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서(법원에 제출한 도서에 대한 요약)-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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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1-05-01 11:34 조회4,66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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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변 서
(별책 내용 요약)
사건 2020노804 가.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위반 등
피고인 지만원
귀 재판부의 명에 따라 위 피고인은 그동안 재판부에 제출한 별책들에 대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제출합니다.
1. 피고인의 연구 역량
피고인은 1966년 육군사관학교(22기) 이학사 과정을 이수함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하였습니다. 소위-대위 시절 44개월 동안 베트남전 전투요원으로 참전하였고, 무공수훈자 겸 상이 6급 유공자가 되었습니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베트남전은 대게릴라전이었고, 이 4년간의 대게릴라전에서 얻은 경험과 지식은 5.18 연구에 활용된 매우 귀한 자산이었습니다. 소령 시절인 1975년에는 미국 해군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중령 시절에는 또 다시 미 해군대학원에서 시스템 응용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박사논문에는 수학 공식 2개와 수학정리 6개가 발명돼 있습니다. 이는 그 학교 창설 이래 이변이자 전설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1980년 10월에는 중앙정보부에서 북한관련 자료를 섭렵했고, 1981년 10월부터는 국방연구원에서 6년 동안 연구를 하였습니다. 1987년 대령으로 예편한 후 모교인 미해군대학원에 가서 3년 동안 교수생활을 한 후 귀국하여 프리랜서로 저술, 강연, 방송 활동을 하다가 1998년 햇볕정책이 가동되면서부터 이에 대한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반공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그 반공활동의 가장 중요한 일부가 2003년부터 현재까지 20년 동안 진행해온 5.18 연구였습니다. 연구내용은 10권의 5.18역사서(약 4,000쪽)에 담겨 있으며 이 모두는 이 재판부에 제출돼 있습니다.
2. 김대중과의 한때 인연
피고인은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도곡리 271번지에서 태어났고, 1990~97년까지는 군사평론과 시스템경영에 관한 내용으로 TV, 라디오 프로에 자주 출연하였습니다. 방송, 기고, 저술, 강연 활동으로 유명세를 탔고, 당시 장관 봉급이 400만원 정도였을 때 두뇌활동으로 연간 1억 이상을 버는 고액소득자 10인 리스트에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1995년 5월 경, 김대중 당시 평민당 대표가 스위스그랜드호텔에서 주재한 한-중 국제세미나에 나가 기조연설을 하였고, 김대중 대표는 그 내용이 좋다며 같은 해 10월 25~31간 중국 북경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다시 발표해 달라 하여 1주일 동안 북경 소재의 조어대(영빈관)에서 그와 함께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는 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10월 19일 박계동 의원이 노태우 비자금 4천억 원을 폭로하자 김대중 대표는 10월 27일, “나는 노태우로부터 20억을 받았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그 때 피고인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 발표는 여론의 화실을 그의 정적인 김영삼에게 돌리는 기막힌 작전이었습니다. 노태우가 그의 정적에게 20억을 주었다면 노태우 밥상머리에서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몇 천억 원을 받았겠느냐는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이에 코너에 몰린 김영삼이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시키고, 재심 절차를 피하기 위해 5.18특별법을 편법으로 만들어 5.18을 다시 재판했습니다. 5.18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1981년 판결과 1997년 판결 2개가 병존하는 것입니다. 일단 특별법으로 사실상의 재심과정이 진행되자 김영삼과 안기부장 권영해는 전두환에게 죄를 씌우기 위해 권정달이라는 시대의 배신자를 이용하여 “전두환에게는 집권하려는 시나리오가 있었다”는 범의를 제조해냈습니다. 이 사실은 피고인이 2003년 연구를 시작하면서부터 찾아낸 발견품이었습니다.
