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는 위장보수 프락치, 종결 증거(만리경)
페이지 정보
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1-08-20 14:31 조회3,006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조갑제는 위장보수 프락치, 종결 증거
글쓴이 만리경
주: 아래 글은 2019.2.2. 시스템클럽에 필명 만리경이 게시한 글이다. 내용을 보니 이 분야에 상당한 전문가가 쓴 글로 보이고, 그 내용이 필자의 분석 맥락과 궤를 같이 하는 반면 필자가 모르던 부분들이 다수 있기에 다시 찾아내 올린다. 이하 만리경의 글
조갑제는 만 29세인 1974년도에 “중금속오염실태” 취재 보도(부산국제신보)로 한국기자상(7회)을 받아 주목을 받았고, 한국기자협회 부산지부의 회원으로 반 박정희, 반 정부기사로 그 반골적, 반체제성으로 많은 독자의 관심을 끌었다. 그의 심층 취재기법은 일본 월간지 문예춘추(文藝春秋)의 다치바나다카시(立花隆) 기자 방식의 모방에 불과했으나 당시 일반 국내 독자에게는 한 차원 깊은 기사로 인식되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반정부적 성향에 두 번씩이나 해직당한 조갑제 기자를 공작 목표에서 빠트릴 멍청한 수준의 북한 대남공작기관이 절대 아니다. 공작담당자가 누구였든 조갑제를 포섭하지 않았다면 혁명과업 나태로 처형감이다. 그러한 공작임무에 대한 철저한 성과물이 오늘날 주사파의 청와대 점령인 것이다. 이러한 당연성 위에 조갑제가 북한에 동조 가담한 시기가 1980.5.18이전인가 이후인가를 살펴보고자한다. 판단은 여러분의 몫이다.
1986년 조갑제는 월간조선 2월호에 ‘한국 내 미국 CIA의 내막’이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미국 CIA 한국거점의 구성, 활동내역, 영향분석, 사무실 전화번호까지 까발렸다. 이 보도로 조갑제는 안기부 대공수사단장 (전 한나라당 국회의원 정형근(鄭亨根) 검사)의 조사를 받았고 그가 석방되었을 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였다. 그 사건 이후 조갑제는 많은 [박정희 전기물]의 저술, 찬양 언동으로 보수의 선봉장으로 행동한다. 그러한 행동은 일반 보수층의 지지를 받게 하여 순식간에 보수언론인으로 자리매김 되고, 많은 보수엘리트들은 자신의 관심 이슈를 “월간조선” 조갑제 이름에 의한 여론화 목적으로 조갑제와 면담하며 상세 의견 및 관련 자료를 제공하게 된다.
조갑제의 취재 기사내용들은 이들 보수엘리트들의 제보였으나 일반 독자들에겐 조갑제의 지적능력으로 착각시키기에 충분한 글재주를 발휘했다. 조갑제는 이들의 제보 자료를 자신의 이름으로 특종화 시켜 명성을 더 높이며 확고한 보수임을 각인시키기에 성공해 왔다.
그러나 조금 디테일한 논란이 제기되면 모순적 응답이 발견되는 것은 자신의 지식이 아니므로 디테일이 약하기 때문이다. 즉 그의 지적 한계가 그렇다. 1990년대 조갑제의 주 면담장소는 광화문 코리아나호텔 커피숍이었고 그와 면담을 기대하여 무작정 기다리는 제보자들이 항상 서너 테이블이나 되었다.
실례로 1993년 5~8월호의 “남침땅굴탐색” 특종은 정지용(鄭趾龍) (남침땅굴을 찾는사람들—“남굴사”대표; 2002년 12월 의문사)의 제보였고, 조갑제는 국가안보를 걱정하는 보수 이미지 강화에 이용하며 최종에는 장거리 남침땅굴 존재를 의문시하여 오히려 국민 관심을 호도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즉 장거리 남침땅굴의 존재 자체를 의문시하는 역할에 기여한 것 이다. 정지용씨는 베테랑 대공 수사관으로 즉각 상황분석에 집중했다. 그가 조갑제에게 강하게 항의하자 조갑제의 변명은 조선일보 사주 방상훈 사장(1948년생, 경복고, 미국 오하이오대, 조갑제 2년 연하)이 땅굴문제 보도에 반대했고 향후 조갑제에게 월간조선 편집장과 독립할 월간조선 사장직을 언급하며 회사의 미래에 장애물이 됨을 걱정했다는 것이었다.
