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규TV에 쓴 김진명의 5.17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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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1-12-04 22:13 조회4,28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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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규TV에 쓴 김진명의 5.17에 대하여
김진명이 [국민작가]라는 소개의 말로 이봉규tv에 연속 2회 출연했다. 한번은 10.26에 대해 또 다른 한번은 5.17에 대해 설명했다. 김진명은 10.26과 5.17에 대해 자기 말고는 그 진실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기상천외한 구라를 진실로 포장했다. 나는 5.17에 대한 11월 28일자 방송을 먼저 접했기에 이봉규 박사에 전화를 걸어 중요한 역사사건에 대해 왜곡해 방송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니 이를 교정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 하였고, 이박사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12월 6일 아침 녹화방송을 하기로 했다. 먼저 아래의 5.17관련 발언부터 체크를 해본다.
5.17에 일어난 일, 생생한 증언, 광주만 유공자가 아니다 [김진명 작가]- 2021. 11.28(5.17)
https://www.youtube.com/watch?v=bxkMHgMVqzU
김진명의 성향
김진명은 1991년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소설을 냈지만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1993년 다시 내서 3~4백만 부가 팔렸다고 한다. 베스트셀러를 썼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국민작가]로 불리는 모양이다. 그 소설에서 인상에 남는 용어는 [개코형사]인데, 이는 경찰의 정식 용어가 아니다. 정식 용어는 [민완형사] 즉 민첩한 수완을 가진 형사의 준말이다. 이 책의 앙꼬는 이휘소라는 핵물리학자다. 그런데 이휘소 박사 부인은 김진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허위사실로 남편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이 책의 테마는 미국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케 한 배후였다는 것이다. 이어서 김진명은 2008년에 [한반도]라는 제목으로 10.26의 역사를 소설화했다고 한다. 뉴스들을 보면 이 책 역시 미국이 시해의 배후였다는 테마를 깔았다고 한다. 11.15.자 이봉규tv에서도 미국을 암살 배후자로 지정했다.
대한민국을 부흥케 하고 빨갱이를 몽둥이로 때려잡은 대통령은 박정희와 전두환 대통령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80%가 빨갱이로 변한 국민들을 순화시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했고, 6.25남침으로부터 국가를 지켜냈다. 그런 이승만을 물러나게 한 것은 북한의 4.19공작이었다. 그 다음에 들어선 대통령은 이승만보다 더 지독했다. 잘 살면 공산주의가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라는 신념으로 눈부신 경제성장을 주도해 북한의 30%였던 1인당 GNP를 2.1배로 역전시켰다. 1960년 당시 남한의 1인당 GNP는 83달러, 북한의 GNP는 280달러였다. 1980년 남한의 GNP는 1.592달러, 북한은 750달러 2.1배로 역전되었다. 전두환은 이를 5.2배로 벌어지게 했다. 지금 현재는 27배로 성장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성장의 틀을 만들어 경제라는 기차를 레일 위에 올려놓았고, 전두환 대통령은 기차의 동력을 강화했다. 이런 두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북한이 저지른 공작행위를 보자.
1968년 1월 21일에는 31명(2014년, 33명으로 정정)으로 구성된 김신조팀을 청와대에 침투시켜 대통령을 살해하려는 대담한 시도를 하였고, 그해 11월 초에는 울진-삼척에 120명의 무장공비를 보내 무차별적인 학살을 감행함으로써 국민들로 하여금 박정희를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하는 무능한 존재로 생각하도록 시도했다. 1974년 8월 15일에는 김대중이 일본에 구축한 반국가단체 한민통이 자객 문세광을 보내 박정희를 저격케 하였지만 총알이 빗나가는 바람에 영부인 육여사를 사망케 했다. 만일 누군가가 김재규에게 시해를 사주했다면 그것은 북한이지 미국일 수가 없는 것이다.
북한은 또 1983년 10월 9일, 아웅산 폭파로 전두환을 살해하려 했다. 북한의 강민철 대위, 신기철대위 이야기는 유명하다. 강민철은 당시 조국이 자기를 배신했다는 생각에 아웅산 폭파가 북한의 소행임을 자백했다. 그래서 북한이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됐었다. 강민철과 신기철은 1980년 광주에 나타난 광수이기도 하다.