1995~97년 전두환 군부에 대한 재판이 전국을 뒤흔들었어도 피고인은 프리랜서 활동에 바빠 신경조차 쓰지 않았습니다. 보도를 통해 재판 결과만 접한 나머지 피고인은 피고인이 중정에서 습득했던 5.18에 대한 지식과 김대중에 관한 지식은 다 잘 못된 것이고, 김대중이 핍박의 피해자였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러다 1998년 김대중이 집권하였습니다. 김상현 의원과 총무, 안보, 경제 분야 등 여러 수석들이 피고인을 만나 한 자리 맡아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심지어는 박지원도 힐튼호텔 조찬에 일부러 피고인을 단독으로 초청하여 자기에게 요청할 것이 있으면 하라고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피고인은 창작의 세계를 즐겼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 돈이 되는 그런 입지’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 이 모든 제의를 쉽게 거절하였습니다. 심지어는 2000년 총선에서는 당시 한나라당 부총재 홍사덕씨가 3차례나 찾아와 전국구나 정책위 의장을 맡아 달라 했어도 서슴없이 거절할 정도로 피고인은 연구하는 자유공간을 사랑했습니다. 일반국민 정서와는 동떨어진 인생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강준만의 ‘인물과 사상’ 제11권(증210) 제94쪽에는 “영원한 자유인으로 살고파”라는 당시 말지에 기고한 피고인의 기고문이 사진으로 소개돼 있을 정도로 피고인은 출세보다는 자유분방한 인생공간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 국정원장 임동원이 경실련에 나와 햇볕정책이라는 것을 발표하는 자리에 갔습니다. 그가 발표하는 햇볕정책을 집중하여 필기하였습니다. 이 내용을 접하자마자 피고인은 국정원 시절에 접했던 정보들이 맞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임동원은 육사 13기인데 북으로 간 간첩 최덕신 장군(임동원 입교 당시 육사교장)의 추천으로 육사에 입교한 사람이며 빨갱이라는 이유로 육사 총동창회에서 제명당한 사람입니다. 금강산 관광사업을 통해 달러를 퍼주고 기업들을 닦달하여 북한을 도와주게 하고 2000년에는 정상회담이라는 형식을 빌어 북한에 5억 달러의 뒷돈을 건네주고, 지뢰 등 DMZ 장애물을 제거하는 등 사상이 의심되는 행동을 보였습니다. 이에 피고인은 김대중과 그의 아바타 임동원을 북한 총독부 사람들이라며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를 향해 웃어주던 두 사람의 얼굴에 침을 뱉은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 ‘웃는 얼굴에 침뱉기’를 피고인이 한 것입니다. 빨갱이들에 속았다는 분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참고로 윤성민 전 국방장관은 피고인이 4부작인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을 쓰고 있던 2005년까지도 매일 여러 차례 전화를 하실 정도로 피고인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12.12의 그날, 당시 윤성민 참모차장에 대한 기록을 분석해 보니 그 당시 그의 행동을 감추어 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피고인은 연구를 하는 대로 조각조각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그후 그로부터 전화가 오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5.18의 역사를 수사기록을 가지고 쓰는 사람으로서 공과 사를 혼돈할 수 없었습니다. 피고인은 피고인을 지극히 사랑해주시던 윤성민 전 장관 얼굴에도 침을 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정리하는 것이 바로 사랑을 배신하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201`9.2.19.에 노컷뉴스는“DJ 편에 섰던 지만원, 왜 '극우 망언자'가 됐나”의 제하에 비록 피고인을 적대시하는 기사를 썼지만 피고인이 한때 김대중과 함께 했다는 사실은 적시돼 있습니다(증209). 피고인이 햇볕정책에 대한 위험성을 제기한 사실은 1998년 전북대 강준만 교수가 펴낸 [인물과 사상 제11권 89~130쪽 “시스템 전도사 지만원의 사고 시스템”에 기재돼 있습니다.(증210)
3. 5.18역사를 연구하게 된 동기
피고인은 5.18 소요가 발생했을 때 미국에서 논문을 쓰고 있었습니다.5.18 사건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에서 학위를 마치고(1980.9.26.) 1980년 10월 입국하면서 곧바로 당시 중앙정보부 지휘부의 특별보좌관으로 보직되면서, 5.18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말들을 많이 들었고, 5.18은 김대중이 배후 조종한 내란음모 사건이라는 보고서도 접하게 되었습니다. 베트남에서 게릴라전을 44개월 동안이나 수행했던 피고인은 광주에서 발생한 폭력 내용들이 정확히 게릴라 활동에 해당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후 6년 동안 피고인은 국방연구원에서 자원관리 분야에 대한 연구를 하였고,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윤성민 장관과 함께 5년 동안 군 역사상 전무후무했던 예산개혁을 추진하면서 군에 적과 친구를 많이 만들었습니다. 장관이 바뀌자 피고인을 추방하라는 임무를 띤 국방기조실장이 연구소장으로 내려와 무조건 나가라 하여 자의 반 타의 반, 1987년 2월, 임관 이후 22년간의 군 생활을 대령 계급을 끝으로 마감하하면서 곧바로 미 해군대학원에 가서 3년 동안 교수직을 수행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처녀작을 냈습니다. [70만 경영체 한국군 어디로 가야 하나] 김영사가 낸 이 책이 4주 동안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베스트 1위, 3주 동안 4~5위를 차지한 바 있습니다(증209-1). 피고인은 [신선한 충격]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하여 피고인은 언론에서는 군사평론가와 시스템 전도사로 부각되었고, 기업에서는 재미있는 강사로 인정되어 인기를 얻었습니다. 프리랜서의 생활이 참 즐거웠습니다.
