, 이들이 김명인의 자백 이전에는 전혀 알 수 없었으며, 그 수사 과정에서도 전체를 수사하는데 있어 안개와 같이 실체를 알 수 없는 조직이라는 의미로 霧林 사건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사건으로 서울대 교내 이념써클들이 조사를 받고 78명이 연행 당했다.
이 사건으로 김명인(국문 4), 박용훈(동양사 4), 현무환(국문 4), 허헌중(정치 4), 고세현(국사 졸), 남충희(철학 4), 남명수(언어 4), 김희경(교육 4), 윤형기(토목 4), 최영선(사회 4) 등이 구속되었다.
현재 김명인은 문학평론가로 활동 중이며, 고세현은 창작과 비평 사장, 현무환은 웅진 미디어 사장, 최영선은 한겨레신문 교육사업단장, 허헌중은 농어촌사회연구소 부소장, 윤형기는 사설 학원가의 인기 수학강사다. 이 사건은 386 운동권 지하조직이 처음 공개된 사건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81년 7월 23일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국민주학생연맹 사건(일명 學林 사건)
위의 霧林 사건에서 나타나듯, “서울역 회군”에 반대한 일부 운동권들은 기존의 학생 운동권 지도부의 노선이 너무도 무력하고 현실에 타협한다고 판단, 새로운 노선의 조직을 만들고자 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이선근은 흥사단 아카데미의 선배인 이태복과 새로운 종류의 학생운동권조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1981년 2월 27일 전국민주학생연맹이 탄생했고, 노동운동의 일환으로 전국민주노동자연맹이 결성되었다. 이 조직은 하부 조직이 상부 조직과 중앙 위원회를 알 수 없도록 점 조직 형식을 통해 비밀리에 유지되었으며, 그 근간은 이선근과 이태복이 활동했던흥사단아카데미의 전국적 연합인 연합서클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조직화됐다. 그 결과 3 개월 동안에 무려 8 차례의 시위가 일어났고, 조직원이던 김태훈이 서울大 시위 중 투신자살하는 결과까지 초래했다.
한편, 경찰은 이전 남민전 사건 관련자들의 사회운동세력 조사 보고서를 기초로 이미 내사 하던 중 이 사건이 발생하자 이태복, 이선근등이 이 사건들과 연계되었을 것으로 보고 이들을 검거하였고 결국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 사건은 학생들의 조직이라는 의미에서 學林 사건으로 불린다. 이후,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부림사건, 아람회 사건, 금강회 사건등이 발생하는데 이들은 모두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 당시 사건 관련 구속자들은 다음과 같다.
이태복(무기징역), 양승조(징역, 자격정지 2년 6월), 신철영(징역 2년, 집행유예 4년), 김철수(징역, 자격정지 2년 6월), 유해우(징역 2년, 집행유예 4년), 김병구(징역 2년, 집행유예 4년), 박태연(징역 2년, 집행유예 4년), 송병춘(징역, 자격정지 2년), 송영인(징역, 자격정지 2년), 노숙영(징역, 자격정지 2년 집행유예 4년), 최규엽(징역, 자격정지 2년), 엄주웅(징역, 자격정지 2년), 오상석(징역, 자격정지 2년), 정경연(징역, 자격정지 2년 6월), 이선근(징역, 자격정지 7년), 박문식(징역, 자격정지 5년), 박성현(형집행 면제, 소취하), 이덕희(징역, 자격정지 3년), 홍영희(징역, 자격정지 2년 6월), 윤성구(징역, 자격정지 2년), 민병두(징역, 자격정지 2년), 김창기(징역, 자격정지 1년 6월), 최경환(징역, 자격정지 1년 6월), 김진철(징역, 자격정지 1년 6월), 손형민(징역, 자격정지 1년 6월), 이종구(징역 10월)
이들 중 李泰馥(이태복)은 1988년 10월 가석방되어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이하 全民聯) 편집실장을 거쳐 DJ 정부 시절 청와대 노동복지수석비서관과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고, 현재 국민大와 한서大 초빙 교수를 맡고 있다. 閔丙梪(민병두)는 이 사건 이후에도 1986년 공개 운동 조직인 民民鬪를 지도하던 제헌의회(CA)그룹을 조직하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징역 5년을 구형 받았다. 그는 全民聯을 끝으로 운동권 생활을 일단 마무리하고 1991년 문화일보에 입사, 워싱턴 특파원과 문화일보 정치부장을 지냈다. 현재 열린당 기획위원장으로 소위 개혁 입법에 대한 전반적 기획조정을 맡고 있다.
