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획] 운동권의 실체를 밝힌다.(전경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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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1-10-17 10:19 조회2,52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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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6.1.16.
1985년 5월 23일 서울美문화원점거농성사건
▲ 1982년 3월18일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는 부산 미 문화원에서 소방대원들이 불을 끄고 있다. 성조기가 건물 위 오른쪽 화염 속에서 펄럭이는 모습이 보인다. 80년대 전국의 미 문화원에서는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추궁하는 재야와 운동권 학생들의 반미 시위가 잇따랐다.
운동권은 원래 美國이 자신들의 행위를 무조건 지지할 것이라고 기대하다 1980년 5.18 이후 美國이 적극적인 개입이나 지원을 하지 않자, 美國은 군사정권을 지원하는 세력이자, 민주화의 적대 세력이라고 단정, 反美 활동을 하게 된다. 이후, 1980년 12월 9일 光州 美문화원 방화사건, 1982년 3월 18일 釜山美문화원 방화사건, 1982년 4월 22일 강원대생들의 성조기소각사건, 1983년 9월 22일 대구美문화원앞 폭발사건, 1985년 4월 9일 釜山 美영사관투석사건과 같은 일련의 反美활동으로 이어지고, 그 맥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全學聯의 결성 이후, 1985년 5월 23일 서울大, 고려大생 등 대학생 73명이 서울 중구 소재 美國문화 2층 도서관을 점거하고 3일간 철야농성을 벌인 사건으로 19명이 구속기소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全學聯과 그 지하지도조직인 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투쟁위원회, 이른바「三民鬪(삼민투)」라는 학생운동조직이 여론에 관심거리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함운경(서울大 三民鬪위원장) 등 25명이 구속되고 43명이 구류 처분을 받았으며, 5명은 훈방조치됐다.
이후 사건의 주동자인 함운경은 全國聯合 중앙위원 및 정치위원,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 기획이사 등을 지냈으며, 1995년 부여간첩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지난 17代 총선 당시 군산 지역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낙선했고, 현재는 열우당 산하 재단인 열린정책연구원 교육연수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許仁會(허인회)는 총선 낙선 이후 열우당 청년위원장을 맡고 있으며,鄭泰根(정태근)은 민가협 간사 등을 거쳐 한나라당 성북갑 지구당 위원장을 맡고 있다. 高鎭和(고진화) 한나라당 의원은 全民聯 기획위원, 민주연합청년회 회장 활동을 하다 민주당 기획조정실 전문위원, 민주당 중앙위원,李富榮(이부영)민주당 최고위원 보좌관을 거쳐 17代 총선에서 당선, 한나라당 院內 副대표까지 맡았다가 탈당, 현재 열우당 의장으로 있다. 신정훈 現 나주 시장도 三民鬪 위원 출신이다. 그 외 장영승은 벤처기업 레츠 사장으로 지내고 있으며, 이강백은 시민단체「아름다운 가게」의 사무처장을 맡고 있다. 한편, 삼민투와 관련해서는,姜琪正(강기정)열우당 의원도 1985 년 6 월, 전남大 민중-민주-민족 투쟁위원회(이하 三民鬪) 위원장으로 4ㆍ19 기념 시위 관련, 폭력 시위와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돼, 징역 7 년, 자격정지 5 년을 선고 받았었다. 이후, 빛고을 새날청년회 회장, 북한동포돕기 범시민 운동본부 사무처장, 민주개혁 국민연합 광주본부 사무국장, 5ㆍ18 시민봉사단 「오월의 빛」단장, 아파트 공동체 연구센터 소장, 「바른 정치와 통일을 여는 시민의 힘」대표를 거쳤다. 17代 총선에서 열우당으로 光州 북구 甲에서 당선되었다. (konas)
이념의 실천 방안 모색과 조직화를 통한 확립기: 1984년 ~ 1985년, 下
1985년 6월 1일 구로지역 연대 파업 투쟁
1980년대 중반 구로지역은 대부분 수출을 위한 경공업제품을 생산하던 곳이다. 이 지역 기업들의 대부분은 당시 저임금, 장시간 노동, 관리직과의 차별 대우 등이 존재하였다. 이에 대해 정부는 월 10만원 미만의 저임금 해소를 위해 부당한 대우를 하는 기업에 대해 강력한 단속을 펴겠다고 밝혔지만, 이들 사업장의 급여 수준은 정상 근무 시 월 10만원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열악한 노동환경이 사회혁명에 필요한 노동자 세력을 끌어들이는 데 좋은 환경임을 인식한 운동권 지도부는 노동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소위 위장취업을 통해 운동권 출신들이 노동자로 들어가 노조 결성을 시도했다.