1995년 봄 어느 날 김대중이 보낸 사람이 꿀 항아리와 30만원을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이를 계기로 아태재단의 초빙교수로 나갔습니다. 학생들로부터 인기를 얻게 되자 김대중은 피고인에게 그가 주최하는 국제세미나에 기조연설을 해달라 요청했습니다. 기조연설에 대해 박수가 많았습니다. 그해 10월, 중국에 가서도 똑같은 내용으로 발표를 해달라 요청하였습니다. 북경으로 가는 비행기에서는 그의 부인이 앉아야 할 자리에 피고인을 앉혔습니다(증209). 이렇게 돈독했던 관계가 그의 햇볕정책 추진으로 한순간에 깨졌습니다.
피고인이 가장 놀란 것은 2000년 6월을 장식한 남북정상회담이었습니다. 2002년 하반기에 발생한 노동자 운동, 마늘파동에 관련한 농민시위 등을 보면서 2002년의 대선이 제대로 치러지지 않을 것이라는 공익적 염려를 하게 되었고, 그 염려의 뜻을 6하 원칙에 의해 동아일보 등에 의견광고의 형태로 기재하였습니다. 3,500자에 해당하는 광고문 중에는 35자에 해당하는 한 문장이 있었습니다. 마늘폭동이 제2의 5.18폭동으로 진전될 수 있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5.18의 성격을 간단히 약술했습니다. “5.18은 소수의 불순분자들과 북한특수군이 야합하여 순수한 광주시민을 선동해 일으킨 폭동”이라는 구절이었습니다(증149). 5월단체들이 피고인을 고소하였습니다. “북한군 개입” 표현이 5월 단체들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것입니다. 피고인은 변호인의 도움을 받아 사건을 서울로 이송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형사소송법 제4조와 제15조를 근거로 내세웠습니다. 그런데 광주지검은 이에 대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수사관과 경찰 4명을 안양소재의 제 주거지로 보냈습니다. 이들은 가족들이 울부짖는 앞에서 저의 팔을 뒤로 꺾어 뒷수갑을 채워 차에 밀어 넣었습니다.
6시간의 압송도중 린치와 폭력을 쉴 새 없이 당했고, 415호 검사실에 도착해서도 수갑을 뒤로 채인 채 욕설과 구타 협박에 시달리며 2시간 동안 더 조사를 받았습니다. 광주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그 위에 존재하는 생지옥이었습니다. 징역 10월을 선고받았습니다(증145). 피고인은 직감했습니다. ‘5.18에 무슨 검은 사연이 있을 것이다.’ 피고인에 연구 의지가 생겼습니다. 10년이든 20년이든 진실을 밝혀낼 것이라는 사명감이 생긴 것입니다. 얼굴도 모르던 전두환 측 변호인 이양우 변호사로부터 수사기록을 빌렸습니다. 18만 쪽에 해당한다는 수사기록들을 가지고 2,170쪽 4부작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에 압축해 놓는 데에만 만5년이 걸렸습니다. 이후 최근까지 5.18역사서 10권을 발간하였습니다. 이들 중 5월단체가 소송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첫 4부작, 5.18영상고발, 무등산의 진달래입니다.
