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군 찾아가 공격한 돌멩이부대 250명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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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1-10-23 23:49 조회3,10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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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 찾아가 공격한 돌멩이부대 250명의 정체
5.18 상황일지에는 5월 18일 오전 9시, 250명 정도의 학생들이 전남대에 주둔한 계엄군(7공수 33대대)을 찾아가 정문에 늘어선 장병들에게 돌멩이 공격을 가해 7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금남로로 달아나 파출소와 차량에 불을 질러 군중을 모은 후 지역감정을 유발하는 유언비어를 뿌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 250명이 광주의 대학생들이었을까? 대답은 북한군이 아닐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보자.
1980년 5월 10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연루자 24명(혁명내각)이 북악파크 호텔에 모여 모의를 했다. 그 중에는 복학생 조직인 민주청년협의회 회장인 장기표가 있었고, 심재권이 있었다. 장기표가 김대중에 말했다. “제가 곧 4.19와 같은 무정부 사태를 만들어 낼 터이니 의장님께서는 이를 집권의 기회로 활용하십시오” 이에 김대중은 “알았다”로 호응했다.
5월 15일 심재철이 지휘하는 서울역 10만 집회가 열렸다. 전국을 패닉상태로 몰았다. 정부와 군이 바짝 긴장했다. 그리고 내무장관 김종환은 진압업무를 계엄사령관 이희성에 이양했다. 5월 16일부터 전국 총학생회장 59명이 이화여대에 모여 밤을 새며 전국적 폭력시위를 모의했다. 같은 16일 김대중은 제2차민주화촉진선언문을 냈다. 이는 국가를 상대로 한 선전포고였다. 동시에 ‘나를 체포해 달라’는 노골적인 유인행위였다.
최규하는 전국계엄을 선포함과 동시에 김대중 내란 음모자 등 26명을 체포했다. 김대중은 왜 이런 유인행위를 하였을까? 2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5월 18일 광주에 살포될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유언비어가 힘을 얻으려면 먼저 전라도의 호프 김대중이 체포되어야 했기 때문일 수 있다. 둘째는 5.18의 성공을 100%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전국은 살얼음판이 되었다. 이화여대에 모였던 총학생회장들은 간발의 차이로 도망을 갔다. 광주 운동권의 핵심 정동년은 체포되었고, 전라도 운동권의 전설이라는 윤한봉은 이리저리 도망 다니다가 미국행 화물선을 타고 도주했다. 광주학생의 영웅 박관현도 도망가고 없었다. 학생과 운동권의 구심점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전국에는 예비검속이 실행되고 서슬 퍼런 체포작전이 실행됐다. 지각 있는 젊은이들은 오해받을까 무서워 문밖 출입을 자제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시각에 돌멩이 들고 감히 공수부대에 접근하여 공격을 하고 달아나 광주의 중심 금남로에서 심리전을 수행한 250여 명은 누구들인가?
대학생으로 시위에 참여한 사람은 없었다. 광주 최고의 유공자들은 거의 다 공돌이들이었다. 이들은 북한군이 비워준 도청에 25일부터 어중이떠중이 자격으로 들어갔다가 27일 손을 들었던 자들이다. 이들 중 대학생은 김종배 한 사람 뿐이었다.
2021.10.23.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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