이처럼 북한은 박정희와 전두환 두 대통령에 대한 살해노력을 집요하게 계속한 반면, 박정희 및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미국의 살해 공작이 증거로 잡힌 적은 없다. 그런데 김진명은 증거가 확실하고 동기가 확실한 북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오로지 미국만을 끝없이 모략한다. 여기까지를 보면 그는 최소한 지독한 반미주의자로 보인다.
11월 28일, 김진명의 방송 내용
김진명은 1958년생으로 개띠라 한다. 그는 1978년 11월, 대학3년일 때, 전경으로 입대하여 1979년 말에는 전경 일등병으로 치안본부 특수수사대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전경이면 방패 들고 시위대와 전투를 하는 직종인데 전경 일등병이 치안본부 특수수사대에서 내근을 했다고 한다. 참으로 기막히는 구라다. 특수수사대에는 경찰 중에서도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아야 갈 수 있는 곳이다. 대학 3년생의 전투경찰이 어떻게 그런 곳에서 근무를 할 수 있겠는가? 마치 남조선의 장진성을 보는 것 같다. (주 : 장진성은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왔고, 대남공작부에서 근무했다며 구라를 쳤다. 자신을 과대포장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본명은 위철현, 그의 탈북스토리는 99% 구라다. 나는 이 사실을 밝히기 위해 140시간 그를 분석했고, 이는 법정에서 공식 확인됐다.)
김진명의 거짓말은 신군부가 학생시위를 제지하지 않고, 시위가 확대되도록 부추긴 면이 있다는 말로부터 시작된다. 전형적인 좌파의 음모론적 시각인 것이다. 아래는 그의 방송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5월 17일 낮에 신군부가 이대에 모인 전국 총학생회장들을 급습하여 그 대부분을 체포해, 서울 시내를 2~3시간 돌리다가 치안본부 특수수사대 건물로 데려다 2인 1개조로 수갑을 채운 다음 개머리판으로 마구 구타하여 아비규환의 장면을 연출했다. 그들은 커다란 방으로 끌려가 매우 불편한 자세로 꿇어앉혔다. 착검을 한 헌병 3명이 그들을 지키고 있었는데, 자기는 그 장소에 들어갈 수 없는 신분이었는데도 들어갔다. 학생회장들 앞에서 한동안 민주화의 정당성을 역설하고 모든 국민이 민주화운동을 성원하기 때문에 제군들은 아무 일 없이 나갈 것이니 안심하라는 요지의 훈시를 했다고 했다. 이때 착검한 고졸출신 3명의 헌병들은 자기를 제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상부에 이 사실을 고발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따라서 민주화 유공자는 이런 민주화 의식에 불타는 헌병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라고 방송했다. 그는 전두환 측을 [신군부]라고 지칭했다. 하지만 1995년 전두환에 대한 사회적 보복이 시작될 때까지 [신군부]라는 말은 우리나라에 없었다. 신군부라는 말은 김일성이 만든 용어다.
그런데 5월 17일 이화여대에 집결한 전국 총학생회장들을 김진명의 말처럼 신군부가 낮에 급습한 것이 아니라 자정에 급습했다. 김진명의 말처럼 그 대부분을 체포한 것이 아니라, 단 한명도 체포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 이후의 김진명이 쓴 소설은 다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총학생회장들을 2~3시간 동안 시내로 돌렸다는 말도 소설, 그들은 특수수사대로 압송했다는 것도 소설, 3명의 헌병 앞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전경 일등병이 일장 훈시를 했다는 말도 다 소설인 셈이다. 20세의 전경이 그런 방에 입장했다는 것도, 상급자들인 헌병들 앞에서 일장 훈시를 할 수 있었다는 것도 군대 상황에 전혀 어울릴 수 없다. 만일 그랬다가는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얻어터진 후 감옥에 갔을 것이다.