4. 피고인이 발행한 총 10권의 5.18역사 저작물에 실린 주요 내용들
1) 4부작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8] (2008)
제1권: 10.26과 12.12의 시대적 정치상황이 자세히 그려져 있습니다. 이후 수사기록을 분석 정리한 현장상황들이 영화장면처럼 묘사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수사기록은 참으로 복접해서 논리적 퍼즐을 맞추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10.26과 12.12는 수사기록을 수학적인 두뇌로 정리해야만 쓸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을 보면 일반 언론 기사들이 모두 소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경호원들이 일거에 살육당하는 현장 상황이 묘사돼 있습니다. 시해 직후 대통령 비서실에서 전개됐던 무조공산 같았던 상황, 안가에서 육군본부 벙커 지휘소로 가는 동안 정승화 총장의 차에서 김재규와 정승화가 나눈 대화, B-2벙커에서 벌어졌던 스릴들, 국방부 청사에서 열린 비상각료회의에서 최규하가 보인 이중적 태도, 김계원 비서실장의 간신 같은 배신행위, 정승화의 구데타 기도, 2성장군 전두환의 등장, 위화도 회군을 방불케 하는 김재규의 연행과정, 김재규의 시해동기 고백, 김재규-정승화의 군벌 인맥과 내전을 방불케 하는 충돌, 정승화 연행계획, 한남동 정승화 공간에서의 총소리, 김진영의 공관출동, 최규하 대통령의 소아적 재가과정, 노재현 국방장관의 부끄러운 기행, 12.12에 대한 신현확의 증언, 노재현의 신문 내용, 장세동과 허화평 진술, 육본 상황, 갈라진 군벌, 장태완의 난동, 12.12.의 마감과 결산, 민주화세력의 천하, 검찰의 역사 평가, 구속당하는 전두환, 헌법재판소의 위헌행진, 헌법소원, 5.18특별법 제정, 특별법의 위헌성, 검찰의 기소행진, 재판과정, 판사들이 다시 쓴 5.18역사 등이 수록돼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은 역사물의 내용이지 5월단체들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한 내용들이 아닙니다. 제1권의 첫 부분은 10.26과 12.12입니다. 난삽하게 흩어진 수사기록들을 시간대별로 정리하는 이 작업은 몰입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제대로 쓸 수 없는 작업이었습니다. 5.18에 대해서는 상황일지를 잘 요약하는 것으로 충분했지만 10.26과 12.12는 고도의 분석력을 요했습니다. 광주의 명예를 훼손시키려면 무엇 때문에 이런 어려운 과업을 수행하겠습니까?
제2권: 제2권은 순전히 5.18 상황을 정리한 책입니다.10.26 직후의 안보상황, 재야세력의 방해 속에 출범한 최규하 정부, 김대중 주도의 선동시국, 학생시위의 폭력화 행진, 학생폭력의 실체, 노동폭력의 실체, 최규하 정부의 대응, 군부의 대응, 보안사의 대응, 북한의 남침 정보, 전군지휘관회의, 광주로 몰려든 먹구름, 광수사태 10일 간의 날짜별 상황정리, 5.18주동자들은 어디에? 계엄사 발표문 등입니다. 제2권은 5.18 10일간의 상황을 정리한 책입니다.
제3권: 5.18을 보는 시각들이 정리돼 있습니다. 과격시위냐 과잉진압이냐, 계엄군과 시위대 중 누가 광주를 더 사랑했나, 진압군 측 사람들의 진술, 반 진압군 사람들의 진술, 정호용의 공판 진술, 이희성의 공판 진술, 광주소요 10일의 결산, 영화 ‘화려한 휴가’, 오보의 전성시대, 미 헤리테지재단 보고서, 이정로(백태웅)의 기고문, 끝나지 않은 모략전, 간첩 배후 조종 없는 소요는 없다, 김일성 비밀교시, 민주화의 실체, 북한군 출신들의 증언, 5.18과 4.3의 유사성 등입니다.
미헤리티지 재단 보고서: 여기에는 한국사회에 광주 피해가 너무 과장돼 있다는 분석내용이 있고, 한국군은 최후까지 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는 요지가 기재돼 있습니다. 2020.5.11. 미국이 한국정부에 주었다는 미측자료와 일치합니다.
계엄군은 광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출중한 지략과 인내심을 발휘하였음 (미 국무성 자료 위치 P:234)
<번역>
광주에서의 희생자수가 예상보다 적었던 것은 전적으로 계엄군이 그들에게 주어져 있던 자위권을 발동하지 않고 끝까지 자제한 계엄군의 덕분이었다. 진압과정에서 계엄군이 발휘한 출중한 계략도 칭찬받아야 할 일이다. 계엄군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도청 건물에 잠입하여 폭도들이 설치한 폭약의 신관을 제거함으로써 광주시를 재탈환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대참사를 미연에 방지시켰다. 이 점은 매우 칭찬을 받아야 할 부분이다. 끝으로 계엄사가 폭동 과정과 상황 종료 후에 검거된 폭도들 총 1,740명중 1,010명을 훈방하여 관용을 베푼 것도 높이 평가할 대목이다.
