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대학이 조사-정리한 2개의 문서: 청주유골 마침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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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1-06-02 12:01 조회3,30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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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학이 조사-정리한 2개의 문서: 청주유골 마침표
1988~89년에 전남대학이 조사-정리한 두 개의 증언에는 광주 시립묘지 직원이 운구한 시체가 594구였다고 했고, 5월 27일 새벽 시체를 잔뜩 싣고 포장을 날리면서 달리는 화물차 여러 대가 비아쪽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있다. 청주시가 내 형사사건을 관장하고 있는 재판부에 제출한 자료에는 2014년 5월 13일 청주시에서 발굴된 시체는 정확히 430구라 했다. 1980년 당시의 광주시민 사망자수는 정확히 164명이다. 이 두 개의 수를 합치면 정확히 594구다. 새벽 1시부터 계엄군이 광주시로 재진입하면서 수많은 시체를 실은 화물트럭 여러 대가 ‘비아’(송정리 방향)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참고로 증언 내용을 보면 이 두 증언자들은 공수부대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증언 자료] 공수부대의 위세에 놀라/최봉희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2007-05-29 조회647회
http://cnu518.jnu.ac.kr/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127)
공수부대의 위세에 놀라 쫓겨 들어간 곳에서 구타당해
증언자 : 최봉희(여)
생년월일 : 1947.(당시 나이 43세)
직 업 : 교사(현재 가정주부, 시인)
조사일시 : 1989. 2
개 요
1980년 5월 20일 오후 4시경 금남로를 걸어가는 중에 공수부대들에게 쫓겨 곤봉으로 왼쪽 머리를 구타당함.
대학생이 무슨 죄가 있으랴
최봉희 씨는1980년 중흥동에서 부모를 봉양하고 3남 1녀의 자녀를 기르면서 장성읍 성산국민학교 교사로 재직중이었다.
그녀는 틈나는 대로 독서를 즐기고 시를 쓰며 열심히 살았다. 5월 20일 금남로를 지나가다 공수들에게 곤봉으로 머리를 두들겨맞았다. 당시의 80년 상황이 그의 일기장에 그대로 적혀진 채 보관되어 있었다. 평소 시를 쓴다며 미소짓는 표정으로 차분함을 엿볼 수 있었고, 그 상황에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목격하고 들은 사실들을 기록해 두고 있었다. 그 일기장에 증언을 보충하여 기록하였다.
5월 18일 일요일.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자 통행금지 시간이 9시로 당겨졌다. 광주 시가지는 어수선하여 마치 내가 어릴 적에 겪었던 6·25가 생각났다. 그때의 날들처럼 불안에 싸인 마음은 초조하기만 했다. 광주 시내의 거리 곳곳에는 밀가루를 뿌려놓은 듯 최루탄 가스가 얼룩져 있었다. 길을 걷는 시민들은 그 때문에 혹독한 재치기와 눈물로 곤욕을 당해야만 했다.
5월 19일 화요일.
세금을 내기 위해서 대인시장 근처를 갔다. 공수부대원이 쏘아댄 최루탄에 눈물을 흘리면서 국민은행으로 간신히 피신을 했다. 파출소 앞과 거리 곳곳에서는 대학생들이 땅에 머리를 처박고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었다. 공수부대들은 1미터 간격으로 거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닥치는 대로 곤봉을 휘두르고 있었다. 공수부대 13호라고 했다. 15호는 사람을 죽여놓고도 피빨아 먹는 놈들이라니 알 만한 거다. 왜 학생들을 잡아가며 때리느냐고 반항하는 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머리가 바람 빠진 공처럼
5월 20일 화요일.