지만원이 책에 쓴 10.26, 12.12. 5.1`7
역사공부는 연구자료에 의해 해야지, 김진명과 같은 반미주의자가 상상으로 이어낸 이야기를 가지고 하면 안 된다. 김진명은 12.12와 5.17을 한 세트로 비벼서 방송을 했지만 12.12와 5.17은 성격적으로 물과 기름이다. 섞어찌개로 혼합할 수 있는 사건들이 아니다. 10.26은 박대통령 시해사건이다. 여기에서의 최대 쟁점은 정승화가 시해 현장 옆 건물에 대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김재규와 박선호, 박흥주에 의한 살육행위가 끝나자마자 정승화는 김재규를 태우고, 국방부 건물 지하에 구축된 B-2벙커에 왔다. 군을 지휘하려면 군 상황실로 가야만 했다. 정승화는 김재규가 시해범인줄 뻔히 알면서 그가 바라는 대로 그의 상급자인 노재현 국방장관을 무시하고, 상황실 전화를 가지고 군을 김재규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작전명령을 발동했다. 차지철 경호실장만이 지휘할 수 있는 청와대 경호부대와 수경사령관을 지휘했다. 차지철이 살아있다면 언감생심 엄두도 낼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런 가운데 10.26 자정, 국방부에서 열린 내각회의는 그런 정승화를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때부터 정승화는 김재규를 옹호하고, 전후방 장군들을 불러 박정희를 비하하는 발언을 노골적으로 했다. 그리고 전두환을 겁박하여 자기에 대한 수사를 방해했다.
한편 10.26 자정, 김재규를 보안사 분실로 체포해 김재규로부터 김재규의 범행과 정승화의 범행을 자백 받은 이학봉 수사부장은 10.27일 아침 전두환에게 정승화를 즉시 체포케 해달라고 건의했다.
하지만 불과 몇 시간 차이로 계엄사령관이 된 마당에 곧바로 계엄사령관을 체포하는 것은 정치적 위험이 있다며, 내사만 열심히 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이학봉은 두 차례 더 정승화에 대핸 체포를 건의했고, 이에 전두환은 12월 6일에 결심했다. “좋다. 그러면 그날을 12월 12일로 하자”
10.26 사건에 대한 역사기록은 수사기록을 외울 정도로 정교하게 분석하지 않고서는 함부로 엮을 수 없는 복잡한 사건이다. 12.12사건은 정승화를 체포한 사건이지만, 탱크와 야포가 동원되는 등 군이 청군과 홍군으로 갈라져 내전을 치를 지경에까지 이르게 한 복잡한 사건이었다. 이에 대한 역사 기록 역시 몰입의 경지에서 연구를 하지 않으면 제대로 기록할 수 없다.
따라서 12.12 사건은 10.26사건을 종결 짓는 [결론의 역사]인 것이다. 정승화가 김재규와 함께 혁명을 시도한 첫 관문이 10.26 시해사건이었고, 김재규와 정승화의 혁명 가도를 가로막은 사건이 12.12사건이었다.
하지만 5.17은 12.12와는 전혀 딴판의 역사다. 5.17은 한마디로 김대중의 망동행위와 그의 국가전복 행진을 저지한 사건이다.
10.26으로 인해 권력의 공백이 생기자, 북한은 이를 남침의 기회로 삼으려 했고, 김대중은 학원을 선동하여 전국을 폭동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최규하 내각을 해산시키고 혁명정부를 수립하려는 데 광분한 것이다. 10.26과 12.12는 그 기록이 양이 5.17보다 더 방대하기 때문에 별도의 방송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2003년, 18만 쪽에 달한다는 수사기록을 입수했다. 2008년에 1,720쪽 4부작의 역사책을 냈다.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 이 책에는 10.26, 12.12, 5.17 및 5.18에 대한 역사를 담았다. 4권의 책이 너무 방대하다며 요약본을 내달라는 요구들이 있어, 이를 다시 2권으로 압축하여 [압축본 상하권]을 냈다. 그 목차만 보아도 1026, 12.12. 5.17은 카더라 통신이나 소설가의 공상과는 그 차원이 다르고 느낌이 다를 것이다.
목 차
01- 10.26의 밤
10.26의 시대적 배경
10.26, 그 살육의 현장
대통령 비서설
차 속에서
B-2 벙커
국방부
슬픈 박흥주
전두환의 등장
김재규 연행과정
02- 정승화의 천하
김재규는 왜 대통령을 시해했나?
만일 김재규가 정권을 잡았다면?
정승화로 지향된 화살
김재규와 정승화는 어떤 사이였나?