지난 17代 총선 당시 열린당의 전체적인 선거 전략을 이끈 바 있다.이선근은 이후에도 위장 취업 등을 통해 노동 운동을 했으며, 현재는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장으로 민노당의 부동산 정책을 맡고 있다. 한 편,박성현은벤처 기업을 운영하고 있으며, 박문식은 공인회계사로 활동 중이다.
1981년 7월 7일 양서협동조합 독서 토론회 사건(일명 釜林 사건)
전국민주학생연맹·전국민주노동연맹 사건(일명 學林 사건)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을 당시, 부산을 중심으로 운동권들이 주로 모이던 양서협동조합 회원들이 정기적으로 모여「한국경제의 실상과 허상」,「제3세계와 종속이론」등을 읽고 토론한 것이 적발됐다. 경찰은 이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양서협동조합이라는 조직 자체가 사회주의를 동경하며, 반국가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판단, 국가보안법, 집시법, 보안법 위반으로 7월 7일부터 9월 7일 사이에 21명을 구속했다. 이 사건에서 구속된 사람들이 주로 부산大 졸업생과 재학생이어서 釜山의 學林이라는 의미로 「釜林 사건」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 편, 이 사건과 관련하여 김광일 변호사의 소개로 무료변론을 맡게 된 노무현 대통령이 이호철의 변호인을 맡은 것이 인연이 되어 운동권 변호사가 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관련자는 송병곤(부산大 졸, 징역, 자격정지 3년), 이상록(부산大 졸, 징역, 자격정지 6년), 고호석(부산大 졸, 징역, 자격정지 6년), 노재열(부산大생, 징역 자격정지 2년 6월), 이진걸(부산大생, 징역, 자격정지 1년6월), 전중근(공원, 징역, 자격정지 1년6월), 김재규(부산大 졸, 징역 자격정지 1년 6월), 장상훈(부산大 졸, 징역,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3년), 박영옥(부산大 졸, 징역,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3년), 송세경(서울大 졸, 징역, 자격정지 3년), 설동일(서울大, 징역, 자격정지 2년 6월), 이상경(부산大, 징역, 자격정지 2년), 최준영(부산大 졸, 징역, 자격정지 2년6월), 윤연희(부산大 졸, 불구속 기소), 주정민(부산大 졸, 징역, 자격정지 2년6월) 이 외에 정귀순(징역 8월, 집유 2년), 오흥민(기소유예), 이호철(징역1년), 설경혜(선고유예), 허진수 등이 있다.
이들 중 김재규는 현재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을 맡고 있고, 노재열은 민노총 산하 금속노조연맹 정책기획실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호철은 배재 여행사를 경영하다가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민정비서관을 지냈다. 이진걸은 釜山노동단체협의회에서 10 여년간 활동하다 현재는 자영업을 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현재는 생업에 종사하고 있으나, 일부는 노사모 등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활동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konas)
이념의 성장기: 1980년 ~ 1983년, 下編
5.18 이후에도 이어진 운동권 지도부 간의 사상투쟁 등 무기력한 행태에 대해 불만을 느끼던 문부식은 5.18의 책임은 美國에 있다고 보고, 이에 대한 경고성 시위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때 5.18 관련으로 수배 중이던 김현장을 원주에서 만나 1980년 12월에 있었던 光州 美 문화원 방화 사건에 대해 듣게 되었다. 문부식은 美國에게는 이와 같은 방식의 경고가 필요하다고 생각, 여자 친구 김은숙, 후배 등과 함께 모의, 1982년 3월 18일 釜山 美문화원 건물을 방화하고 유나 백화점 등 도심에서 전단지를 배포했다. 이 사건으로 1층 도서관 열람실에서 공부하던 동아大 장덕술이 중화상을 입어 사망하고 김미숙 등 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김현장(무직, 사형),문부식(고신大 3 제적, 사형), 김은숙(고신大 3 제적, 징역 10년 자격정지 7년), 유승열(부산大 공대 3, 징역 자격정지 7년), 박원식(고신大 의예과 2, 징자 7년), 최충언(고신大 의예과 2, 장7년 단5년 자7년), 이미옥(고신大 의예 2, 징10년 자7년), 최인순(부산大 약대 3, 징10년 자7년), 김지희(釜山여대 3, 징10년 자7년), 박정미(釜山여대 3, 징자 3년 집유 4년), 최기식(신부, 징 3년, 자 2년), 문길환(원주교구 성당관리인, 징자 3년 집유 4년), 김영애(치악산 서점 경영, 징자 3년, 집유 4년), 허진수(기장청년회부회장, 징2년), 김화석(부산大 공대 제적, 징3년), 이창복(교회사회선교협 회계, 징자 1년 집유 2년) 가 검거되었다.
