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획] 운동권의 실체를 밝힌다.(전경웅)-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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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1-10-17 11:22 조회2,69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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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적 운동의 쇠멸과 대중혁명역량 강화기 : 1988년 ~ 1993 년, 下
1987년 11월 ~ 현재,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회 관련 사건
1980년부터 1986년 10월의 건국大 愛學鬪 사건에 이르기까지 운동권은 전국적 조직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우여곡절 끝에 결성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全大協)는 이후 학생운동권의 핵심적 역할을 했고, 1993년 민선 대통령 선출 이후에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韓總聯)으로 변신하여 학생 운동권의 주류 세력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1987년 결성 이후 지금까지 수 많은 공안 사건들과 관련되었으며, 凡民聯, 凡靑學聯과 같은 사회 운동권 단체들과도 연계하는 것은 물론, 지하조직을 통한 이념 지도 또한 계속했다. 全大協 ▪ 韓總聯 관련 사건으로 구속된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전문환(前 서강大 총학생회장), 홍순철(서총련 서부지구정책위원장, 연세大 국문과졸), 송갑석(全大協 前 의장), 김종식(한양大 총학생회장, 全大協 의장), 임헌태(연세大 총학생회장), 표홍철(서강大), 이동균(대책회의 정책기획국장), 한상열(대책회의 상임대표), 정원택(한국外大 총학생회장), 강희남(목사, 全民聯 고문), 배다지(釜山 민련의장), 문정현(신부, 정의구현사제단), 한철수(全大協 조국통일위원장), 성용승(全大協 축전대표, 건국大 행정 4), 박성희(全大協 축전대표, 경희大 작곡 4), 한철수(학추위 위원장, 경희大 총학생회장), 허동준(중앙大 全大協 대변인), 하태경(서울大 서총련 조통위 연대사업담당), 손성표(고려大 서총련 사무국계열부문 담당), 김시몽(목포대 前 총학생회장), 신현욱(한양大 全大協의장 수행비서), 정미연(全大協 축전예비대표, 전남大 회계 4), 이관복(凡民聯 남측본부), 김쾌상(凡民聯 남측본부), 송규봉(全大協 정책위의장, 경희大 국문 4), 최정봉(前 서강大 총학생회장, 경영학과 4 휴학), 손종국(全大協 의장 경호원, 전남大), 박종렬(前 全大協 정책실장, 연세大 경제 4 제적), 신동호(全大協 문화국장, 한양大 국문과 졸), 태재준(全大協의장, 서울大 총학생회장), 김영하(全大協 조국통일위원장, 중앙大 총학생회장), 이상현(건국大 총학생회장), 김호상(조국통일위원회 위원장), 이명석(조선大 정외 2), 송진환(남총련의장, 전남大 총학생회장), 우상호(범민족대회 추진본부 간부), 김정기(한양大 총학생회장), 김재용(韓總聯 의장, 한양大 총학생회장), 김병삼(조국통일위원회 위원장, 연세大 총학생회장), 김현준(韓總聯의장, 부산大 총학생회장), 양동훈(조통위 위원장, 조선大 총학생회장), 김연식(교지 민주조선 前편집위원, 조선大 환경공학 3), 이현화(조선大 생물 3), 태광호(전북大 화학 졸), 서일석(조선大 前기공학 4), 이종욱(서총련 의장, 한양大 사학 4), 설충석(韓總聯 대변인, 중앙大 체육교육 4), 진재영(전남大 총학생회장), 선세규(건국大 총학생회 간부), 이준형(광주大 조통위원장), 정태흥(韓總聯 의장), 배정기(韓總聯 조통위 부의장), 이원구(서총련 의장), 정민주(全大協 축전대표, 인천大 건축 3 제적), 이혜정(全大協 축전대표, 가톨릭대 회계 2), 정명기(韓總聯 의장, 전남大 총학생회장), 박병언(韓總聯 대변인, 연세大 총학생회장), 유병문(韓總聯 조국통일위원회 위원장, 동국大 총학생회장), 홍성규(서울大 도시공학 4), 박진빈(단국大 투쟁국장), 강위원(韓總聯 의장, 전남大 총학생회장), 박현정(전남大 여학생회장), 김창학(서총련 투쟁국장), 설증호(충청총련의장), 이태환(韓總聯 조직국장), 정기찬(남총련 임시의장, 조선大 총학생회장), 정영훈(韓總聯 대변인, 한양大 총학생회장), 박휴상(韓總聯 사무처장 박휴상), 오경만(韓總聯 의장정책비서), 김광수(서총련 중집위 선전국원), 유병서(凡靑學聯 전술담당), 최진수(금오공대 총학생회 조국통일위원회 위원장), 장정숙(韓總聯 대의원), 정병도(서울大 총학생회장 당선자), 배병화(서울大 부학생회장 당선자), 이준구(韓總聯 조국통일위원장, 前 건국大 총학생회장) 등 수 백 명 이상에 달한다.
