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는 5.18지휘자가 없었다는 유공자들의 증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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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1-05-18 11:14 조회2,98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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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는 5.18지휘자가 없었다는 유공자들의 증언들
5.18기념재단 홈페이지에는 사태 당시 광주에서 죽은 광주인 154명의 직책과 나이가 있다. 가방끈이 거의 없는 껌팔이 구두닦이 식당보이 등 천대받던 양아치계급과 중고등학생들이 대부분이다. 사망자들 가운데 가장 빨갱이들에 의해 높이 평가받고 있는 사람이 윤상원(본명 윤개원)이다. 시위의 앞장에 섰다가 재판을 받은 사람은 357명, 이들의 직업을 자세히 살펴보니 모두 59종이었고, 이들 대부분 역시 양아치계급과 중고등 학생들이었다.
5.18은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10일 동안 진행되었다. 5월 18일부터 21일까지는 전투단계, 5월 22일부터 25일까지는 종교지도자-교수 등이 나서서 무기반납을 주도하다가 김종배, 박남선 등 과격분자들에 의해 해산되는 지리멸렬 단계, 26일부터 27일 새벽까지는 각자 단위로 뿔뿔이 도청에 들어간 과격분자들이 서로 만나 의기 자랑하고 갑론을박하다가 제압당한 이른바광주항쟁단계였다.
전남지역 운동권에서 가장 뛰어났던 윤한봉은 5.17계엄령 발동 이전에 숨어 다니다가 밀항하여 미국으로 도망갔고, 김대중으로부터 김상현을 통해 500만원을 받았다는 정동년은 5월 17일 자택에서 체포되었고, 광주 운동권에서 가장 신망 높았던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시위 기간 내내 도망가 있었고, 5월 27일 사망한 윤상원은 5월 22일까지도 이리저리 숨어 다녔다. 5.18유공자들 중 최고반열에 정좌한 사람들의 증언을 읽어보면 5월 18일부터 21일 계엄군을 도청에서 몰아낼 때까지의 전투 지휘자는 광주에 없었다.
전라도 인간들, 정치빨갱이들은 북한군이 주도한 게릴라 전쟁을 놓고 마치 자기들이 주도한 민주화운동이라고 공갈하고, 가방끈이 거의 없는 도시빈민 천덕꾸러기들이 ‘더러운 세상 한번 뒤집어 보자’는 심정으로 이리 저리 몰려다니면서 부나비 노릇하다가 죽은 아이들의 공을 타고 앉아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횡재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더럽고 비겁한 인간쓰레기들이 아닐 수 없다.
최초의 학생수습위원회 위원장 김창길의 증언
22일 형성된 학생수습위원회의 위원장은 나였고, 부위원장 겸 장례위원장은 김종배였다. 그 후 박남선, 윤석루, 김화성, 황금선, 노수남, 구성주 이런 사람들이 들어왔다. 학생수습위원회라고는 이름 지었지만, 학생들은 서너면 밖에 안 남고 나머지는 다 일반시민이었다. 학생들은 다 도망가 버렸다. 이들 모두는 어떤 조직으로 묶여 있었던 게 아니라 뿔뿔이 여기저기에서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여기 도청에 있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조직은 없었다.
도청에 몰려든 사람들이 23일부터 무기회수에 나섰다. 무기는 광주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발사고만 날 수 있었다. 무기에 대해 알고 있던 사람은 군에 다녀온 노수남, 고재왕, 황금선 정도였고, 이들이 무기 회수를 주도했다. 5월 24일은 김재규가 처형된 날이었다. 날씨도 을씨년스러웠다. 당시 시청 지하실에 쌓인 다이너마이트 관리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것이 가장 두려운 존재였다.