정승화의 혐의지우기 행진
정승화의 수사방해
정승화의 김재규 살리기
철옹성 같은 김재규-정승화의 인맥
정승화 연행계획
03- 12.12의 밤
한남동의 총소리
김진영의 공관출동
대통령 재가
노재현의 피신과 재가지연
12.12의 육군본부
내 편 네 편 갈라진 군벌
장태완의 난동
12.12의 마감
12.12의 결산표
12.12는 사전에 계획된 쿠데타였는가?
04-재야의 폭력
10.26직후의 안보상황
재야세력의 방해 속에 최규하 과도정부 출범
재야세력과 최규하 정부와의 전쟁
김대중의 등장
김대중 주도의 선동시국
학생폭력화를 통한 국가전복 행진
학생시위 폭력화의 실체
노동자 폭동의 기승
노동폭력의 실체
최규하 정부의 대응
계엄사의 대응
보안사의 대응
북한의 남침정보
5.17전국주요지휘관회의 및 비상계엄전국확대
광주로 몰려든 먹구름
05- 광란의 해방구 5.18의 광주
이후 생략
지만원이 연구한 5.17 진실
10.26 이후의 권력공백기를 맞이하여 국민은 북한의 남침을 가장 걱정했다. 실제로 김일성은 11월 3호 청사에서 남한에 전민봉기를 유도하라는 비밀지령을 내렸고, 이어서 12월 20일에는 남조선에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인민무력부는 신호만 떨어지면 즉각 출동할 수 있도록 24시간 가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존재하지도 않던 ‘신군부’라는 말은 이때 김일성이 최초로 사용한 단어였다.
4월 21일, 사북탄광 노동폭력사태가 발생하자 김일성은 노동자를 포함한 전 계급이 들고 일어나 전민봉기를 일으키라고 간첩들에 지시했다. 1980년 3월부터 5.18직전까지 색출한 간첩사건만 7건, 남침징후 첩보 5건에 이어 5월 10일에는 일본내각으로부터 북한이 남침을 결정했다는 정보까지 입수되어 정부와 군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반면 안보에는 관심조차 없는 3김시대의 정치권과 재야세력으로 불리는 불순세력들은 때가 왔다며 최규하 주도의 과도정부를 유신잔당이라 몰아치면서 즉시 퇴진하라며 압박을 가했고, 이에 최규하 정부는 연내에 헌법 개정을 마치는 대로 정권을 이양할 것을 수차 약속하면서 재야세력이 요구하는 대로 학원자유화를 허락했고, 2월 29일에는 윤보선, 김대중, 지학순 등 긴급조치 위반자 687명에 대해 사면-복권을 단행하는 등 유화조치들을 취했다. 저들에게는 이른바 ‘서울의 봄’, 신나는 계절이었지만 국가는 자유방임지대로 타락했다.
김종필은 공화당, 김영삼은 신민당을 이끌고 있었지만 김대중은 신민당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뛰쳐나와 학생세력과 노동자세력을 이끌어온 재야세력을 결집시켜 ‘국민연합’이라는 사실상의 혁명지휘부를 결성하고 학생과 노동자들을 선동하면서 폭력시위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4월 하순부터 시작된 대학생 시위는 5월에 접어들면서 전국 규모로 확산됐고 이에 고무된 김대중은 5월 7일, 제1차 [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을 발표하여 최규하 정부의 즉각 퇴진-전국내각 구성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며 정부를 압박했고, 학생 등을 향해서는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김재규도 김주열(1944. 마산용마고)이나 김상진(1949, 1975년 4월 11일 서울대 농대 교정에서 유신헌법과 독재정권의 허위성을 고발하는 ‘자유성토대회’에서 양심선언문 낭독 후 할복) 못지않은 애국충신”이라며 과격시위를 선동했다.
이어서 김대중은 4월 10일, 5월 1일, 5월 10일 3회에 걸쳐 북악파크에서 문익환, 예춘호, 장기표, 심재권 등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 집단을 이끌고 폭력시위에 의한 국가전복 계획을 수립하고 김대중의 혁명내각을 작성했다.
5.12.17:00시, 국민회의 지도부, 김대중, 문익환, 예춘호, 이문영, 한완상, 한승현, 서남동, 이해동, 심재권, 장기표, 이헌배, 계훈제 등이 북악파크호텔에서 또 다시 회동하여 투쟁방향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오고 간 보고와 지시 내용은 이러했다.