이들 중 특히 의장단들은 현재 국회의원, 정당원, 보좌관 등 정치권으로 진출한 사람이 많다. 全大協 1기 의장이었던 李仁榮(이인영)은 열우당 의원으로 1987년 이한열 장례식에서의 시위로 집회 및 시위 관련법 위반으로 구속,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집행 유예 시기에 다시 집회 및 시위 관련법, 국가 보안법으로 구속되어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 자격정치 2 년을 선고 받았다. 졸업 후 全民聯 정책실 간사 및 부장, 全國聯合 조직국장을 지냈다. 새천년 민주당 창당과 함께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동북아 경제중심추진위원회 자문위원, 열우당 중앙위원, 한반도재단 내 동북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全大協 2기 의장이었던吳泳食(오영식)또한 열우당 의원으로 1988년 고려大 총 학생회장 겸 全大協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主體思想 노선에 따라「反美청년회」를 결성한 혐의로 국가 보안법, 특수공무집행방해, 공용물건손상, 집회 및 시위법 위반 등으로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다. 대학졸업 후 노점상 등을 하다 1995 년 국민회의 청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경선 당시 盧武鉉 후보 선대위 청년위원장을 지냈다. 현재 全大協 동우회 회장, 열우당 청년위원장 등을 맡고 있다.
全大協 3기 의장이었던任鍾晳(임종석)도 열우당 의원이다. 1989 년 全大協 3 기 의장 당시 林琇卿(임수경) 密入北을 추진,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돼 징역 3년 6월을 선고 받았다. 졸업 후, 청년정보문화센터 부소장, 소장, 全大協 동우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다 1999년 새천년 민주당 창당에 가담했다. 새천년 민주당 당무위원, 同 청년 위원장, 대표 비서실장 등을 지냈다.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당시 盧武鉉 후보 선대委 국민참여운동본부 사무총장으로 盧武鉉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현재 民和協 회장, 열우당 국민참여운동본부 본부장, 同 공동 대변인, 원내 부대표 등을 맡고 있다. 宋斗律(송두율) 교수 귀국추진위원회 위원으로 宋斗律 입국을 위해 활동했다. 韓總聯 합법화 성명서 서명, 이라크 파병반대, 『美國의 對北강경발언이 남북화해방해하고 있다』는 성명서 등에 서명했다. 여중생 사망 사건 때에는 부시 美 대통령에게 사과 요구를 하기도 했다.「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입법 추진 모임」간사이다.
