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들의 위험한 가면(장진성과 1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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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1-08-19 18:16 조회3,07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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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들의 위험한 가면
탈북자 숫자가 33,000명을 넘어섰다. 이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오로지 자유를 갈구해 사선을 넘어 대한민국을 찾았다" "북한의 인권 실태를 고발하려고 넘어왔다" 하지만 이런 말들은 액면 그대로 믿어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 말은 때로 그들의 정체를 속이기 위한 만병통치약으로 쓰인다. 2016년 9월 27일자 조선일보는 2012-2016년 동안 군에 침투한 남파간첩 13명 중 12명이 탈북자 신분이었다는 기사를 냈다. 군 장교를 상대로 한 간첩 원정화, 서울시 공무원 신분으로 간첩 혐의의 재판을 받았던 유우성 등 탈북자들이 었다.
1966년 드라마틱하게 판문점을 넘어온 이수근은 당대 대한민국 최고의 애국자로 숭앙되었다. 하지만 그는 간첩이었고, 1969년 처형됐다. 1983년 인민군 대위 계급장을 달고 휴전선을 넘어 귀순한 신중철은 양구 제4땅굴 위치를 가지고 왔다. 이로 인해 신중철은 1980-90년대 대한민국 최고의 애국자가 되었다. 신중철과 이웅평은 국군정보사령부에 소속돼 있었다. 1986년 당시 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이었던 피고인은 정보사에 공문을 보내 이들을 각 3일간씩 피고인의 연구실로 출근시킨 적이 있었다. 신중철이 털어놓았다.
“나는 연합사 부사령관인 모 대장(육사12기)과 의형제를 맺었다. 그의 제안으로 나는 전방 20개 사단을 다 돌면서 정보 및 작전 브리핑을 받았다. 그 대장은 나에게 말했다. 휴전선 모든 사단을 다니면서 정보참모와 작전참보로부터 브리핑을 듣고 네가 북괴 사단장이라면 어떤 결심을 하겠는지 각 사단장들에게 알려줘라.”
신중철은 이런 종류의 정보를 다 수집하면서 국군정보사령부에서 1995년 대령으로 예편할 때까지 13년 동안 근무했다. 그리고 2001년 김대중 시대를 맞아 남한에 와서 새로 결혼해 이룬 가족들을 버리고 사라졌다. 이런 간첩이 이수근에 이어 1980~90년대의 대한민국 최고 애국자로 군림했던 것이다. 민간 땅굴 탐사자들이 신들린 듯 매달려 찾아낸 땅굴이 문제가 될 때마다 최고의 애국자로 행세한 신중철과 조갑제가 눌러버렸다. 이 두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으로 처리됐다.
이수근 신중철 장진성
2000년대 초반의 대한민국 최고 애국자는 장진성이었다. 그는 국정원과 조갑제의 배후 역할에 의해 위대한 애국 시인이자 세계적인 문호로 군림하면서 20년 가까이 문화황제 행세를 했다. 위키백과에 나타난 장진성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2014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시장경제대상 문화예술부문 수상, 2012년 영국 옥스퍼드 렉스 워너 문학상 수상, 2015년 네덜란드 레이던대학교 북한학 초빙교수. 베스트셀러 시집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는 일본과 미국에서 번역 출판, 수기 〈시를 품고 강을 넘다〉는 일어 출간, 해외 계약과 판매에서 한국 작가들 중 가장 압도적 1위 기록, 수기 〈DEAR LEADER〉는 영국 랜덤하우스가 유럽판권 획득, 2012년 5월 29일 한국인 최초로 옥스퍼드 문학상 수상. 평양음악무용대학 졸업, 조선중앙방송위원회 TV총국 문예부 기자, 김일성종합대학 졸업, 중앙당 통일전선부 101연락소 근무, 2004년 망명, 2005.01~2010.12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 2011.12 뉴포커스 발행인 대표. 이처럼 위키백과에 소개된 장진성은 눈부시게 화려했다. 그가 이만큼 성역화되기까지는 안기부, 조갑제, 정규재, 차기환 등의 주도적인 노력이 있었다.