외숙 아들이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영남신경외과에 입원해 있어서 어머님이 그곳에 가 계셨다. 그런데 오후쯤 숙모님이 19일 해남 절에 불공드리러 가셨다고 나더러 김치를 가져오도록 전화를 하셨다. 오후 4시쯤 병원에 들렀다가 금남로를 걷고 있을 때였다. 분수대 앞에서부터 공수부대가 얼마의 거리를 두고 물밀듯 시민들을 향해 전진해 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대로 길을 걷기가 두려워서 가톨릭센터와 전일빌딩 사이의 3층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7, 8명의 사람들과 함께 잠시 피신하려고 들어섰던 곳은 사무실마다 굳게 문이 잠겨 있었다. 결국 2층에까지 올라갔다. 그곳은 넓은 홀 안에서 가구점의 목공일을 하는 곳이었다. 두세 명의 직공들이 일손을 놓고 곧장 출입구 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닫지 못했다. 바로 뒤쫓아온 공수부대의 군화발 소리가 요란스레 들려왔다. 그들은 마치 탈출범이라도 잡을 듯 등등한 기세였으므로 우리는 온몸을 떨었다.
나는 길 쪽으로 나 있는 계단 창 가까이의 기둥에 술레나 된 듯 얼굴을 가리고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숨도 제대로 못 쉰 채 내 혈관의 피는 온통 거꾸로 흐르는 듯 경황이 없었다.
"움직이기만 하면 찌른다!", "나는 오늘 죽기로 결심했다"는 공수부대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옆에서는 "아이쿠머니...아이구" 하는 소리, 곤봉 휘두르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넘어지는 소리들과 몇 번인가 탁! 탁! 소리가 나더니 내 머리를 곤봉으로 사정없이 내리치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아픈 것조차도 느낄 수 없었다.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 왼쪽 머리를 만졌을 때 나는 너무도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영락없이 바람 빠진 공처럼 한쪽 머리가 푹 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상처부위를 손으로 막고 죽음에 직면한 사람처럼 구석에 쭈그리고 엎드려 있었다.
대검으로 쑤실까봐 벌벌 떨면서 엎드려 있을 때 "죽어버린다, 나와!." 하며 소리소리 질렀다. 계속 홀 안을 왔다 갔다하는 공수부대에 의해 나가지도,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을 때 또 허벅다리를 한 대 갈기고 갔다. 아픈 줄도 몰랐다. 이젠 죽기 아니면 살기라고 생각하자 앞이 캄캄했다. 뒤도 돌아보지 못한 채 숨죽이며 엎드려 시멘트 기둥 사이로 머리를 처박고 왼손으로 머리 상처를 누르고만 있었다.
30분 정도 시간이 흐르고 홀 안이 조용해졌다. 누군가가 달려와서 수건으로 상처부위의 머리를 틀어막고 나를 부축해주었다. 층계를 내려서서 밖으로 나오자 나를 택시에 태워주었다. 금남로를 무사히 빠져나와 집에서 가까운 임종호병원으로 갔다. 마취도 하지 않은 상태로 아홉 바늘을 꿰매었다. 찢어진 자국에서 하얀 뇌가 보였으니 특히 안정을 요한다고 했다.
약을 먹고 주사를 맞았지만 머리의 통증이 가시지 않았다. 사람들이 병원 안으로 속속 들어왔다. 아무런 이유 없이 얻어맞아야 했던 공수부대의 폭력이 어찌해서 자행되는가도 알지 못했다.
양식 걱정 때문에 아껴먹어야 했다
5월 21일 수요일.
머리를 온통 붕대로 동여맨 상처가 욱신거리며 쑤시고 아팠다. 허벅다리는 온통 시퍼렇다 못해 검게 일그러져 있었다.
19일과 20일 사이 공수부대로 인하여 무참히 두들겨 맞았던 젊은이들과 시민들은 완전 합세가 이루어졌다. 광주의 모든 시민과 학생은 전날의 공수부대의 자행을 보고 분노를 참지 못했다.
곳곳에 꿇어 엎드려놓았던 대학생들도 모두 어디론가 싣고 가버렸다. 여대생의 옷을 벗기고 가슴을 칼로 난자하는 것을 옆에서 보고 있던 교수가 "너무하지 않느냐"고 말하자, 공수부대는 다른 사람들까지도 칼로 찔러 죽였다고 했다.