全大協 1기 부의장이었던 禹相虎(우상호)도 열우당 의원으로 1987 년 이한열 장례식 중 시위 주도로 국가모독, 집시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2 년을, 1988 년 집회 및 시위 관련 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全國聯合 부대변인, 月刊 말誌 기획위원으로 在野 활동을 했다. 1998 년 高健 서울시장 선거대책본부에 합류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민주당 부대변인 등을 거쳐 현재 열우당 원내 부대표를 맡고 있다. 이들 全大協 의장단 이외에 凡民聯, 凡靑學聯으로 全大協과 관련있는 사람들 중 배다지는 현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부이사장과 민주국민연합 대표를 맡고 있으며, 문규현 신부는 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와 민주노동당 후원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편, 4기 의장이었던 송갑석은 2000년 16代 총선에서 군산 지역에서 낙선한 이후, NGO 활동과 사업에 전념하고 있으며, 5기 의장이었던 김종식은 평범하게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全大協 6 기 의장이었던 태재준은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하다 현재 美國 유학 중이다. 의장단 출신 이외에 全大協 연대사업국장으로 활동하던 白元宇(백원우)도 현재 열우당 의원이다. 1986 년 특수공무집행 방해로 징역 1 년을, 1989 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 년, 자격정지 1 년을 선고 받았다. 한 때 노동운동을 했다. 대학 졸업 후 통합 민주당을 거쳐 盧武鉉 대통령의 지방자치실무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 李光宰(이광재), 徐甲原(서갑원), 李華永(이화영) 등과 친분을 맺었다. 盧武鉉 대통령의 국회의원 시절에는 비서관을, 現정권 출범 이후에는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실 행정관을 지냈다. 宋永吉(송영길) 열우당 의원은 연세大 총학생회장 겸 全大協 대변인이었으며, 1985년 집시법 위반 및 절도, 공문서 위조 혐의로 구속,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 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대우자동차, 선퍼니처 가구, 까치마을 장갑공장, 대진 산업 등에서 노동 운동을 했다. 1994 년 사법 고시에 합격했다. 전국민주택시노련, 인천개인택시사업조합, 한국통신노조, 대우자동차 노조 사무노조위원회 등의 고문 변호사로 활동했다.
성균관大 총학생회장, 全大協 수원의장으로 활동하던 李基宇(이기우)도 열우당 의원이다. 1990년 특수공무집행방해와 화염병 사용 등의 처벌 관련 법률 위반으로 구속,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全民聯-全國聯合 경기 남부 조직부장, 수원시민광장 사무국장으로 활동했다. 1998년 국민회의 소속으로 경기도 의회 의원으로 당선돼,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1988년 全大協 조국통일 특별위원장이었던 鄭淸來(정청래)도 현재 열우당 의원이다. 당시 집회 및 시위법,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 받았으며, 1989년 全大協 결사대 駐韓 美 대사관 점거농성으로 집회 및 시위법,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 받았다. 2001년 평양 민족통일 대축전 청년대표, 금강산 민족 대토론회 청년대표로 참가했다. 현재 열우당 국민참여운동본부 부본부장, 열우당 언론발전특위 간사를 맡고 있다. 노사모의 후신인 생활정치네트워크 국민의 힘 초대대표를 지냈다. 최근 노사모 대표를 지낸 明桂男 씨가 대표로 있는 「라디오 21」의 이사를 맡았다.
崔宰誠(최재성)열우당 의원도 1988년, 동국大 총학생회장,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회(이하 서총련) 중앙상임위원 겸 남부지구 대표, 全大協 학원자주화 투쟁위원장 활동을 하면서 집회 및 시위법, 폭력법 위반으로 구속,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출소 후, 한국정책연구소장, 남양주시 시정 기획단 상임 부단장으로 활동하다, 2002 년 민주당 내 盧武鉉 후보 선대위에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韓秉道(한병도) 열우당 의원도 1989 년 원광大 총학생 회장, 全大協 전북지역 조국통일위원장 활동 시절 집회 및 시위법, 폭력관련법 위반으로 구속,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졸업 후 원광 보건대에서 근무하다 2003년부터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현재「진보적 종교인들의 모임」이라고 주장하는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운영위원 등도 맡고 있다.