시민수습위원회(주:원로모임) 어른들이 도청 2층 도지사실에서 아침에 넥타이 매고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했다. 신부 목사들이란 어른들한테 나는 욕설을 했다. 탁상공론 하지 말고 무언가 실질적으로 도와달라고. 조비오, 김성룡 신부가 나타나 YWCA 소속의 사람들을 동원해 주겠다고 했다. 주로 고등학생들과 대학생 일부 데리고 와서 그 인원으로 무기고와 다이너마이트 보관실을 지키게 했다. 윤상원, 정상용, 박효선, 윤강옥은 24일 오후에야 도청에 들어왔다. . 강경파가 이끄는 항쟁지도부는 26일 아침부터 가동됐다. 김종배가 항쟁지도부 항쟁위원장이 된 것이다. 나는 25일 저녁에 자리를 내놓았다.
5.26.구성된 항쟁본부 사령관 김종배의 증언
87년에 복학했다. 제13대 국민회의 국회의원을 했다. 5월 25일, 윤상원, 정상용, 김종배 이렇게 셋이서 투쟁위원회를 짰다. 김창길의 수습위원회에 재야청년들을 더 영입했다. 당시 정상용과 윤강옥 김영철 정해직 등은 학생이 아니었다. 이들이 재야청년들인 셈이다. 윤상원이 대변인을 했다. 내가 총위원장이었고, 두 사람의 부위원장이 각기 외무위원장, 내무위원장을 맡고, 예비군까지 동원하려 했다. 하지만 동원은 못했다.
당시 미항공모함이 왔다. 조금만 더 버티면 미국이 우리를 도와줄 줄 알았다. 28일에 시민장을 계획했었다. 기동타격대를 구성했는데 대장은 윤석루(무기징역 선고)가 맡았다. 사실 윤석루는 그때 뭘 모르는 어린아이였다. 21일 발포 이후인 저녁에 총이 나왔다. 그런데 그 다음날 수습대책위원회가 설치되어 무기반납을 추진했다. 나는 도청 분수대에 뛰어 올라 마이크를 뺏어가지고 ‘사람이 많이 죽었는데 무슨 수습이고 무슨 무기반납이냐 소리쳤다. 각 병원에 있는 시체들을 모두 도청 앞에 집결시켜가지고 시민들을 흥분시켰다.
26일, 우리는 참 외로웠다. 계엄군은 들어온다 하지, 사람들은 계속 빠지고 있지, 이런 상태에서 계엄군과 싸운다는 건 자살행위였다. 나중에 보니 17명이 사망했더라. 감창길이 도청에 들어와 계엄군이 곧 들어온다며 밥해주던 여자들을 다 내보냈다. 많은 사람들이 도청을 빠져나갔다. 나는 박남선과 같이 도청 전투배치를 지휘했다. 박남선(투쟁위원회의 상활실장, 화려한 휴가의 안성기 역)은 평시에 알던 사람이 아니라 도청에서 처음 만났다. 도청에서 최후까지 싸운 사람들은 거의 다 모르는 얼굴들이었다.
5.26.구성된 항쟁본부 외무위원장 정상용의 증언
그는 5.18항쟁자료집 제1권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나와 김종배 허규정은 수습대책위원이었고, 나중에 YWCA로부터 영입된 윤상원등과 합쳐 ‘항쟁지도부’를 출범시켰다. 김종배가 김창길이 이끌었던 수습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이었기 때문에, 그가 위원장을 하고 나는 대외관계를 맡는 외무를 맡고 허규정이 내무를 맡았다.
‘항쟁지도부’라는 것은 낯모르는 사람들 끌어 모아 임시방편으로 만든 임시조직이었다. 윤상원, 나, 이강현, 윤강옥 이렇게 넷이서 주로 대책을 의논했다. 25일 이후에 도청에 모인 사람들은 겨우 70-80명 수준이었다. 그나마 얼굴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온건파인 김창길 등을 몰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박남선이었다. 그가 권총을 쏘며 무섭게 해서 몰아냈다.
