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번째 고소자 이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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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1-08-15 22:16 조회3,51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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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순실(240광수)
생년: 광수로 240광수로 게시된 날(2015. 11. 7)을 기준으로 하여 그 이전에는 1962년이라 줄곧 발언, 그 이후로는 1966,1968, 1971로 춤춰
한국 도착: 2007 (나무위키)
고소 요지: 1967년생으로 5.18당시 14살이었다.
총평: 이순실은 채널A가 진행하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 등의 방송 프로와 자신의 유튜브 계정을 통해 인기 스타가 되어 있다. 특히 교회를 대상으로 하여 하나님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강조해왔다. 2살 난 딸아이의 영특함을 신격화하고 그런 딸과 강제로 생이별 당한 처지를 온갖 수식어들로 장식하여 남한 국민들의 탄식과 눈물과 동정심을 자아내 성금으로 유도하고, 탈북자들로부터는 부러움의 대상이 돼왔다. 하지만 그녀가 그토록 애달프게 조각해낸 두 살 난 딸은 그녀가 가공해낸 소설 속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 피고인의 판단이다. 그녀는 아이를 낳은 적도 키워본 적도 없다는 것이 피고인의 판단이다. 그녀는 7전8기로 탈북에 성공하였다고도 하고, 8전 9기로 성공하였다고도 말한다. 그녀의 나이는 그녀가 제240광수로 지정되기 이전과 그 이후가 다르다. 이전에는 1962년생(5.18당시 19세)이라고 했다가 그 이후에는 1971생(5.18 당시 10살) 이라고 말한다. 나무위키에서는 1960년생이라고 한다. 노숙자담요는 그녀의 광주 사진을 놓고 20세 전후의 나이라고 했다. 그녀의 탈북 과정과 스토리는 말할 때마다 다르다. 그녀는 다양한 거짓말로 남한 국민들 특히 남한 교인들의 눈물과 동정심을 자극하여 성금을 얻는 일종의 사기 행각을 벌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증거 자료
⓵ 이제 만나러 갑니다 이순실여사의 슬픈 이야기, 2012.6.11.
https://www.youtube.com/watch?v=WUJSOS0xATA\
0분 20초~9:00분
⓶ 9번 탈북, 이순실의 애환과 질곡의 탈북 이야기, 2012. 10. 4.
https://www.youtube.com/watch?v=nVLkZXwsZzo&lc=Ugiqjem4UIAZxXgCoAEC
2분 40초~3분 18초
5분 25초~5분 37초
6분 10초~8분49초
9분00초~10분 30초
12분00초~12분40초
13분 00초~19분 18초
⓷ 2012.12.4. 2012년 통일다큐멘터리_미리보는 통일 한반도 2부,
https://www.youtube.com/watch?v=KrHcuQsA934
7분 20초~7분37초
⓸ 2013. 3. 19. [탈북자 행복열차] 안녕하세요? - 이순실 편,
https://www.youtube.com/watch?v=qiTlXGLWfoQ&t=702s
5분 40초~6분 40초
13분 10초~13분 40초
13분 48초~14분 10초
14분 19초~16분 16초
17분 45초~21분 20초
21분 52초~23분 40초 .
⓹ 2013.6.3. 오늘 순실의 과거를 밝히겠다! 새로운 탈북미녀 김수경!_채널A_이만갑 77회
https://www.youtube.com/watch?v=FUEp2akKqoc&t=123s
00분 20초~2분 50초
⓺ 2013. 7. 11. 탈북미녀 이순실, 배고픔에 우는 아이에게 줄 것이 '죽은 병아리' 밖에 없어.._채널A_이만갑 82회,
https://www.youtube.com/watch?v=T8R0DMYFCdY
00초~3분 00초
⓻ 8번의 북송을 통해 이순실이 겪었던 끔찍한 고문_채널A_이만갑 84회, 2013.7.23.
https://www.youtube.com/watch?v=MAZnGmUuTbk\
1분 28초~2분 00초
⓼ 2014.5.20. 통일북소리 8편, 남남북녀 커플, 황유성 이순실 부부의 간증 (MC. 김경란, 오지헌,
https://www.youtube.com/watch?v=ZsN_BJghvoQ
5분 40초~7분 10초
8분 20초~ 8분 40초
17분 28초~34분 36초
⓽ KTV 사랑합니다 대한민국] 죽음을 경험한 8번의 강제북송 탈북 간호장교 ‘이순실’, •2014. 9. 1.
https://www.youtube.com/watch?v=tZw28nZ7Nv8
4분 00초~4분 10초
⓾ "탈북자들 앞에서 북한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 (황선-신윤미)
2014. 12. 2.
https://www.youtube.com/watch?v=QxOkH1Mj8DY
32초~50초
⑪ "탈북, 그 행복한 선택" 방송인 이순실 간증집회, 2015. 8. 15.
https://www.youtube.com/watch?v=IrTSyWwXtSY
2분 10초~2분 27초
2분 52초~4분 00초
5분 10초~7분 25초
21분 30초~ 22분 25초
28분 25초~54:00초
⑫ 20170524 수요예배 이순실집사 간증집회, 217.5.30.
https://www.youtube.com/watch?v=vO8s2VUWp4E
6분 50초~7분 05초
38분 40초~40분 00
48분 20초~ 52분 10초
56분 55초~ 1시간 2분 32초
⑬ 2018.1.12. [탈탈탈] 88회 2부 - 2007년 입국, 남한생활 10년 만에 내 집 마련 … "너무 기뻐서 잠도 안 온다" : 이순실 인터뷰
https://www.youtube.com/watch?v=2aMEdn-ZgSk
23초~54초
17분 40초~18분00초
⑭ [탈탈탈] 88회 1부 - 1997년 탈북, 중국에 오자마자 인신매매범에게 잡혀 … "아이와 강제로 이별" : 이순실 인터뷰 2018.1.12.
https://www.youtube.com/watch?v=5RUe3ujmcfI
6분 00초~6분 21초
11분 50초~12분 15초
27분55초~31분 15초 52분 50초~ 1시간 08분 24초
⑮ “몽골까지 걸어갔죠” 이순실, 죽을 뻔한 탈북 스토리(SBS) 2019.08.04
http://mplay.mk.co.kr/view/?cid=2906448
00초~3분 29초
⑯ 2019. 8. 30. 내가 살던 고향은... -이순실 편-
https://www.youtube.com/watch?v=jLvSDYfaXLg&t=1051s
2분 27초~ 2분 50초
4분 00초~ 4분 15초
25분 15초~26분 36초
37분 24초~ 39분 20초
⑰ 부모님 생각이 간절해지는 추석, 2019. 9. 8.
https://www.youtube.com/watch?v=SKtE6kDIuJk&t=28s
1분 30초~2분 50초
4분 40초~5분 12초
12분 50초~14분 40초
19분 20초~ 20분 12초
21분 38초~26분 08초
⑱ 북에서 온 편지 2019.9.23.
https://www.youtube.com/watch?v=qzsgAXWhGsI
3분 56초~4분 44초
⑲ 내가 만난 남편과 시댁식구들 1편
2019. 10. 15.
https://www.youtube.com/watch?v=4Y1MU0OzDJ8
00분 40초~3분 55초
9분 10초~9분 20초
이상은 녹취된 부분
아래는 녹취 안 된 부분
❶. 이제 만나러 갑니다, 이순실여사의 슬픈 이야기, 2012.6.11.
https://www.youtube.com/watch?v=WUJSOS0xATA
0분 20초~9:00분 녹취
❷. News Magazine Chicago, 9번 탈북, 이순실의 애환과 질곡의 탈북 이야기, 2012. 10. 4.
2분 40초~3분 18초
5분 25초~5분 37초
6분 10초~8분49초
9분00초~10분 30초
12분00초~12분40초
13분 00초~19분 18초
❸ 아카데미통일, 2012년 통일다큐멘터리,_미리보는 통일 한반도 2부,
2012.12.4.
https://www.youtube.com/watch?v=nFryssiuYSI
7분 20초~7분37초
❹ 아카데미통일, [탈북자 행복열차] 안녕하세요? - 이순실 편, 2013. 3. 19.
https://www.youtube.com/watch?v=qiTlXGLWfoQ
5분 40초~6분 40초
13분 10초~13분 40초
13분 48초~14분 10초
14분 19초~16분 16초
17분 45초~21분 20초
21분 52초~23분 40초
❺ 채널A, 오늘 순실의 과거를 밝히겠다! 새로운 탈북미녀 김수경!_채널A_이만갑 77회, 2013.6.3.
https://www.youtube.com/watch?v=FUEp2akKqoc
00분 20초~2분 50초
❻ 채널A, 탈북미녀 이순실, 배고픔에 우는 아이에게 줄 것이 '죽은 병아리' 밖에 없어.._채널A_이만갑 82회, 2013. 7. 11.
https://www.youtube.com/watch?v=T8R0DMYFCdY
00초~3분 00초
❼ 2013.7.23. 채널A, 8번의 북송을 통해 이순실이 겪었던 끔찍한 고문_채널A_이만갑 84회,
https://www.youtube.com/watch?v=MAZnGmUuTbk
1분 28초~2분 00초
❽ CGNTV 블레싱 한반도, 남남북녀 커플, 황유성 이순실 부부의 간증 I @ 통일북소리 8편 (MC. 김경란, 오지헌, 2014.5.20.
https://www.youtube.com/watch?v=ZsN_BJghvoQ
5분 40초~7분 10초
8분 20초~ 8분 40초
17분 28초~34분 36초
❾ KTV국민방송, [KTV 사랑합니다 대한민국] 죽음을 경험한 8번의 강제북송 탈북 간호장교 ‘이순실’, •2014. 9. 2.
https://www.youtube.com/watch?v=tZw28nZ7Nv8
4분 00초~4분 10초
❿ 조선일보, "탈북자들 앞에서 북한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 (황선-신윤미)
2014. 12. 3.
https://www.youtube.com/watch?v=QxOkH1Mj8DY
32초~50초
⓫ 반야월교회, "탈북, 그 행복한 선택" 방송인 이순실 간증집회, 2015. 8. 16.
https://www.youtube.com/watch?v=IrTSyWwXtSY
2분 10초~2분 27초
2분 52초~4분 00초
5분 10초~7분 25초
21분 30초~ 22분 25초
28분 25초~54:00초
⓬ 이동하 목사, 수요예배 이순실 집사 간증집회, 2017.5.30.