소문은 꼬리를 물고 퍼졌다.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도 없었다. 택기기사들이 외곽지대로 대학생들을 싣고 가다가 공수부대를 만나 죽었다고 하자 기사들의 분노가 치솟았다. 뿐만 아니라 공수부대는 집집마다 수색하여 대학생들을 차에 싣고 갔고 곤봉으로 무차별 때렸다.
밤사이 시민군들이 아시아자동차 트럭과 군 지프차, 남선산업, 화장품 차 등을 타고 다니는 것이 보였다. 이들은 막대기와 철근 조각들로 차체를 두들기며 태극기를 차에 꽂고 다녔다.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계엄 해제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은 박수를 치는 사람,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 등 모두 승리감에 젖어 있었다. 오늘은 완전히 시외통화마저 끊기고 신문도 끊겨 버렸기 때문에 외부 소식은 전혀 들을 수 없었다. 텔레비전도 방영되지 않았다.
노도와 같이 밀리며 외치는 시민군은 20일 밤 MBC 방송국, KBS 방송국, 광주세무서 등을 태웠다고 했다. 시민군은 무기 등으로 무장하였고 광주시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중학교를 다니던 둘째가 어젯밤 들어오지 않고 오늘 오후 1시쯤에 돌아왔다.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느냐고 묻자, 금남로에서 군인들과 대치하였는데 맨 앞줄의 데모대에 끼어 연좌를 하고 시위를 했다고 했다. 아들의 말에 의하면 국민학생 할 것 없이 엄청나게 많이 참여하였다고 했다.
5월 22일 목요일.
21일 하루 온종일 집 앞을 쉴 새 없이 누비던 시민군 차량들이 오늘은 갑자기 한산해졌다. 알고 보니 시민군은 나주 등 외곽지대로 빠졌다고 한다.
광주시내는 비교적 조용했지만 불안과 공포가 감돌았고, 시장과 가게들은 거의 문을 닫았다. 때문에 찬거리를 살 수가 없었다. 아빠의 학교 서무과장댁 딸도 유탄에 맞아 사망했다고 아빠는 그곳에 위문을 갔다.
어떻게 목화상회가 문을 열었기에 라면 1상자를 샀다. 식량 걱정 때문이었다. 비행기, 헬기 등이 계속 하늘을 메우고 낮게 뜨지는 않았다.
5월 23일 금요일.
전날 높게 떴던 비행기와 헬리콥터가 오늘은 낮게 떠서 귓청을 때렸다. "폭도들은 자수하라", "자수하면 생명을 보호한다"고 외쳤다. 삐라 등을 뿌렸고 마이크를 통해 남녀 목소리가 번갈아서 하늘 전체를 흔들었다. 마이크 방송 내용은 무기 자진반납을 요구했으며 이제까지 천여 정을 회수하였다고 했다. 또한 밤거리를 배회하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는 폭도로 간주한다는 방송이 들리기도 했다.
5월 24일 토요일.
비가 내렸다. 광주 시민들의 분노와 원한의 눈물인지도 모른다. 우울한 날씨 탓인는지 머리의 통증이 더욱 심했다. 머리가 어지럽고 쑥쑥 쑤시고 속이 메스꺼웠다.
5월 25일 일요일.
양식 걱정 때문에 겨우 보리쌀 네 푸대를 구하여 쌀과 섞어 먹도록 했다. 김치도 아껴 먹어야 했는데, 찬거리가 굉장히 비싸고 사기조차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비가 계속 내렸다. 석유를 살 수가 없었다. 주유소마다 석유가 바닥이 나고, 거리에서는 자전거와 오토바이만이 활개를 치고 달렸다.
이젠 광주 사람들이 모조리 죽어가는 구나
5월 26일 월요일.