이정로(본명 백태웅)이 월간 노동해방문학 1989년5월호 특집에 기고한 글의 일부는 5월 세력의 5.18관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광주의 노동자와 민중은 아세아자동차에서 장갑차를 몰고 나오고 파출소의 무기고를 덮쳐 캐리버50을 꺼내오고, 화순탄광에서 다이너마이트를 끌어다 싣고 왔다. 권력의 총구가 민중의 가슴팍을 겨누고, 대검에 찔린 민중의 배에서 창자가 꾸럭꾸럭 허리 아래로 흘러내릴 때 민중의 뼈저린 자각은 저항의 총구에 불을 붙였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선 권력이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 존재라는 깨음에 신나를 몸에 끼얹고 활활 타오르는 노동자에게도 광주의 경험은 다시 살아나야 한다. 농약을 들이마시고 절명하는 농민들에게도 광주의 희망은 부활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광주봉기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뜯어고치고 알짜배기 혁명의 교훈을 찾아내야 하는 이유이다. . ”
“무장을 통하여 권력을 탈취하고자 하는 시도, 낡은 권력을 깨뜨리고 새로운 권력을 수립하고자 하는 광주민중의 영웅적 투쟁의지를 살려야 한다. '무장봉기'라는 규정은 광주민중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유일한 명칭이다. 광주 민중은 민주주의를 위한 '압력'을 넣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도'하기 위해서 총을 들었다. 그것은 '시민항쟁'의 차원을 넘어서서 '반란'이요 '혁명'이며, '주권탈취'의 한판 싸움이었다. 광주의 민중은 '비굴한 타협'이 아니라, 해방을 위한 '총공격'의 신명나는 한판을 벌였다. 그것은 '실패한 무장봉기'였다. 만약 광주지역의 승리가 전남 전체지역의 승리로 그리고 나아가 전국적 승리로 되었다면 위대한 민족민주혁명의 성취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 처절하게 참혹한 실패를 정확하게 배우고 새로운 혁명의 첫걸음을 열기 위해서도 우리는 광주를 '무장봉기의 도시', 권력을 일시적으로나마 민중이 직접 소유한 소중한 경험을 가진 '혁명의 도시'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제4권: 김대중의 내란음모사건, 김대중의 일생, 역사뒤집기의 시동, 주요쟁점들, 검찰이 본 5.18, 검찰의 법적 판단, 수사결과에 대한 언론보도, 검찰의 관심법, 화려한 법리논쟁, 대법원 판단의 요지와 쟁점, 정호용에 뒤집어씌운 기막힌 혐의 [부화뇌동죄]죄, 5공의 배신자들, 허화평의 항변, 공수부대 장병들의 증언, 방송작가가 바라본 재판현장, 5.18은 성역인가. 주요쟁점들에 대한 필자의 생각, 황당한 판결들, 재판이 무효라고 생각하는 이유 등이 펼쳐져 있습니다.
2)2부작 상-하권 [수사기록으로 본 다큐멘터리 역사책 압축본 12.12와 5.18](2009)
이 책들은 4부작을 요약한 책입니다. 하권의 제128쪽부터 238쪽에는 탈북자들의 5.18수기들이 실려 있습니다.
이 책들은 4부작을 요약한 책입니다. 하권의 제128쪽부터 238쪽에는 탈북자들의 5.18수기들이 실려 있습니다.
3) [솔로몬 앞에 선 5.18](2010)
2008년 피고인이 발간한 4부작에 대해 5월 단체가 또 고소를 했습니다. 2개의 단독재판부가 재판을 미루거나 회피하여 합의부가 형성됐습니다. 재판을 받으면서 피고인은 통일부 ‘북한자료센터’에서 실로 많은 북한자료를 접했습니다. 1989년 김일성이 황석영과 윤이상을 북으로 불러 [님을 위한 교향시]라는 5.18영화를 제작한 사실을 처음 알았고, 많은 네티즌들과 함께 공동 시청하였습니다.