http://www.chowonch.org/amina/print.php?bo_table=gr2_3&wr_id=14
6분 50초~7분 05초
38분 40초~40분 00
48분 20초~ 52분 10초
56분 55초~ 1시간 2분 32초
⓭ 배나TV, [탈탈탈] 88회 1부 - 1997년 탈북, 중국에 오자마자 인신매매범에게 잡혀 … "아이와 강제로 이별" : 이순실 인터뷰 2018.1.13.
https://www.youtube.com/watch?v=5RUe3ujmcfI
6분 00초~6분 21초
11분 50초~12분 15초
27분55초~31분 15초 52분 50초~ 1시간 08분 24초
⓮ 배나TV, [탈탈탈] 88회 2부 - 2007년 입국, 남한생활 10년 만에 내 집 마련 … "너무 기뻐서 잠도 안 온다" : 이순실 인터뷰 2018.1.13.
https://www.youtube.com/watch?v=2aMEdn-ZgSk
23초~54초
17분 40초~18분00초
⓯ 미운 우리 새끼, “몽골까지 걸어갔죠” 이순실, 죽을뻔한 탈북 스토리(SBS)
등록일 2019.08.04
https://programs.sbs.co.kr/enter/woori/clip/52019/22000345492
00초~3분 29초
⓰ 2019. 8. 30. 김길선's평양만사, 내가 살던 고향은... -이순실 편-
https://www.youtube.com/watch?v=jLvSDYfaXLg
2분 27초~ 2분 50초
4분 00초~ 4분 15초
25분 15초~26분 36초
37분 24초~ 39분 20초
⓱ 길선's평양만사, 2-78. 부모님 생각이 간절해지는 추석 2019. 9. 9
https://kzread.info/dash/2-78-bumonim-saeng-gag-i-ganjeolhaejineun-chuseog/hX-op5ikdKzbes4.html
1분 30초~2분 50초
4분 40초~5분 12초
12분 50초~14분 40초
19분 20초~ 20분 12초
21분 38초~26분 08초
⓲ 순실행님요리수다, 북에서 온 편지 2019.9.23.
https://www.youtube.com/watch?v=qzsgAXWhGsI
3분 56초~4분 44초
19. 순실행님요리수다, 내가 만난 남편과 시댁식구들 1편 2019. 10. 16.
https://www.youtube.com/watch?v=_ZAz3sF27vQ
00분 40초~3분 55초
9분 10초~9분 20초
1) 고향에 대한 발언
⓼ 2014.5.20. 통일북소리 8편
평양에서 태어났지만 개성에서 살았다. 평양과 비슷한 공급 체계가 돼 있는 곳이었다.
⑬ 2018.1.12. [탈탈탈] 88회 2부
평양에서 인민학교까지 졸업했다. 평양에서 인민학교(초등학교)를 졸업했기에 평양 전철 내부의 역사 기록물을 위시한 많은 시설들에 대한 기억이 있다.
⑯ 2019. 8. 30. 내가 살던 고향은 ... -이순실 편-
평양에서는 유치원 다니던 기억만 조금 나고 기억나는 게 별로 없으며, 황해북도 평산군 와현리가 성장한 고향이다
의 견
2014년에 말하기로는 평양에서 태어났지만 평양과 비슷한 공급 체계가 돼 있는 개성에서 자랐다고 했다. 2018년과 2019년에 말하기로는 평양에서 태어났지만 평산으로 이사했다고 했다. 평양을 몇 살 때 떠났는가에 대해서도 말이 달랐다. 2018년 1월 12일에 말하기로는 평양에서 인민학교(초등학교)를 졸업했기에 평양 전철 내부의 역사 기록물을 위시한 많은 시설들에 대한 기억이 있다고 했고, 2019년 8월 30일에 말하기로는 평양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을 정도의 어린 시절에 평양을 떠났다고 했다. 전자의 발언은 평양을 12살 이후에 떠났다는 것이고, 후자의 발언은 평양을 5~7세에 떠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이를 줄이기 위한 작전인 것으로 보인다.
2) 생년에 관한 발언
2012.6.11. 이만갑에서는 2007년 이순실이 9번째 탈북에 성공했으며, 당시의 나이가 43세였다고 했다. 이순실이 1962년생이라는 뜻이다. 2015.8.15. 간증집회에서는 이순실이 1991년에 제대했으며 그때 나이가 29세였다고 잘라 말했다. 1962년생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순실 나이는 2015.11.7.제240광수로 발표되면서부터 줄어들기 시작했다. 2017.5.30. 간증집회에서는 ‘2007년 국정원 조사를 받을 때 41세’였다고 말했다. 이어서 82년도에 자기 나이가 16살이라고 말했다. 다 같이 1966년생이라는 뜻이다. 2018.1.12. 인터뷰 때에는 97년에 첫 탈북을 했는데 당시 나이가 29세였다고 말했다. 1968년생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가장 최근 자료가 실려 있는 나무위키에는 1960년생인 것으로 기재돼 있다.
의 견
2015.11.7.은 그가 제240광수로 발표된 날이다. 그 이전에는 그는 줄곧 1962년생이라 말했고, 그 후에는 1966년, 1968년생이라고 말했다.
3) 부모에 대한 발언
2012년 10월 4일의 발언에는 아버지가 군인이었고, 어머니는 군단장 전속 요리사였는데 가정이 부유해 남이 먹어보지 못하고 입어 보지 못한 것 다 입으면서 유복하게 자랐으며 노동당 당원 가족이라는 말을 했다. 2015년 8월 15일 간증에는 출신 성분은 대단한 집안이었지만 찢어지게 가난했는데 잘 살다가 가난해진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찢어지게 가난했다는 내용이 있다. 아버지는 황해북도 사령부에 근무했는데 별 두 알, 줄 둘을 찬 중장이었고, 어머니는 요리사였기 때문에 자기는 잘 먹어서 키가 컸다는 내용이 있다. 이순실의 학교와 아버지의 근무지는 이웃이며, 그 지역은 황해북도 평산군이고, 그 평산군 사령부에 아버지가 중장(2스타)으로 근무했다고 했다. 아버지는 이순실을 학교 가는 길에 동행하다가 길가에 쌓여있는 강냉이 자루에 있는 강냉이를 훔쳐오라 시켰고, 남의 감자, 호미, 신발 등을 훔쳐오라 훈련시켰는데 이 훈련 덕분에 이순실이 부대에서 도둑질을 잘해 표창을 받았다고 말했다.
2018년 1월 12일 인터뷰에는 어머니가 2군단장 전속 요리사이기 때문에 회의 때도 따라갔고, 야전 훈련 때에도 따라갔다는 내용이 있다. 아버지는 남의 호박을 훔쳐오라 했고, 어머니는 이웃 잘 사는 집 딸이 신은 예쁜 구두가 샘이 나서 한 짝만 훔쳐가 장마철 개울에 버리라고 시켰다는 말도 했다. 2019년 8월 30일에는 아버지가 툭하면 자식들 보는 앞에서 어머니에게 욕하고 때렸는데, 그런 아버지가 매우 미워 어머니가 닦아 놓은 아버지 구두를 개에게 던져주어 산산조각 나게 했고, 신문지에 아버지 이름을 써서 이웃에 다니면서 "이 아무개 타도"라는 데모를 해서 아버지 버릇을 고쳤다는 내용이 있다.
2019년 9월 9일 추석을 주제로 한 대담에는 아래 내용이 있다. 부모의 묘가 과수원 묘지에 있고 그 묘지는 군에서 관리한다. 제대하고 오빠랑 산으로 올라가 3년 전에 돌아가신 부모님 합장묘지에 갔는데 돈이 없어 오빠가 대리석, 스레트으로 비석을 만들지 못하고, 나무 비석을 박아놓았더라. 몇 주 후 다시 와보니 비석을 누가 뽑아갔더라. 6~7개월 후 다시 와보니, 묘지가 장마에 쓸려 납작하게 돼 있었다. 2019년 9월 23일에는 ‘북에서 온 편지’라는 제목으로 10년 동안 보관해온 오빠로부터의 편지를 읽어주었다. 중국에 있을 때 오빠로부터 여러 차례 편지가 왔는데 누군가가 모았다가 10년 전에 보내왔다고 소개했다. 이 편지 내용 중 괄목할 만한 부분이 있다. 형제들이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부모 없이 자랐다는 내용이다. 자랄 때에 부모가 없었다는 말이다. 이는 위에서 이순실이 말했던 모든 내용과 배치된다.
의 견
이상의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이순실이 부모에 대해 진술한 내용들 역시 말할 때마다 그 내용이 다르고 서로 상반돼 있다. 북한은 프롤레타리아 사회인데 어떻게 군단장이 여성 전속요리사를 둘 수 있다는 것이며, 여성 전속요리사가 회의 때 어떻게 군단장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며, 야전으로 작전을 하러 나갈 때 어떻게 여성 전속요리사를 데려다 요리를 만들어 먹을 수 있는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이 세상 아무리 호화로운 부르주아 국가의 군대라 해도 군단장이 여성 전속요리사를 가는 데마다 데리고 다닐 수는 없다. 만일 북한에서 이런 군단장이 있으면 하루도 견디지 못하고 인민재판이 되어 숙청당할 것이다. 북한 사단장은 월 4주 중, 1주는 최전방 초소에서 보초를 서고 2주는 내무반에서 병사들과 함께 자야하며 1주일만 자기 공관에서 잘 수 있다고 한다(신중철 진술).
아버지가 평산의 군부대 중장(2성장군)이면 2군단의 부군단장이거나 그 예하 사단의 사단장일 것이다. 일단 장군이면 군단에서 운영하는 군관숙소 영내에서 살았을 것인데 어떻게 앞집에 유치원 여선생이 살 수 있는 것이며 신문지에 아버지 이름을 써서 “타도 아무개”라고 일인 시위를 했다는 것인가?