아빠 자전거로 출근. 오토바이를 타기도 했다고 했다. 시내에서는 차라고는 구경할 수 없고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세상 만난 듯 거리마다 판을 치고 있다. 광이(큰아들)는 친구 진표가 꿔달란다고 "엄마 돈 천 원만" 한다. 친구 꿔줄 돈은 없다고 했더니 조금 후 "그럼 안경 맞춰주세요" 했다. 그 말이 채 끝나기가 바쁘게 아빠는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 "가자. 지금 못 맞추기만 해봐라" 하고 쫓아나가니 벌써 맨발로 달아나고 없다.
이 난리통에 안경점이 열었을 리도 없고 어긋나게 말하는 품이 너무 아빠를 실망시킨 것이다. 아빠는 숙직도 겸해서 학교에 가셨으니 저녁에 들어오지 않겠지만 광이까지 들어오지 않고 있다. 공연히 걱정이 된다.
친척으로부터 화정동에서 계엄군이 시내 쪽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전화가 왔다. 문단속, 애들 단속 잘하라는 것이었다.
5월 27일 화요일.
어제 오후 늦도록 비교적 조용했다. 라디오 방송에서는 외곽지대를 보충하기 위한 군 배치니 시민들은 놀라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새벽 1시가 되더니 시내 진입 교전이 벌어진 것이다. 도청 쪽과 전남대 입구 쪽 사방팔방에서 총소리가 콩 볶듯 들려왔다.
아침 5시경 방송을 들으니 시민들은 절대 밖에 나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해는 떠서 환한 대낮이건만 공포와 죽음의 도시로 변한 광주의 길거리를 걷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이젠 광주 사람들이 모조리 죽어가는구나' 탄식하며 집안에 있어도 무서웠으니 병원엔 갈 수가 없었다. 창문으로 내다보기도 무서워서 커튼 사이로 밖을 내다보곤 했는데 군 지프차 등 군인들의 움직임이 보였다.
오후쯤 되자 길을 가는 사람들이 한두 명씩 눈에 띄었다. 조사가 심해지고 곳곳에는 군인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특히 학교 근처 등은 경계망이 심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깝게 죽어갔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서늘해진다.
아빠와 광이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다. 광이는 친구집에 있을 것이고, 아빠는 학교에 계실 것이다.
5월 28일 수요일.
머리가 어지럽고 아픈 데다 속이 메스꺼워 아무래도 이상이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은 걸어서라도 신경외과를 가보고 싶었다. 온 신경이 머리로만 쏠려 잠도 안 오고 다른 일이라곤 전혀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영남신경외과를 찾아갔다. 처방약과 3대의 주사를 맞았으나 계속해서 병원엘 다니라는 의사의 권고를 받았다. 대개 머리를 다치면 3주가 지나고 석 달이 지나고 3년이 지나야 그 증상이 치유되는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했다.
걸어서 집에 오니 기절할 것만 같다. 시내 곳곳에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고 조사가 극히 심했다. 아빠는 오후 4시쯤 귀가했다. 광이도 오전 12시쯤 귀가했다.
아빠와 함께 동사무소에 가서 부상자 신고를 한 후 나는 곧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남모를 주위의 감시와 당시 교직에 몸담고 있었던 말 못 할 고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후 6시쯤 순천과 통화가 되었다. 거리에는 영업차는 없고 유리창이 부서졌거나 부상당한 차들이 공장으로 향하는 모습만 보였다.
5월 29일 목요일.
버스는 다녔으나 거의 40분을 기다리니 7번이 왔다. 주미와 함께 병원엘 갔다가 도청 앞으로 갔다. 상무관은 군인이 엄하게 지키고 있고, 도청 앞에는 곳곳에 탱크가 7, 8대 있었다. 시민들은 이곳저곳에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시체 얼굴에는 검은 페인트를 칠했다고 했다. 너무 한 일이다.
5월 30일 금요일.
방송에서는 사망자가 1백70명이라고 했다. 말도 안 된다. 시립 공동묘지에서 일하는 사람이 어제까지594구를 운구했고행방불명,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시체들이 아직도 많다고 했는데 말이다. 아마도 1천7백 명 정도 되는가보다.