1980년의 광주 현장은 북한특수군이 주도했댜. 그 현장 사진에는 9살짜리 장진성이 게릴라전 엑스트라로 동원돼 있었다. 신원이 밝혀진 11살짜리, 12살짜리가 수두룩했다. 등에 업힌 아이, 가슴에 안긴 아이, 아장거리는 아이들도 여럿 있었다. 2016년 피고인이 이 사진을 공개하자 장진성은 즉시 피고인을 고소했다. “지만원이 미쳤다, 아홉 살짜리 특수군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소송이 걸려 있는 상태에서 변호사 차기환이 공개적으로 돌아다니면서 장진성 편을 들었다. “지만원이 너무 나갔다.”
장진성과 12명의 탈북자들
탈북자 장진성은 이번 하태경이 주선한 고소자 대열에 없다. 12명의 탈북자들은 2019년에 고소를 했지만 장진성은 2016년에 홀로 피고인을 고소했다. 장진성 사건은 광주-전남인들이 고소한 2016년 사건에 병합됐다. 그래서 장진성에 대한 분석은 [5.18답변서, 서울중앙지방법원 사건 2020.노804]에 포함돼 있다. 분석의 결론만 요약하면 그는 김일성종합대학도 나오지 않았고, 대남공작 조직에서 근무하지도 않았다. 그의 탈북스토리는 99.99%가 가짜다. 대한민국에 와서 국민을 우롱하고 사기를 친 것이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국정원과 조갑제 등이 문화황제로 등극시켰는지 그 배경이 매우 궁금하다. 장진성의 사기극은 또 이어진다.
2021년 1월 24일 오후 7:25분, MBC 프로 ‘스트레이트’가 '유명 탈북 작가 장진성, 그에게 당했다'는 프로를 50분 정도 방송했다. 이에 의하면 장진성은 피고인에게 고소를 했던 바로 그 시기인 2016년 6월에 20대 여성 탈북자에게 접근하여 국정원을 팔아가며 성폭행을 했다. 나체 사진을 찍어 그녀가 다니는 학교 게시판에 공개하겠다고 협박하면서 자금을 획득하기 위해 재력가들을 상대로 성매매 행위를 자행했다. 2021년 2월 28일 한국경제에는 이런 보도내용이 실렸다. ”지난 1월 24일 ‘스트레이트’가 유명 탈북작가 장진성 씨의 성폭력 의혹을 보도한 이후, 장진성 씨는 개인 유튜브 등을 통해 승설향 씨 등이 허위 거짓 주장을 하고 있다고 적극 반박했다. 장진성 씨의 반박이 공개된 뒤, 장 씨로부터 비슷한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는 두 여성이 침묵을 깨고 목소리를 냈다. 탈북민이 아닌 두 여성은 장진성 씨가 운영했던 언론사 ‘뉴포커스’에서 근무하던 시절 장 씨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고 고백했다.. “
장진성은 탈북사회의 별이었다. 교회를 배경삼아 신뢰를 증폭시켰고, 북한 인권 운동계의 별로 빛나고 있었다. 2000년대의 20년 동안, 대한민국에서 가장 숭고한 애국시인으로 추앙받고, 눈물 나는 탈북스토리로 수많은 국민들로부터 뜨거운 애정과 성금을 받아 챙기면서 세계적인 문호라는 레이블로 문화황제 노릇을 했고, 탈북 직후 6년 동안 국정원 산하연구소에서 선임연구원으로 보직돼 있었다. 눈부시게 화려한 프로필의 소유자 장진성, 알고 보니 악마요 국민 전체를 농락한 사기꾼이었던 것이다.
여기 이 사건에 등장한 12명의 고소인들 역시 장진성급 사기꾼들이다. 가는 곳마다 국민의 눈물샘을 자극하고 국민을 기만하며 성금을 챙겨왔다. 이들은 각자 남한 사회에서 단체 하나씩을 만들어 세력을 키우고 있다. 이들은 어쩌면 북한의 외화벌이 수단일 수도 있다. 그리고 결정적인 시기를 위한 트로이 목마일 수 있는 것이다.
2021.8.19.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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