부모의 산소에 대해서도 아버지가 장군이라서 군이 인민군 묘지에 수용하고, 군이 관리한다고 해놓고, 그 다음에는 오빠가 산에다 묘를 만들고 거기에 나무로 비석을 세웠다가 그 비석마저 도둑맞고 장마에 봉분이 사라졌다는 말을 했다. 2성장군의 묘를 북한이 이렇게 방치했다는 것도 황당한 이야기다. 중장(2스타)이나 되는 군관 아버지가 딸에게 도둑질을 시켰다는 것도 현실과 어울릴 수 없고, 물자가 귀한 북한에서 아버지의 출근을 위해 어머니가 닦아 놓은 구두를 딸이 개에게 던져주어 개로 하여금 걸레조각으로 만들게 했다는 이야기는 코미디 프로에서나 상상해 불 수 있는 허풍이다. 신문지에 아버지 이름을 써서 "이 아무개 타도"하자며 동네에 데모를 하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남한에서도 불 수 없는 코미디극이다. 북한의 신문은 로동신문인데 거기에는 늘 당과 수령의 사진이나 글이 실려 있기 때문에 소중하게 여겨져야 하는 당의 상징이다. 나무위키에는 이런 설명이 있다. “로동신문은 조선로동당의 기관지다. . 현재는 경제난과 여러 가지 사정이 겹쳐서 대략 20~30만 부 정도를 찍는다고 한다. 참고로 한국 최대 발행 부수라는 조선일보가 2016년 기준 151만 부 남짓이다. . . 북한에서 이 신문은 그냥 보고 버리는 용도가 아니라 당원 비당원 가리지 않고 생활 총화나 새로운 규약의 교육 같은 목적으로 활용된다. 또한, 김씨 일가의 초상화가 들어있는 지면은 구기거나 접지 말고 잘 펼쳐서 모아두라고 하고 있다. 이는 북한에 체류하는 외국인들도 조심해야 하는데, 1990년대에 경수로 건설 지원을 위해 파견된 남한 근로자들이 김정일 사진이 들어있는 신문을 다 보고 접어서 숙소 바깥에 폐지로 내놨다가 북한 근로자들과 심각한 마찰을 빚은 적이 있었다.
북한에서의 신문은 이순실의 이야기처럼 그렇게 함부로 다뤄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런 신문에다 자기 아버지 이름을 써서 아무개 타도라고 외쳤고, 그로 인해 동네에서 비판을 받아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폭력행위가 시정되었다는 말은 남한에서도 엽기적인 이변에 속할 것이다. 이처럼 모두가 사실이 아니라 임기응변식으로 쏟아낸 말 조각들이기 때문에 말할 때마다 서로 다르고 현실과 동떨어지게 된 것이다.
4) 군사 복무에 대한 발언
2013년 3월 19일에 출연한 프로에는 군위대학에서 2년 동안 공부하고 6개월 동안 실습한 후 22세에 졸업함과 동시에 준의사 자격증을 획득했다는 내용이 있다. 16세부터 29세까지 군대 생활을 했다는 내용도 있다. 2013년 7월 30일 자유아시아 방송에는 군사 복무를 11년 했고, 근무지는 개성시 장풍군이었다는 내용이 있다. 2014년 5월 20일 간증포로에는 19살 이전까지는 오전에는 학교에 다니고 오후에는 군부대 선수생활을 3년 동안 했기 때문에 군생활을 13년 했다는 내용이 있다. 16세부터 3년 동안 군부대 배구선수 생활을 했다는 뜻이다. 2014년 5월 20일 간증포로에는 군에서 배운 게 있다면 오로지 도둑질뿐이고, 29세에 제대했다는 내용이 있다. 2015년 8월 15일의 간증프로에는 2군단 15사단 간호장교였고, 11년 동안 간호장교로 복무했다는 내용이 있다. 대남 선전 차원에서 전방 초소에 30명의 미녀장교가 선발되어 남한 군인들에 보여주기를 했는데 그것은 1983년부터 시작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1983년에 입대하여 1991년에 제대했는데 휴가를 가지 않았으며, 집에 휴가를 가면 소대장 또는 중대장을 딸려 보내기 때문에 휴가를 가면 그 집은 중대장 또는 소대장 대접하느라 살림이 거덜난다는 내용이 있다. 1991년 제대할 당시 그녀의 나이는 29세였다는 내용도 있다.
의 견
군복무에 대한 위 발언들은 이순실이 2015년 11월 7일, 제240광수로 발표되기 이전에 있었다. 이 발언들에는 이순실의 생년이 1962년이라는 점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이순실이 군 복무에 대해 발언한 내용들에는 이순실의 진짜 나이가 반영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간호장교도 장교인데 간호장교를 휴가 보낼 때 소대장이나 중대장을 딸려 보낸다면 그 소대장과 중대장은 여타의 부대원들을 지휘공백 상태로 방치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부분 발언은 임기응변으로 지어낸 거짓이요 허풍이라는 생각이 든다.
5) 북에서 한 결혼에 대한 발언
위키백과에는 군사복무 시절에 알게 된 소대장과 결혼했지만 가정 폭력으로 인해 가출했고, 임신한 몸으로 꽃제비생활에 접어들었다고 기재돼 있다. 2012년 6월 1일 이만갑 프로에서는 군사복무 기간에 친분을 쌓았던 소대장에게 배낭 메고 가서 결혼식 없이 살았는데 남편이 술주정하여 많이 때렸다고 했다. 2014년 5월 20일통일 북소리에서는 같은 부대의 입당 보증인의 중매로 결혼을 했다고 말했다. 시댁 식구는 6명, 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 시아버지, 시어머니, 장애인 큰아주버니, 남편이었는데 혼자 먹여 살려야 하는 처지가 된 것도 모자라 남편이 폭행을 자행했고, 식구들 모두가 못 살게 굴어 가출해서 곧바로 꽃제비가 되었다고 말했다. 꽃제비 생활 도중에도 선거 때만 되면 집에 가서 주민 거주 여부에 대해 조사를 받아야 해서 시댁에 들렸는데 그 과정에서 임신이 되었다고 말했다. 꽃제비 생활은 시댁을 떠나면서부터 시작되었고 임신은 가출상태에서 꽃제비 생활을 하던 도중 선거 때 시댁에 잠시 들렸다가 술주정꾼 남편과 합방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술주정꾼 남편이 술에 취해 가출한 꽃제비와 합방을 해서 임신을 시켰다고 하는 것이다. 짐승 세계라는 것인가? 사실 여부를 떠나 나이 50대 중반에 들어 선 여인이 도대체 창피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인가?
2015년 8월 15일에는 2007년에 탈북을 시도했다가 체포되어 감옥 생활을 하고 만기 출소하는 날, 오빠가 혜산시 감옥에 찾아와 자기를 데리고 황해도 평산으로 데리고 갔는데 오빠네 식구들도 살기가 심히 어려워 나가겠다고 했더니 오빠가 시집을 가라며 신랑감의 개성 주소를 적어주었는데 배낭 하나 메고 70리 길을 걸어 그 주소로 찾아간 것이 결혼이었다고 말했다. 남편의 술 폭력에 대항해 싸우다가 집 유리창을 다 깨먹고 7개월 만에 탈출했는데 그 때는 이미 임신이 되어 있었다고 했다. 입덧을 했는데 돼지고기가 그렇게 먹고 싶었다고 말했다.
2017년 5월 30일에 한 말은 다음과 같다. 8번째 탈북 후 감옥에서 만기 출소했는데 감옥에서 고생한 후유증으로 무릎이 팅팅 붓고 고름이 나왔다. 이럴게 병든 나를 오빠는 오빠의 친구에게 시집을 보냈는데 시집은 개성 장풍리 삼거리에 있었다. 7개월 만에 뛰쳐나와 보니 이미 임신이 되어 있었다. 2018년 1월 12일에는 8번째 탈북하다 체포돼 감옥살이를 했는데 만기가 되자 보위부가 오빠에게 연락해서 나를 데려가 다시는 탈북을 하지 못하도록 관리하라고 하면서 나를 오빠에게 내주었는데 오빠 집에 오니 집이 파산 직전이라 나를 시집가라 하면서 남편의 될 사람의 개성 주소를 써주어서 배낭 하나 메고 70리 길을 걸어가 오빠의 친구와 그냥 살았다고 했다. 2007년에 8번째 탈북이 이루어졌고, 이어서 오빠가 정해준 오빠 친구에게 개성으로 시집을 가서 7개월 살고 뛰쳐나와 임신을 했다고 표현돼 있는 것이다. 2019년 9월 9일에는, 꽃제비들도 선거 때면 집에 들어가야 했지만, 나는 선거고 뭐고 무시하면서 집에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의 견
종합해 보면 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방송 프로마다 틀리다. 남편에 대해서는 군 복무시절 친하게 지냈던 소대장과 결혼했다고도 했고, 오빠가 중매한 오빠의 친구라고도 했고, 입당 시에 보증을 서준 보증인의 중매로 만난 사람이라고도 했다. 임신과 관련해서도, 시집에서 가출한 후 선거 때마다 실시하는 거주인 조사에 응하기 위해 시집을 방문했다가 그 과정에서 임신을 했다고도 했고, 거주지 조사 과정에 응한 적이 없었다고도 했고,, 임신은 가출할 때 이미 되어 있었다고도 말했다.
여기에는 매우 중시해야 할 대목이 있다. 이순실은 2007년에 8번째 탈북을 했고, 그 결과 감옥에 가서 6개월 감옥살이를 한 후 곧장 오빠에 이끌려 혜산에서 평산의 오빠집으로 온 후 곧장 오빠가 정해준 개성에 사는 오빠 친구에게 시집을 가서 7개월 살고 뛰쳐나와 임신을 했다고 표현했는데 어떻게 4년 전인 2004년 12월 25일 또는 27일에 그 딸아이를 출산했다는 것인가?
북한의 시댁에는 시할아버지와 시할머니는 없고 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가 있다고 했다. 남한에서 현 남편과 결혼한 시점, 하나원을 이수한 시점을 사실로 본다면 8번째 탈출 시기는 2006년 이전인 것으로 보인다. 2006년 당시 이순실(1962년)의 나이는 44세인 것으로 추정되고, 시할아버지 시할머니는 없고 증조할머니와 증조할아버지가 있다면 그 증조부모의 나이는 적어도 80~100세가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런 증조부모들이 아들과 며느리 없는 증조 손자의 집에서 동거한다는 것도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거니와 그 늙은 증조부모가 증조 며느리를 못살게 닦달했다는 이야기도 황당하게 들린다. 이순실은 남편의 폭력을 이기지 못해 가출하여 꽃제비 생활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의 꽃제비 생활은 8번째 탈북에 실패한 2006년 이후에 시작됐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는 1991년 군복무를 마치자마자 꽃제비 생활로 접어들었다는 꽃제비 관련 이야기와 상충한다. 44세에 결혼을 했다는 결론까지 이끌어낸 이순실의 갈지자 발언이 참으로 현란하다.