최봉희 씨 일기는 여기에서 끝나 있었다. 심한 두통으로 삶의 의욕마저 상실해 버린 채 그로부터 1년 후 교직을 그만두기에 이르렀다. 머리가 아픈 곳에 좋다는 약은 다 먹었다고 이야기했다. 지금도 두통을 자주 앓는 그는 차라리 다른 데가 아프다면 더 참을 수 있겠는데, 두통은 너무 견디기 힘들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악몽처럼 떠오르는 공수부대의 기억을 두통과 함께 떨쳐 버릴 수가 없다고 한다.
최봉희 씨는 차분한 표정으로 현재의 감정을 이렇게 얘기했다.
"광주를 학살의 현장으로 만들고 전라도를 무자비하게 짓밟은, 그래서 독일 나치스 히틀러보다 더 잔악했던 당시의 진실을 파헤치기 전에는 광주는 영원히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다. 반드시 학살의 원흉은 처단되어야 한다.
미국 사람이라면 지나칠 정도의 친절을 베풀던 우리들은 이제 피끓는 젊은이들의 주장을 들어보도록 하자. '미국놈을 몰아내자'고 외쳐대던 미문화원의 방화사건이 왜 끊임없이 계속되는가를 냉철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병 주고 약 주는 미국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옛부터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왔던 우리 민족은 이제 홀연히 일어서 우리나라 사람끼리 우리 힘으로 우리 땅을 지켜야 할 때다.
광주의 명예회복과 통일을 이룩하기 전에는 이 땅의 평화는 아직도 요원할 뿐이다."
(조사정리 안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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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자료] 군인 차량에 치어/안병복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2007-05-29 조회565회
http://cnu518.jnu.ac.kr/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216
군인 차량에 치어
증언자 : 안병복(남)/김금난(어머니)
생년월일 : 1960. 10. 17.(당시 나이 20세)
직 업 : 재봉사(현재 사망)
조사일시 : 1988. 7.
개 요
당시 재봉사였던 안병복 씨는 5월 21일 계림동으로 가다가 계엄군의 차량에 치어 죽었다고 한다. 어머니 김금난 씨가 당시의 상황을 증언했다.
광주에 큰일이 났소!
우리 병복이는 계림동 어느 공장에서 재봉사로 일하면서 착실히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1980년 5월 21일 10시경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서는 병복이를 본 작은방 할머니께서, '빨리 들어오시오!'하니까 작은집에 갔다 온다면서 나갔다고 한다. 작은집은 계림동에 있었는데, 그곳으로 갔다가 계엄군의 차량에 치어서 사망한 것 같다.
그날 나는 63세의 늙은이였지만 백대환의 어머니 박순례 씨 등과 경주 불국사 여행 중이었다. 2박 3일의 여행경로 중 순천에 오니 사람들이, '광주에 큰일났소! 광주로 들어갈 수 없소!'하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우리는 그때서야 큰일났나보다 하면서 타고 다니던 차를 화순탄광에 감춰두고 그곳에서 잤다.
다음날 화순에서 너릿재터널까지 걸어오는 중에 보니 용달차가 부서져 있었고 신작로에 피가 있었다. 너릿재터널을 넘어 광주 쪽으로 통하는 지원동 입구에서 얼굴에 복면을 하고 총을 멘 사람들이 두 대의 차에 나누어 타고 화순으로 가는 것도 보았다. 앞차가 먼저 나가면서 군인이 없다는 표시를 하자 뒤차에 더 많은 시민군을 태우고 화순 쪽으로 달려갔다. 차량 속에서 젊은이가, "도청 앞으로 모입시다!" 하는 구호를 외치며 사라져갔다. 계속 걸어오는데 간혹 총소리도 들렸다. 광주상고 앞쯤 왔을 때 총소리가 요란하게 나서 무작정 남의 집에 뛰어들어가 몸을 도사리고 있는데 총알이 지붕 위로 슁슁 날아다녔다.