현재 이 사건 관련자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사건의 핵심인 문부식은 당대비평의 주간 겸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이 사건에 대한 후회와 함께 죄책감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밝혀 운동권들에게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최충언, 이미옥은 의사가 되었고, 최인순은 약사가 돼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회장을 맡고 있다. 김은숙은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고, 김지희와 박정미는 평범한 가정 주부로 생활하고 있다.
김영애와 김현장은 1984년 결혼해 光州에서 케터링 사업을 하며 살고 있고, 박원석은 개인 사업을, 류승열은 무역업으로 하며 생활하고 있다. 또한, 최기식 신부와 문길환은 원주에서 천주교사회복지재단에서 사회복지 사업을 하고 있다. 허진수는 경남도의원을 지냈고, 지금은 개인 사업을 하고 있다. 관련자들 대부분은 민주화를 지향한다면서, 방화로 무고한 사람의 인명을 빼앗은 점 등으로 인해 당시의 사건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1983년 10월 29일 민주화운동청년연합(民靑聯)-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民統聯)사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하 民靑聯)은 1983년 9월 30일 70년대 학생운동권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창립되었다. 民靑聯은 기관지 「민주화의 길」,「민중신문」 등의 간행물을 발행하며 선전 활동을 했다. 1984년 6월말 民靑聯을 비롯한 운동권 단체들은「민중민주운동협의회(民民協)」를 결성했다. 民民協은 이후 민주·통일국민회의와 통합하여 1985년 3월 29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民統聯)'을 창립하게 되었다. 1985년 5월 9일 종로2가에서 民靑聯은 청년단체, 전국학생총연합(의장 김민석,서울大 총학생회장)과 함께 「光州학살정권퇴진을 위한 국민대회」를 주최했다. 이에 당국은 民靑聯을 학생운동과 민추위사건(「깃발)사건)의 배후로 지목하여 간부들을 구속▪수사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사람들로는김근태(民靑聯 전의장),이을호(民靑聯 상임위부위원장), 김희상(民靑聯 대변인), 김종복(民靑聯 청년부장), 최민화(民靑聯 부의장), 권형택(民靑聯 사회부장), 연성수(民靑聯 상임위 부위원장), 한경남(民靑聯 의장), 김희택(民靑聯 부의장), 천영초(民靑聯 상임위 위원장), 이범영(民靑聯 집행국장), 박우섭(民靑聯 운영위원장), 윤여연(民靑聯 사무국장), 서원기(民靑聯 집행국장) 등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김근태 전 의장에 대한 고문은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고 이로 인해 민주화 실천가족 운동협의회(민가협)이 생겨나게 된다. 사건의 관련자 중 金槿泰(김근태. 58) 보건복지부 장관은 출소 후 1990년 全民聯 정책기획실장 및 집행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민자당 창당반대 시위 주도, 全民聯 결성선언문 작성으로 다시 한 번 국가 보안법, 집회 및 시위 관련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 받았다. 정계에 입문한 후, 새정치 국민회의 부총재, 새천년 민주당 지도위원, 열린당 원내대표를 지냈다. 入閣 前 국가 보안법 폐지운동을 주도했고, 韓總聯 합법화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이라크 파병반대에도 서명했다.
2003년 10월에는『宋斗律(송두율)에 대한 공격은 舊시대적 매카시즘』이라며,『본인의 소원대로 조국에서 후학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金 장관의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숙부 등이 월북했다. 崔圭成(최규성) 열린당 의원도 1986년 서울 民統聯 부의장 시절, 국가 보안법 상 범죄은닉 혐의로 구속,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서울민족민주운동 협의회 공동의장, 全民聯 상임집행위원, 全國聯合 제도정치위원장 등을 거쳐 새정치 국민회의 창당 발기인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열린당 사무처장, 국민정치연구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국가 보안법 폐지를 지지하고 있다.
