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세 타는 탈북자들은 위장한 핵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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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1-02-14 12:42 조회3,49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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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고의 애국자였던 이수근-신중철-장진성
탈북자 숫자가 33,000명을 넘어 섰다한다. 이들 모두는 오로지 자유를 추구한 나머지 사선을 넘어 대한민국을 찾아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은 그들의 정체를 속이기 위해 고안된 만병통치약이었다. 2016년 9월 27일자 조선일보는 2012-2016년 동안 군에 침투한 남파간첩 13명 중 12명이 탈북자 신분이었다는 기사를 냈다. 군 장교를 상대로 한 간첩 원정화, 서울시 공무원으로 간첩혐의로 재판을 받았던 유우성 등 우리가 최근 접했던 간첩사건들도 탈북자들이 주인공이었다. 1966년 드라마틱하게 판문점을 넘어온 이수근은 당대 대한민국 최고의 애국자로 숭앙되었다. 하지만 그는 간첩혐의로 1969년 처형됐다.
1983년 인민군 대위 계급장을 달고 휴전선을 넘어 귀순한 신중철은 이웅평이 몰고 온 전투기보다 더 값진 선물을 들고 내려왔다. 양구에 있는 제4땅굴 위치를 가지고 온 것이다. 이로 인해 신중철은 1980년대 대한민국 최고의 애국자가 되었다. 1986년, 나는 국방연구원에 근무하면서 신중철과 이웅평을 각기 3일간씩 빌렸다. 이때 신중철은 내게 이런 말을 털어놓았다. “나는 연합사 부사령관인 모 대장(육사12기)과 의형제를 맺었다. 그의 제안으로 나는 전방 20개 사단을 다 돌면서 정보 및 작전 브리핑을 받았다. 그 대장은 나에게 말했다. ”휴전선 모든 사단의 브리핑을 듣고 네가 북괴 사단장이라면 어떤 결심을 하겠는지 사단장들에게 알려줘라” 신중철은 이런 종류의 정보를 다 수집하면서 국군정보사령부에서 1995년 대령으로 예편할 때까지 13년 동안 근무한 후 2001년 김대중 시대에 가족들을 버리고 사라졌다.
2000년대 대한민국 최고의 애국자는 장진성이었다. 그는 위대한 시인이자 세계적인 문호 정도로 숭앙받으면서 10년에 가까운 세월, 성역화된 명성을 누렸다. 위키백과에 나타난 장진성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2014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시장경제대상 문화예술부문 수상, 2012년 영국 옥스퍼드 렉스 워너 문학상 수상, 20150 네덜란드 레이던대학교 북한학 초빙교수. 베스트셀러 시집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는 일본과 미국에서 번역출판, 수기 〈시를 품고 강을 넘다〉는 일어 출간, 해외계약과 판매에서 한국 작가들 중 가장 압도적 1위 기록, 수기 〈DEAR LEADER〉는 영국 랜덤하우스가 유럽판권 획득, 2012년 5월 29일 한국인 최초로 옥스퍼드 문학상 수상.
북조선에서는 평양음악무용대학 졸업, 조선중앙방송위원회 TV총국 문예부 기자, 김일성종합대학 졸업, 중앙당 통일전선부 101연락소 근무, 2004년 망명, 2005.01~2010.12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 2011.12 뉴포커스 발행인 대표. 위키백과에 소개된 장진성은 눈부시게 화려했다. 그가 이만큼 성역화되기까지는 조갑제와 정규재의 주도적인 노력이 있었고, 국정원이 배후자 역할을 했다. 변호사 차기환도 그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1980년의 광주 현장은 북한특수군이 주도했댜. 그 현장 사진 하나에는 9살짜리 장진성이 게릴라전 엑스트라로 동원돼 있었다. 2016년 내가 이 사진을 공개하자 장진성은 즉시 나를 고소했다. “지만원이 미쳤다, 아홉 살짜리 특수군이 어디 있느냐?” 소송이 걸려 있는 마당에 변호사 차기환이 돌아다니면서 드러내놓고 장진성 편을 든 것이다.
현존하는 장진성의 정체
장진성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검색을 하다보니 2008년 11월 23일, 천도교 교령이었던 오익제는 세상에 알려진 바와는 달리 스스로 월북한 사람이 아니라 북한의 대남공작부에서 공작하여 납치했다”는 주장을 편 것이다. 김대중과 오익제의 앞가슴에 빨갱이라는 주홍글씨가 붙어 있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장진성이 느닷없이 나타나 그들 가슴에 붙어있는 주홍글씨를 떼어내려 한 것이다. 오익제는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의 창당 발기인이자 핵심 고문이었다. 그런 그가 1997년 8월 갑자기 북한으로 자진 월북했다. 그리고 그 해 12월 오익제가 김대중 앞으로 쓴 편지가 국제우편을 통해 김대중에 전달됐고, 이 편지는 당시 안기부에 포착됐다. 그 편지는 김대중 보라고 쓴 편지가 아니라 안기부에 의해 국민에 발표되라고 쓴 공작물이었다. 오익제의 월북사건과 편지사건은 김대중에 대한 색깔론을 불렀고, 김대중은 이를 영리하게 이용하여 김대중이 안기부에 의해 탄압받고 있다는 동정론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오익제는 김대중을 당선시키기 위해 북한과 짜고 스스로 월북했던 것이다.