그리고 천일버스 종점 근처에는 유인물도 뿌려졌다. 나는 글을 읽지 못하여 볼 수 없었지만 총기소지자는 자수하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간신히 집으로 돌아와서 보니 병복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계림동 작은집에 간다고 나갔을 뿐 아니라 학생들만 잡아간다는 얘기를 듣고 있었던지라 거의 염려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닷새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아서학동 큰집에 전화를 해보니 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병복이 친구는 거의 없는 편이어서 따로 연락해 수소문할 길이 없었다.
도청 안 시체들 속에
전혀 소식을 몰라 걱정하고 있는데 군에서 근무 중이던 셋째 아들 병선이가 어느 날 연락을 해왔다. 신문에 난 광주사태의 사망자 명단에 안병복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꼭 동생 같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둘째 아들 병원이가 도청으로 가보았다. 정말로 우리 병복이가 죽어 있었다. 병원이가 시체를 찾아서 관에 넣었다. 우리 아들 관에는 '열사'라는 글씨가 박혀져 있었고 큰 태극기가 덮어져 있었다. 관은 빨간색 페인트가 칠해진 좋은 것이었다.
5월 25일이었다.병복이가 들어 있는관을 도청 사무실 입구에 두었다. 둘째 아들이 그날 밤을 거기서 보냈고, 둘째 며느리가 노잣돈 5천 원과 손에다 250원을 쥐어줬다. 제사도 지냈다.
5월 26일도청으로 시체를 확인하러 갔더니 주위에 1백구도 넘게 태극기로 덮힌 관이 있었다. 학운동에서 세 식구가 몰살한 시체도 거기 있었다. 남자는 머리가 깨져 있었고 어깨도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부인과 어린 아들도 죽어 있었는데 미처 입관을 해놓지 않아서 시체를 볼 수 있었다. 처참하게 일그러진 시체를 보고도 징그럽다거나 무섭다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한 미확인 사상자도 보았다. 몸뚱이가 동강난 사람도 있었는데 얼굴을 알 수가 없어서 신발과 바지만 진열해 놓고 찾아가라고 했다.
시체를 가득 실은 트럭
그날은 병복이 아버지가 도청에서 밤을 새웠다. 27일 새벽에 빨리 피신하라고 하는 말과 함께 도청 쪽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병복이 아버지는 집으로 간다고상무관을 빠져나왔는데, 65세나 된 노인이라 눈이 어두워송정리쪽으로 잘못 빠져나가버렸다.
그때 많은 군인 차들이 비아쪽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화물차 같은 것에 뭔가를 잔뜩 싣고 가는데 얇은 것으로 덮어진 트럭 포장이 펄렁펄렁해서 보니 시체들이 가득 실려 있더라고 했다. 그 시체를 실은 차가 두서너 대 지나간 부터는 시내 쪽에서 총소리가 나지 않았다.
군인들이 어딜 가냐고 물어, "난 유동 쪽인데 삼각동을 가야 한다."고 했더니 계림동까지 데려다주었다고 한다.집에서는 새벽에 총소리를 듣고 쌍초상이 난 줄로만 알았다. 병복이 아버지가 집에 들어온 시간은 오전 10시쯤이었다.
오후에 시체를 찾으러 다시 도청으로 갔는데, 도청 앞에는 임자 없는 시체가 많이 있었다. 다음날 서방 삼거리로 나오라 해서 거기로 갔는데, 시체들 옆에 새끼줄을 쳐놓고 못 들어가게 했다. 시체를 용달차에 싣고 기름종이 같은 포장만 덮은 채 망월동으로 싣고 갔다.
우리 가족은 보안대 차를 타고 망월동까지 갔다. 당시에 장례비 30만 원이 나오고 동사무소에서는 쌀 두 가마니를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시에서 주는 4백만 원도 받았다. 1983년에는 1천만 원의 지급비를 받았다.
나는 처음부터 유족회에 가입하여 활동해 오고 있다. 유족회원에 대한 탄압은 심해 1981년에 1주기 기념 추모제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나주경찰서까지 연행된 적이 있었다.
(조사.정리 서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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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6.2.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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