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18일 오전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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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1-10-17 12:41 조회2,52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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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8일 오전 상황
1980년 본격적인 학생시위는 5월 4일부터 시작됐다. 5월 15일 서울역 10만 집회가 안보를 위협했다. 다음 날인 5월 16일, 김대중은 감히 최규하 정부를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 이른바 제2차민주화촉진선언이었다. 5월 19일까지 최규하가 내각을 해체하고 계엄령을 철회한다는 결심을 김대중에게 통보하지 않으면 5월 22일 정오를 기해 서울역과 같은 폭력 시위를 전국적으로 확대할 것이며, 이날 모든 군인과 경찰은 상부의 명령에 불복하고 모든 국민은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라고 선언한 것이다. 정부와 군을 극도로 자극하는 협박이었다.
누가 봐도 이는 구속을 자청하는 행위였다. 최규하는 이날 밤 자정을 기해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강화하면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기획한 혁명내각(shadow cabinet) 요원 24명을 긴급 체포했다. 이른바 5.17사건이다. 이날 밤 이화여대에 모였던 전국대학 학생회장들이 모두 도망쳤고, 광주에서는 전남대학총학생회장 박관현이 도망쳐서 시위기간 내내 숨어있었다. 이후 전국에는 예비검속바람이 불어 청년들은 문밖에 나가지 않았다.
계엄집행 목적으로 전북 금마에 주둔하던 7공수 여단 2개 대대(33대대 35대대)가 광주로 출동했다. 권승만 중령이 이끄는 제33대대는 전남대에, 김일옥 중령이 이끄는 제35대대는 조선대에 진주해 있었다. 경찰만 보아도 가슴을 졸이면서 도망쳤던 살얼음판에 한 이변이 발생했다. 5월 18일 오전 9시에 전남대 정문에 돌멩이 부대 250명 정도가 나타나 계엄군에 시비를 걸어 7명에게 부상을 입혀놓고 줄행랑을 친 것이다.
검찰보고서에는 단지 학생이라고만 표현돼 있지만 이들 250명이 학생이었다면 전남대 학생들이 주류였을 것이다. 그런데 전남대 학생회장 박관현은 5월 17일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대한민국 대학생들 모두가 꼭꼭 숨었다. 광주에서 사망한 광주인은 154명, 이들 중 대학생은 거의 없었다. 5월 25일부터 도청에 들어간 어중이떠중이들 중에도 대학생은 거의 없었다. 대한민국 대학생들은 예비검속이 무서워 전국적으로 다 꼭꼭 숨었고, 대학생을 움직이는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도 도망갔고, 광주 운동권 전설이라는 윤한봉도 화물선 몰래 타고 밀항했는데, 강심장을 가진 이 250명은 과연 누구들이라는 말인가. 돌연변이 집단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은 계엄군이 따라잡을 수 없는 빠른 속도로 금남로로 도주하여 차량과 파출소들에 불을 질렀다. 검은 연기와 흰 연기가 하늘을 덮자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바로 이 때 지역감정에 뿔을 지피는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서 보냈다. 전라도 70%를 죽여도 좋다는 것이 전두환의 살인명령이다. 벌써 수십 명 죽었다.. .” 이런 유언비어는 김대중의 체포로 야기된 전라도 민심에 불을 지폈다. 김대중은 열등의식으로 가득한 전라인들의 한을 풀어주는 구세주요 신이었다. 5월 16일, 김대중이 감히 국가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것은 전라도 민심을 악화시킨 촉매제가 되었다. 250명의 돌멩이 부대와 이들이 살포한 유언비어와 김대중의 체포 유도작전은 엄청난 시너지를 내는 예술적 앙상블이었다. 전쟁에도 예술이 있고, 공작에도 예술이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5월 18일의 상황은 김대중과 북이 싱크로나이즈 시킨 정교한 합동작전이었다.
2021.10.17.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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