참고로 현 정치권에는 이목희 열우당 의원, 노영민 열우당 의원, 백원우 열우당 의원, 송영길 열우당 의원, 신계륜 열우당 의원, 우원식 열우당 의원, 이화영 열우당 의원, 심상정 민노당 의원, 노회찬 민노당 의원, 조승수 민노당 의원 등이 직업으로써의 노동이 아닌 사회운동으로써의 노동을 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결국, 이러한 상황을 개선할 의사도 노력도 없었던, 구시대적 기업정신을 지닌 기업들이 노조 활동을 거부하고, 한편에서는 사회주의적 사고를 주입함으로써 노동자들의 불만은 급속히 증가하였고, 동시다발적으로 노조가 결성되는데 그 대표적인 시기가 84년 여름이다. 이들은 비슷한 근로조건과 노조결성 시기, 노동운동이 유행하면서 유입된 학생출신의 위장취업자 증가 등으로 인해 노조 결성은 물론, 노조 간의 교류와 연대를 강화해 왔으며 85년에 임금인상을 위한다는 핑계로 최초의 연대 파업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1985년 6월 22일 오전 11시 경찰은 대우어패럴 노조 위원장 김준용, 사무국장 강명자, 여성부장 추재숙을 임금인상 투쟁 때 파업농성을 주도하며 노동쟁의조정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혐의로 구속하고 조합간부 8명을 불구속 입건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함께 연대했던 노조들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위원장 연행 소식을 전해 듣고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은 즉각 작업을 중단한 후 1백 여 명이 총무과로 몰려가 고발 취소를 요구하는 농성을 전개하였다. 다음 날인 6월 23일 대우어패럴 외에 가리봉전자, 효성물산, 선일섬유, 청계피복 노조 위원장들이 모여 24일부터 동맹파업에 들어갈 것을 결의하였다. 6월 24일 오전 8시 경 대우어패럴 노동자 350여명이 파업을 시작한 것을 신호로 오후 2시 효성물산 노조원 4백 여명이 파업에 동참하였고 같은 시간 가리봉 전자 노조원 5백 여명, 선일섬유 노조원 70여 명 등도 파업에 돌입하였다. 6월 25일에는 남성전기 조합원 3백 여명이 오후에 농성을 벌이고 세진 전자 노조원 250여 명, 룸코리아 1백 여명이 지지 철야농성을 하는 등 연대투쟁은 7개 업체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학생 및 재야의 지지도 이어졌다.
즉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등 22개 운동권 단체에서 지지 농성이 있었고 6월 26일 오후에는 서울대생 2명이 '구속노동자 석방'을 요구하며 대우어패럴 맞은 편 협동봉제 공장에 올라가 지지 구호를 외치는 것을 비롯해 학생들의 지지 시위가 이어진 것이다.
6월 28일에는 부흥사노조원 120여명이 연대파업에 돌입했으나 강제해산됐다. 한편 6월 28일에는 대학생 18명이 농성장에 합류하는 등 농성에 대한 지원이 거듭되자 마침내 6월 29일 회사와 경찰이 대우어패럴 농성장에 투입되어 농성을 강제해산시킴으로써 사건은 막을 내렸다.
당시 이 사건으로 김준용 등 노동자 다수와 노철호 등 학생 다수가 구속되었다. 한 편, 이 사건으로 유명해진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現 민노당 의원인 沈相貞(심상정)이다. 심 의원은 서울대 역사교육과 출신으로 서울대 여학생회 결성을 주도했다.
1980년부터 구로 공단에 취업, 노조 결성 및 쟁의 혐의로 수배를 받았으며, 1985년구로동맹 파업과 관련하여 쟁의조정법위반, 제3자금지법위반, 사문서위조, 방화, 폭력, 집단방화, 집단폭력사주, 집시법위반, 국가보안법위반 등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후, 서울노동운동연합중앙위원장, 전국노조협의회 쟁의국장 및 조직국장, 민주금속연맹 사무처장을 거쳐 민주노동당 당대회 부의장, 민주노동당 대의원 겸 중앙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7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당선되었다. 현재 민주노동당 의원단 수석 부대표를 맡고 있으며 주로 당의 경제정책을 입안하고 있다.