金晩洙(김만수) 청와대 비서실 상근 부대변인도 전대협 출신으로 1987년 연세大 총학생회 부회장 시절 국가 보안법 위반, 집회 및 시위법 위반으로 구속돼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 받았다. 元惠榮(원혜영) 의원 보좌관으로 정치 생활을 시작했다.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연구원으로 盧武鉉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경기도 부천시 의원을 거쳐 2002년 새천년민주당 盧武鉉 후보경선캠프 공보팀장,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부대변인, 청와대 홍보 수석실 보도지원비서관 겸 부대변인을 거쳤다.
1992년 4월 29일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社勞盟)사건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 동맹 (이하 社勞盟) 은 1988년 4월 1일 백태웅, 박노해를 비롯한 약 200여 명이 준비위를 만든 것에서 시작하여, 1989년 11월 12일 정식으로 출범했다. 이 조직은 자생적 비합법사회주의조직으로 남北韓 정권을 모두 비판하는 노선을 채택하고 있다. 社勞盟은 1991년 3월10일 박노해가 구속되고 다음해인 1992년 4월 29일에 백태웅을 비롯한 중앙위원과 주요간부 전부가 국가 안전기획부에 의해 구속되었다. 社勞盟 사건으로 기소된 사람은 박노해(본명 박기평), 김진주, 현정덕, 백태웅(서울大 민간인 감금고문사건 참조), 남진현, 은수미, 정명섭, 이은경, 김기수, 박홍순, 차익종 등 무려 300여 명으로 해방이후 최대의 조직사건으로 평가된다. 社勞盟 사건 관련자들은 1999년 3월 1일자로 잔형면제의 특별 사면 및 복권 조치를 받았다. 이들 중 백태웅은 현재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 대학 조교수로 재직하다 국내 모 법무법인에서 국제변호사로 활동 중이며, 박노해는 시인으로 활동 중이다. 한편, 2004년 7월에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중 社勞盟 사건 관련 출신자가 현직 장성과 기무부대를 조사했다고 해서 논란이 된 적도 있다.
1992년 10월 6일 남한조선노동당(민족해방애국전선·애국동맹)사건
1992년 10월 6일 안기부는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며 권력서열 22위인 이선실 간첩망 사건을 발표했다. 이에 운동권들은 실체가 없는 사람을 내세워 운동권을 탄압하려는 용공조작사건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사건의 핵심 인물인 北韓 노동당 이선실은 1979년 노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 1980년 제6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 중앙위원 선출, 1982년 4월 김일성의 70회 생일에 김일성훈장 수훈. 1991년 1월 한국민족민주전선 부위원장 임명. 1992년 4월 김일성의 80회 생일 기념연회에서 당 정치국 후보위원 자격으로 참석했으며, 1994년 김일성 사망 당시 국가장의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는 등 北韓의 대남공작사업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이선실은 사건 당시 월북했으며, 2000년 8월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사건의 관련자는 민영완, 최진섭, 최종만, 이형두, 노중선, 정경수, 정경진, 최호경, 황인오, 양홍관, 심금섭, 함정희, 김현찬, 은재형, 임명규, 황인욱, 마윤종, 임인출, 이철우, 김경태, 손민영, 우민성, 이경섭, 윤정환, 신동욱, 이근희, 손병선, 김낙중, 변의숙, 이강훈, 김표무, 장창호, 심상득, 조덕원, 이철, 진용근, 김동훈, 장기표, 김선태, 고한석, 김옥기, 양진우, 이승미, 한경임, 조일준, 이원배, 신선아, 이영지, 박미옥, 최상, 이규성, 이성구, 정인미, 최지영, 주병화, 전재순, 송혜숙, 전달수, 전송임, 윤임현, 김부겸, 조무하, 양견웅, 손병구, 임종호 등이다.