이어서 북한 당국이 발간한 많은 단행본들과 간행물들을 접했습니다. 이 모든 자료의 내용들이 수사기록과는 전혀 딴판인 반면 광주에서 유통되고 있는 유언비어들과 대동소이하였습니다. 피고인은 연구에 신천지를 발견했다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이런 내용들을 증거자료로 제출하기 위해서는 재판부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대외비인 북한 자료들을 반출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 달라”고 재판부에 간청하였습니다. 재판부의 도움으로 피고인은 수많은 북한자료를 복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많은 국민들에 ”5.18의 바이블“로 알려진 [시대를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약칭 ‘넘어 넘어’)라는 책은 그 저자가 황석영이 아니라 북한책들을 모자이크하여 펴낸 저자 없는 책이라는 것을 이 책에서 증명하였습니다. 이는 2010.11. 신동아가 재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넘어 넘어]는 1982년 조국통일사가 발행한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과 1885년 노동당출판사가 펴낸 [광주의 분노]를 모자이크한 책이었던 것입니다. [넘어 넘어]는 위 북한 책들에서 공수부대를 모략하는 내용만을 추려서 모자이크한 것이었습니다. 위 2권의 북한책들은 광주의 여러 현장에서 발생한 상황들을 소설책처럼 자세하게 묘사했으며, 이 묘사한 내용들을 읽으면 광주에는 북한 사령부가 와서 게릴라 작전을 수행했다는 점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피고인이 게릴라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3장이 이 책의 핵심입니다. 여기에는 ‘광주에 북한 사람 있었다’, ‘광주에 북한 상황실 있었다’, ‘광주에 북한 지휘통제부가 있었다’, ‘5.18은 북한이 기획-연출했다’, ‘광주에 북한특수군 왔다’, ‘유언비어 발상지는 북한이었다’, ‘광주 실황중계방송은 북한 방송이었다’, ‘민주화운동은 적화통일운동’, ‘5.18원동력은 반골정신’, ‘황석영 책과 북한 책은 일란성 쌍둥이’등이 담겨 있습니다.
4.) [5.18최종보고서](2014)
이 책에 더 보태진 자료는 ‘5.18기념재단측이 보유한 책 [5.18항쟁 증언자료집](증59)입니다. 5.18을 주도했다는 5.18유공자 최고반열에 속한 이른바 5.18항쟁주역들인 김창길, 김종배, 정상용, 허규정, 박남선 등이 2002년에 증언한 내용을 전남대학교 출판부가 엮은 책입니다. 이들의 증언내용은 한마디로 1980년 5월 21일부터 1980년 5월 24일 낮 시간까지 도청을 배타적으로 점령했던 외지인이 떠난 이후에야 서로 얼굴도 모르는 젊은이들이 모여 ’시민학생수습위원회‘(일명 항쟁본부)를 구성했고, 이들은 서로 말다툼만 하다가 계엄군에 점령되었다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와 전남 17개 시군을 뒤흔들었던 광주시위를 구성한 사람도 한국에는 없었고, 그 지휘자도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수사–재판 기록, 북한기록, 항쟁지도부 사람들의 증언을 합치니 5.18연구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제1장이며 여기에는 5.18 기간 10일을 3개 기간으로 분류한 것입니다. 5월 18~21을 제1단계인 북한특수군의 작전기간, 5.22~25를 제2단계인 광주유지들이 주도한 무기반납 및 협상기간, 5.26~27을 제3단계인 소수의 20대 노동자들이 벌인 객기의 기간으로 성격 규정을 한 것입니다. 특히 제34~63에는 도저히 광주시민으로 볼 수 없는 주역들이 행한 작전장면을 촬영한 현장들이 있습니다. 항쟁본부를 형성하여 5.18을 주도했다고 선전하는 5.18유공자들은 모두 제3단계를 주도한 사람들일 뿐이었습니다.
제2장에는 북한특수군 600명이 5.18을 주도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료들이 실려있습니다. 남한 당국자료에도 북한특수군 600명이라는 숫자가 있고, 북한 당국 자료에도 600명의 주역들이 광주에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5.18기념재단 홈페이지에도 외지인 500여명이 광주에 왔었다는 기록이 있고, 그 유명하다는 광주출신 기자 김영택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제3장은 북한의 황장엽 김덕홍을 위시한 탈북자들의 증언이 실려 있고, 제4장에는 광주 5.18단체들의 집요한 사실왜곡과 자료조작 행위들이 나열돼 있습니다. 제5장에는 김영삼이, 자기가 처한 정치적 궁지를 모면하기 위해 5.18역사를 왜곡한 내용들이 정리돼 있고, 제6장에는 수사결과는 동일한데 판결이 시대에 따라 정반대로 바뀌어졌다는 내용, 5.18관련법 3개가 왜 폐기돼야 하는지에 대한 논리가 전개돼 있습니다. 제7장에는 5.18을 폭력과 억지로 성역화 해왔다는 사실들이 정리돼 있고, 제8장에는 국가역사가 5.18세력에 의해 침탈당하고 있다는 분석이 전개돼 있고, 제9장에는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데 대한 18개의 SMOKING GUN이 정리돼 있습니다.