6) 꽃제비 역사에 대한 발언
2012년 9월 6일, 시카고 중앙일보에는 먹을 것이 없어 개미를 잡아먹었다고 했다. 2012년 10월 4일에는 군복무 11년이 끝나자마자 꽃제비 생활이 이어졌다고 말했다. 1991년부터 꽃제비생활을 시작했다는 말이었다. 2012년 10월 4일에는 장교생활이 끝나자마다(1991년) 곧바로 꽃제비가 되었고, 그 후 5년 동안은 밖에서만 잤는데 그 과정에서 임신이 되었다고 했다. 1991~1996년까지 꽃제비로 밖에서만 잠을 잤는데 그 기간에 임신을 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딸아이는 1997년 이거나 그 이전에 출산되었다는 말이 되는데 이는 딸아이를 2004년 12월에 출산했다는 이야기와 상충한다. 그녀는 방송할 때마다 헤어질 때의 딸의 나이가 2살이었으며 ‘내 딸은 영원한 2살’이라며 청중의 눈물을 자아냈다.
2013년 3월 19일에는 매일 압록강 가에 가서 얼음물 먹고 물 길러 온 할머니들이 된장을 물에 풀어주었다고 말했다. 2013년 7월 11일에는 중국에 갔을 때 아이에게 배추밭 고랑에 늘어져 있는 부패한 병아리를 먹였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기를 업고 농촌에 갔다. 배추에 농약을 뿌렸는데 풀어놓은 병아리들이 배추에 붙은 벌레를 잡아먹고 다 죽었다. 주인이 병아리들을 거름하려고 밭고랑에 쭉 늘어놓았다. 갈비가 드러날 정도로 부패했다. 그 병아리들을 모두 걷었다. 농약을 먹고 부패한 병아리를 먹으면 안 될 것 같았지만 뒤에 업힌 아이가 자꾸 먹겠다고 했다. 개울에 가서 씻어서 뼈가 녹도록 양재기에 삶았다. 고기를 씹어서 국물은 내가 삼키고 고기 건데기를 아이에게 먹였다.” “북-중을 연결하는 세관다리가 있다. 비닐 방마를 구해 그걸 깔고, 거기에 아이를 둘둘 말아 배낭에 넣어 안고 잤다. 너무 추운 새벽에는 아이가 꼬무락거리는 것을 보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아파트 창문 밑에 방마 하나 뒤집어쓰고 웅크리고 잤다. 아침에 그 집 아이가 나오는 순간 문이 열리니까 등에 업혀 있던 아이가 ‘나보고 들어가서 먹을 거 내라 해, 엄마 들어가’ 하고 말했다. 그래서 들어갔더니 주인아줌마가 왜 문이라도 두드리지 그랬느냐며 강냉이죽을 주었다. 어른 양말 몇 켤레 준 것을 가지고 아이 손과 발에 끼워주었다.”
2013년 7월 30일에는 이렇게 말했다. “91년에 사회에 나와서 93년까지는 집 근처에서 나돌았다. 그때까지는 꽃제비 생활은 안하고 나물 먹고 살았다. 93년부터 엄청난 고난이 있었다. 2015년 8월 15일에는 이렇게 말했다. 제대하자마자 장마당에서 할머니에게 군복과 팬티까지 벗어주고 빵 6개를 받았다. 할머니가 입었던 초라한 옷을 입고 왔다. 창피해서 집에 못 들어가 꽃제비가 됐다. 내 나이 29세였다. 91~97까지 평산에서 도둑질 하면서 꽃제비 생활을 했다. 1997년 북중 국경지역 양강도 혜산까지 갔다. 1997년까지는 훔쳐 먹을 데가 많았다. 그렇게 훔쳐 먹다가 훔쳐 먹을 데가 없어서 걸어서 양강도 혜산까지 갔다. 가보니 전국의 꽃제비가 다 모였더라.”
2019년 8월 30일에는 이렇게 말했다. 97년 탈북을 시작해서 2007년에 성공했다. 97년 어느 날까지는 고향에 있었다. 평산군은 곡창지대로 알려져 전국의 꽃제비들이 몰려왔다. 꽃제비들이 몰려와 살 수가 없었다. 우라늄 광산에서 흘러나오는 폐수로 인해 예성강 물을 먹을 수 없었다. 먹을 양식도 없고, 물도 없고, 전기도 없어서 1997년 양강도 혜산으로 도망쳐갔다. 양강도 혜산에서 10년 꽃제비 했다. 2019년 9월 9일에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죽을죄를 졌다. 제대한 직후, 집이 풍비박산 나니까 먹을 게 없어서 여동생과 함께 개성시 개평군 삼풍리 박연폭포 근방에 외삼촌 집으로 갔다. 할아버지 수의를 훔쳐 배낭에 넣고 동생과 함께 삼촌을 피해 줄행랑을 쳤다. 그리고 여동생과 함께 황해도 평산군 장마당에 갖다 팔았다.
의 견
꽃제비 생활을 시작한 시기가 발언마다 다르고, 현실감이 떨어진다. 1991년 29세에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시작됐다고도 했다. 제대하고 여동생과 함께 개성에 있던 외삼촌 집에 가 외할아버지 수의를 훔쳐다 장마당에 팔았고, 자기가 입었던 군복과 팬티를 장마당에 가서 안노인 옷과 바꿔 입고 빵 6개를 얻었는데 할머니가 입었던 남루한 옷을 입고서는 집에 오기가 너무 창피해서 중간에 꽃제비가 되었다고도 했다. 1991년부터 1993년까지는 집 근처에서 나물 먹고 살 수 있어서 꽃제비 생활을 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1991년부터 1997년 어느 시점까지는 평산에서 꽃제비 생활을 했지만 전국의 꽃제비들이 몰려오고 예성강에 광산 폐수가 흘러들어 1997년에는 6개월에 걸쳐 혜산으로 걸어갔고, 혜산에서 10년 동안 압록강 얼음물 마시고 세관다리 밑에서 비닐방막 하나로 딸과 함께 지냈다는 말도 했다. 이순실은 1997년 어느 날 평산에서 혜산시까지 갔고, 2007년 8번째 탈북에 실패해 감옥에서 나와 오빠와 함께 혜산에서 평산으로 왔다가 개성으로 시집을 갔다고 했다. 1997년부터 2008년까지는 혜산에 있다가 2008년어느날 오빠에 이끌려 개성으로 시집을 갔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어떻게 딸을 2004년 12월에 혜산에서 출산했다는 것인가?
출산을 2004년 12월에 했다면 임신은 2004년 2월에 해야 했고, 그렇다면 2004년 2월에 이순실은 남편과 같은 공간에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순실은 2008년 8번째 탈북에 실패한 후 오빠에 이끌려 평산으로 와서 결혼을 했다고 했다. 1997년 혜산에 갔다가 2007년 8번째 탈북에 실패한 후 2007년에 결혼한 여인이 어떻게 2004년 12월 혜산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말인가? 1991년부터 꽃제비가 되었다고도 했다가 1993년까지는 산나물이 있어서 꽃제비 생활을 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2007년의 딸 나이가 2살이었다고 반복해 말하면서 임신을 1991~1996년 사이에 했다는 말도 했다. 이순실은 2004년 12월 25일 또는 27일 출산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결혼은 2007년 8번째 탈북에 실패하고 감옥에서 만기 출소한 이후에 했다고 말한다. 1991~1996년 사이에 임신한 아이라면 2004년 12월에 출산할 수 없으며, 2007년에 결혼하였다면 그보다 3년 전인 2004년 12월에 출산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중국의 시골 배추 밭고랑에 늘어놓은 병아리가 있었다는 말도 현실과 부합되기 어렵다. 중국 농부들이 농약 뿌린 배추 밭에 수많은 병아리를 풀어놓았다는 것도 사실 같지 않고, 2살 난 딸아이가 그걸 먹겠다고 졸랐다는 말도 허구인 것 같고, 졸랐다고 해서 농약 먹고 죽었다는 썩은 병아리를 삶아 먹였다는 말도 현실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런 병아리를 삶아먹고도 모녀가 탈이 없었다는 이야기도 기적 같은 이야기다. 탈북하여 애를 업고 중국에 간 처지에, 썩은 병아리를 푹푹 끓일 수 있는 식도구, 땔감, 라이터 등을 어떻게 구했는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한마디로 도깨비 언어를 하고 있는 것이다.
7) 출산에 대한 발언
2012년 10월 4일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장교생활이 끝나자마자(1991) 곧바로 꽃제비가 되었다. 5년 동안 밖에서만 잤다. 그 과정에 임신을 했다. 애기를 낳았다. 장마당 어머니들이 동냥젖을 먹여주었다.” 위키백과에는 혜산청년역 길바닥에서 딸 출산했다고 기록돼 있다. 2012년 6월 11일동아일보 기사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2004년에 출산했다. 꽃제비들이 모이는 여관에서 산후 조리를 했다. 강냉이죽 국물로 연명했다. 젖이 나오지 않아 아이에게도 강냉이죽 국물을 먹였다.” 같은 날 이만갑 프로에서는 이런 말을 했다. “혜산 역전에서 낳은 후 7층짜리 꽃제비 여관에서 강냉이죽 먹으면서 산후조리를 했다. 아기는 잠시 소아병동에 입원했었다. 아이랑 동반탈출 했다.
2012년 10월 4일에는 이런 말을 했다. “지나가던 할머니가 유리조각으로 탯줄을 끊어줬다. 비닐장막 하나 쓰고 밖에서 살았다. 4일을 굶었다. 지나가던 여인들이 젖을 물려주곤 했다”. 2013년 3월 19일에는 이렇게 말했다. “역전 옆 아궁이가 아이 낳은 자리였다. 지나가던 할머니가 애 받아주고 깨진 유리로 탯줄을 잘라주었다. 아픔보다 할머니가 고마워 엉엉 울었다. 날씨가 얼마나 추운지 애 낳다 흘린 눈물이 다 얼어붙었다.”