장기표:“각 대학은 일정한 날을 정하여 동시에 각목과 화염병을 사용한 폭력시위를 과격하게 벌여 저지하는 과정에서의 희생을 각오하면서 민중의 호응을 얻어 정부중요부서를 점령하게 되면 4.19와 같은 무정부상태가 되는데 이를 계기로 민주세력의 구심인물인 김대중 선생을 사태수습 인물로 내세워 학생과 민중을 설득하면 정권장악이 가능하고 사후 수습으로서 민주제도연구소를 주축으로 과도정부를 이끌면 차기 정권까지 잡을 수 있습니다. 저는 심재권과 함께 각 대학 학생회장단에 영향력이 있는 복학생들을 규합, 학생폭력시위를 주도하겠으니, 선생께서는 이문영에게 과도정부구상을 미리해 두시기 바랍니다”
김대중:“알았다”
5.15일은 심재철의 서울역 회군으로 대표되는 날이다. 전국 80여 개 대학, 10만여 명의 학생들이 "신현확내각 퇴진", "계엄해제" 등을 외치며 유례없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37개 대학 7만여 명의 학생이 14시를 기해 일제히 행동을 개시했다. 경찰의 진압장비를 빼앗아 파괴하고 경찰에 폭행을 가했다. 서울역 광장에는 10만 학생이 집결하여 경찰차량 3대를 방화했고, 민간차량 4대를 탈취하여 경찰대열에 돌진함으로써 경찰관 1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3명이 중상을 입었다. 수적 열세에 몰린 경찰은 오직 청와대 하나만을 지키기 위해 청와대로 배치됐고, 서울시내는 완전히 치안공백 상태가 되었다.
5월 16일, 서울역 시위에 극도로 고무된 김대중은 제2차 [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을 발표했다. 5월 22일 12시, 군인, 경찰은 상부명령에 불복할 것이며, 전국의 모든 국민은 검은 리본을 달고 전국적으로 봉기하여 정부를 전복할 것이라는 선전포고였다. 정부를 살리느냐, 김대중에 항복하느냐? 최규하 정부는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5월 17일 오전 11:00시,국방부에서 각 군 관구사령관급 이상 지휘관 43명이 참석한 전군지휘관회의가 열렸다. 합참 정보국장이 국내외 정세를 브리핑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주영복 장관이 참석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일일이 의견을 개진하게 했다. 군 지휘관들은 한결같이 “더 이상 혼란이 계속되어서는 국가가 망한다.”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오후 2:30분까지 장장 3시간 30분에 걸쳐 진행된 회의는 극도의 사회혼란과 북괴의 오판을 막기 위해서는 오직 강력한 사전 조치만이 해결책이라는 데 만장일치했다. 국방장관은 이를 근거로 전국비상계엄 선포를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로 결론지었다.
5월 17일 오후4시,주영복 장관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신현확 부총리에게 보고했고, 이어서5시에 대통령 공관을 방문하여 전군주요지휘관회의 결과를 보고하고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를 건의했다.
오후 7시, 최규하 대통령은 신현확 총리를 불러 전국비상계엄확대 처리를 지시했다. 이 지시에 따라 5월 17일 밤 9:30분, 임시국무회의가 열렸고, 이어서 밤 11:30분, 최규하 대통령은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선포했다.
10.26 이후 선포됐던 지역비상계엄(제주도 제외)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하고 5.18일 새벽 2시를 기해 전국 136개 국가시설을 보호하고 31개 주요 대학을 점령하기 위해 25,000명의 계엄군을 배치하는 한편, 5.17 자정을 기해 이른바 김대중 내각을 구상했던 김대중, 김상현 등 24명의 내란음모자들을 체포하고 학생 주동자들을 구속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규하 정부와 계엄당국이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전국은 무법천지가 됐을 것이고, 북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북한군은 제2의 6.25남침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에 시간이 있다면 아래에 대한 김진명의 소설을 반박할 것이다.
① 어마어마한 뒷이야기 흥미진진 [김진명 작가]- 2021. 11. 25 (10.26)
https://www.youtube.com/watch?v=tpPSZ5wnFmo
2021.12.2.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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