19일에 나는 녹두서점에 있었다. 거기서 윤상원을 만나 대책을 의논하다가 21일 총격전이 벌어지자 흩어졌다. 녹두서점에 있었던 사람들이 ‘각자 처신하자’며 다 해산해 뿔뿔이 헤어졌다. 22일 다시 녹두서점에 모였다.그리고 녹두서점이 비좁아 본부를 YWCA로 옮겼다. 김종배(총사령관역)와 허규정(내무위원장)은 여기에서 처음 만났다. 이 두 사람은 조선대 학생이었고, 운동권이 아니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거기에서 생전 처음 만난 거다.
윤상원의 투쟁 감각이 나보다 앞서 있었다. 김종배를 찾아낸 것도 윤상원이었다. 27일, 윤상원 등 여러 명이 도청건물 회의실에 있었다. 회의실에 있었던 사람들이 거의 다 죽었다. 전망이 좋은 2층 복도에 있던 사람들은 별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제압당했다. 계엄군이 의표를 찔러 후방으로부터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5.26.구성된 항쟁본부 내무무위원장 허규정의 증언
그는 5.18항쟁자료집 제1권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나는 5월 26일 출범한 투쟁위원회의 내무위원장을 맡았다. 우연히 지나다가 공수부대 요원들이 젊은 학생들을 따라다니며 때리는 것을 보고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도 공수부대에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됐다. 운동권에 속했던 것도 아니고 순전히 개인지격으로 휩쓸렸다. 시민들 하고 이리저리 밀려다니기만 했다. 그 시위는 누가 주도하는 사람도 없고 리더도 없었다. 경찰도 공수부대를 욕하고 우리더러는 들어가라며 보호해주려 했다.
21일 누군가가 도청을 탈환했다. 이걸 장악한 사람들이 있을 거 아닌가? 도청을 장악한 사람들은 따로 있고, 우리는 사태를 수습하려고 도청으로 간 거다.장악한 사람들은 위엄 있는 높은 관료 정도로 보이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우리에게 ‘곧 계엄군이 들어올 것이니 학생들은 나가라’고 말했다.
종교계 지도자, 재야인사만 들어가고 학생들은 들어오지 말고 나가라 했다. 계엄군이 곧 들어온다 하니까 누구든 책임감 없이 나와 버렸다. 종교지도자들도 나갔고, 일반 시민들도 다 나갔다.도망 나온 거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멀리 안 가고, 근처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그런데 일부 시민들이 도청에 들어갔다는 말이 들렸다. 나도 다시 도청에 갔다. 갔더니 시국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돼 있었다. 높아 보이는 사람들은 안 보였다.
어른들은 시국수습대책위원회, 젊은 사람들은 학생수습위원회, 어른 청년이 각각 위원회 만들어 가지고 서로 말이 다르고 통제가 안 되었다. 조직이 움직이지 않고 엉망이었다. 그런데 윤석루(19세)가 나이도 굉장히 어린데 기백이 있어서 기동타격대를 장악했다. 윤석루는 학생도 아니었다. 특별한 방법은 안 나오고 맨날 회의만 했다. 운동권 간부들은 모두 다 예비검속으로 미리 잡혀 가버렸고,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개념 없는 사람들뿐이었다.
23일의 이런 모습을 본 위엄 있는 ‘국장급 공무원들’이 24일부터는 보이지 않았다. 남는 사람들은 오직 종교지도자들, 교수들 그리고 젊은 사람들뿐이었다. 이들은 모두 사태를 여기서 끝내고 시국을 수습하자고 했다. 나도 멋모르고 참여해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내무위원장이 된 거다.
5.26.구성된 항쟁본부 상황실장 박남선의 증언
5.18항쟁자료집 제1권에서 박남선은 이런 증언을 했다.