2014년 5월 20일에는 이렇게 말했다. “역전 보일러실에서 아기를 낳았다. 재를 밖에다 버렸는데 그 재 위에 비닐방막 깔고 진통을 했다. 할머니가 쓰레기장에서 깨진 유리를 가져와 탯줄을 끊었다. 할머니가 나에게 장마당에 가면 살 수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할머니가 시커먼 앞치마를 벗어서 아기를 싸주면서 장마당으로 가라 했다. 그래서 곧장 장마당으로 갔다. 12월 25일이었다.”
2015년 8월 15일에는 이렇게 말했다. “역전 보일러 실, 방막 깔고 앉아 12월에 출산했다. 12월 27일이었다. 지나가던 할머니가 도와줬다. 앞치마 찢어서 실오라기 뽑아내고 깨진 유리조각 찾아다가 탯줄 끊고 실오라기로 잡아매 주었다. 추위가 대단했다. 누가 양말 주면 아기 발과 팔에 끼워 옷이 되게 했다.”
2018년 1월 12일에는 이렇게 말했다. “혜산역 아궁이 옆에서 아기를 낳았다. 그 할머니가 벗어준 앞치마에 아이를 싸들고 할머니가 일러준 대로 장마당으로 갔다. 애를 배낭 속에 집어넣고 손을 높이 들어 도와달라고 소리쳤다. 장마당에서 3년 살았다. 아기가 3살 될 때까지.”
의 견
종합해 보면 이야기를 꺼내놓는 시기마다 출산 장소가 다르고 출산일이 다르다. 임신한 시기가 1991년에서 1996년 사이라고도 말했다. 1996년 이전에 임신한 아이라면 1997년에는 출산을 했어야 했다. 출산일이 2004년 12월 25일이라고도 했고, 27일이라고도 말했다. 2004년 12월에 출산을 하려면 2004년 2월경에는 임신을 해야 했다. 그런데 이순실은 2007년 8번째 탈북에 실패한 후 결혼을 했다고 말했다. 이이를 낳은 장소와 장면이 발표 시기마다 다르다. 혜산청년역 길바닥에서 출산했다고도 했고 역전의 따뜻한 아궁이 앞에서 출산했다고도 했으며 역 보일러실에서 낳았다고도 했다. 아기를 낳자마자 앞치마에 싸가지고 배낭에 넣어 장마당으로 달려가 손을 높이 들고 도와달라고 외쳐서 동냥젖을 얻어 먹였다는 말도 했다. 아기를 낳아 7층짜리 꽃제비 여관에서 산후조리 하면서 아이에게는 강냉이죽 국물을 먹였는데 그 과정에서 아이가 잠시 소아병동에 입원하였다는 말도 했다.
12월의 강추위에 할머니가 앞치마를 입었다는 말도 현실적이지 않고, 12월 하순의 압록강 추위 속에 방금 자궁에서 나온 아이를 겨우 앞치마에 말아 배낭에 넣어가지고 장마당으로 달려가 4일 동안 굶으면서 동냥젖을 먹였다는 이야기도 믿기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말과는 달리 산후 조리를 7층짜리 꽃제비 여관에서 했고, 거기에서 강냉이죽 국물을 아이에게 먹였고 아기를 소아과 병원에 입원을 시켰댜는 말도 했다. 아이를 낳은 날짜와 장소가 발표할 때마다 다르고 산후 과정이 발표 때마다 다르다. 아이를 실제로 낳은 것인지, 이순실이 과연 아기를 길러본 여성인지 의문이 가는 대목들이다. 말하는 내용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 현실에 부합되지도 않는다. 아이에 대한 이순실의 이야기들은 남한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내게 하려고 꾸민 가공의 작품이라는 의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8) 탈북과정에 대한 발언
2012년 6월 11일, 동아일보는 이렇게 기사를 썼다. 첫 탈북을 시도한 해는 2001년이었다. 9번 북송 당했다가 9번 고문당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2006년 마지막 10번째 탈북했고, 딸과는 중국에서 2008년에 생이별했다. 중국 브로커에 속아 딸을 잃었다. 택시 운전사가 검문을 피한다며 이순실과 딸을 따로 태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기사는 인신매매범이었다. 이순실은 5000위안(약 923,000원), 딸은 3000위안(약 554,000원)에 팔렸다.
2012년 9월 6일, 시카고 중앙일보는 이렇게 썼다. 드디어 10번째에 탈북에 성공하지만 중국 인신매매단에 의해 아이가 눈앞에서 3천원에 팔려갔다. 딸아이가 그렇게 울던 것은 처음이다. 저기 가서 만나자고 했는데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아이를 하루라도 잊어본 적이 없다. 2012년 10월 4일에는 이렇게 말했다. 화장실 밑으로 빠져서 변을 파는 구멍으로 나왔다. 상처에 똥독이 올랐다. 탈출한지 이틀 만에 다시 잡혔다. 감옥살이를 6개월 했다. 탈북은 먹기 위해 했지, 한국에 간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중국 공안에 잡혔다. 애기 따로 엄마 따로 택시에 나눠 탔다. 사람들이 5천 위안과 3천 위안에 팔렸다고 하더라.
맨 마지막 탈북한 시점은 장마철이었다. 장마철에는 물이 많아 사람이 떠내려가니까 깊은 물에는 경비를 서지 않는다. 오로지 중국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애기 엄마 4명이 4살 미만짜리 애기들을 배낭에 메고 강을 건넜다. 나는 원래 신발이 없었다. 강 밑에 있는 돌멩이들에 물때가 끼어서 미끄러지면 끝장이기 때문에 새끼줄로 꽁꽁 묶었다. 건너자마자 중국 공안에 잡혔다. 처음에는 엄마, 아이 한 차에 태워가다가 갈림길이 나서자 검문소가 있다 하면서 어른과 아이들을 따로 분리해 따로 차에 태웠다. 갑자기 차 안에 함께 탔던 브로커들이 때리고 협박했다. 아이들은 3천 위안에 팔렸으니 찾을 생각하지 말고 입 다물라고 협박하며 마구 때렸다. 브로커들의 말로는 엄마들은 5천 위안에 팔렸다 하더라. 3일 동안을 달려 어느 농촌 집에 내려놓았다. 사람들이 구경 와서 한 사람씩 선택해 간다는 것이었다. 4명은 다 도망을 쳤다. 도망치다 2명은 다시 잡혀갔고, 나를 포함한 2명은 성공했다. 산으로 가니 무덤 지키는 아버지가 저기 십자가가 있는 집으로 가라고 했다. 그 한인교회에서 여러 달 먹고 잤다.
2012년 12월 4일에는 이렇게 말했다. 2살 된 딸아이를 업고 열 번째 탈북을 시도했다. 하나원은 2006년 12월에 이수했다. 현 남편과의 결혼은 2007년 10월 25일에 했다. 2013년 7월 23일에는 이런 말을 했다. 유독 나에게만 고문이 가혹했던 이유는 내가 당원이었고 부모의 출신성분이 좋았으며 국가로부터 많은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7번째와 8번째는 때리지도 않더라. 2013년 3월 19일에는 이렇게 말했다. 네 번째까지는 홀몸으로(애가 없을 때니까) 탈북했다. 잡히면 중국에선 임산부로 대우해줬지만 북한에선 누구 종자냐고 해서 남편 이름 대니까 군인 자식이라 살려줬다. 나는 내 남편이 2군단 출신이라고 말했다. 한국 가다 잡힌 아주머니가 감옥에 들어왔는데 한국 가는 길 알려줘서 한국 가는 희망 잃지 않았다. 열 번 만에 탈북 성공했다. 2013년 7월 30일에는 이렇게 말했다 1997년부터 10년 동안 탈북해서 8번 중국에서 강제북송을 당했고 9번 만에 성공했다.
2014년 5월 20일에는 이런 말을 했다. 조국에 대한 배신감이 들었다. 세관다리 밑에서 5년 동안 꽃제비 생활을 했다. 그 때 탈북을 결심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탈북이라는 걸 몰랐다. 그냥 밀수꾼들이 왔다갔다하는 것을 탈북이라고 알고 있었다. 우리 같이 돈 없는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장마당에서 아주머니들을 만나게 되었다. 철국이 엄마를 만나게 됐다. 둘이 끌어안고 통곡했다. 알고 보니 친구였다. 우리 중국 가자고 그녀가 제안했다. 겨울에 애기를 배낭에 업고 중국에 갔다. 길에 버린 언 사과를 게걸스레 먹고 있는데 공안 요원들이 뒤로부터 다가왔다. 아기는 “엄마 나도 줘, 나도 먹을 래”, 공안요원들이 우리를 보더니 불쌍했는지, 태워가지고 변방대로 데려갔다. 거기에 3일 동안 있었다. 그들은 끼니때마다 하얀 쌀죽에 돼지고기 삶아서 주었다. 그리고 북한으로 보냈다. 북한 보위부 요원들이 난로 쑤시는 쇠꼬챙이로 지졌다. 코바늘로 손바닥을 고문했다. 1997년 혜산으로 올라가 5년 이후인 2002년에 첫 탈북을 해서 중국에 가서 돼지고기와 쌀죽을 먹고 북송됐다는 것이다. 1997년에 첫 탈북을 했다는 이전의 말과 다른 것이다.