1985년 7월 20일 서울大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깃발사건)
민주화추진위원회(이하 민추위)사건은 1985년 10월 29일 검찰이 서울大 학생운동의 비공개 지도조직인 민추위를 이적단체로 규정, 관련자 26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고 3명을 불구속 입건, 17명을 수배한 사건으로 「깃발」 사건으로 불린다. 「깃발」은 운동권 내부의 운동 노선에 대한 평가와 반대파 운동권들과의 이념 논쟁을 위한 홍보책자였다. 「깃발」은 학생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이에 따라 당국은 「깃발」수사전담반을 설치하는 한편 서울 美문화원 점거 농성사건이 발생하자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사건을 담당하게 된다. 깃발 전담반이 설치된 후 10개월 만에 주요간부가 체포되고 다시 한달 반쯤 후에 지도선이 체포되었다.
민추위는 노동문제투쟁의원회, 민주화투쟁위원회, 홍보위원회, 대학간연락책등 4개의 산하 기구를 두고 각 대학의 三民鬪委 결성, 서울美문화원 점거농성등을 주도하는 한편,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 대우어패럴 동조시위 등 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검찰로부터「자생적 사회주의자」들로 규정된 이 조직은 한국사회변혁에 대한 사회구성체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박문식(철학4), 문용식(국사 3휴), 안병룡(국사4휴), 황인상(무역졸), 이종원(지리4), 민관홍(인류4), 윤성주(동양사 3년), 이종원(지리4휴학), 조경애(의류과 졸), 이홍균(인류4년), 성명섭(공법과졸), 김태룡(경영4년), 민병렬(사회4), 윤성주(동양사3), 이홍구(공법3), 김희갑(동양사2), 김재광(영어교육4), 박충렬(법학졸), 장혜경(중문4), 김찬(국사3 제적) 김신훤((정치4), 유경완(무역4), 김형섭(농대졸), 석미주(종교3 제적), 황경희(경북대 불문과 졸) 등이 구속되었고, 김근태 전民靑聯 의장이 문용식에게 민족민주혁명 이념교양을 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들 중 박문식은 공인회계사와 21세기 프론티어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황인상은 변호사로, 문용식은 나우콤의 사장과 김근태 계열과 관련있는 한반도 재단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1985년 11월 20일 제헌의회(Constituent Assembly: CA)그룹사건
1986년 5월을 전후하여 제헌의회 그룹(CA : Constituent Assembly)은 「파쇼하의 개헌반대,혁명으로 제헌의회」라는 표어를 내걸고 그 모습을 드러냈다. CA 그룹은 「헌법제정민중의회」소집투쟁을 주장하면서, 산하 학생조직으로 민족민주학생투쟁위원회(이하 民民鬪)계열을 지도했다. 民民鬪계열은 1986년 5월 전국반제반파쇼민족민주학생투쟁위원회(全民學聯)을 결성하여 1986년 여름 방학을 전후하여 신민당사농성투쟁, 성남공단지역 선전작업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CA그룹은 한국 사회를 제국주의의 신식민지 간접통치방식 사회로 간주했고, 종속성을 특수성으로 하면서 자본주의의 압축적 발전의 길을 걸어온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규정하였다.
이 사건으로 최민(서울大 78, 징역 7년), 윤성구(서울大 78, 징역 6년), 민병두(성균관大 78, 징역 5년), 김철수(서울大 75, 징역 5년),김성식(서울大77, 징역 5년), 유강근(서울大79, 징역 4년), 이선희(서울大 79, 징역 3년), 강석령(서울大79, 징역 5년), 김현호(성균관大79, 징역 7년), 김찬(성균관大77, 징역 2년), 한승권(서울大81, 징역 1년 6월), 이호균(서울大 78, 징역 2년), 차호정(서울大 79, 징역 1년 6월), 김옥수(한국한국外大 81, 집행유예), 하윤숙(서울大 79, 집행유예) 등이 구속되었다. 이들 중 CA 그룹의 핵심이론가라는 최민은 현재 열린당 중앙위원이며 장애인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민병두는 열린당 의원이자 정책위원장을 맡고 있다(學林 사건 참조) (konas)
2021.10.17.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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