그 이외의 사람들은 민청련이 사라진 현재, 민청련 동지회를 통해 꾸준히 교류하고 있다. 또한, 이 당시 민청련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에는 張永達(장영달) 열우당 의원도 있는데, 장 의원은 국민대 행정학과 출신으로 1974 년 한국기독학생회 총연맹 활동 시절, 民靑學聯 사건에 연루되어 긴급 조치법 위반으로 구속, 징역 7 년을, 1975 년 긴급 조치법 9 호 위반으로 징역 1 년, 자격정지 1 년을 선고 받았다. 출소 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부의장 및 상임 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民統聯 총무국 국장, 사무국 차장으로 활동하던 시절, 인천 5.3 사건 관련 국가 보안법 및 집회 및 시위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평민당 13 대 총선대책본부 기획조정실 실장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평민당 부대변인, 신민당 대회협력위원회 부위원장, 민주당 통일국제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거쳐 국민회의 국회의원, 환경운동연합 국정정책위원회 위원 및 간사, 국민회의 원내 수속부총무, 국민회의 안보특별위원회 위원장, 새천년 민주당 정책위 부의장, 21 세기 동북아 평화포럼 대표의원,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장 등을 거쳐, 현재 한-일 의원연맹 부회장을 맡고 있다. 작년 6월, 북한의 NLL 침범과 관련, “꽃게철 만이라도 NLL 부근에 공동어로수역을 설정하자.”는 성명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 이외에도 이해찬 국무총리, 이회창 총재 20만달러 수수설로 구속되어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은 설훈前 의원,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대변인을 한 박선숙, 청와대 춘추관장을 지냈던 최경환, 박우섭 인천 남구청장,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을 지낸 장준영, 민주평통 사무처장으로 발탁된 김희택, 송두율 초청으로 조사를 받았던 나병식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부이사장, 한홍구성공회대 교수, 조성우 민화협 대표 등이 이 민청련 회원 출신들이다. (konas)
이념의 실천 방안 모색과 조직화를 통한 확립기 : 1984년 ~ 1985년, 上
1984년 9월 17일 서울大 민간인 감금고문 사건
1984년 9월 17일 서울大 복학생들은 9월 17일 교내에서 80여명의 회원과 50여명의 재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복학생협의회 창립 대회를 열고, 78학번 유시민을 집행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이후 일련의 민간인 감금고문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괄호 안은 감금 기간)
① 임신현 사건(9.17∼18):평소에 서울大를 선망하던 임신현은 서울大에 재학 중인 친구를 만나러 갔으나 친구는 만나지 못하고 복학생협의회의 술자리에 우연히 어울리게 된 후, 자신을 '78학번 공법학과 출신으로 소개했다. 그러나, 유시민등이 78학번에는 공법학과가 없었다며 기관 정보원으로 의심, 학생회 사무실로 끌고 가 다음날 오후 8시까지 기관 정보원임을 자백하라며 감금▪폭행한 사건이다. 임신현은 학교 직원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형이 고소하겠다고 하자 26시간만에 풀려났다.
② 손형구 사건(9.21∼26): 손형구는 학력고사성적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했으나 성당 교우들에게 서울大 법대에 입학했다고 속였다가 돌이키지 못하고 가짜 서울大생 행세를 했다. 이후 40여 차례나 서울大에 출입했고 사건당일에도 법대 앞에서 배회했다 손형구는 9월21일 오후 1시쯤 법대 사무실 앞 의자에 앉아 있다가 김진욱 등 2~3명으로부터 신분을 조사 당하고 서울大 학생이 아님이 드러나자 학도호국단 사무실로 끌려가 감금당했다. 유시민, 백태웅, 백기영, 윤오중, 오재영, 김도인 등으로부터 기관 정보원 추궁 받았다. 손형구가 기관 정보원이라는 명확한 물증이 발견되지 않자, 유시민, 백태웅 등은 신림동 소재 여관으로 자리를 옮겨 손형구를 감금했다가 다시 총학생회장실에 감금하는 등 약 5일 동안 불법 감금했다. 결국, 학교 직원의 연락을 받고 어머니와 삼촌이 왔으나, 석방해 달라는 요청이 거절당했다. 이에 가족들은 학생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구출해 냈다. 이후 손형구는 강박증세로 인한 정신분열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③ 전기동 사건(9.26-27): 전기동은 1982년 대입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서울법대에 지원했다가 불합격한 후 방송통신大에 입학했다. 그 해부터 사법고시 준비를 위해, 도움을 받던 교수로부터 고시공부에 필요한 참고도서를 추천 받고자 서울大에 가끔 출입해오고 있었다. 전기동은 26일 오후 4시30분쯤 독도 문제와 관련된 국제법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 서울大에 잠시 들어갔다가 『잠깐 볼 일 있다』는 학생 7~8명에 의해 학생회관 3층 총학생회장실로 끌려갔다. 이곳에서 유시민, 백태웅, 윤오중 군등이 전氏의 소지품을 뒤져 주민등록증과 방송통신大학증을 확인했다. 학생들은 『너 소속이 어디냐, 기관원이지』하며 추궁했고, 전氏가 계속 『방송통신大학생이다, 왜그러냐?』고 하자 『안되겠다』 면서 오후 5시쯤 총학생회장실과 같은 층에 있는 서클 연합회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이곳에서 4~6명의 학생이 플래카드로 사용했던 나일론천을 찢어 전氏의 눈을 가리고 의자에 앉혀 양손을 의자 뒤로 묶은 다음 구타하면서 자백을 강요했다. 전氏가 자백을 완강히 거부하자 학생들은 다시 전氏를 화장실로 끌고 가 자갈과 숟가락으로 입을 벌려 주전자로 입과 코에 물을 퍼붓고 세면대 물통에 얼굴을 쳐박아 숨을 못 쉬게 하는 등 고문을 계속하였다. 그래도 자백을 하지 않자 복도로 끌어내어 시멘트 바닥에 꿇어앉힌 뒤 양 무릎 안쪽에 각목을 끼워놓고 위에서 밟는 등 고문을 계속했다. 다음 날인 27일 밤 10시까지 29시간 반 동안 이 같은 감금 폭행을 해 전氏가 실신상태에 빠지자 학생들은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학교직원들에게 연락, 직원3명이 들것으로 전氏를 앰뷸런스에 실어 관악병원에 입원시켰다. 병원 측은 혈변 증세로 전氏의 상태가 악화되자 28일 오후 서울大병원으로 옮겼다.