2015년 8월 15일에는 이런 말을 했다. 중국에 가자고 결심했다. 겨울에는 엄청 추워 탈북 시즌이었다. 1-2월에는 외상으로 중국에 갈 수 있었다. 외상으로 한국에 보내 준 후 한국에 가면 정착금에서 뺏아간다. . . 탈북과 감옥가는 일을 8번 계속했다. . 1997~2007년 10년 사이, 4년 동안 교도소 생활했다. 2007년에 8번째 탈북으로 감옥에서 출소했다. 2017년 5월 30일에는 이런 말을 했다. 1997년부터 2007년까지 10년간 8번 북송 당했다. 매번 감옥 갔다. 8번째 출소하는 날 다시 중국에 못 가게 하려고 오빠한테 인계했다. 오빠네 가서 올케, 큰조카 모습 보고 더 이상 여기 못 있겠다 생각해 떠나기로 작정했다. 애를 데리고 중국에 가자 결심했다. 평산에서 혜산으로 다시 이동해 배낭에 아이를 담아 등에 업고 강에 들어섰다. 아이도 압록강 강 건너는 것을 알았다. 총에 맞고 잡혀 간다는 것을 알았다. 공포를 알았다. 아이가 배낭끈을 붙들고 부들부들 떨었다. 눈물을 꾹 꾹 참으면서 소리 내서 울지 못했다. “애기야 울자마라, 울면 군대가 총 쏜다, 절대 울지 마라. 우리 다 죽는다‘ 말했더니 애기가 ’알았어 엄마 알았어‘ 말했다. 숲속에 숨어있는 인신매매단에 잡혔다. 인신매매단이 강제로 빼앗자 아이가 엄마 손을 꼭 잡았다. 2살짜리가 그렇게 힘이 센지 몰랐다. ”엄마 놓지마, 꼭 잡아 놓지마“ 소리쳤다. 얼어붙은 강을 건넜다. 건너니까 강 옆에 숨어 있던 인신매매단이 아이를 분리시켰다. 아이가 엄마 손 잡고 소리를 쳤다. "엄마 안 가 안 가, 같이 가, 엄마야 같이 가, 같이 가, 나 안 가, 나 배 안 고파, 이제 배고프다 말 안 할게."
2018년 1월 12일에는 이런 말을 했다. 다. 혜산 보위부 감옥에 잠깐 수용됐다. 원칙대로라면 고향 주거지 감옥에 가야 하는데 교통수단이 안 되는 데다 수용인은 많고, 먹을 게 부족하니까 금방 풀어주었다. 쉽게 넘어가고 쉽게 풀어주는 환경이었다. 나는 8전 9기로 탈북에 성공한 사람이다. 6번째 7번째 잡히니까, 보위부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너 또 왔냐” 하면서 몇 번 때리더니 아이가 있으니까 중국으로 아주 가라고 했다. 아이랑 압록강 강둑에서 자는데 꽃제비 엄마들이 저벅저벅 자갈밭을 걷는 소리가 났다. 배추, 무, 볏단, 강아지 등을 중국에서 훔쳐오는 길이었다. 이들은 중국에는 먹을 게 지천이라 말했다. 나더러 중국에 가라고 했다. 그래서 강을 건널 생각을 했다. 97년부터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중국 변방대에 잡혀가면 쌀죽도 끓여주고 돼지 껍데기도 삶아주었다. 8번째 탈북하니까, 오빠에게 연락해서 데려가게 했다. 와보니 오빠 집이 파산 직전이었다. 다시 나가려 하니 오빠가 ‘너는 병자다. 무르팍에 물이 차서 붓고, 몸은 병자이니까 시집을 가라했다. 오빠가 써주는 주소를 가지고 70리 걸어서 개성으로 갔다. 그것이 시집이었다. 남편은 오빠의 친구였다. 장마당 가게 주인이 식기들을 집으로 갖다 놓으라고 심부름을 시키자 중간에서 팔아 양식을 구했다. 그리고 1월에 압록강을 건넜다. . 건너자마자 인신매매원들이 풀밭에서 튀어나와 아기를 강탈해 놓고, 내가 보는 앞에서 아기를 장마당 물건처럼 흥정했다.
2019년 8월 4일에는 이런 말을 했다. 97년부터 탈북시도해서 2007년에 한국에 왔다. 꽃제비로 중국에 주워 먹으러 가는 사람들이니까, 그냥 잡으면 보위부로 보냈다. 중국도 북한도 “너 또 왔나” 하고 감옥에 넣었다가 다시 내주곤 했다. 2019년 8월 30일에는 이렇게 말했다. 97년 탈북을 시작해서 2007년에 성공했다. 97년까지는 고향에 있었다. 2019년 9월 9일에는 이렇게 말했다. 북송 됐을 때 오빠 손잡고 집에 가라 해서 오빠와 함께 집에 왔다. 오빠의 손을 잡고 부모님 산소를 한식 때 찾아가보니, 초라한 묘에는 굵은 싱아들이 자라있었다. 어머니가 주신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다 베어다 장마당에 팔았다. 2019년 9월 26일에는 중국에서 식당 일을 했다는 말을 했다. 중국에 들어와서 저를 포함해 탈북자 3명이 식당에서 설거지 일을 하면서 지하방에서 잤다. 곰팡이가 쓸고 하수관에서 물이 떨어졌는데 그걸 피해 두 명은 침대에서 한 명은 바닥에서 잤다.
의 견
위 발표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탈북 스토리의 앞과 뒤가 맞지 않고 시기마다 말이 다르며, 현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들이 많아 그녀의 탈북 스토리기 과연 실존했던 것이기는 한 것인가, 장진성의 탈북 스토리처럼 가공해낸 스토리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간다. 첫 탈북을 시도한 해도 여러 가지로 말했다. 첫 탈북을 2001년에 했다고도 했다. 97년부터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고도 말했다. 97년부터 탈북 시도해서 2007년에 왔다고도 했다. 97년까지는 고향에 있었다는 말도 했다. 딸은 유리독이 올라, 나는 굶어 죽기를 바라면서도 행인들에게 젖을 구걸해 아이를 키웠는데 2살이 돼도 걷질 못했기 때문에 아기를 살리기 위해 탈북을 시도했다는 말도 했다. 첫 번째 탈북한 시점에 대해서는 1997년이라 했다가 2001년이라고 했다가 2002년이라고도 했다가 딸아이가 2살이 돼도 걷지를 못하기 때문에 딸을 살리기 위해 2006년 12월 이전에 시도했다고도 말했다.
마지막 탈북에 대한 스토리도 달랐다. 마지막 탈북은 10번째였고, 2006년이었다는 말도 했다. 딸과는 중국에서 2008년에 생이별을 했다는 말도 했다. 맨 마지막 탈북은 장마철이었다고도 했다. 장마철에는 물이 많아 사람이 떠내려가니까 깊은 물에는 경비를 서지 않기 때문에 깊은 물을 선택해 엄마 4명이 4살 미만의 애기들을 배낭에 메고 강을 건넜는데 곧바로 중국 공안에 잡혔고, 아이들을 빼앗긴 상태에서 엄마들만 3일을 꼬박 달려 데리고 가 어느 농촌에 내려놓고 팔려고 했는데 2명은 팔려갔고, 자기를 포함해 2명은 도망을 해서 한인교회로 가게 됐다는 말도 했다. 이와는 정반대되는 말도 했다. 마지막 탈북을 여름에 한 것이 아니라 한겨울 1월에 했다는 말을 한 것이다. 가장 추운 1월에 얼어붙은 강을 건너 탈북에 성공했다는 말을 한 것이다. 8번째 북송되었고, 8번째 감옥살이를 했는데 출소하는 북한 보위부는 나를 다시 중국에 못 가게 하려고 오빠한테 인계됐는데 오빠네 가서 올케, 큰조카 모습 보고 더 이상 여기 못 있겠다 생각해 애를 데리고 중국에 가자고 결심한 후 배낭에 담아 등에 업고 강에 들어섰다는 말도 했다. 이전에는 2007년 8번째 탈북 실패를 한 후 오빠집에 이끌려 왔다가 시집을 갔다 해놓고, 지금은 오빠 집에 왔을 때 이미 애기가 있었고, 그 애기를 업고 마지막 탈북을 결심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원을 이수한 시기가 2006년 12월이라 했고, 남한에서 현 남편과 결혼한 날짜가 2007년 10월 25일이라고 했다.
8번째 북송당한 후 감옥에서 오빠 손잡고 집에 가라 해서 오빠와 함께 집에 왔고, 오빠와 손잡고 부모님 산소를 한식 때 찾아가보니, 묘에 굵은 싱아들이 자라있어서 베어다 팔았다는 말도 했다. 8번째 탈북하니까, 오빠에게 연락해서 데려가게 했다. 와보니 오빠 집이 파산 직전이었다. 다시 나가려 하니 오빠가 “너는 병자다. 무르팍에 물이차서 붓고, 몸은 병자이니까 시집을 가라”했고, 오빠가 써주는 주소를 가지고 70리 걸어서 개성으로 갔는데 이것이 곧 시집이었다는 말도 했다. 8번째 탈북 이후 곧장 2살 난 아이를 업고 영원한 탈북으로 이어지는 강을 건넜다고도 했고, 8번째 탈북 이후 오빠 친구와 결혼했다는 말도 했다. 마지막 탈북에 대해서는 한겨울 1월에 압록강 얼음 위로 건넜다고도 했고, 장미철에 가장 깊은 곳으로 애기를 업은 엄마 4명이 함께 건넜다고도 했다. 탈북에 성공한 때가 2006년이었다고도 했고, 2007년이었다고도 했으며 2008년이었다고도 했다. 장미철에 물이 가장 많이 불어나서 경비조차 설 필요가 없는 깊고 험한 격랑을 이겨내고 4명의 엄마들이 각기 애를 하나씩 업고 압록강을 건넜다는 것은 무협지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이지 아기를 업은 엄마들에 해당할 수는 없는 황당한 우화다.
마지막 탈북 시점과 상황도 발표할 때마다 다르다. 마지막 탈북이 9번째라고도 했다가 10번째라고도 했다. 마지막 탈북시기에 대해서는 2006년, 2007년, 2008년이라고 각기 달리 말했다. 추운 1월 얼어붙은 강을 혼자 아이 업고 건넜다고도 했고, 장마철에 경비를 피하기 위해 가장 깊은 곳을 골라 애기를 업은 4명의 엄마들이 함께 강을 건넜다는 황당한 말도 했다. 8번째 탈북에 실패한 후에는 혜산에서 평산으로 내려와 오빠 친구와 결혼을 했다는 말도 했고, 오빠와 함께 평산으로 내려와 오빠가 가난하게 사는 것을 보고 2살 난 아이를 업고 곧장 강을 건널 결심을 했다는 황당한 말도 했다.