조갑제는 사주의 욕구도 만족시키고 미래의 자리도 보장받는 교활한 선택을 하며 장거리 남침땅굴 자체를 국민에게 불신케 했다. 사실(事實)보다 사익(私益)이 우선인 자가 조갑제로 믿을 인물이 아니라고 정지용씨는 한탄 분개했다. 그후 조갑제는 정지용씨의 말대로 월간조선 편집장을 역임했고 월간조선이 독립법인이 되자 대표이사도 겸임했다.
4. 1980년 5.18 광주폭동시 행적에 나타난 증거들
조갑제 광주진입 의문점: 독일인 위르겐 힌츠피터는 북한군에 안내되었음이 그의 기록영상물에 나타난다. 그러나 조갑제가 어떻게 광주에 진입했는지는 불명확하다. 당시 전국해안이 완전봉쇄(유병현 장군 언급 인용)되어 북한군의 침투가 불가능했으므로 북한군 개입 불가에 목숨 건다는 조갑제는 정작 전국 해안선 길이의 백분의 일도 못 되고 게엄군에 의해 완전 봉쇄된 광주시 외곽 봉쇄선을 5월 23일 어떻게 통과했는지 설명이 없다. 독일인 위르겐 힌츠피터처럼 누구의 안내를 받았든지, 많은 간첩들이 사용하는 비표 내지 암구호 등의 통과 방법으로 광주에 들어갔을 것이고, 황장엽의 반탐조가 감시하는 서슬퍼런 감시 공간 내에서 활동 가능했던 것이다. 조갑제가 자기 발로 그냥 광주로 들어갔다면 전국 해안선 봉쇄가 허구가 되고 해안선 완전 봉쇄가 진실이라면 평범한 신문기자 조갑제는 광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조갑제는 들어갔고 5월 23일 도청 앞 사진에 찍혀있다. 정체가 보이지 않는가?
도청 정문 앞 조갑제 사진이 설명하는 것: 광주 학원 강사 김중식이 반탐조에 의해 연행되는 도청 정문 사진에 찍힌 조갑제는 김중식의 발이 밟고 지나간 행적의 바로 앞 2미터 이내의 거리에 위치한다. 일반 군중에 섞여 서있었으나 반탐조의 허가를 받았을 확률이 높다. 황장엽의 허락 없이 도청 앞의 취재 내지 탐문행위가 불가능하다고 봄이 타당하다.
평양 고위층 집단사진(김경희 포함) 내의 황장엽 시선은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다른 방향의 무엇인가를 관찰하는 시선이었다. 그런 반탐조 황장엽의 눈을 피한 순수한 기자의 취재였다면 학원강사 김중식의 피살 특종 기사깜을 지난 39년간 숨긴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특종 좋아하는 조갑제가 김중식 학원 강사가 누구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것을 알면서 39년간 입 다문다는 게 정상인가? 기자인가? 간첩인가? 이 사진은 그 시각 조갑제와 황장엽 간의 인지관계를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5. 박원순비호: 박주신의 병역비리 문제를 조갑제가 어설픈 궤변으로라도 비호해야하는 조갑제의 초라한 조직 내 위상을 읽을 수 있다. 그는 박원순 호위 정도에 쓰이는 소모품에 불과하다.
6. 전 CIA 요원 마이클리의 회고록 조작사건: 마이클 리의 회고록 원고 중에 5.18 북한군 관련 부분을 통째로 빼버리고 출판한 행위는 단순누락 실수가 아닌 고의적 원고 조작 범죄행위이다. 이런 범행을 할 수밖에 없는, [5.18북한군 개입]을 목숨 걸고 부인해야 하는 절박성은 그의 모든 실체를 압축적으로 설명하기에 필요충분하다. 이런 자를 쉴딩하는 어리석음은 후일 프락치 은폐죄에 처벌될 것이다.
마감: 이자를 관찰해온지 이미 25년이 흘렀다. 조갑제의 과거 행적은 그가 프락치일 가능성을 높여왔지만 5.18 현장에서의 조갑제 사진 한 장이 없었다면 이자의 정체를 종결짓지 못한다. 이제 완벽한 결론: 조갑제=“위장보수 프락치(fraktsiya)” 탕탕탕 끝!!! [지만원 박사님의 5.18 연구]가 선행되어 문헌적 결론이 종결되고 일반 독자에 의한 우연한 제1광수의 사진이 제기되고 노숙자담요라는 영상분석가의 애국적 희생이 뒷받침 되어 [완벽한 현장증거 사진]이 제시되는 이 과정이 “하늘이 박사님과 함께한다는 확신” 이외의 설명할 길이 없다. 하늘에 감사드리고 지만원 박사님께 감사드리고 제1광수를 제기한 독자분께 감사드리고 노숙자담요님께 감사드린다.
2021.8.20. 지만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