④ 정용범 사건(9.26-27): 정용범은 7급행정직 공무원시험준비를 위해 서울大에 출입하면서 공기 좋고 조용한 연못 앞에서 수험공부를 했으며, 지난7월부터 3차례정도 서울大에 출입했다. 9월26일 오후 3시 30분쯤 정氏가 서울大 연못 앞 벤치에서 수험서를 보고 있는데 학생2명이 다가와 『여기 어떻게 왔느냐, 잠깐 좀 가자』면서 학생회관 3층에 있는 복학생협의회 사무실로 끌고 갔다. 서울大 학생이 아님을 안 유시민, 백태웅 등 학생 5~6명은 광목천으로 눈을 가리고 팬티만 남긴 채 옷을 벗기고 기관 정보원이 아니냐고 추궁했다. 학생들은 다시 정용범에게 학생훈련복을 입혀 손을 뒤로 묶어 사무실 바닥에 꿇어 앉히고 자백하라며 주먹과 발길질로 다음날 새벽 4시까지 가슴 등 다리를 구타하였다. 유시민 등은 이곳에서 폭행을 지시한 후 27일 오전 5시30분쯤 철야 조사한 것을 확인하는 등 감금폭행을 주도했으나 정보원이라는 사실이 끝내 확인되지 않자 27일 낮 12시30분쯤 정氏를 버스정류장까지 안내해 풀어주게 했다.
이 사건으로 유시민(경제 4, 복학생협의회장, 징역 1년 6월), 백태웅(공법 4,학도호국단장, 징역 1년 6월), 윤호중(철학 4, 징역 1년 6월), 오재영(인류 4, 징역 2년), 신윤남(인문계 1년 복학생, 유치장에서 정신이상으로 국립정신병원으로 이감) 등이 폭력 혐의로 구속되었고, 단순 참가자들은 대부분 공소 외 혐의로 훈방되었다.
이 사건의 관련자인 尹昊重(윤호중)은 현재 열우당 국회의원으로 사건 이후, 평화민주당 기획조정실 기획위원, 한광옥 의원 비서관 등을 거쳐 국민회의 부대변인, 대통령비서실 민정국장, 대통령 비서실 정책기획국장을 지냈다. 또한, 柳時敏(유시민)도 현재 열우당 국회의원으로 졸업 후「창작과 비평」誌에 소설 『달』로 데뷔했으며, 李海瓚(이해찬) 의원 보좌관, 한겨레신문 독일통신원, 성공회大 교양학부 겸임교수, MBC 100 분 토론 진행자,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개혁국민정당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현재 열우당 제4정책 조정 위원장을 맡고 있다. 현재 그의 친누나인 유시춘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또 다른 관련자인 백태웅은 이후에도 社勞盟 사건과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었으나, 1999년 사면복권되어 유학,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 대학 조교수를 하다가, 현재는 국제 변호사로 국내에서도 활동 중이다. 한 편, 이 사건의 피해자들 중 전기동을 제외하고는 대인기피증 등 극심한 후유증을 보이고 있다. 사건 피해자 중 전기동은 유시민, 윤호중 두 의원의 총선 자료집 중에서 서울大 민간인 감금고문 사건을 서울大 프락치 사건이라 부르고 민주화 운동이라고 거짓말 한 것을 고소했고, 이에 검찰은 유시민 의원을 선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기소, 벌금 100 만원을 구형하고, 재판을 진행 중이다.
2021.10.7.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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