황해도 평산에서 특별관리지역인 ‘국경연선지구’에 속한 혜산으로 가려면 푸른 줄 2개가 인쇄된 여행증을 받아야 하는데 이런 특수여행증을 받으려면 신분과 뇌물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순실은 마치 평산과 혜산 사이를 왔다 갔다 반복하는 행위가 여행증 없이도 가능하고, 도보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처럼 이야기를 했다. 이순실의 탈북 과정을 보면 이순실은 1997년 평산에서 6개월 동안 걸어서 혜산에 갔고, 2007년 8번째 탈북과 감옥생활을 마친 후 오빠와 함께 평산으로 내려왔고, 다시 혜산으로 가서 마지막 탈북에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전개돼 있다. 2017년 5월 30일, 이순실은 “달구지나 기차보다 더 빠른 게 사람 걷는 거다. 혜산에까지 6개월 걸렸다” 이렇게 말했다. 평산에서 혜산으로, 혜산에서 평산으로, 다시 평산에서 혜산으로 여행을 했다는 것은 북한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가공의 스토리에 속한다.
탈북한 횟수에 대한 말도 여러 가지다. 2살 된 딸아이를 업고 10번째 탈북을 시도했다는 말도 여러 번 했다. 1997년부터 10년 동안 탈북해서 8번 중국에서 강제북송을 당했고 9번 만에 성공했다는 말도 여러 번 했다. 1997년부터 2007년까지 10년간 8번 북송 당했다는 말도 했다. “나는 8전 9기로 탈북에 성공한 사람”이랴는 말도 했다. 9전 10기라는 말도 여러 번 했다.
탈북 동기에 대해서도 제각각이다. 한국에 가다가 잡힌 아주머니가 감옥에 들어왔는데 한국 가는 길 알려줘서 한국 가는 희망 잃지 않았다는 말도 했다. 아이랑 압록강 강둑에서 자는데 중국에서 배추, 무, 볏단, 강아지 등을 중국에서 훔쳐오는 꽃제비 엄마들이 중국에는 먹을 게 지천이라며 나더러 중국에 가라고 해서 중국에 갔다는 말도 했다. 97년에 처음으로 강을 건넜다고도 했고 2001년에 처음 건넜다고도 했다. 97년에는 평산에서 혜산으로 6개월에 걸쳐 걸어갔다고도 했고, 97년에 처음으로 압록강을 건넜다는 말도 했다. 딸이 유리독에 올랐고, 2살이 돼도 걷질 못했기 때문에 아기를 살리기 위해 탈북을 시도했다는 말을 한 반면 2014년 5월 20일에는 유리로 탯줄을 잘랐는데 염증이 없었다고 말했다.
딸과 헤어질 때의 상황 설명도 제각각이다. 마지막 탈북에 성공할 때의 상황 설명도 제각각이고 현실적으로 황당하다. 4명의 여인들이 4명의 애기들을 배낭에 메고 장마철에 압록강 중 가장 깊은 곳을 골라 도강에 성공했는데 건너자마자 곧바로 중국 공안에 잡혔고, 4명의 아이들을 빼앗긴 채, 4명의 엄마들만 3일을 꼬박 달려 어느 농촌에 하차시켜놓고 필려고 하는 순간 도망쳐 한인교회로 왔다는 말도 했고, 1월에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자 강 옆에 숨어 있던 인신매매단이 아이를 분리시켰는데 아이가 엄마 손 잡고 “엄마 안가 안 가, 같이 가, 엄마야 같이 가, 같이 가, 나 안 가, 나 배 안 고파, 이제 배고프다 말 안 할게” 이렇게 말했다는 이야기도 했고, 겨울 강을 건너자마자 숲속에 숨어있던 인신매매단이 강제로 아이를 빼앗은 순간 아이가 엄마 손을 꼭 잡으면서 “엄마 놓지마, 꼭 잡아 놓지마” 소리쳤는데 그 순간 2살짜리 아이가 그렇게 힘이 센지 몰랐다는 말도 했다. 1월에 압록강 얼음 위로 강을 건너자마자 인신매매원들이 풀밭에서 튀어나와 아기를 강탈해 놓고, 내가 보는 앞에서 아기를 장마당 물건처럼 흥정했다고도 했다. 겨울에 인신매매단이 숨을 만한 풀밭이 존재한다는 말도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돌이 지난 2살짜리 아이가 위험을 인식하는 지능이 있고, 말을 알아듣고 의사를 표현했다는 이야기는 모두 이솝우화에서나 있을법한 허풍이다. 거짓말이라 해도 아이를 키워 본 엄마는 이런 허풍을 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한국의 남녀들은 이런 허풍에 놀아나 눈물을 바가지로 흘렸다.
고문에 대한 말도 제각이다. 온 몸에 고문 받은 상처가 나 있으며 손바닥에는 코바늘로 고문당한 상처가 지금도 나있다고 했다. 코비늘이란 뜨게 바늘을 의미한다. 9번 고문당한 흔적 그대로 있다고도 했다. 보안요원이 허리띠 같은 걸로 나를 때리는데 허리띠가 위로 올라갈 때마다 2살짜리 젖먹이 아기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엄마 때리지 마” 울부짖었다는 말도 했다. 고문이 너무 심해 화장실 밑으로 빠져서 변을 파는 구멍으로 나온 적이 있는데 상처에 똥독이 올랐다가 또 잡혀 6개월 감옥생활을 했다는 말도 했다. 7번째와 8번째는 때리지도 않았다는 말도 했다. 혜산 보위부 감옥에 잠깐 수용됐다고도 했다. 원칙대로라면 고향 주거지 감옥에 가야 하는데 교통수단이 안 되는 데다 수용인은 많고, 먹을 게 부족하니까 금방 풀어주었다. 쉽게 넘어가고 쉽게 풀어주는 환경이었다는 말도 했다. 6번째 7번째 잡히니까, 보고 했다. 보위부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너 또 왔냐’ 하면서 몇 번 때리더니 아이가 있으니까 중국으로 아주 가라고 했다. 꽃제비로 중국에 주워 먹으러 가는 사람들이니까, 그냥 잡으면 보위부로 보낸다. 중국도 북한도 “너 또 왔나” 하고 감옥에 넣었다가 다시 내주곤 했다.
헤어질 때의 딸 나이에 대한 평가도 발표 시기마다 다르다. 한국에서 2살짜리 아이 볼 때마다 딸 생각난다고 하소연했다. 2살 난 딸 때문에 지금의 남편이랑 기도를 한다고도 말했다. 지금도 내 딸은 영원한 두 살로 내 가슴에 남아있다고도 말했다. 역전 보일러실에서 출산한 딸이 2살이 될 때까지 따뜻한 집에서 한번 재워보지 못했고, 옷 한 벌, 마른 기저귀 한번 채워보지 못한 채 인신매매단에 빼앗겼다고도 말했다. 2018년 1월 12일 배나TV 사회자가 “지금 살아있다면 12살, 13살 쯤 되었을가요?” 하고 질문하자 이순실은 “잘 모르겠다. 3살 아이만 기억한다. 애기 얼굴도 잘 기억 안 난다”고 말했다. 딸을 한 순간도 잊지 못해 아기곰 엄마곰 인형을 쓰다듬으면서 그리워했다는 엄마가 그리고 수많은 기회를 이용해 딸에 대한 슬픔을 호소했던 엄마가 2018년 1월 12일 당시 딸의 현재 나이를 알지 못하고, 딸의 얼굴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발언한 순간은 한 마디로 경악할만한 장면이었다. 더구나 이순실은 딸의 생일이 12월 25일이라고도 했고, 12월 27일이라고도 말했다. 이순실은 헤어질 때의 딸이 2살이었다고 귀가 따갑도록 반복해 시청자들에 ‘2살 난 딸’로 각인시켜 놓았었다. 그런데 필자가 2015년 11월 7일 이순실을 제240광수로 발표하자 그 후인 2018년 1월 12일에는 헤어질 때의 딸이 3살이었다고 말했다. 북한에서는 나이를 만으로 계산한다. 2004년 12월에 출산한 딸은 2006년 12월부터 2007년 12월까지는 2살이 된다. 헤어질 때의 딸 나이가 3살이려면 그 딸과는 2008년에 헤어졌어야 했고, 남한에는 2008년 또는 그 이후에 도착했어야 한다.
9) 딸 지능에 대한 발언
2살 딸아이가 엄마 고문 받는 모습을 보고 “엄마 때리지 마” 하면서 울었다. 보안요원이 허리띠 같은 걸로 나를 때리는데 허리띠가 위로 올라갈 때마다 2살짜리 젖먹이 아기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엄마 때리지 마” 울부짖었다. 중국에서는 빵 조각이라도 먹기 때문에 아이도 중국에 온 걸 안다. 다시 북한에 가면 아이가 무서워했고, 공포감에 울었다. 바깥에서 사는 데도 아이가 감기 한 번 안 걸렸다. 정말 지독하게 생명이 붙어 있더라. 이불이라야 비닐 방막 하나 밖에 없었다. 아기가 얼어 죽지 않았다. 탯줄을 유리로 잘랐는데 염증도 없었다. 애기가 꽃제비 생활에 적응됐다. 사람들이 지나가면 울었다. 사람들이 먹을 것을 주었다. 사람들이 먹을 것을 주고 멀리 떠나면 아이는 그 때를 기다려 먹거리를 반으로 나누어 엄마 입에 넣어주었다. 무역다리 밑에서 잠을 자고 새벽이 오면 2살배기 아이는 “또 살았네” 이렇게 말했다. 바로 이 아이의 말에서 탈북을 결심했다. 겨울에 애기를 배낭에 업고 친구랑 중국에 갔다. 길에 버린 언 사과를 게걸스레 먹고 있는데 공안요원들이 뒤로부터 다가왔다. 아기는 “엄마 나도 줘, 나도 먹을래”, 공안요원들이 우리를 보더니 불쌍했는지, 태워가지고 변방대로 데려갔다. 거기에 3일 동안 있었는데 그들은 끼마다 하얀 쌀죽에 돼지고기를 삶아주었다.