2016년 이 글을 뒤늦게 접한 나는 그해 3월 23일, 시스템클럽에 “국정원은 장진성을 위장 간첩 혐의로 조사하라”는 글을 썼고, 뉴스타운은 이를 전재했다. 이에 대해 장진성은 4월 12일, 3일 내에 사과하지 않으면 고소를 하겠다 엄프를 놓았고, 이에 응하지 않자 2016년 5월 28일 고소를 했다. 이 고소 사건으로 인해 장진성은 고소인 자격으로 법정에 나와 2시간 30분 동안 나의 질문을 받았고, 여기에서 그가 간판 학력과 경력으로 내걸었던 김일성 종합대학 졸업과 대남사업부 근무 경력 그리고 탈북 스토리 자체가 모두 허위라는 사실이 들통났다.
2021년 1월 24일 오후 7:25분, MBC 프로 ‘스트레이트’에서 “유명 탈북 작가 장진성, 그에게 당했다"는 프로에 50분 정도 방송되었다. 이에 의하면 장진성은 나에게 고소를 시작했던 바로 그 시기인 2016년 6월에 한 20대 여성 탈북자에게 접근하여 국정원을 배경으로 팔아가며 성폭행을 했다. 나체 사진을 찍어 그녀가 다니는 학교 게시판에 공개하겠다고 협박하면서 재력가들에게 성매매를 시켰다. 변호사가 나서서 그를 상대로 고소도 했다.
장진성은 탈북 사회의 별이었다. 교회를 배경삼아 신뢰를 증폭시켰고, 북한 인권 운동계의 별로 등장해 있었다. 그래서 더 많은 탈북 여성을 착취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가장 숭고한 애국 시인이고, 세계적인 문호이고,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했고, 북한 대남사업부에서 시를 써서 남한 학생계와 운동권에 내려 보냈고, 남에서는 6년 동안 국정원 산하연구소에서 선임연구원으로 보직돼 있었다는 등 눈부시게 화려한 프로필의 소유자가 알고보니 악마요 남한국민 전체를 농락한 사기꾼이었던 것이다.
전직 주사파 하태경, 간첩보다 더 해로운 존재
나는 외국 정보기관에서 영상분석 업무를 수행하다가 지금은 팀을 만들어 중국 정부의 하청을 받아 영상분석 사업을 하고 있는 한 애국 교포팀의 도움으로 탈북자 60명 정도가 1980년 5월에 광주 현장에 왔었다는 영상분석 결과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에 의하면 1980년 5월 23일, 전남도청 앞에서 촬영된 한 장면의 사진 속에 50여 명의 탈북자 얼굴이 있었다. 이들 중 장진성 말고도 이순실, 김영순, 리민복 등 12명의 탈북자가 추가로 나를 고소했다. 2019년 2월 8일, 나는 국회의원 회관 대회의실에서 개최된 [5.18 진상규명 대공청회]에서 4시간여에 걸쳐 “5.18은 북한이 저지른 게릴라전이었다”는 연구 결론을 발표했다. 이에 국회의원 설훈, 민병두, 최경환, 5월단체들이 나를 고소했다. 모든 방송과 언론들이 “지만원은 망언자”라는 꼬리표를 달아 전국에 알렸다.
전직 주사파였던 하태경이 탈북자 12명을 선동하여 “나는 광주에 절대 오지 않았다”는 취지의 고소를 하게 했다. 나는 이들 12명이 오랜 동안 남한 사회에 확산시킨 방송과 저서들에 대해 여러 달 동안 분석했다. 한마디로 이들은 무협지보다 더 무협지 같은 거짓말들을 꾸며 남한 국민들을 농락했다. 거짓말을 지어내 청중들로 하여금 눈물을 펑펑 흘리게 했다. 거짓말로 동정심을 유발시켜 성금을 모았지만, 그 거짓말들은 말을 할 때마다 다 달랐다. 교회도 큰 몫을 했다. 한국 언론들이 수족 노릇을 했다. 나를 고소한 13명은 한국사회에서 유명세를 즐기며 한국 국민을 조롱하며 주머니를 털었다. 탈북자들이 하는 말이면 무조건 믿고 눈물을 흘려대는 마음씨 착한 한국 국민들은 순진한 봉들이었다.
2021.2.1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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