5) [5.18영상고발](2016)
피고인은 [5.18분석 최종보고서]가 5.18연구의 종지부인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2015.5.5.부터 필명 노숙자담요에 의해 광주현장 사진의 주역 얼굴들이 북한인 얼굴 [광수](광주에 참전했던 북한인)라는 신기한 영상분석이 나오면서 문헌연구에 이어 영상연구가 더 보태지게 되었습니다. 5.18연구는 [5.18최종보고서]까지만 가지고도 북한 특수군 600명이 5.18을 주도한 것으로 결론을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영상연구가 더 보태지면서 5.18연구는 시각적 효과를 더 보탤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A4지 사이즈의 340쪽으로 인쇄된 화보책이며 대부분의 페이지는, 책의 부제목 “5.18은 북한의 침략이었다”가 암시하듯이, 광주현장의 얼굴이 북한의 얼굴이라는 것을 영상으로 증명하는 데 할애되었습니다. 책에는 기본적인 설명부분이 있으며 이 부분은 국제사회에 전파할 것을 염두에 두어 국문과 영문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차례를 보면 피고인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김대중으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은 사실, 피고인이 왜 5.18연구에 매달려왔는가에 대한연구 목적, 화보제작의 목적, 영상분석의 정확도, 청주유골의 행방 등이 포함돼 있습니다.
6)[5.18진상규명 대국민공청회](2019)
2019.2.8.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14:00~18:30까지 4시간 30분 동안 발표된 발제문입니다. 이 책은 국회의원 설훈, 민병두, 최경환, 5월단체 등이 고소-고발하였고, 이에 대해 서울남부지검에서 ‘이 내용은 학문적 공간에 속하는 의견’이라며 불구속 처분을 내렸습니다.
제1장(7~10):피고인의 5.18연구는 두 가지 분야로 이루어져 왔다. 2002년부터 2014년 10월까지는 문헌연구, 2005년 5월 5일부터 현재까지는 노숙자담요가 제공한 영상분석을 토대로 하는영상연구로 이루어져 온 것이다.
제2장(10~112):5.18연구가 왜 중요한가? 5.18마패만 들면 헌법도 대통령도 제압된다. 5.18을 등에 업은 민주화세력의 무소불위의 독재가 현실화되고 있다. 이는 5.18이 사악한 정치목적에 악용되고 있음을 뜻한다. 이는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한다.
제3장(11~41) 5.18 일지: 5.18은 정부와 폭동세력 사이에 발생한 10일 동안의 충돌사건이다. 위 발제문의 11~41쪽에는 이 10일 동안의 폭동-진압 상황이 요약돼 있다.
5월 18일(일): 학생으로 위장한 폭도 250여명이 책가방에 돌멩이를 숨겨가지고 전남대 정문을 지키고 있던 공수대원 20명에게 도서관에 가겠다고 시비를 걸면서 투석하여 분노 유발시킨 후 금남로로 달려가 차량과 파출소를 파괴하고 불을 질러 검은 연기가 나게 하여 사람들을 모이게 한 후 ‘광주시민이 수십 명 죽었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씨를 말리러 왔다, 계엄군이 여성들을 발가벗기고 희롱하였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살포했다. 이날 7공수 여단 2개 대대는 광주지역 사단장 정웅 소장의 작전지휘를 받았으며, 오후 4시경, 정웅은 36개 길목에 계엄군을 배치하여 그 안에 들어 있는 젊은이를 모두 체포해 31사단 헌병대로 넘기라 명령했다. 2명의 대대장은 길목 당 4~5명씩 배치해 젊은이들을 체포하려 했다. 중과부적인 상황에서 병사들은 곤봉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
5월 19일~20일: 이 양일간 계엄군이 수적 열세에 몰려 시민군으로부터 매타작을 당했다. 수적 우위를 차지한 시위대는 대형 버스와 트럭을 지그재그 궤적으로 몰아 계엄군을 향해 돌진했고, 계엄군은 이리저리 피하면서 “차온다”는 소리에 노이로제 공황상태로 내몰렸다. 불타는 드럼통을 계엄군을 향해 굴리고, 경상도 차량만 보면 탑승자들을 집단 구타해 살해했다. 5월 20일에는 공수부대 5개 대대(각 1,500명)가 전남대와 시청에서 수만 명 시위대에 포위되어 몰살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했고, 5월 21일 오후 5시에는 구사일생으로 시 외곽으로 탈주하기에 이르렀다. 공수부대가 곤봉을 사용한 것은 오직 5월 18일 오후 5시부터 9시까지 뿐이었다.