이 중 최근에 이슈가 되고 있는이철우는 열우당 의원(反美 청년회 사건 참조)이고, 사북탄광사태의 관련자이기도 했던 황인오는 석방 후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한편, 1991년 김일성 훈장을 받기도 했던 김낙중은 현재 평화운동가라는 직함으로 현재도 파병반대, 주한미군 철수, 통일연대 활동 등의 운동권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철우 등의 경우, 대부분 하부 조직원으로 그들 스스로도 자신이 북한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몰랐다는 점이이다. 즉, 당국에 적발 시 북한과의 연계 사실을 은폐함으로써 북한을 보호하고, 가입자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민족해방애국전선, 애국동맹 등의 명칭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또한, 북한 노동당은 이철우와 같은 하부 조직원은 당원으로 입당시키지 않는다는 게 더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북한 노동당은 아무나 당원으로 가입시키지 않는다. 결국, 이철우와 같은 하부 조직원은 상부조직원과 북한에 이용당한 것 밖에 안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사상을 신봉했으며, 충성맹세를 했음은 이미 판결문 등을 통해 인정된 사실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konas)
운동권의 합법 활동기 : 1993년 이후 ~ 현재
운동권들은 1993년 민간인 출신 대통령인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이후, 운동권과 좌익 세력들은 과거의 지하 활동뿐만 아니라, 합법적 활동도 동시에 개시한다. 좌익들은 기존의 다양한 단체들을 양성화하여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이라는 거대단체를 결성하고, 이후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다. 특히, 1998년을 기점으로 다양한 시민단체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들이 초기 주로 내세운 이슈는 통일, 환경, 인권, 여성, 빈민, 노동 문제 등이지만, 그 내부의 주장은 대부분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연계되어 있다. 즉, 이들의 전술은 사회적 이슈를 내세움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고 이를 통해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지지 세력을 넓히는 것이었다. 반면, 기존의 보수계층은 승리감에 젖어 그 맥이 점점 사라지고 다음 세대를 키우지 않고, 타성에 젖어 살고 있던 시기이다. 이 시기를 시작으로 대학교의 수가 거의 2배 가까이 늘어나면서 각 대학교에 좌익 성향의 교수들이 포진하게 되고, 변호사, 언론인, 시민단체 관계자 등이 엄청나게 늘어난다. 심지어는 대학 자체가 좌익 성향인 경우도 나타나는데 대부분 이 시기에 정규대학으로 승격되거나 설립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현재 시민들이 질려하는, 늘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이슈를 연결짓는, 자칭 시민단체의 약 70% 이상이 1998년 이후에 설립되었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94년 6월 2일 김일성 조문 파동
1994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이 추진되기 시작하던 시기에 김일성이 돌연 사망했다. 이에 운동권들은 김일성에게 국가차원의 조문 사절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조문을 위해 密入北을 시도하기도 했으며, 학내에 빈소를 설치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정부는 이에 대대적인 主體思想 관련 조직들을 검거했다. 관련 사건으로 구속된 사람들은 김세원(凡民聯 남측본부 광주전남연합 창립준비위원장), 오병윤(민주주의 민족통일 광주전남연합 사무처장), 김양무(凡民聯중앙정책실장), 이종욱(서총련 의장), 설충석(韓總聯 대변인), 김종백(서총련 조통위원장), 최종민(서총련 동부지구 의장, 건국大 총학생회장), 이석준(고려大 동양사 2), 강희남(凡民聯 의장), 이종린(凡民聯 부의장), 전창일(凡民聯 부의장), 강순정(凡民聯 부의장), 안희만(凡民聯 간사), 신광수(법명 법탁, 평불협 상임부회장), 이지범(평불협 前 총무부장), 이영규(전남大 법대 학생회장), 문정우(전남大 부총학생회장), 정연철(고려大 총학생회 학생복지위원장), 이광훈(고려大 경제2), 전창근(고려大 경제3), 김준일(고려大 경제3), 최윤규(고려大 경제3), 남창유(고려大 경제3), 이창복(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 공동본부장, 全國聯合 상임의장), 황인성(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 집행위원장, 全國聯合
2021.10.17.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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