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 메시지 281] 도덕적 자본주의 창시자, 시부사와 에이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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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7-10 22:23 조회7,61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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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메시지 281]
도덕적 자본주의 창시자, 시부사와 에이이치
조선일보의 샤이 이름
2024.7.7. 조선일보 Weekly Bit에는 도쿄 특파원이 시부사와 에이이치 증손을 만난 이야기를 2면에 걸쳐 기사화했다. “일본은 왜 자본주의 설계자를 120년 만에 소환하나?” 왜 120년 만에 소환했는가에 대한 질문은 있는데 2쪽을 다 훑어봐도 답은 없다. 시부사와가 500개의 기업을 창업하긴 했지만 그가 소유한 기업은 단 1개도 없고, 그에게 남은 돈은 모두 600여 개의 사회공헌 단체에 기부했고, 자식에 전해준 자산이 사실상 없었다는 점을 기사화했고, 그의 증손자는 쓰레기를 줍는다고도 기사화했다. 그런데 왜 120년 후인 지금에 와서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초상이 일본 최고권 1만엔 권에 새겨지는지에 대한 답은 없다. 도코 특파원은 시부사와는 ‘자본주의 설계자’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이는 의미 없는 소개다. 자본주의의 설계자는 그가 아니었다. 그는 ‘일본식 자본주의’ 설계자였고, 일본식 자본주의는 ‘도덕적 자본주의’였다. 한 손에는 도덕율, 다른 한 손에는 주판을 들라. 주판은 오로지 도덕율 아래서만 두어라” 이것이 일본의 도덕적 자본주의였고, 그 설계자가 시부사와인 것이다. 이런 위인을 조선일보는 조선 경제의 침탈자로 소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왜 2024년부터 1만엔 권 초상이 시부사와로 바뀌었나?
우리나라 민주주의 정치제도는 이승만 대통령이 설계했고, 경제는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이 건설했다. 그런데 일본의 정치제도 설계자는 후쿠자와 유키치이고, 일본의 개화의 아버지도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일본의 도덕적 자본주의는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설계했다. 한국 토대의 위인은 3명의 대통령이었지만, 일본 토대의 위인은 관직이 없는 선구자들이었다. 지난 40년 동안 일본 최고권 1만엔 권에는 후쿠자와 유키치(1935)의 초상이 인쇄돼 왔다. 40년이 지난 2024년부터 후쿠자와 유키치의 5년 연하인 또다른 위인인 시부사와로 초상이 바뀌어진 것이다. 거의 동시대에 태어난 두 민간 인물들이 일본의 민주주의, 일본의 근대화, 일본의 도덕적 자본주의라는 터전을 설계했다. 그래서 차례로 초상을 올리는 것이다. 이것이 도쿄 특파원이 찾아내지 못한 답이다. 지난 40년간 1만엔 권 초상에 올랐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한문을 사용하는 중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한국 모두의 위인이다. 그가 옥스퍼드 영영사전을 영-한문 사전으로 전환한 작업은, 문자계의 불가사의로 꼽히는 실로 위대한 작업이었다. 한국 말고는 중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가 다 후쿠자와 유키치를 존경하고 고마워한다.
시부사와가 조선 경제의 약탈자?
오늘의 한국은행 전신이 조선은행이고, 조선은행은 시부사와의 작품이다. 무거운 엽전을 지폐로 바꾸었다. 광맥을 찾아 광산업을 개발하고, 경부철로, 경인철로를 부설했다. 한국에도 수많은 도덕적 기업들이 들어섰고, 이들 모두가 오늘날 대기업의 전신이었다. 이것이 경제 침탈인가? 일본이 설치한 사회간접 자본, 일본이 남기고 간 기업들이 없으면 한강의 기적도 없었다. 이것이 경제 침탈이라는 자들, 무식하거나 빨갱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결 론
필자가 발행한 [일본의 의미]는 일본을 제대로 평가한 대한민국 최초의 책일 것이다. 친일 딱지가 붙으면 사회생활 자체가 불가능한 멍석말이 마녀사냥 사회에서 그 누구도 엄두낼 수 없는 내용들을 일필휘지 하듯 갈겨쓴 책이다. 비록 210쪽이지만 이 내용들은 일반 상식에 천지개벽을 일으키는 폭풍몰이 엑기스다. [일본의 의미]를 읽어야 폐쇄된 국민의식이 비로소 개화될 것이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개화되지 못했다. 반일은 곧 원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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