시민군은 모두 불루칼러들이었다, 식당종업원, 구두닦이 등 가장 밑바닥에서 사는 사람들이 가장 앞장섰다. 운동권들은 다 광주에서 도망갔다. 지식인들은 수습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얼굴 세울 궁리만 했다. 전남대? 5월 17일, 운동권 인물들 다 잡혀 갔다. 항쟁에 참여한 사람 거의 없다. 고등학생들, 총 들고 싸우겠다고 했는데 내가 26일 밤, 다 돌려보냈다. 무기를 탈취한 사람들은 광주가 통제해서 보낸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간 사람들이다.
윤상원과 함께 숨어 있던 김효섭의 증언
“역사로서의 5.18” 제3권 (329-332)에는 김효섭의 증언이 있다.
“상원이 형은 그게 자기가 생각해도 잘 안 되겠던지, 이번에는 무기를 개발하자고 했다. 깨진 보도 불록을 가지고는 어림도 없으니, 철공소들에 다니면서 쇳토막 하고 나사를 많이 가져오라 했다. 21일 새벽부터 계림동 대인동을 다니면서 나사와 철근토막들을 구해 녹두서점으로 왔다. 그걸 가지고 나가 땡겨보았는데 날카로워 손에 피가 났다. 이거 안 되겠다 생각하고 있는 순간 어디선가 모르게 총이 쏟아져 나와 버렸다. 수집한 쇳토막들은 소용없게 되었다.”
역사학연구소 연구원·노동자교육센터 부대표 박준성의 글(2005.9.5.)
https://blog.naver.com/logosist/17006521
5.18의 열렬한 호위무사인 박준성은 역사학연구소(http://www.ihs21.org/) 연구원이자 노동자교육센터 부대표다. 그는 2005년 9월 5일 인터넷(http://blog.naver.com/logosist/17006521)에 “광주항쟁의 '주역'은 바로 노동자였다”는 제하에 아래와 같은 글을 올렸다.
“1980년 ‘민주화의 봄’을 이끌던 지도부가 광주를 빠져나간 뒤, 광주를 지키며 끝까지 싸웠던 이들은 노동자, 농민, 기층 민중이었다.”
수사기록
당시 군은 광주사태 관련자 2,518명을 조사한 결과 1,957명은 훈방조치하고 561명을 검찰로 송치했다. 제1심 피고인 수는 모두 357명, 이중 252명만이 집행유예 이상의 형을 받았다. 그런데 이 357명을 연령별로 보면 10대가 71명으로 20%, 20대가 216명으로 61%를 차지했다. 10-20대가 81%를 차지한 것이다. 나머지는 30대 36명, 40대 23명, 50대 6명, 60대 5명으로 집계된다. 이들의 직업은 주로 하층 계의 직업들로 무려 59종에 이르며 직업별 구체적인 숫자는 아래와 같다.
학생80 농업30 무직27 운전수24 종업원21 노동13 방위병13 교수11 목공11 상업9 공업7 회사원6 양화공5 용접공5 행상4 미장공4 광부4 목수4 선원4 교사3 변호사3 재수생3 보일러공3 교직원3 인쇄업3 조수3 운수업2 샤시공2 제과공2 석공2 신부2 자개공2 가구공2 회사이사2 재봉사2 정비공2 실내장식1 약사1 개찰원1 다방1 전기공1 변호사사무장1 서적판매원1 세공1 도자기공1 의사1 이발사1 양복점1 엿장수1 건재상1 신문보급소1 당원1 청과물상1 불럭공1 매점1 대학이사1 회장1 화가1 가톨릭회장1(서경원)
사형을 받은 사람은 정동년(37, 복학생), 배용수(34,운전수), 박노정(28,인쇄업), 박남선(26, 트럭운전수), 김종배(26,학생)이고, 무기징역을 받은 사람은 윤석루(20,구두공, 기동타격대장) 허규정(27,학생) 정상용(30,회사원) 하영열(31,공원) 윤재근(28,공원) 서만석(36,상업) 홍남순(67,변호사)였다.
27일 새벽 진압작전에서 사망한 17명, 거의가 13세를 포함한 10대 학생들과 20대의 천덕꾸러기들이었다.
2021.5.18.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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