5월 21일: 이날 600명의 조직화된 시위대가 벌인 행위는 군사작전에서도 세계 최상급의 특공작전이었다. 5월 21일 제20사단 지휘차량 부대는 08:00시에 광주 톨게이트를 통과하도록 계획돼 있었다. 이 이동계획은 극비 중의 극비에 속했다. 그런데 시위대 300명이 이 이동계획을 사전에 입수해 하루 전에 토끼몰이식 장애물을 설치하고 여러 시간 전에 매복해 있다가 20사단 차량부대가 정확히 그 지점을 08:00시에 통과하자 주로 몽둥이와 화염병으로 공격하여 사단장용 지프차 등 14대의 지프차를 탈취하여 인근 군납업체인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갔다. 09시, 아시아자동차 공장에는 또 다른 300명이 몰려와 600명이 되었다. 이들 600명은 단 한 차례도 출고되지 않았던 최신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370여대를 탈취하여 그들을 몰고 전남 17개 시군에 위장돼 있던 44개 무기고를 불과 4시간 만에 습격해 5,403정의 총기를 탈취했다. 전남도청에는 TNT를 가지고 2,100발의 폭탄을 조립해놓고 광주시를 히로시마로 만들 수 있다고 협박하였다. 방송국과 세무서, 파출소들을 불태우고 도청과 전남대에 집합해 있는 계업군을 포위 공격하여 계엄군을 시외곽으로 내쫓고 도청을 접수하였으며 이날부터 광주교도소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제27~31쪽에는 19개의 현장사진이 소개돼 있다. 2018년 10월 12일, 증인으로 출두한 5.18기념재단 상임이사 김양래에게 이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지휘체계가 갖추어진 이 사람들이 광주시민이냐’고 물었을 때, 김양래는 광주시민이 아니라고 답했다. 전두환이 또 다른 군부대에 민간복을 입혀 투입시킨 [전두환 편의대]일 것이라고 답했다.
아래는 2017.1.16.자 연합뉴스 보도다. 5.18당시 조립된 2,100발의 폭탄에서 뇌관을 제거한 배승일 문관이 1990년대에 훈장을 박탈당했다가 지역국회의원의 도움으로 소송을 해서 훈장을 되찾게 되었다는 사연이다.
5월 22~24일:전남도청을 완전 점령한 그룹은 광주시민이 아니라 외지인이었다. ‘수습학생위원회’라는 글자가 새겨진 어깨띠를 두른 외지인들이 광주의 똘똘해 보이는 청년들을 연행해가는 사진들이 있다. 이들의 이름은 해남농민활동가 김인태와 학원 교사인 김중식이며 이들은 사망자 명단에 들어 있다. 그런데 [수습학생위원회]라는 조직은 광주에 형성된 적이 없었다
5월24~
27일: 5월 24일 낮까지만 해도 광주시민은 외지인이 점령한 도청(에 들어갈 수 없었다.
증59의 ‘5.18항쟁증언자료집’에는 5.18유공자 최고반열에 속한 ‘5.18항쟁본부’ 핵심 간부들의 증언들이 있다. 이 증언자들은 한결같이 5월 21일 총소리가 나자 자기들은 각자도생하자며 숨어 다녔고, 5월 24일 낮에는 고위 공무원들로 보이는 위엄 있는 사람들이 도청출입을 금지시켜 들어갈 수 없었고, 24일 밤부터 도청에 들어왔다고 증언했다. 도청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낯선 사람들이었고, 매일 토론을 하지만 싸움질만 했다. 그러다가 5.27. 새벽 점령되었다.
제4장, 게릴라 프로필(41~47쪽): 북한 특수군 군인 600명, 비군인 900명 정도로 추산, 내국인 광수 13명으로 추정한다는 내용이 있다. 5,18현장을 누빈 600의 존재가 명시된 것은 4개 자료다. 1995. 검찰이 작성한 [5.18광련사건수사결과], 1985. 안기부가 작성한 5.18상황일지, 1982년 북한 조국통일사가 발행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 제595쪽, 1985년 북한 조국출판사가 발행한 [광주의 분노]의 제35쪽에 있다.
제5장, 광수 영상분석 동기와 정확도48~62쪽): 혓바닥광수, 주걱턱광수, 경찰광수, 얼굴만 보아도 무조건 광수얼굴 등으로 소개하였음.
제5장, 광수 영상분석 동기와 정확도48~62쪽): 혓바닥광수, 주걱턱광수, 경찰광수, 얼굴만 보아도 무조건 광수얼굴 등으로 소개하였음.
공간 문제로 제2부로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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