두 살 난아이가 등에서 쇼를 배웠다. 연극을 잘해서 엄마 살렸다. 엄마가 거지라서 먹을 것 못주고 입을 것 못 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울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장마당에서 뭘 사오는 걸 보면 갑자기 내 머리카락을 잡아 흔들면서 “배고파, 나 죽겠어” 하면서 막 울었다. 동전도 주고 입에 물었던 사탕도 잘라주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멀리 가면 받은 것을 반으로 나눠 엄마 입에 넣어주었다. 애가 땅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소똥만 보면 ‘엄마엄마 맘마 있어, 맘마 줘’ 하고 울었다. 빨리 가서 맡아야지 우물쭈물하면 다른 꽃제비에게 빼앗긴다. 그걸 빨리 주워서 나뭇가지로 헤치면 강냉이 여물 콩 몇 알이 나온다. 여덟 알, 다섯 알, 이걸 씻어서 비닐봉지에 싸들고 다니면 아기는 하루 식량이 마련된 줄 알고 하루 종일 울지 않고 재롱을 부렸다. 배우 연기하듯이 엄마라는 이름을 하루에 백번 천번 여러 가지 억양으로 다르게 불렀다. 한 알 주면 너무 좋아 발버둥을 치면서 삼키지 못하고 콩알이 크게 불어터지도록 입안에서 굴리면서 먹었다.
이렇게 예쁜 아기를 데리고 중국에 가자 결심했다. 배낭에 담아 등에 업고 강에 들어섰다. 아이도 압록강 강 건너는 것을 알았다. 총에 맞고 잡혀 간다는 것을 알았다. 공포를 알았다. 아이가 배낭끈을 붙들고 부들부들 떨었다. 눈물을 꾹 꾹 참으면서 소리 내서 울지 못했다. “애기야 울자마라, 울면 군대가 총 쏜다, 절대 울지 마라. 우리 다 죽는다‘ 말했더니 애기가 ”알았어 엄마 알았어“ 말했다. 숲속에 숨어있는 인신매매단에 잡혔다. 인신매매단이 강제로 아이를 빼앗자 아이가 엄마 손을 꼭 잡았다. 2살짜리가 그렇게 힘이 센지 몰랐다. ’엄마 놓지마, 꼭 잡아 놓지마’ 소리쳤다. 배고파도 안 울고 추워도 안 울고 누군가 지나가면 엄마가 거지라는 걸 아이가 알았다. 누군가가 먹으면서 지나가면 “엄마 나 저거 좀 줘. 맘마 좀 줘, 배고파 배고파” 했다. 마지막으로 엉엉 울었다. 그러면 지나가던 행인이 먹을 걸 주었다. 받으면 기다렸다가 그 행인이 지나가면 받은 것을 절반으로 갈라 엄마 입에 넣어줬다.
1월에 압록강을 건넜다. 건너는 동안 아기가 “엄마 빨리 가, 빨리 가, 무서워” 배낭끈을 꼭 붙잡고 울먹였다. 건너자마자 인신매매원들이 풀밭에서 튀어나와 아기를 강탈해 놓고, 내가 보는 앞에서 아기를 장마당 물건처럼 흥정했다. 아기가 내 손을 꽉 붙잡고 울었다. “엄마, 무서워, 엄마 안 가, 같이 가, 엄마 배고프다는 말 안할게~~”
의 견
이상이 이순실이 들려준 2살배기 딸아이의 프로필이다. 이 대목을 보면 이순실에 대한 확실한 개념이 선다. 위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그녀는 아이의 일반적 지능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이순실의 탈북 이야기는 2살배기 딸이 핵심이었다. 딸 얘기만 나오면 진행자도, TV시청자도, 청중도 다 울었다. 눈물샘을 자극하는 소재가 바로 2살배기 딸이었다. 그런데 위 딸이 말했다는 내용들을 보면 2살배기 아이의 지능일 수가 없다. 10살배기도 이런 지능과 언변과 연기능력을 소유할 수 없을 것이다. 설사 없는 딸을 소설로 가공해낸다 하다라도 아기를 정말로 키워본 엄마는 이런 허풍으로 딸의 행동을 가공해낼 수 없다. 결론적으로 이순실은 애기를 낳아 본적도 없고 길러본 적도 없는 여자라고 생각한다. 이순실의 딸아이는 가공의 작품이지 현실의 주인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울러 그녀의 탈북 스토리 전체가 상상으로 지어낸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장진성이 그랬던 것처럼 이순실 역시 탈북하여 남한 국민들을 거짓 스토리로 우롱하고 있다는 평가를 내리지 않을 수 없다. 그녀에게 남한 국민은 아마도 쉽게 넘어가고 쉽게 눈물을 흘리고 쉽게 성금을 내는 호구 정도로 여겨졌을 것이다.
10) 몽골 수용소에 대한 발언
이순실에 대해 이순실 자신과 그 동료들 진술에 의하면 몽골 수용소에서의 이순실의 행위는 어린 딸자식을 억울하게 강탈당한 어미새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순실은 중국의 한인교회로 도망쳐 6개월간 은신하다 다른 8명의 탈북자와 함께 옷이 찢기며 몽골 야산으로 향하다가 곧 사막 경찰에 잡혔다고 했다. 3개월을 걸어 도착한 UN 수용소에는 이미 400명의 탈북자가 있었다고 했다. 몽골수용소는 탈북자들이 가장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곳이라 했다.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데다가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 겹쳐 폭력사태가 빈번했다고 했다. 그 험악한 분위기를 이순실이 군인 경력을 살려 리더십을 발휘해 탈북자들을 통솔했다고 한다, 수용소 생활 50일이 채 안 돼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는 기사도 있고, 몽고(양탄굴)에 간 지 3개월 만에 비행기를 탔다는 말도 직접 했다. 50일 만에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는 말과 3개월 만에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는 말은 서로 다르다.
이순실은 몽골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양고기를 실컷 먹었다는 말을 했다. 딸을 금방 인신매매단에 탈취당하고 구사일생의 험하고 위험한 길을 3개월 동안 걸어서 몽골에 온 엄마가 양고기를 실컷 먹었다 하니 어안이 벙벙하다. 이에 더해 김수경이라는 다른 탈북자의 증언을 들으면 이순실은 몽골 수용소에서 분위기 메이커였고, 남자건 여자건 다른 탈북자들을 휘어잡으면서 대장 노릇을 했다. 덩치가 킹콩 같고, 저 언니한테 잘못 보이면 사자 밥이 되니까 건드리지 말라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고도 했다.
몽골 수용소는 몽골군대가 관리했지만 여기에 수용된 300~400명의 탈북인들은 영애파와 순실파로 나뉘어 라이벌 경쟁을 했다고 한다. 라이벌인 ‘영에’씨는 얼굴과 몸매가 아름다운 편에 속하고, 관상을 잘 보아, 몽골 군인들에게 인기가 좋았던 반면 이순실은 왈가닥이고, 몸집이 크고 말이 거칠었다고 한다. 영애는 미모와 관상봐주기를 무기로 몽골 군인들로부터 호감을 받았고 그 덕분으로 몽골 군인들로부터 오락 시간을 많이 할애 받았다고 했다. 거대한 홀에 노래방 기계를 갖다 놓고 밤새내 즐겼다고 했다. 노래를 부르고, 디스코를 추었으며 몸에 딱 붙은 옷을 입고 몸매 자랑과 궁둥이 흔드는 패션쇼를 하면서 밤새워 신나게 놀았다고도 했다.
의 견
이순실은 몽골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양고기를 실컷 먹었다는 말을 했다. 이에 더해 이순실은 몽골 수용소에서 분위기 메이커였고, 남자건 여자건 1개 대대 병력에 해당하는 400여 명의 탈북자들을 휘어잡으면서 대장 노릇을 했다고 한다. 몽골 군대가 관리하는 수용소에서 이순실은 그의 라이벌인 영애파와 주도권을 잡기 위한 파워게임을 했고, 거대한 홀에 노래방 기계를 갖다 놓고 밤새내 즐겼다고 스스로 말했다. 노래를 부르고, 디스코를 추었고, 몸에 딱 붙은 옷을 입고 몸매 자랑 패션쇼를 했고, 궁둥이 흔들며 신나게 놀았다고 했다. 여기에서도 이순실은 거친 전투적 언어와 덩치를 기반으로 하여 주도권을 행사했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2살배기 딸을 금방 인신매매단에 탈취당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구사일생으로 몽골에 온 어미가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수도 없이 초대된 방송 프로를 적극 활용하거나 또는 스스로 방송 프로를 만들어, 대다수 국민의 눈물과 신뢰를 획득했던 이순실. 그녀는 알고 보니 몽골에서는 양고기와 누룽지를 독점해 해치우는 대단한 식욕을 과시했고, 탈북 여성이 입은 예쁜 옷을 다 지기만이 입어야 한다며 빼앗고 보는 배짱을 과시했다. 주위에 '저 멧돼지에 걸리면 뼈도 추리지 못한다'는 이미지를 확보하면서 400명의 남녀 탈북자들을 장악하는 사실상의 리더이자 쾌활한 분위기 메이커였다. 밤에는 오락과 가무를 즐기고 식사를 마음껏 하면서 리더십 행사를 즐겼다고 했다. 2살짜리 딸을 잃고 온갖 고초를 겼으면서 몽골로 탈출했고, 지금도 딸을 못 잊어 밤마다 엄마곰 아기곰을 쓰다듬으면서 울고 잔다며 수많은 국민의 눈물을 자아내는 가련한 엄마의 모습과는 어울릴 수 없는 상반된 모습인 것이다. 그녀가 묘사한 딸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공된 존재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지울 수 없다.
최종 결론
이순실을 보면 국정원이 보이고 북한이 보인다. 북한 생활과 탈북과정에 대한 그의 방언을 보면, 어제 발언 다르고 오늘 발언 다르다. 그런데 어제의 발언을 들어봐도 맞는 게 없고, 오늘 발언 들어 봐도 맞는 말이 없다. 국정원은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 그녀를 보호하고 있을 것이다. 북한이 탈북광수들을 결정적인 시기에 사용하기 위해 남한 당국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기관 간첩들과 연결돼 있을 것이라는 점은 피고인은 믿고 있다. 그 사이에 북한에 달러를 바치게 만들기 위해 모든 탈북자들을 닦달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한다. 그래서 그들이 뱉어낸 달콤한 거짓말들이 남한 국민들의 눈물을 짜내고 그 눈물의 양만큼 성금을 모아 북으로 보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순실이 분출해낸 딸 이야기를 접하다 보면 이순실은 북에서 딸을 낳아본 적도 없고 길러본 적도 없는 여자다. 그가 몽골 수용소에서 보여주었던 행동은 절대로 2살배기 딸을 생이별한 어미의 모습일 수 없다.
2021.8.15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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